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척주동해비 및 대한평수토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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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kjudonghaebi Monument and Daehanpyeongsutochanbi Monument

Cheokjudonghaebi Monument was erected by Heo Mok, the governor of Samcheok in 1661 during King Hyeonjong's reign. Heo Mok composed a poem titled Ode to the East Sea which expressed his desire to protect his city from tsunamis that devastated the area, and engraved the poem on the stale. Daehanpyeongsutochanbi Monument, which contains 48 Chinese characters from the Chinese Emperor Yu's Stale served a similar purpose as Cheokjudonghaebi Monument.

개관

삼척 척주동해비는 1661년(현종 2) 허목(許穆)이 삼척부사로 재직할 때, 동해 풍랑에 대한 피해를 막고자 동해를 칭송하는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전서(篆書)로 비문을 새겨 바닷가에 세운 것이다. 대한평수토찬비도 동해의 거친 파도가 삼척부내에까지 밀려들어, 허목이 중국 우제(禹帝)의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를 보고 그 중에 48자의 가려서 새긴 비석이다.[2]

위치

삼척 척주동해비

미수 허목

허목은(1595(선조 28)∼1682(숙종 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따님이다. 1660년 삼척부사에 임명받았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건립 연원

삼척 척주동해비 비문은 삼척 부사 허목이 지은 것으로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높이 76cm, 두께 23cm이다. 현종 3년(1662)에 건립한 척주동해비는 일명 퇴조비(退潮碑)라 불리듯이 조류(潮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당초에는 만리도에 건립되었다. 이후 숙종 34년(1708)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 바다에 잠겼던 것을 동왕 35년 부사 홍만기가 문을 본떠서 다시 새겼으며, 동왕 36년 삼척 부사 박내정이 죽관도 동쪽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에 이건하였다.

척주동해비 내용


瀛海漭瀁 큰 바다 끝없이 넓어
百川朝宗 온갖 물이 모여드니
其大無窮 그 큼이 무궁하네
東北沙海 동북쪽은 사해라서
無潮無汐 밀물도 없고 썰물도 없어
號爲大澤 대택이라 일렀네
積水稽天 무진장 많은 물 하늘까지 닿아
浡潏汪濊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海動有曀 바다가 일렁이고 음산하네
明明暘谷 밝디밝은 양곡에는
太陽之門 태양의 문이라서
羲伯司賓 희백이 공손히 해를 맞고
析木之次 석목의 위차요
牝牛之宮 빈우의 궁으로
日本無東 해가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鮫人之珍 교인의 보배와
涵海百産 바다에 가득한 온갖 산물
汗汗漫漫 한없이 많으며
奇物譎詭 기이한 물건 변화하여
宛宛之祥 너울대는 그 상서는
興德而章 덕을 일으켜 나타나도다
蚌之胎珠 조개의 태에 든 진주는
與月盛衰 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旁氣昇霏 대기를 따라 김이 올라가고
天吳九首 천오와 구수
怪夔一股 외발 달린 기는
颷回且雨 폭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린다네
出日朝暾 아침에 돋은 햇살
轇軋炫煌 둥글게 올라 휘황찬란 빛나니
紫赤滄滄 자줏빛 붉은빛 가득하여라
三五月盈 십오일 둥실 뜬 달
水鏡圓靈 하늘에 밝은 거울 되니
水鏡圓靈 뭇 별들 빛을 감추도다
扶桑沙華 부상과 사화
黑齒麻羅 흑치와 마라
撮髻莆家 상투 튼 보가며
蜒蠻之蠔 굴을 따는 연만
爪蛙之猴 원숭이 많은 조와
佛齊之牛 소를 중시하는 불제는
海外雜種 바다 밖 잡종으로
絶黨殊俗 종류도 풍속도 다른데
同囿咸育 같은 세상에 함께 살도다
古聖遠德 옛 성왕 덕화가 멀리 미쳐
百蠻重譯 오랑캐들 중역 거쳐 찾아오니
無遠不服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皇哉煕哉 크고도 빛나도다
大治廣博 그 다스림 넓고 커서
遺風邈哉 유풍이 오래가리라. [3]

삼척 척주동해비 관련 사진


평수토찬비

건립 연원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禹篆閣)"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비석 측면에 고종 41년(1904) 비석을 옮겨 세운다는 기록이 있다.

평수토찬비 내용


久作忘家 오래도록 자기 집을 잊어버리고
翼輔承帝 보좌 우익 임금을 받들었도다
勞心營智 마음을 괴롭히고 지혜를 짜내어
裒事興制 사실을 모으고 법제를 일으켰네
泰華之定 태산과 화산이 안정되고
池瀆其平 지와 독이 균평하도다
處水犇麓 물에 처하여 산록에 붙달으니
魚獸發形 고기와 짐승이 형을 나타내네
而罔不亨 형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伸欝䟽塞 억울을 펴고 옹색을 뚫었구려
明門與庭 문과 뜰은 환히 밝어서
永食萬國 만국이 길이 밥 먹을 걸세.[4]

평수토찬비 관련 사진

주석

  1. '[1]',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문화재청, 2017년 4월 6일
  2. '[2]', 삼척 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 문화재청, 2017.4.6
  3. [3]’, 기언 제65권, 자서, 고전번역원 홍기은 번역.
  4. [4]’, 성호사설 제30권, 구루비문, 고전번역원 신호열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