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병산서원의 역사
- 병산서원이 되기까지
병산서원은 아까 서애 선생을 모시고 있다고 했는데, 원래 이 자리는 아니었구요. 여기보다 한 20여 리 떨어진 풍산읍에 있었습니다. 풍악 서당이라해서 풍산 유씨의 자제들을 모셔다가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는데 고려말 공민왕때 풍악 서당쪽으로 몽진을 옵니다.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부인인 노국공주를 데리고 이곳 안동으로 피난을 오죠. 피난을 올 때 그 난리 와중에도 어디선가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공민왕이 글을 읽는 소리를 찾아 근원지를 봤더니 바로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글을 읽는 소리였고, 공민왕이 감동해서 많은 책과 땅을 주어서 격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점점 주위에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주변이 시끄러워져 좀 더 공부하기 좋은 장소를 찾다가 1572년도까지 오는데요, 그때가 서애 류성룡 선생이 부친상을 당해서 하회에 내려와 상중일 때입니다. 유생들이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공부하기에 풍악서당 주위가 좋지 않으니까 좀 더 좋은 장소가 어디 없겠습니까? 라고 여쭷더니 서애 선생이 여기 병산 앞을 가르쳐줍니다. 여기다 지으면 학생들이 공부하기 좋을 것 같다, 집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풍악서당을 이리로 옮기고 여기 지명을 따서 병산서당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처음에 병산서당이었던 서당이 서애 선생이 있을 때 병산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했구요.
- 사액사원
병산서원의 일부는 임진왜란 때 불타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서애 선생이 1607년에 돌아가시고, 유생들과 학자들이 모여서 서해선생의 위패를 모시자 해서 여기서 향사를 올리게 된 겁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셔왔구요, 서애 선생이 임진왜란 때 영의정까지 하셨던 분이라 바로 사액이 이루어 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가진 정치적 힘을 느낀 반대세력들에 의해서 바로 사액이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1864년, 서애 선생이 돌아가시고 200년도 훨씬 지나고 철종 임금때야 비로소 사액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철종 임금이 사액은 내렸지만 현판 편액을 내리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병산서원은 그전부터 쓰던 편액을 걸고 새로운 편액은 받지 못한 사액서원이 됩니다.
사액, 내릴 사자를 써서 말 그대로 편액을 내렸다는 겁니다. 사액이 되면 일반서원과는 좀 다르죠. 보통의 서원은 유림의 자제를 모아놓은 사립학원인데 사액서원이 되면 준 공립이 되어 나라에서 땅과 노비 토기 소금 책 등을 지원 해주면서 운영이 굉장히 쉬워지기 때문에 누구나 사액서원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굉장히 엄격한 조건을 걸어서 사액이 쉽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대원군 때는 전국 47개 사액서원을 제외한 많은 서원과 사후들을 해체를 시키게 되는데 그 때 해체되지 않은 서원중 하나가 병산서원이고, 그 때 해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양 그대로 존속될 수 있었습니다.
- 병산교육재단, 풍산그룹
보통 서원에서는 존현양사(尊賢養士)라 해서 훌륭한 선비 학자를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尊賢), 선비를 길러내는(養士) 두 가지 역할을 서원에서 하는데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거의 모든 서원들이 이 존현의 기능인 향사는 지내고 있지만 양사는 대부분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여기 병산서원에는 병산 교육 재단이 1940년대에 설립이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학교를 설립해서 풍산중학교 풍산고등학교가 세워졌구요, 이 곳 유생들이 향사를 지낼 때도 직접 참여를 해요.
- 부시와 아들부시의 방문
그 학교에 미국의 부시대통령과 그 아들부시가 방문 했었습니다. 2005년도에 아버지 부시는 여기에 앉아 부인이신 로라 여사와 같이 20여분 체류하시면서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과거 조선시대의 학교였구나’ 하고 감탄을 하고 병산과 만대루를 보시다 가셨고, 몇 년 후에는 아들부시도 오셨어요. 아버지부시는 요 앞에다가 소나무 한그루를 식수하셨고 아들부시는 서당에 대롱 나무를 또 한 그루 식수를 하셨어요. 풍산 그룹 류진 회장님이 병산교육재단의 이사장인데 그분이 미국 부시 가문하고 친분이 좋아 아들부시가 풍산고등학교에 와서 연설도 하셨습니다. 학생들 교직원들 모아놓고 연설을 하셨는데 한 학생이 부시가의 가훈은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들부시가 ‘부모님을 사랑하라. 극진히 사랑하라’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마음을 다해서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자식의 도리이다. 라고 하셨고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링컨대통령의 관한 이야기, 남북전쟁에 관한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맺음말
그리고 병산서원에는 서애 선생의 셋째 아들도 함께 모셔지고 있습니다. 서애 선생은 정식으로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라 국무에 계셨구요, 아들 수암 류진 선생은 문과를 급제한 것이 아니라 추천을 받아 유일로 등용되고 사헌부, 지금으로 치면 감사원에서 일을 하게 돼죠. 이 분이 아버지의 학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었기 때문에 이 곳 병산서원에 함께 모셔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병산서원에 대한 설명 드렸구요, 한 바퀴 죽 둘러보시면서 이 곳의 경관과 서애 선생의 자취를 느껴보시다가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