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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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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왕골/참골/용수초/부들 |왕골/골풀자리]]가 사용되었는지부터 강화도 화문석이 처음 등장한 기록된 자료 등을 통하여 강화 화문석의 역사와 활용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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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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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왕골]]은 신라시대 휘장으로 처음 등장하며, 자리는 경덕왕때 이전의 기구였던 석전을 개칭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자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왕실 뿐 아니라 해외 교역품 및 공물로 자리를 활용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도경에서 구체적인 화문석의 모양이 언급되며, 해동역사 원씨액정기에서는 당인의 만화석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등장하여 강화도 화문석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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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문석은 처음엔 왕실에서 사용하고 중국, 일본 등 교역품, 선물, 공물 등에 활용하다가 후에는 양반가에서 주로 사용하고 후에는 전국 부녀자들 사이에 관심을 갖는 물품으로 성장하였고, 그 중 강화 화문석은 기록 상에 꾸준히 등장하면서 당시의 위상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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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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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 거기조車騎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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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六頭品(육두품) : 6두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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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前後幰若隨眞骨已上貴人行則不設(전후헌약수진골이상귀인행칙부설)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진골 이상의 귀인을 수행할 때는 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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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但自行則用竹簾若莞席(단자행칙용죽렴약완석) : 혼자 다닐 때만 대발이나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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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五頭品(오두품) : 5두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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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前後幰只用竹簾莞席(전후헌지용죽렴완석)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ref> 三國史記 第 三十三卷(삼국사기 제 33권) 雜志 第 二(잡지 제 02) https://hwalove.tistory.com/entry/%E4%B8%89%E5%9C%8B%E5%8F%B2%E8%A8%98-%E7%AC%AC-%E4%B8%89%E5%8D%81%E4%B8%89%E5%8D%B7%EC%82%BC%EA%B5%AD%EC%82%AC%EA%B8%B0-%EC%A0%9C-33%EA%B6%8C122%EF%A4%82%E9%A8%8E%EA%B1%B0%EA%B8%B0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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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의 내용을 보면, 수레를 휘장으로 치장할 때 6두품과 5두품은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자료에 나오는 왕골에 대한 처음 언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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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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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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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관조(職官條)는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ref>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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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으로 이때 석전을 봉좌국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석전이 이미 경덕왕 이전에 있던 관청이었고, 자리의 생산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자리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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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 언급된 석(席)이 백색자리인지, 무늬가 있는 석(席)인 화문석(花紋席)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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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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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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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목종 11년(1008)에 요나라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 31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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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나라 통화 26년인 무신 5월에 사신을 보내어 문화무공 양 궁전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 31석을 전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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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초에 해동역사는 요사를 인용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ref> 등메장 최헌열 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0&page=1&menuId=143&bc=0</ref> <b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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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는 골풀류의 하나로 석(席) 혹은 화문석(花紋席)을 제작하는 식물이다. 현재 화문석을 제작하는 [[왕골/참골/용수초/부들 |왕골]]과 혼동하여 사용되기도 하는데, 기록된 많은 자료에 의하면, 제작 후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왕골]] 화문석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으로 보여져 다른 식물로 보여진다. 마찬가지로 이때의 용수초석이 돗자리인 석(席)이지 무늬가 있는 화문석(花紋席)인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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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 권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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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문종이 즉위하여 영을 내릴 인욕(茵褥 : 왕골로 짠 자리)는 금, 은선으로 짜서 계금을 사용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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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는 마땅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어야겠노라. <ref>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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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문종은 제11대 왕(재위 1046∼1083)으로 이때에도 사용된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왕골]]자리가 돗자리인 석(席)이지 무늬가 있는 화문석(花紋席)인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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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도경 제28권 공장(供張) 문석(文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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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석은 곱고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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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 <ref>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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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도경은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이 지은 책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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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우 부드럽고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 화문석은 재료가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 혹은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골풀류]]로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며, 청자색 테를 두른 것으로 보아 강화도 [[등메]]로 여겨진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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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메]]는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골풀류]]를 1년 이상 재배하여 길들인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참골]]로 제작되어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으며, 뒤에 부들기직을 대고 청자색 테를 두르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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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 권제29, 2장 뒤쪽, 세가 29 충렬왕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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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甲寅 遣郎將殷洪淳 如元 獻花文大席 갑인일에 낭장 은홍순을 원나라에 보내어 화문대석을 바쳤다. <ref>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8929&cid=41826&categoryId=4182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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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은 제25대(재위:1274~1308) 왕으로 대략 1100년 이후로 지속적으로 화문석이 언급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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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동역사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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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순제가 영영英英을 위하여 채방관采芳館을 경화도 안에다 짓고는 당인唐人의 만화석滿花席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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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인唐人은 고려에 있는 섬 이름으로 만화초滿花草가 나는데, 성질이 부드러워서 꺽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광택이 있어 아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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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지방 사람들은 이것을 짜서 방석으로 만든다. <ref>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초류草類 https://citrain64.blog.me/10011960674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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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元)나라 순제는 15대 황제(재위 : 1333(37)~1367(70))으로 고려에서 공물 받은 만화석으로 궁궐을 장식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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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석은 화문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려에 만화초가 나는 섬인 당인唐人은 강화도로 보여지며, 석(席)은 물론 방석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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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존에는 막연히 등장하던 화문석에 이제 구체적인 지명까지 등장하며 [[강화도 화문석]]의 역사가 족히 1000년은 넘는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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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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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에서는 사직신(社稷神)인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에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文席)채석(彩席)화문대석(花文大席)을 사용하였다. <ref>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2,00290000,11&pageNo=5_2_1_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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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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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실록 제29권 7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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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 도에서 장흥고로 납부하는 돗자리가 5,148장인데 현재 634장이 있다. 1년 동안 필요한 돗자리가 2,215에 불과하니 경기도에서 바치는 480장은 없애기를 청한다.<ref>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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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실록의 세종 7년은 1425년으로, 경기도에서도 석(席)을 진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때 경기도는 강화도로 여겨진다. 강화도는 현재는 인천시이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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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문관지通文館志 卷 3 「事大」 方物數目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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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문관지(通文館志)에 기재된 중국으로 보내진 화문석의 종류와 수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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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지사행(冬至使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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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제(皇帝) 황태후(皇太后)ㆍ태후(太后) 황태자(皇太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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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문염석(龍紋簾席) 2장(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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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화석(黃花席) 20 각(各)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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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석(滿花席) 20 각(各)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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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방석(滿花方席)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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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채방석(雜彩方席) 20 각(各)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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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초기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화문석류(花紋席類)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중국에 보내는 조정의 선사품으로 배 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었으며, 수량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물론 일본에도 보내졌으나 그 규모는 중국에 비해 적었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화문석들을 조달 관장하는 부서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927 장흥고](長興庫)였다. 그런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927 장흥고](長興庫)에는 자리류(類)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리 만드는 석장(席匠)은 경공장(京工匠)에는보이지 않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에만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문석들이 주로 지방의 토산품으로 진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ref>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저. 한국민속대관. 1980. 8. 15.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523&nodeId=NODE04001422&medaId=MEDA04107039#non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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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원경제지 제3권 섬용지(贍用志) 용수석(龍鬚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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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방에서는 해서의 백천, 연안 등의 읍에서 생산된 것을 최고로 치고 다음이 경기도 교동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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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수석은 오색의 화조문이다. 검은 단색으로 수, 복, 만자 무늬를 장식하고 부들자리를 밑에 대어 청, 흑, 갈색의 천으로 둘레를 싼 것을 등매석(登每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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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리 여러개를 연결하여 관부 청사에 까는 것을 지의석이라 하고 자리에 화조문을 가득 놓은 것을 만화석이라 한다. <ref>완초장 이상재의 완초공예기술 조사, 정리한 <문헌 및 관계기록.pdf> www.cultureline.kr/webgear/.../[%202%20]%20Ⅱ.%20문헌%20및%20관계기록.pdf</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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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원경제지는 1800년대 초에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기록한 책으로 교동의 왕골자리를 공물로 바친다는 기록하면서 구체적인 이름인 등매가 나온다. [[등메]]는 [[등메|등매]]가 혼동되어 사용되는데, 정확한 이름은 [[등메]]이다. 또한 서울의 지체높은 가정에서 최고로 친 해서(황해도)의 백천과 연안의 용수석은 강화도 교동도를 바로 마주한 육지로 황해도와 경기도로 지역은 구분되어 있지만, 강화도, 교동도, 연안 등의 용수석이 국내 최고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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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연문장전산고 萬物篇/萬物雜類 / 규합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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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명산지에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가 있다 <ref>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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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규경(李圭景)의 _1788에서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를 전국 특산품으로 기술하며, 교동을 돗자리의 산지로 언급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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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합총서에도 교동이 나오는데, 이때는 교동의 노계(露鷄)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주 : 안산의 수시(水枾)·조개·게, 교동의 노계(露鷄), 양주의 생밤[生栗], 파주의 게)<ref>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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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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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블로거가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성희> 책을 소개하면서 책을 소개하는 안산의 게와 감, 교동의 화문석, 양주의 날밤, 남양의 굴, 연평도의 조을 좋은 상품이라고 기록했다고 소개하였는데, <ref> 책미리보기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011981&memberNo=30620779 </ref> 여러 번 규합총서를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도 교동의 화문석이 우수하다는 여타 기록된 자료를 찾지 못하여 이 부분은 추후에 다시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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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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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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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16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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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신라화문석1.png | 삼국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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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화문석7.png | 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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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화문석8.png | 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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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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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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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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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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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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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자 || 역할|| 이름 ||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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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6월 || 정리 및 편집 || [[손형남]] || 인문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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