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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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은 새 왕조 개창기에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등에 의해서 견제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그러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나 왕위에 오른 뒤 계속된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 보면 그는 500년 조선조 국가 운영의 밑그림을 완성한 군왕이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여가에 담긴 야망
고려 왕조의 마지막 기운이 느껴지던 어느 날, 이방원과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술상을 앞에 놓고 자리하였다.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던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한 이 자리에서 이방원은 먼저 시 한 수를 읊었다. 우리네 세상살이 중간중간에 부딪치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시를 잠깐 짬을 내어 감상해보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른바 ‘하여가(何如歌)’라고 하는 것이다. 정몽주에게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굽힐 것을 권유하면서, 자신의 뜻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방원다운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표현이다. 그러자 정몽주가 이방원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받아 들고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丹心歌)’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시구를 통해 정몽주의 고려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전부터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방원이었기에 더 이상의 설득은 무의미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통해 선지교(후에 선죽교로 이름이 바뀜)에서 정몽주를 살해하며, 이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국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원. 그는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희망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처치하는 거사가 성공한 뒤 남은ㆍ정도전ㆍ조준 등 52인과 이성계의 추대를 협의하고, 공민왕비 안씨를 움직여 수창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연 것이다. 새 왕조를 여는 데 있어 이방원은 중요한 고비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개국의 공로가 묻혀버린 좌절의 순간들
새 왕조를 개창한 뒤, 아마도 이방원은 부왕의 등극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개인적인 능력이나 중망으로 보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좌절의 아픔을 주었다.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좌절은 태조 초에 이루어진 개국공신의 선정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개국공신의 선정을 주도한 태조는 아들의 공은 인정하되 친자(親子)라는 이유로 공신 선정에서 제외시켰다. 왕자 신분이 되면서 정치적ㆍ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을 것이지만, 개국공신의 선정에서 제외된 것은 그것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볼 때 이방원에게는 서운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한 뒤, 그는 자신을 비롯해 방의ㆍ방간 두 형을 개국 1등 공신에 추가로 선정하였다.
이방원은 이후에도 계속 정치에서 소외되며 정도전 등에 의해 견제되었다. 새 왕조가 들어선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392년 8월, 정도전 등이 중심이 되어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당시 배극렴은 “시국이 평온할 때에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먼저 공 있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여, 이방원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이방원은 세자 책봉에서 소외되었다. 더하여 정도전은 중국의 예를 들어 모든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자고 청하기도 하였고, 명나라와 외교적이 마찰이 생기자 진법 훈련을 실시하면서 왕자 및 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겠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방원을 비롯한 정적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차원이었다.
새로운 왕조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다
좌절의 순간은 그러나 그리 길지 않았다.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으로 그야말로 이방원의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시대는 그냥 오지 않는 것, 준비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영광이었다. 이방원과 그 주위 사람들은 좌절의 시기에 앞으로 다가올 재기의 순간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먼저 본인과 부인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사병을 육성하거나 후일을 도모할 준비를 하였고, 여기에 당대 최고의 책사라고 할 수 있는 하륜(何崙, 1347~1416)과의 만남은 이방원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하륜을 통해서 의형제를 맺은 이숙번(李叔蕃, 1373~1440)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태종의 친필. 그는 무장 가문으로 유명한 이성계 집안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였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의 대세는 이방원에게로 옮겨갔다. 이방원으로서도 바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었다. 정도전 등의 제거가 권력욕으로만 비추어진다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일단 당시 생존하고 있던 형들 가운데 맏형인 영안대군 방과(제일 맏형은 진안대군 방우였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임)에게 왕위를 양보하니, 그가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定宗, 1357~1419, 재위: 1398~1400)이었다. 영안대군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적장자가 없었으니, 이는 이방원에게 후일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정종 즉위 후 방원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고, 정종이 재위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방원이 차지하게 되니, 그가 바로 태종이었다.
태종은 왕세제 시절 사병을 혁파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려고 할 때 반발하던 그가 왕위에 올라서는 이를 혁파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병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소였으므로, 태종도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는 이를 혁파해야만 하였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조 국가에 맞는 여러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국가의 행정체계를 정비하여 6조 중심의 행정체계를 완성하여 자신의 국정 장악력을 강화하였다. 이 밖에도 오늘날 지방제도의 근간이 되는 8도 체제를 정비하였고, 서얼의 관직 진출 등을 제한하는 서얼차대법을 제정하였으며, 국가 운영의 필수인 인구나 군적 파악을 위해 호적법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제도들은 이후 조선조 운영의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피의 숙청과 왕조 수성을 위한 비장한 선택
태종은 국가 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 축출하였다. 가장 먼저 태종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인물은 이거이(李居易, 1348~1412)였다. 태조 대(代)의 무장으로, 그리고 태종과 혼인 관계로 맺어져 영의정까지 지냈던 이거이였으나 사병 혁파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제거되었다. 그는 당대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렸던 인물이었다.
이어 태종의 화살은 자신을 그토록 도왔던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 민씨의 집안으로 겨냥되었다. 외척으로서, 그리고 태종을 도와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기에 그 권력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나 1406년(태종 6년)과 1409년 두 차례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전위 표명 과정과 1415년을 거치면서 결국 원경왕후 집안의 4형제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연속이었다.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아버지로서 비장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물려주기 2개월 전에 있었던 일로,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을 폐위시키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었다. 당시 의정부를 비롯해 6조 등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양녕대군의 잘못을 논하면서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위해 폐위시키기를 요청하였다. 어렵게 세운 왕조의 수성을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관리들이 세자의 폐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국왕과 교감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왕세자의 폐위에 대해 태종은 천명임을 강조하면서, 후계자를 어진 이로 삼는 것은 고금의 대의라고 그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그 일이 비록 정당하다고는 하지만, 아비 되는 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록에서는 당시 태종의 심정을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이 상황에서 심적인 동요가 없을 수 없었으리라.
‘용의 눈물’에 담긴 의미는?
1996년, ‘용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모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던 사극이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태종을 소재로 조선 초의 역사를 그린 사극이었는데, 이는 방송 외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유발하였다. 당시는 마침 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어가던 시기였는데, 후보자들이 정도전과 태종을 대비시키며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하던 후보자가 당선되었으나, 이는 당시로써는 보기 드문 논쟁이었다. 개국 초 혼란한 시기를 살았던 태종의 삶과 그것을 그린 사극의 인기를 반영하는 듯했다.
이 사극의 마지막 장면은 대단히 극적이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의 신분으로 있던 태종이 가뭄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궁궐 후원에 단을 쌓고는, 며칠을 하늘에 기도한 끝에 단비가 내렸다. 태종도 서서히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태종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그 비는 ‘용의 눈물’이 변하여 내린 것이었을까? 태종은 1422년(세종 4년) 5월 10일에 승하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년 태종이 승하하는 날에 비가 내리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며, 이때 내리는 비를 가리켜 ‘태종우(太宗雨)’라 하였다.
조선 개국의 물꼬를 튼 정몽주의 저격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종은 때로는 비정하게까지 느껴진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 흘린 눈물은 그동안 자신 때문에 흘렸던 피에 대한 사죄의 눈물이 아닐까? 그러나 재위 기간 동안에 이루어낸 여러 가지 제도와 정책의 확립은 이후 조선왕조 국가 운영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태종은 새롭게 출발한 왕조의 밑그림을 성공적으로 그린 임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