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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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송순(宋純, 1493년 ∼ 1583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수초, 호는 면앙정, 본관은 신평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종 때 주문사로 명에 다녀왔다. 이황 등 신진 유학자와 대립했으며, 선조 때 대사헌·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으며 나이가 많아 기로소에 들어갔다. 전남 담양에 석림정사와 면앙정을 짓고 독서와 시조를 지으며 여생을 지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이며 저서로 《면앙집》 《기촌집》 등이 있다. 담양 출신. 증 이조판서태(泰)의 아들이다.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이다.


생애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중종 19)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중종 22)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년(중종 32)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중종 34)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중종 37)윤원형과 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명종 7)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賦)를 쓰고,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명종 17)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년(선조 1)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