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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font color=blue>서오릉</font> 중 하나인 <font color=blue>대빈묘</font>(大嬪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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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font color=blue>서오릉</font> 중 하나인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8&mn=RT_01_10_01 대빈묘](大嬪墓)이다.  
  
 
1970년 05월 26일 에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1970년 05월 26일 에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2019년 6월 22일 (토) 16:51 판

정의

1659(효종 10)∼1701(숙종 27). 조선 숙종의 후궁

내용

생애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출신인 장형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

어머니의 정부였던 조사석과 종친인 동평군 이항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과 외조부인 윤성립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을 지냈으며 거부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 이정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식어버린 숙종의 총애, 환국정치의 중심에 섰던 비극적 운명의 여인

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비 인경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뒤에 처음 숙종에게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비 명성왕후는 당파적 색채가 강했는데, 희빈과 연결되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왕후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희빈이 8세 위였다.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 등의 서인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락하게 되었다. 환국이 원자 정호 때문에 촉발되었으므로 왕실의 교체도 당연히 뒤따랐다.

인현왕후는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고(5월 2일) 나흘 뒤 희빈은 드디어 왕비에 올랐다(5월 6일).

원자의 외가, 그러니까 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다.

이듬해(1690, 숙종 16) 6월 경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은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기사환국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을 점차 후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환국으로 나타났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원자 정호와 희빈의 중전 책봉이었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은 인현왕후의 복위였다.

숙종은 이전의 조처를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환궁시켰다.

장씨는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 교지는 불태워졌고, 장씨의 왕후 옥보도 파괴되었다(1694년(숙종 20) 4월 12일).

숙부 장현과 장찬도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윤5월 13일). 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러나, 그녀의 비극은 끝이 아니었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숙종은 대노했다. 장희재는 참형에 처해졌고, 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최석정 등 소론도 몰락했다. 정계는 노론이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결국 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0월 8일). 죄목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것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입궁해 숙종덕에 원자를 생산하고 중전까지 올랐지만 결국 숙종으로 인해 사사된 42년의 파란 많은 생애였다.

숙종은 이후 빈(嬪)을 후비(后妃)로 승격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관련 사건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대빈묘(大嬪墓)이다.

1970년 05월 26일 에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경기도 양주에 있었으나 희빈장씨의 묘자리를 두고 불길한 징조가 있다고 간언되어 이장이 결정되었다.

현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한다.

대빈묘의 모습

대빈묘.PNG

재미로 보는 희빈 장씨

참고문헌

기여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