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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봄날 꽃이 흩날리는 필운대

Synopsis

지금처럼 한양인들도 봄날 꽃구경을 좋아했는데, 봄나들이를 '상춘(賞春)', 꽃구경을 '상화(賞花)'라 하였다. 경복궁을 포함한 도성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인왕산의 필운대 일대는 살구꽃과 복사꽃 등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유난히도 많아 봄 꽃구경의 명소로 유명했다. 봄철이 되면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라 하여 도성의 풍류객들이 이곳을 찾아 술과 시로 춘흥을 즐겼다. 특히 '필운대 부근의 살구꽃'(弼雲杏花)은 '행촌(杏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박지원을 비롯한 많은 한양 선비들의 시문에 등장하며, 정선도 필운대의 모습을 《필운대》,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렸다. 《필운대》는 사직동에서 인왕산을 향해 오르며 필운대를 바라보며 그린 것으로 필운대가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놀 수 있는 공간임을 알 수 있고, 《필운대상춘》은 선비 여러 명이 필운대에 올라 자연을 즐기며 모여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또한 1786년에 임득명(林得明, 1767~?)의 시화첩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1]에 수록된 《등고상화(登高賞華)》에는 필운대에서 시화 모임을 갖는 모습을 그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비 갠 듯한 봄날 인왕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수채화처럼 맑게 그려져서 필운대의 아름다운 봄날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면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은 '난후필운춘망(亂後弼雲春望-전쟁 뒤 필운대의 봄 경치)'라는 시를 지어 임진왜란 후 필운대에서 바라본 황량한 한양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필운대라는 이름은 중종 때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인왕산의 이름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은 것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 32년(1537) 3월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용경에게 북쪽의 백악산(북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을 가리키며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당시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극진한 예우였다. 이에 공용경은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하고,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은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온 것인데, ‘운룡’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백악산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필운산이라는 이름은 별로 쓰이지 않았고, 필운대 및 필운동이라는 이름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필운대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터로도 유명한데,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의 오성대감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權慄, 1537-1599)의 사위이다. 이항복은 19살 때 권율의 딸과 혼인한 후 필운대에서 가까운 행촌동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권율의 집터는 현재 사직터널 위쪽인 종로구 행촌동1-18로 알려져 있는데, 필운대와 직선거리로 약 600미터로 걸어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인왕산 밑 필운대는 이항복이 처가를 나와 젊은 시절 관직생활을 하며 지내던 사가일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필운대에는 배화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배화여고는 1898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Peel Campbell) 여사가 세운 캐롤라이나학당에서 이름을 바꾼 배화학당이 전신이다. 배화여자고등학교 별관 뒤쪽에 위치한 바위벽에는 이항복의 글씨라는 ‘필운대’ 석 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2]단단한 힘과 반듯한 균제미가 돋보이는 해서체의 글씨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의와 도리에 맞게 정견을 펼쳤던 이항복의 성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필운대’글씨 오른쪽에는 몇 줄의 싯구가 적혀있는데, 이 제명은 1873년에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이 터에 들른 후 그 느낌을 글로 지어 새긴 것이다. 가장 우측에는 조선후기 가객 박효관(朴孝寬, ?-?)과 연관된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누가 썼는 지 알 수 없다. 박효관과 관련된 글씨가 있는 것은 이유원과의 인연에서 생긴 것이다. 이유원은 악부를 비롯하여 우리말 노래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유원이 필운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박효관이 감동(監董)의 역할을 맡으면서 교유하게 된다. 그래서 박효관은 필운대 주변에서 가곡을 향유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고, 이 모임이 유명한 '승평계(昇平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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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임득명은 여항 문인들의 시사인 옥계시사(玉溪詩社, 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시사 모임의 내용을 기록한 서화첩
  2.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아들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