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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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방어체계_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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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조선 |
출신 | 파평윤씨 |
한글표기 | 윤이제 |
한자표기 | 尹以濟 |
영문표기 | |
출생년도 | 1628 |
사망년도 | 1701 |
최고관직 | 경기관찰사, 형조판서 |
시대 | 조선시대 |
관련 방어시설 | 적북돈대, 휴암돈대, 월곶돈대, 옥창돈대,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 갑곶돈대,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 손석항돈대, 덕진돈대,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 택지돈대, 동검북돈대, 후애돈대, 분오리돈대, 송곶돈대,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장곶돈대, 송강돈대, 굴암돈대, 건평돈대, 망양돈대, 삼암돈대, 석각돈대, 계룡돈대, 망월돈대, 무태돈대, 인화돈대, 광암돈대, 귀등곶돈대, 작성돈대, 불장돈대, 의두돈대, 천진돈대, 석우돈대, 소우돈대, 숙룡돈대, 낙성돈대 |
내용
윤이제의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즙(汝楫)이다. 판서 윤국형(尹國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윤경립(尹敬立)이다. 아버지는 윤세징(尹世徵)이며, 어머니는 유정(柳艇)의 딸이다.[1]
관직 경력
1663년(현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76년(숙종 2) 의주부윤이 되었다. 강화유수·공청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2년 진하 겸 진주사은부사(進賀兼陳奏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승지·동지중추부사·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남인으로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한성부좌·우윤을 거쳐 판윤이 되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1691년에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 뒤로 비변사제조·우참찬·공조판서·형조판서·어영대장 등 요직을 지내다가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삭탈관작되어 향리 포천에서 은거하였다.[2]
성품
세번이나 도백을 지내고 다년간 병마권을 잡았으나 항상 청백하여 집에는 담장이 없었고, 스스로 몸가짐을 삼가하여 당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큰 화를 입지 않았다.[3]
강화도 방어체계 와 관련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에 부임 했을 시, 승군 8,000명 어영군 4,000명을 투입하여 80일 만에, 강화도 주위를 둘러싼 48곳에 돈대를 완성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