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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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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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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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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 거기조車騎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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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六頭品(육두품) : 6두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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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前後幰若隨眞骨已上貴人行則不設(전후헌약수진골이상귀인행칙부설)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진골 이상의 귀인을 수행할 때는 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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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但自行則用竹簾若莞席(단자행칙용죽렴약완석) : 혼자 다닐 때만 대발이나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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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五頭品(오두품) : 5두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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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前後幰只用竹簾莞席(전후헌지용죽렴완석)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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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의 내용을 보면, 수레를 휘장으로 치장할 때 6두품과 5두품은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자료에 나오는 왕골에 대한 처음 언급이다. <ref> 三國史記 第 三十三卷(삼국사기 제 33권) 雜志 第 二(잡지 제 02) https://hwalove.tistory.com/entry/%E4%B8%89%E5%9C%8B%E5%8F%B2%E8%A8%98-%E7%AC%AC-%E4%B8%89%E5%8D%81%E4%B8%89%E5%8D%B7%EC%82%BC%EA%B5%AD%EC%82%AC%EA%B8%B0-%EC%A0%9C-33%EA%B6%8C122%EF%A4%82%E9%A8%8E%EA%B1%B0%EA%B8%B0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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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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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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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관조(職官條)는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ref>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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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으로 이때 석전을 봉좌국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석전이 이미 경덕왕 이전에 있던 관청이었고, 자리의 생산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자리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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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 언급된 석(席)이 백색자리인지, 무늬가 있는 석(席)인 화문석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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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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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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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초에 해동역사는 요사를 인용하여 ‘고려 목종 11년(1008)에 요나라에 용수초 31석을 보냈다’고 기록하였다. ‘요나라 통화 26년인 무신 5월에 사신을 보내어 문화무공 양 궁전에 용수초 31석을 전물하였다’라는 최초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이전으로 추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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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같은 책에 <원씨액정기>를 인용하여 ‘원나라 순제가 영영을 위하여 경화도에 채방관을 세우고 안에 당인 만화문석을 깔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성질이 부드러워 부러지지 않으며 광택이 있어 매우 좋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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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 권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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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문종이 즉위하여 영을 내릴 인욕(茵褥 : 왕골로 짠 자리)는 금, 은선으로 짜서 계금을 사용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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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는 마땅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어야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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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 권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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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에서는 사직신(社稷神)인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에 왕골자리르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文席)채석(彩席)화문대석(花文大席)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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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도경 제28권 공장(供張) 문석(文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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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송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인종 때 고려의 문물을 둘러보고 기록한 <고려도경>에도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정교한 것은 핌상과 평상에 깔고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며 부드러워접거나 굽혀도 구부러지지 않는다’라고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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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도경 中 화문석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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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석은 곱고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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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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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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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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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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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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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16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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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신라화문석1.png | 삼국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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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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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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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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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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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자 || 역할|| 이름 ||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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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6월 || 정리 및 편집 || [[손형남]] || 인문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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