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화문석자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Sharondesign (토론 | 기여) |
Sharondesign (토론 | 기여) |
||
4번째 줄: | 4번째 줄: | ||
=='''해설'''== | =='''해설'''== | ||
− | ==='''삼국사기 | + | ==='''삼국사기 거기조車騎條'''=== |
− | + | 六頭品(육두품) : 6두품은, | |
+ | 前後幰若隨眞骨已上貴人行則不設(전후헌약수진골이상귀인행칙부설)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진골 이상의 귀인을 수행할 때는 치지 않고, | ||
+ | 但自行則用竹簾若莞席(단자행칙용죽렴약완석) : 혼자 다닐 때만 대발이나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 | ||
+ | 五頭品(오두품) : 5두품은, | ||
+ | 前後幰只用竹簾莞席(전후헌지용죽렴완석)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 | ||
+ | 위의 내용을 보면, 수레를 휘장으로 치장할 때 6두품과 5두품은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자료에 나오는 왕골에 대한 처음 언급이다. <ref> 三國史記 第 三十三卷(삼국사기 제 33권) 雜志 第 二(잡지 제 02) https://hwalove.tistory.com/entry/%E4%B8%89%E5%9C%8B%E5%8F%B2%E8%A8%98-%E7%AC%AC-%E4%B8%89%E5%8D%81%E4%B8%89%E5%8D%B7%EC%82%BC%EA%B5%AD%EC%82%AC%EA%B8%B0-%EC%A0%9C-33%EA%B6%8C122%EF%A4%82%E9%A8%8E%EA%B1%B0%EA%B8%B0 </ref> | ||
+ | |||
+ |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 | ||
+ |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직관조(職官條)에 나타나는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ref>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ref> | ||
+ |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으로 이때 언급된 석(席)이 백색자리인지, 무늬가 있는 석(席)인 화문석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치만, 자리의 생산을 담당하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자리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
+ | |||
− | |||
− | |||
=='''시각자료'''== | =='''시각자료'''== |
2019년 6월 25일 (화) 10:38 판
개요
해설
삼국사기 거기조車騎條
六頭品(육두품) : 6두품은, 前後幰若隨眞骨已上貴人行則不設(전후헌약수진골이상귀인행칙부설)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진골 이상의 귀인을 수행할 때는 치지 않고, 但自行則用竹簾若莞席(단자행칙용죽렴약완석) : 혼자 다닐 때만 대발이나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 五頭品(오두품) : 5두품은, 前後幰只用竹簾莞席(전후헌지용죽렴완석)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 위의 내용을 보면, 수레를 휘장으로 치장할 때 6두품과 5두품은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자료에 나오는 왕골에 대한 처음 언급이다. [1]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직관조(職官條)에 나타나는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2]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으로 이때 언급된 석(席)이 백색자리인지, 무늬가 있는 석(席)인 화문석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치만, 자리의 생산을 담당하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자리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시각자료
사진
삼국사지
출처
- ↑ 三國史記 第 三十三卷(삼국사기 제 33권) 雜志 第 二(잡지 제 02) https://hwalove.tistory.com/entry/%E4%B8%89%E5%9C%8B%E5%8F%B2%E8%A8%98-%E7%AC%AC-%E4%B8%89%E5%8D%81%E4%B8%89%E5%8D%B7%EC%82%BC%EA%B5%AD%EC%82%AC%EA%B8%B0-%EC%A0%9C-33%EA%B6%8C122%EF%A4%82%E9%A8%8E%EA%B1%B0%EA%B8%B0
- ↑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6월 정리 및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