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 속 숙종과 숙종의 사람들
목차
주제
서오릉 속 숙종과 숙종의 사람들
제작의도
조선왕릉(朝鮮王陵)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고 총 40기에 달한다.
1408년부터 1966년까지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왕릉은 선조와 그 업적을 기리고 존경을 표하며,
왕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선조의 넋을 사기(邪氣)로부터 보호하고 능묘의 훼손을 막는 역할을 했다.
왕릉은 뛰어난 자연경관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보통 남쪽에 물이 있고 뒤로는 언덕에 의해 보호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이며,
멀리 산들로 둘러싸인 이상적인 자리를 선택해 마련되었다. 왕릉 주변은 다양한 인물과 동물을 조각한 석물로 장식되어 있다.
조선왕릉은 5,000년에 걸친 한반도 왕실 무덤 건축의 완성이다.[1]
이러한 조선왕릉 중 하나인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도동에 있는 조선시대 5개를 합한 능호(陵號)로
창릉·익릉·명릉·경릉·홍릉 5기의 왕릉과 함께순창원,수경원, 대빈묘가 있다.[2]
특히 이 서오릉에는 자신의 업적보다는 여인들과의 이야기가 더 유명했던 왕 숙종이 있다.
그 혼란스러운 정치 속에서 과연 그는 어떤 인물들과 함께 하고 있을지, 그 인물들과 관련된 사건들은 무엇이 있는지,
서오릉 속 각 인물들의 묘 위치는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오릉 속 숙종과 숙종의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콘텐츠를 제작하게 되었다.
노드 리스트
CLASS | NODE |
---|---|
인물 | 숙종,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희빈 장씨, 경종 |
세력 | 서인, 남인 |
사건 |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
장소 | 명릉, 익릉, 대빈묘 |
형식 | 동원이강릉, 쌍릉, 단릉, 단분 |
주요 노드
CLASS | NODE |
---|---|
인물 | 숙종, 인현왕후, 희빈 장씨, 경종 |
사건 |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
장소 | 명릉, 익릉, 대빈묘 |
형식 | 동원이강릉, 쌍릉, 단릉 |
인물들과의 관련사건
경신환국
인물
세력
내용
이 사건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1674년 남인은 2차 갑인예송 문제로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나 경신환국으로 다시 실각하였다.
1680년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의 집에 조부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가 있는데, 그날 비가 왔다.
숙종이 잔치에 쓰게 하려고 유악(기름 먹인 천막으로, 임금만 사용하던 것)을 허적의 집에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가져가서 사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남인이 장악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기는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3]
패초(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4]
이로써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달인 4월 정원로의 고변으로 허견의 역모가 적발되었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들이 임성군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복창군·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고,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를 엄호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고변자 정원로 또한 원래의 공모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되었다.[5]
이 사건의 연루자들에 대해서는 “장사꾼들에게 뇌물을 받고 시장을 옮겼다.”거나, “각 사 공물(貢物)을 많이 시장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통용하게 하여 그 값을 나누어 먹었다.”는 등
상인 및 상업과의 관계를 지적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정파의 어느 쪽이건 간에 당시의 정치가 경제의 새로운 변동에 영향을 받게 되는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시된다.
이 시기 이후로 붕당정치가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성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변모이다.[6]
결과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7]
이후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여 붕당의 기본 원리(상호 견제와 비판)를 무너트리고 일당 전제화 정치를 실시하였다.[8]
인물들과의 연관성
경신환국은 숙종 외에 서오릉 속 인물들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숙종대에 환국의 주 세력인 서인과 남인의 정권교체가 처음 시작되는 사건이다.
숙종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불러 최상의 예우를 베풀었다(10월 12일).
공교롭게 국혼의 변화도 비슷한 때 일어났다. 1680년(숙종 6) 10월 인경왕후가 별세하자 이듬해 5월 민유중의 딸을 계비(인현왕후)로 맞은 것인데,
그녀 또한 대표적인 서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로써 서인은 국혼과 주요 관직을 대부분 장악했다.
이런 상황은 10년 가까이 이어졌다.[9]
경신환국을 시작으로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경종이 연관된 사건인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이 차례로 일어났다.
기사환국
인물
세력
내용
왕자 윤의 출생으로 파급된 여파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치 실세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불렀다.
숙종은 왕자 윤(뒷날의 경종)을 원자로 삼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숙종의 발언에 서인들은 크게 반대했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회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을 내렸다.[10]
결과
송시열의 사사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김수항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김덕원·목래선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11]
인물들과의 연관성
이 사건은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숙종의 총애를 받는 여인들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환국이 일어나고부터 그 유명한 숙종의 여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민씨가 왕후로 간택되기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았으며 그러던 차에 장씨가 1688년 왕자 윤(昀)을 낳게 되자 일약 정치적 격변을 몰고오게 되었다.
숙종은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희빈(희빈 장씨)으로 높였다.
이 환국의 여파로 5월 2일에 서인세력이었던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고, 남인을 등에 업은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12]
갑술환국
인물
세력
내용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13]
남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힘겹게 집권했는데, 기사환국은 남인이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서인에 대한 숙종의 염증과 혐오 때문에 얻은 것이었다.
특히 궁녀였던 소의장씨(희빈 장씨)를 두고 서인과 숙종의 갈등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남인이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남인은 자신들의 실권을 항상 불안하게 여겼으며 언제든 또다시 실각할 수 있다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기사환국 이후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나뉘어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당시 노론이었던 김춘택과 소론 한중혁 등이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함이완이 이런 사실을 남인 민암에게 고변하였고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서인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14]
서인들은 기사환국 이후 새로이 왕의 사랑을 받게 된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와 연결을 가져, 숙종에게 남인계의 잘못된 점을 자세히 알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숙종은 민암 등 남인의 보고를 받기 전에 태도를 돌변하였다.[15]
또한 당시 숙빈 최씨 독살설까지 퍼지면서 남인들은 다시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마침내 숙종은 남인이었던 민암의 처사를 문제삼았고 김춘택 등의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옳게 여겨, 민암을 사사하고 남인 세력을 유배하였다.
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는 노·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16]
결과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남인을 물리치고 남구만을 영의정, 박세채를 좌의정, 윤지완을 우의정에 각각 기용, 소론 정권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된 것을 비롯, 송시열·민정중·김익훈·김수흥·조사석·김수항 등이 복관되는 등 기사환국 이전의 상태가 되었다.
반면, 남인측은 민암·이의징이 사사되고, 권대운·목내선·김덕원·민종도·이현일·장희재 등 다수가 유배되었다.
이 사건으로 축출된 남인은 다시는 정권에 대두하지 못했으며 이후 당쟁은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17]
인물들과의 연관성
남인들은 인현왕후 민씨 폐출의 원인이 된 소의장씨(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 정호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만일 민씨가 복위하여 다시 왕비가 되면 남인은 또 실권하게 되므로 폐비민씨를 지지하는 김춘택 등 서인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장씨를 총애하여 희빈(희빈 장씨)을 삼았으며 아들(뒷날의 경종)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던 숙종은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씨보다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 최씨(최씨는 후일 영조의 생모가 된다.)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18]
이러한 숙종의 변화된 마음으로 인해 갑술환국이 일어나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맞아들였고 왕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으며 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19]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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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명릉
인물명 | 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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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의 조성 | 1701년(숙종 27), 1720년(경종 즉위), 1757년(영조 33) |
능의 형식 | 쌍릉의 형태인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과 단릉의 형태인 인원왕후의 능이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있는 동원이강릉 형식 |
익릉
인물명 | 인경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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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의 조성 | 1681년(숙종 7) |
능의 형식 | 인경왕후 한 분만 모셔져 있는 단릉의 형식 |
대빈묘
인물명 | 희빈 장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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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의 조성 | 1702년(숙종 28), 1719년(숙종 45) |
묘의 형식 | 희빈 장씨 한 분만 모셔져 있는 단분의 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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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조선 왕릉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 영/불어 원문)
- 서오릉
- 경신환국 (두산백과)
- 경신환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신환국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황병석)
- 숙종 - 환국 정치의 명암 (인물한국사, 김범, 장선환)
- 기사환국
- 기사환국
- 갑술환국 (두산백과)
- 갑술환국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 갑술환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갑술옥사 (한국고중세사사전)
- 환국정치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