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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숙종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3&mn=RT_01_10_01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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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3&mn=RT_01_10_01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ref>[http://www.linkroyaltombs.or.kr/cms/content/view/272 조선왕릉 형식]</ref>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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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결국 숙종과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은 누구였을까?'''</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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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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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인들을 이용해 환국을 일삼았던 숙종의 마지막 선택은 인현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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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던게 걸렸던 것인지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을 공사할 때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제도로 공사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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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에 제일 처음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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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720년(숙종 45)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의 능 옆으로 능을 조성하여 [[쌍릉]]의 형식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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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을 조성한지 37년이 지난 후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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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왕후는 생전에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곳에 미리 묻힐 자리를 정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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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새로 산릉공사를 해야 하는 것(당시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공사하고 있던 상황)을 염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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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 서쪽 언덕에 자리를 선정하고 필요한 인력과 국고를 줄여 산릉공사의 부담을 덜었다.<ref>[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3&mn=RT_01_10_01 명릉 이야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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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늘 [[숙종]]과 함께하고 싶었으나 숙종에게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인현왕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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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야 숙종과 계속 함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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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잡했던 숙종의 여인들 중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인현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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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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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이강릉 형식의 명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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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원이강릉.PNG]]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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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3&mn=RT_01_10_01 명릉]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3&mn=RT_01_10_01 명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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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inkroyaltombs.or.kr/cms/content/view/272 조선왕릉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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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saarinen00/175511417 명릉]사진 참조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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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서오릉 속 숙종과 숙종의 사람들)]] [[분류:(형식)]] [[분류:(김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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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5일 (화) 22:25 기준 최신판

정의

동원이강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 광릉이며, 예종 창릉, 성종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숙종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1]

내용

결국 숙종과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은 누구였을까?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인현왕후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단릉이다.

그렇게 여인들을 이용해 환국을 일삼았던 숙종의 마지막 선택은 인현왕후였다.

생전에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던게 걸렸던 것인지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을 공사할 때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제도로 공사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에 제일 처음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1720년(숙종 45)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의 능 옆으로 능을 조성하여 쌍릉의 형식을 이루었다.

명릉을 조성한지 37년이 지난 후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생전에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곳에 미리 묻힐 자리를 정하였으나,

영조는 새로 산릉공사를 해야 하는 것(당시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공사하고 있던 상황)을 염려하여

명릉 서쪽 언덕에 자리를 선정하고 필요한 인력과 국고를 줄여 산릉공사의 부담을 덜었다.[2]

살아생전 늘 숙종과 함께하고 싶었으나 숙종에게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인현왕후

죽어서야 숙종과 계속 함께할 수 있었다.

그 복잡했던 숙종의 여인들 중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인현왕후였다.

멀티미디어

동원이강릉 형식의 명릉 사진

동원이강릉.PNG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조선왕릉 형식
  2. 명릉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