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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방석(滿花方席)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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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채방석(雜彩方席) 20 각(各)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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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화문석류(花紋席類)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중국에 보내는 조정의 선사품으로 배 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었으며, 수량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물론 일본에도 보내졌으나 그 규모는 중국에 비해 적었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화문석들을 조달 관장하는 부서는 장흥고(長興庫)였다. 그런데 장흥고(長興庫)에는 자리류(類)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리 만드는 석장(席匠)은 경공장(京工匠)에는보이지 않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에만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문석들이 주로 지방의 토산품으로 진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ref>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저. 한국민속대관. 1980. 8. 15.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523&nodeId=NODE04001422&medaId=MEDA04107039#non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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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화문석류(花紋席類)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중국에 보내는 조정의 선사품으로 배 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었으며, 수량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물론 일본에도 보내졌으나 그 규모는 중국에 비해 적었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화문석들을 조달 관장하는 부서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927 장흥고](長興庫)였다. 그런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927 장흥고](長興庫)에는 자리류(類)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리 만드는 석장(席匠)은 경공장(京工匠)에는보이지 않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에만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문석들이 주로 지방의 토산품으로 진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ref>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저. 한국민속대관. 1980. 8. 15.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523&nodeId=NODE04001422&medaId=MEDA04107039#non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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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합총서에도 교동이 나오는데, 이때는 교동의 노계(露鷄)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주 : 안산의 수시(水枾)·조개·게, 교동의 노계(露鷄), 양주의 생밤[生栗], 파주의 게)<ref>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ref>
 
규합총서에도 교동이 나오는데, 이때는 교동의 노계(露鷄)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주 : 안산의 수시(水枾)·조개·게, 교동의 노계(露鷄), 양주의 생밤[生栗], 파주의 게)<ref>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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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블로거가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성희> 책을 소개하면서 책을 소개하는 안산의 게와 감, 교동의 화문석, 양주의 날밤, 남양의 굴, 연평도의 조을 좋은 상품이라고 기록했다고 소개하였는데, 여러 번 규합총서를 읽어도 교동의 화문석이 우수하다는 기록을 찾지 못하여 이 부분은 추후에 다시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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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블로거가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성희> 책을 소개하면서 책을 소개하는 안산의 게와 감, 교동의 화문석, 양주의 날밤, 남양의 굴, 연평도의 조을 좋은 상품이라고 기록했다고 소개하였는데, <ref> 책미리보기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011981&memberNo=30620779 </ref> 여러 번 규합총서를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도 교동의 화문석이 우수하다는 여타 기록된 자료를 찾지 못하여 이 부분은 추후에 다시 논의한다.  
  
  

2019년 6월 25일 (화) 14:15 판

개요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왕골/골풀자리가 사용되었는지부터 강화도 화문석이 처음 등장한 기록된 자료 등을 통하여 강화 화문석의 역사와 활용을 살펴보았다.


해설

왕골은 신라시대 휘장으로 처음 등장하며, 자리는 경덕왕때 이전의 기구였던 석전을 개칭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자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왕실 뿐 아니라 해외 교역품 및 공물로 자리를 활용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도경에서 구체적인 화문석의 모양이 언급되며, 해동역사 원씨액정기에서는 당인의 만화석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등장하여 강화도 화문석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다.
화문석은 처음엔 왕실에서 사용하고 중국, 일본 등 교역품, 선물, 공물 등에 활용하다가 후에는 양반가에서 주로 사용하고 후에는 전국 부녀자들 사이에 관심을 갖는 물품으로 성장하였고, 그 중 강화 화문석은 기록 상에 꾸준히 등장하면서 당시의 위상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

삼국사기 거기조車騎條

六頭品(육두품) : 6두품은,  
前後幰若隨眞骨已上貴人行則不設(전후헌약수진골이상귀인행칙부설)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진골 이상의 귀인을 수행할 때는 치지 않고, 
但自行則用竹簾若莞席(단자행칙용죽렴약완석) : 혼자 다닐 때만 대발이나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
五頭品(오두품) : 5두품은, 
前後幰只用竹簾莞席(전후헌지용죽렴완석)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1]  

위의 내용을 보면, 수레를 휘장으로 치장할 때 6두품과 5두품은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자료에 나오는 왕골에 대한 처음 언급이다.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 

직관조(職官條)는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2]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으로 이때 석전을 봉좌국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석전이 이미 경덕왕 이전에 있던 관청이었고, 자리의 생산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자리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때 언급된 석(席)이 백색자리인지, 무늬가 있는 석(席)인 화문석(花紋席)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해동역사

고려 목종 11년(1008)에 요나라에  용수초 31석을 보냈다
요나라 통화 26년인 무신 5월에 사신을 보내어 문화무공 양 궁전에  용수초 31석을 전물하였다

고려 초에 해동역사는 요사를 인용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3]

용수초는 골풀류의 하나로 석(席) 혹은 화문석(花紋席)을 제작하는 식물이다. 현재 화문석을 제작하는 왕골과 혼동하여 사용되기도 하는데, 기록된 많은 자료에 의하면, 제작 후에 왕골 화문석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으로 보여져 다른 식물로 보여진다. 마찬가지로 이때의 용수초석이 돗자리인 석(席)이지 무늬가 있는 화문석(花紋席)인지는 확실치 않다.


고려사 권 제7

고려 문종이 즉위하여 영을 내릴 인욕(茵褥 : 왕골로 짠 자리)는 금, 은선으로 짜서 계금을 사용하나
이는 마땅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어야겠노라. [4]

고려 문종은 제11대 왕(재위 1046∼1083)으로 이때에도 사용된 왕골자리가 돗자리인 석(席)이지 무늬가 있는 화문석(花紋席)인지는 확실치 않다.


고려도경 제28권 공장(供張) 문석(文席)

문석은 곱고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  [5]

고려도경은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이 지은 책이다.
매우 부드럽고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 화문석은 재료가 용수초 혹은 골풀류로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며, 청자색 테를 두른 것으로 보아 강화도 등메로 여겨진다.
등메 골풀류를 1년 이상 재배하여 길들인 참골로 제작되어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으며, 뒤에 부들기직을 대고 청자색 테를 두르는 특징이 있다.


고려사 권제29, 2장 뒤쪽, 세가 29 충렬왕 5.3

甲寅 遣郎將殷洪淳 如元 獻花文大席 갑인일에 낭장 은홍순을 원나라에 보내어 화문대석을 바쳤다. [6]

고려 충렬왕은 제25대(재위:1274~1308) 왕으로 대략 1100년 이후로 지속적으로 화문석이 언급됨을 알 수 있다.


해동역사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

원나라 순제가 영영英英을 위하여 채방관采芳館을 경화도 안에다 짓고는 당인唐人의 만화석滿花席을 깔았다. 
당인唐人은 고려에 있는 섬 이름으로 만화초滿花草가 나는데, 성질이 부드러워서 꺽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광택이 있어 아주 아름답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것을 짜서 방석으로 만든다. [7]

원(元)나라 순제는 15대 황제(재위 : 1333(37)~1367(70))으로 고려에서 공물 받은 만화석으로 궁궐을 장식하였다.
만화석은 화문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려에 만화초가 나는 섬인 당인唐人은 강화도로 보여지며, 석(席)은 물론 방석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에는 막연히 등장하던 화문석에 이제 구체적인 지명까지 등장하며 강화도 화문석의 역사가 족히 1000년은 넘는 것으로 보여진다.


기타

고려에서는 사직신(社稷神)인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에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文席)채석(彩席)화문대석(花文大席)을 사용하였다. [8]


조선

세종실록 제29권 7년 8월 22일

각 도에서 장흥고로 납부하는 돗자리가 5,148장인데 현재 634장이 있다. 1년 동안 필요한 돗자리가 2,215에 불과하니 경기도에서 바치는 480장은 없애기를 청한다.[9]

세종실록의 세종 7년은 1425년으로, 경기도에서도 석(席)을 진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때 경기도는 강화도로 여겨진다. 강화도는 현재는 인천시이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에 속하였다.


통문관지通文館志 卷 3 「事大」 方物數目 參照

통문관지(通文館志)에 기재된 중국으로 보내진 화문석의 종류와 수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지사행(冬至使行)
황제(皇帝) 황태후(皇太后)ㆍ태후(太后) 황태자(皇太子)
용문염석(龍紋簾席) 2장(張)
황화석(黃花席) 20 각(各)10 10
만화석(滿花席) 20 각(各)10 10
만화방석(滿花方席) 20
잡채방석(雜彩方席) 20 각(各)10 10

고려 초기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화문석류(花紋席類)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중국에 보내는 조정의 선사품으로 배 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었으며, 수량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물론 일본에도 보내졌으나 그 규모는 중국에 비해 적었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화문석들을 조달 관장하는 부서는 장흥고(長興庫)였다. 그런데 장흥고(長興庫)에는 자리류(類)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리 만드는 석장(席匠)은 경공장(京工匠)에는보이지 않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에만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문석들이 주로 지방의 토산품으로 진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10]


임원경제지 제3권 섬용지(贍用志) 용수석(龍鬚席)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방에서는 해서의 백천, 연안 등의 읍에서 생산된 것을 최고로 치고 다음이 경기도 교동의 것이다. 
용수석은 오색의 화조문이다. 검은 단색으로 수, 복, 만자 무늬를 장식하고 부들자리를 밑에 대어 청, 흑, 갈색의 천으로 둘레를 싼 것을 등매석(登每席)이라 한다. 
자리 여러개를 연결하여 관부 청사에 까는 것을 지의석이라 하고 자리에 화조문을 가득 놓은 것을 만화석이라 한다. [11]

임원경제지는 1800년대 초에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기록한 책으로 교동의 왕골자리를 공물로 바친다는 기록하면서 구체적인 이름인 등매가 나온다. 등메등매가 혼동되어 사용되는데, 정확한 이름은 등메이다. 또한 서울의 지체높은 가정에서 최고로 친 해서(황해도)의 백천과 연안의 용수석은 강화도 교동도를 바로 마주한 육지로 황해도와 경기도로 지역은 구분되어 있지만, 강화도, 교동도, 연안 등의 용수석이 국내 최고였음을 알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萬物篇/萬物雜類 / 규합총서

유명산지에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가 있다 [12] 이규경(李圭景)의 _1788에서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를 전국 특산품으로 기술하며, 교동을 돗자리의 산지로 언급하였다.
규합총서에도 교동이 나오는데, 이때는 교동의 노계(露鷄)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주 : 안산의 수시(水枾)·조개·게, 교동의 노계(露鷄), 양주의 생밤[生栗], 파주의 게)[13] .
어떤 블로거가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성희> 책을 소개하면서 책을 소개하는 안산의 게와 감, 교동의 화문석, 양주의 날밤, 남양의 굴, 연평도의 조을 좋은 상품이라고 기록했다고 소개하였는데, [14] 여러 번 규합총서를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도 교동의 화문석이 우수하다는 여타 기록된 자료를 찾지 못하여 이 부분은 추후에 다시 논의한다.


시각자료

사진

출처

  1. 三國史記 第 三十三卷(삼국사기 제 33권) 雜志 第 二(잡지 제 02) https://hwalove.tistory.com/entry/%E4%B8%89%E5%9C%8B%E5%8F%B2%E8%A8%98-%E7%AC%AC-%E4%B8%89%E5%8D%81%E4%B8%89%E5%8D%B7%EC%82%BC%EA%B5%AD%EC%82%AC%EA%B8%B0-%EC%A0%9C-33%EA%B6%8C122%EF%A4%82%E9%A8%8E%EA%B1%B0%EA%B8%B0
  2.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
  3. 등메장 최헌열 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0&page=1&menuId=143&bc=0
  4.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5.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6.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8929&cid=41826&categoryId=41826
  7. 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초류草類 https://citrain64.blog.me/100119606744
  8.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2,00290000,11&pageNo=5_2_1_0
  9.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10.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저. 한국민속대관. 1980. 8. 15.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523&nodeId=NODE04001422&medaId=MEDA04107039#none
  11. 완초장 이상재의 완초공예기술 조사, 정리한 <문헌 및 관계기록.pdf> www.cultureline.kr/webgear/.../[%202%20]%20Ⅱ.%20문헌%20및%20관계기록.pdf
  12.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
  13.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
  14. 책미리보기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011981&memberNo=30620779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6월 정리 및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