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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6.25 전쟁 최악의 흑역사'''로 꼽힌다.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서 과거 좌익에 몸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인 보도연맹을 6.25전쟁 때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보도연맹과 전혀 상관 없는 민간이도 많이 학살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희생자 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였는 이처럼 정부는 민간인 학살에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의 정보를 보관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권침해를 해왔다. 이 사건이 얼마나 잔혹했냐면 당시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러 그제서야 이승만이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지금도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 |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에 대한 평가===== |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에 대한 평가===== |
2019년 6월 25일 (화) 01:15 판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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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승만(李承晩), Syngman Rhee |
출생 | 1875년 5월 1일 |
사망 | 1965년 7월 19일 |
성별 | 남 |
국적 | 한국 |
직업 | 대한민국 대통령 |
경력 | 1·2·3대 대한민국 대통령 |
목차
인물정보
정의
대한민국의 제 1·2·3대 대통령이자 정치인 및 독립운동가.
생애
1875년 황해도 평산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위의 두 형이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해 집안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이승만은 1894년 배재 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러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만든 협성회에 참여해 활동했고, 독립 협회에 가입한 뒤에는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1904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다시 국내로 돌아와 교육과 기독교 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났고, 3 · 1 운동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임명되어 잠시 상하이에 머물렀다. 1925년에는 미국 대통령에게 우리나라를 국제 연맹이 통치하도록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부터 탄핵을 당해 물러났다.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10월에 국내로 돌아온 이승만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우익 지도자로서 세력을 키워 갔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 통치에 반대하며 남한 내의 좌익 세력을 제압한 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과거사 청산보다는 국가의 안정과 반공을 앞세우는 정책을 수행했다.
6 · 25 전쟁 중 헌법을 바꿔 대통령에 다시 선출되었고, 전쟁 후에는 대통령 연임 규정을 없애는 헌법 개정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켜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에는 또다시 3 · 15 부정 선거를 저질러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분노한 국민들이 4 · 19 혁명을 일으키면서 결국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1965년에 세상을 떠났다.[1]
평가
긍정적 평가
허정은 흔히 선생님을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미국에서 수학하신 선생은 독재자는 커녕 분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면까지 없잖아 있었다 라고 말했다. 또한 허정은 그가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점을 두고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다 고 평하였다.
장면은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본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승만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 며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기 때문에 그 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극작가 신봉승은 오직 조국의 자주 독립만을 위해 헌신하였다.는 평을 내렸다.[2]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과 지시를 내린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 군인, 관료 출신들을 '반공투사'라 칭송하면서 대거 등용했다는 점과,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들과 책임들, 토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나아갔다는점, 이후 자유당과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점, 집권욕, 고집 등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허정은 다만 처음 환국했을 때처럼 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 선 초당적 지도자로서 아직도 미숙한 한국의 정당들을 공평한 입장에서 육성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위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점과 정권을 인계함으로써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한 점만은 그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3]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평가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6.25 전쟁 최악의 흑역사로 꼽힌다.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서 과거 좌익에 몸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인 보도연맹을 6.25전쟁 때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보도연맹과 전혀 상관 없는 민간이도 많이 학살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희생자 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였는 이처럼 정부는 민간인 학살에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의 정보를 보관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권침해를 해왔다. 이 사건이 얼마나 잔혹했냐면 당시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러 그제서야 이승만이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지금도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에 대한 평가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의 인도교가 폭파된 사건이다.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북한이 남침을 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홀로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 방송으로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라는 방송을 하였고 시민들은 이를 믿고 서울에 머물렀다. 하지만 북한군이 진격해오자 당황한 시민들은 그제서야 피난을 가기 시작했는데 이 때 이승만이 북한이 남쪽까지 내려올까 두려워 한강의 인도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 경찰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고 특히 국군의 열세를 숨기고, 홀로 도망쳐놓고는 자신이 서울에 머무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국민을 기만했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