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환국
정의
1694년(숙종 20)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폐비민씨(인현왕후) 복위운동을 반대하여 화를 입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1]
인물
내용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2]
남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힘겹게 집권했는데, 기사환국은 남인이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서인에 대한 숙종의 염증과 혐오 때문에 얻은 것이었다.
특히 궁녀였던 소의장씨(희빈 장씨)를 두고 서인과 숙종의 갈등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남인이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남인은 자신들의 실권을 항상 불안하게 여겼으며 언제든 또다시 실각할 수 있다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기사환국 이후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나뉘어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당시 노론이었던 김춘택과 소론 한중혁 등이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함이완이 이런 사실을 남인 민암에게 고변하였고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서인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3]
서인들은 기사환국 이후 새로이 왕의 사랑을 받게 된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와 연결을 가져, 숙종에게 남인계의 잘못된 점을 자세히 알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숙종은 민암 등 남인의 보고를 받기 전에 태도를 돌변하였다.[4]
또한 당시 숙빈 최씨 독살설까지 퍼지면서 남인들은 다시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마침내 숙종은 남인이었던 민암의 처사를 문제삼았고 김춘택 등의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옳게 여겨, 민암을 사사하고 남인 세력을 유배하였다.
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는 노·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5]
결과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남인을 물리치고 남구만을 영의정, 박세채를 좌의정, 윤지완을 우의정에 각각 기용, 소론 정권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된 것을 비롯, 송시열·민정중·김익훈·김수흥·조사석·김수항 등이 복관되는 등 기사환국 이전의 상태가 되었다.
반면, 남인측은 민암·이의징이 사사되고, 권대운·목내선·김덕원·민종도·이현일·장희재 등 다수가 유배되었다.
이 사건으로 축출된 남인은 다시는 정권에 대두하지 못했으며 이후 당쟁은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6]
인물들과의 연관성
남인들은 인현왕후 민씨 폐출의 원인이 된 소의장씨(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 정호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만일 민씨가 복위하여 다시 왕비가 되면 남인은 또 실권하게 되므로 폐비민씨를 지지하는 김춘택 등 서인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장씨를 총애하여 희빈(희빈 장씨)을 삼았으며 아들(뒷날의 경종)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던 숙종은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씨보다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 최씨(최씨는 후일 영조의 생모가 된다.)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7]
이러한 숙종의 변화된 마음으로 인해 갑술환국이 일어나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맞아들였고 왕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으며 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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