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화문석자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개요'''== 화문석의 생산은 삼국시대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신라에는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즉 직관조(職...)
 
1번째 줄: 1번째 줄:
 
=='''개요'''==
 
=='''개요'''==
화문석의 생산은 삼국시대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신라에는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즉 직관조(職官條)에 나타나는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
 
<ref>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ref>
+
  
 
=='''해설'''==
 
=='''해설'''==
  
==='''박물관 내부시설 / Museum facilities'''===
+
==='''삼국사기 제33 잡지雜誌 '''===
 +
왕골에 대한 언급이 처음 기록된다. "6두품은 혼자 다닐 때 왕골 자리를 치되 가장자리는 견직으로 꾸미고 6두품은 왕골 자리를 쓰되 가장자리는 가죽과 삼베로 꾸민다." <br/>
  
강화전쟁박물관은 1층의 제1~2전시실, 2층의 제3~4전시실 총 4가지 주제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강화의 전쟁사 관련 유물을 시대순으로 볼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br/>
+
==='''석전(席典)'''===
 
+
화문석의 생산은 삼국시대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신라에는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즉 직관조(職官條)에 나타나는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ref>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ref>
* 제1전시실 (주제관) - 복합영상을 통해 건국부터 오늘날까지 외세의 침략에 맞선 강화의 호국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주제관이며, 돌화살촉,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7692&cid=43065&categoryId=43065 고리자루칼], 청동화살촉 등 선사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강화지역의 전쟁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
  
 
=='''시각자료'''==
 
=='''시각자료'''==
16번째 줄: 15번째 줄: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160px>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160px>
  
File:강화전쟁박물관외부1.jpg | 박물관과 갑곶돈대 입구
+
File:신라화문석1.png | 삼국사지
File:강화전쟁박물관외부2.jpg | 박물관 건물
+
File:갑곶돈대3.jpg | 박물관 전경
+
  
 
</gallery>
 
</gallery>
 
==='''영상'''===
 
* 채널A 오늘의 영상_스마트리포터 동영상, 왕골 돗자리, 게시일: 2013년 3월 4일.
 
<html>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cIEMPX3WQC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html>
 
 
==='''가상현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B4%EC%9E%AC%EC%97%B0&ridx=2&tot=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 광성보' 사진]</ref>===
 
-추후 드론과 파노라마사진을 넣을 곳입니다.
 
  
 
=='''출처'''==
 
=='''출처'''==

2019년 6월 25일 (화) 03:30 판

개요

해설

삼국사기 제33 잡지雜誌

왕골에 대한 언급이 처음 기록된다. "6두품은 혼자 다닐 때 왕골 자리를 치되 가장자리는 견직으로 꾸미고 6두품은 왕골 자리를 쓰되 가장자리는 가죽과 삼베로 꾸민다."

석전(席典)

화문석의 생산은 삼국시대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신라에는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즉 직관조(職官條)에 나타나는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1]

시각자료

사진

출처

  1.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6월 정리 및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