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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 교육용 위키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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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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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삭제&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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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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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문서를 비움&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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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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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증언'''==&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amp;quot;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amp;quot;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amp;quot;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amp;lt;ref&amp;gt;[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 한계레 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b8F9ahXlWx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노근리 위치'''==&lt;br /&gt;
&amp;lt;googlemap width=&amp;quot;800&amp;quot; height=&amp;quot;800&amp;quot; lat=&amp;quot;36.215192&amp;quot; lon=&amp;quot;127.880292&amp;quot; type=&amp;quot;normal&amp;quot;&lt;br /&gt;
zoom=&amp;quot;8&amp;quot; icon=&amp;quot;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amp;quot;&amp;gt;&lt;br /&gt;
36.215222, 127.880292 노근리 쌍굴다리&lt;br /&gt;
&amp;lt;/googlemap&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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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보도연맹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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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4:57: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35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 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보도연맹사건 정의]&amp;lt;/ref&amp;gt; 이 사건을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학살 과정'''==&lt;br /&gt;
*전쟁 발발 직후 정부의 동향&lt;br /&gt;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됐다.&amp;lt;br/&amp;gt;&lt;br /&gt;
따라서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amp;lt;br/&amp;gt;&lt;br /&gt;
한국 전쟁 중에서 수도 서울을 탈출하여 부산으로 피난 갔던 [[이승만]] 대통령은&amp;lt;br/&amp;gt;&lt;br /&gt;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는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는 아직 확보하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게 된다.&amp;lt;br/&amp;gt;&lt;br /&gt;
이승만이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학살사건 과정]&amp;lt;/ref&amp;gt;&lt;br /&gt;
상부에서 처형 명령이 내려오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구금된 인원 중 일부는 교도소로 보내고, 일부 인원은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하기도 했다.&amp;lt;br/&amp;gt;&lt;br /&gt;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연맹원은 군경이 유치장이나창고에 가두었다가 차례로 트럭에 실어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lt;br /&gt;
&lt;br /&gt;
*지역별 학살 현황&lt;br /&gt;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후퇴하던 6월 하순부터 후퇴와 함께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amp;lt;br/&amp;gt;&lt;br /&gt;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시작된 학살은 이후에는 삼남 지역으로 내려갔다.&amp;lt;br/&amp;gt;&lt;br /&gt;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점령할 때까지 상대적으로 시간이 걸렸던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에서는 7월 경에 대량 학살이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대전,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지역은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형무소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amp;lt;br/&amp;gt;&lt;br /&gt;
특히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낙동강 방어선 안쪽 지역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138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78 제주 지역에서의 학살]은 규모와 잔혹성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라도에서의 학살&lt;br /&gt;
1950년 7월 중순에 전라남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다. &amp;lt;br/&amp;gt; &lt;br /&gt;
경찰은 후퇴하기 전 해남 각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고, 어디론가 끌고 가버렸다고 한다.&amp;lt;br/&amp;gt;&lt;br /&gt;
당시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끌려간 후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고 하며, 진도 근처의 무인도에서 이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전라도의 피해] &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경상도에서의 학살&lt;br /&gt;
경상도는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계속해서 행정권을 유지했으며 인민군에게 가장 늦게 점령된 지역인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amp;lt;br/&amp;gt;&lt;br /&gt;
경북에서는 대구 가창골 일대에서 수천 명이 학살 당하고, 경산 지역은 코발트 광산에 약 3천 5백 명을 모아두고 코발트 광산 내에서 집단 학살한 뒤에 아예 콘크리트로 막아 사건 은폐까지 했다. &lt;br /&gt;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amp;lt;br/&amp;gt;&lt;br /&gt;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경남 마산, 진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 총으로 학살한 다음 학살당한 이들 손과 발을 묶어서 바다에 수장시켰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amp;lt;br/&amp;gt;&lt;br /&gt;
당시 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심도 앞바다에서 집단으로 총살되거나 수장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amp;lt;br/&amp;gt;&lt;br /&gt;
경남 남해군에서는 강진만 앞바다에 30여 명을 선상 위에서 총살하여 바다에 빠뜨렸는데, 일부 희생자는 파도에 떠밀려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부산의 경우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학살 당했다.&amp;lt;br/&amp;gt;&lt;br /&gt;
경남 마산의 여양리에 위치한 골짜기 도둑골에도 수백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키겠단 목표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는데 당시 조직을 키운다는 이유로 사상과 무관한 국민들도 비료와 식료를 나눠 준다며 가입을 시켰다.&amp;lt;br/&amp;gt;&lt;br /&gt;
때문에 명단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amp;lt;br/&amp;gt;&lt;br /&gt;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좌익 사상을 가진 적이 있다며 언제든 인민군과 연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경상도의 피해]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보도연맹원들의 무고에 대한 자료'''==&lt;br /&gt;
정부는 보도연맹이 북한측에 협조할까봐 걱정하여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했지만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원 대부분은 정부의 지시에 잘 따랐다. &amp;lt;br/&amp;gt;&lt;br /&gt;
오제도와 [https://namu.wiki/w/%EC%A0%95%ED%9D%AC%ED%83%9D 정희택]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철수하기까지 각 구(區) 보도연맹 지부를 돌아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하였는데, 서울 지역 보도연맹원은 개전 초기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 구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amp;lt;br/&amp;gt; &lt;br /&gt;
이후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도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인민군에 협력했지만 남은 인원들은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려 했다는 기록과 증언도 있다.&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던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하였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 -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반공활동]&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amp;quot;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각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강 이남 지역에서 대채로 보도연맹원 등 좌익들이 소요나 무장폭동 등과 같은 집단적인 행위를 야기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서울 함락 전야에는 일부 소요가 있었긴 있었다).'''''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반공활동]&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은폐 정황'''==&lt;br /&gt;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 여론이 들끓자, 대한민국 제4대 국회에서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해 가장 피해가 큰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등의 학살 현장을 방문해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정부의 태도는 싹 바뀌었다. 군부세력은 '소급법'(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하에 유족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처벌했다. 또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을 모두 소각해 진상을 철저히 은폐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철저하게 금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유가족들에 대한 대우&lt;br /&gt;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희생자 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였고, 이후 정부는 이 자료를 관련자 신원조회에 활용하였다. 군사독재정권 역시 유족들을 항시 감시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오랫동안 유족들을 옥죄었다. 이처럼 정보기관은 학살 희생자와 유족들의 정보를 보관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권침해를 해왔다. 연좌제는 유족들까지 피해자로 만들었고, 그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 자연스럽게 각종 불이익은 유족들을 경제적 곤궁으로 몰아넣었다. 국가기관의 보도연맹원과 그 유가족에 대한 관리는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특히 1960년 5.16 군사정부는 유족회 활동을 금지시키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유족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주었다.&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진상조사'''==&lt;br /&gt;
이 사건은 결국 군사정부가 막을 내린 1990년대 들어서야 제대로 조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간단체에 의한 유해발굴 정도였지만,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었고 2007년 5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기며 국가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들을 통해 2007년 5월부터 시작된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로 충북 청주시에서 110여 명의 민간인 유해들이 발굴되었고 이 가운데 10대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유해들도 여럿 발굴되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3년 동안의 조사 결과 확인된 것만 해도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0년 즈음에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index.html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밝힌 사망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lt;br /&gt;
이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경기·인천 21곳, 강원 1곳, 충북 19곳, 충남 9곳, 경북 28곳, 경남 41곳, 전남 27곳, 전북 6곳, 제주 2곳 등 모두 168곳에 민간인 학살자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사료 조사, 주민 증언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해 우선 발굴 대상지를 39곳으로 압축하였다. 하지만 실제 발굴이 이뤄진 것은 2007~2009년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에 그쳤고 발굴을 통해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최종적으로 2010년 12월 31일 위원회 해산을 끝으로 매장 추정지로 밝힌 168곳 중 7.7%, 우선 발굴 대상지 39곳 중 33%만 발굴이 이뤄진 채 모든 활동이 끝났다. 현재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인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는 4,934명이다. 하지만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군사정권이 대대적으로 관련 기록을 소각시키며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밝혔다.&lt;br /&gt;
&lt;br /&gt;
*국가를 향한 손해 배상 소송&lt;br /&gt;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mp;quot;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amp;quot;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825_0011391763&amp;amp;cID=10201&amp;amp;pID=10200 관련기사])&lt;br /&gt;
유족들의 국가를 상대로한 소송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마산지역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 역시 2019년, 5년만에 재심 판결이 내려지며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88294 관련기사])&lt;br /&gt;
&lt;br /&gt;
*국가차원에서의 사과&lt;br /&gt;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평가'''==&lt;br /&gt;
일부 극우파단체는 ‘위장 전향 좌파세력들이 유사시에 보도연맹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적 활동을 취하는 것이 전쟁 시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보도연맹원 학살을 '반정부활동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사건'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이념적, 사회적 이유라도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보도연맹원들이 반정부 활동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는 그들을 재판도 없이 처벌 할 수 없다. 결국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고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한 반헌법적, 비인간적 학살이다.&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당시 사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파일:보도연맹2.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매체 속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44&amp;quot; height=&amp;quot;306&amp;quot; src=&amp;quot;https://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768973F8EF41979215E59D6A553FBF3DD2BF&amp;amp;outKey=V123510351e7336ee9df265572051454162fbddd5cf9e94e544bb65572051454162fb&amp;quot; frameborder=&amp;quot;no&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title=&amp;quot;NaverVideo&amp;quot; allow=&amp;quot;autoplay; gyroscope; accelerometer; encrypted-media&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극 중 주인공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전쟁 중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리쌀을 준다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반공청년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보도연맹 학살사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EC%82%AC%EA%B1%B4"/>
				<updated>2019-06-25T14:57: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35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 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보도연맹사건 정의]&amp;lt;/ref&amp;gt; 이 사건을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학살 과정'''==&lt;br /&gt;
*전쟁 발발 직후 정부의 동향&lt;br /&gt;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됐다.&amp;lt;br/&amp;gt;&lt;br /&gt;
따라서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amp;lt;br/&amp;gt;&lt;br /&gt;
한국 전쟁 중에서 수도 서울을 탈출하여 부산으로 피난 갔던 [[이승만]] 대통령은&amp;lt;br/&amp;gt;&lt;br /&gt;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는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는 아직 확보하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게 된다.&amp;lt;br/&amp;gt;&lt;br /&gt;
이승만이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학살사건 과정]&amp;lt;/ref&amp;gt;&lt;br /&gt;
상부에서 처형 명령이 내려오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구금된 인원 중 일부는 교도소로 보내고, 일부 인원은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하기도 했다.&amp;lt;br/&amp;gt;&lt;br /&gt;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연맹원은 군경이 유치장이나창고에 가두었다가 차례로 트럭에 실어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lt;br /&gt;
&lt;br /&gt;
*지역별 학살 현황&lt;br /&gt;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후퇴하던 6월 하순부터 후퇴와 함께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amp;lt;br/&amp;gt;&lt;br /&gt;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시작된 학살은 이후에는 삼남 지역으로 내려갔다.&amp;lt;br/&amp;gt;&lt;br /&gt;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점령할 때까지 상대적으로 시간이 걸렸던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에서는 7월 경에 대량 학살이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대전,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지역은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형무소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amp;lt;br/&amp;gt;&lt;br /&gt;
특히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낙동강 방어선 안쪽 지역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138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78 제주 지역에서의 학살]은 규모와 잔혹성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라도에서의 학살&lt;br /&gt;
1950년 7월 중순에 전라남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다. &amp;lt;br/&amp;gt; &lt;br /&gt;
경찰은 후퇴하기 전 해남 각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고, 어디론가 끌고 가버렸다고 한다.&amp;lt;br/&amp;gt;&lt;br /&gt;
당시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끌려간 후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고 하며, 진도 근처의 무인도에서 이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전라도의 피해] &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경상도에서의 학살&lt;br /&gt;
경상도는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계속해서 행정권을 유지했으며 인민군에게 가장 늦게 점령된 지역인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amp;lt;br/&amp;gt;&lt;br /&gt;
경북에서는 대구 가창골 일대에서 수천 명이 학살 당하고, 경산 지역은 코발트 광산에 약 3천 5백 명을 모아두고 코발트 광산 내에서 집단 학살한 뒤에 아예 콘크리트로 막아 사건 은폐까지 했다. &lt;br /&gt;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amp;lt;br/&amp;gt;&lt;br /&gt;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경남 마산, 진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 총으로 학살한 다음 학살당한 이들 손과 발을 묶어서 바다에 수장시켰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amp;lt;br/&amp;gt;&lt;br /&gt;
당시 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심도 앞바다에서 집단으로 총살되거나 수장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amp;lt;br/&amp;gt;&lt;br /&gt;
경남 남해군에서는 강진만 앞바다에 30여 명을 선상 위에서 총살하여 바다에 빠뜨렸는데, 일부 희생자는 파도에 떠밀려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부산의 경우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학살 당했다.&amp;lt;br/&amp;gt;&lt;br /&gt;
경남 마산의 여양리에 위치한 골짜기 도둑골에도 수백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키겠단 목표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는데 당시 조직을 키운다는 이유로 사상과 무관한 국민들도 비료와 식료를 나눠 준다며 가입을 시켰다.&amp;lt;br/&amp;gt;&lt;br /&gt;
때문에 명단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amp;lt;br/&amp;gt;&lt;br /&gt;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좌익 사상을 가진 적이 있다며 언제든 인민군과 연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경상도의 피해]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보도연맹원들의 무고에 대한 자료'''==&lt;br /&gt;
정부는 보도연맹이 북한측에 협조할까봐 걱정하여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했지만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원 대부분은 정부의 지시에 잘 따랐다. &amp;lt;br/&amp;gt;&lt;br /&gt;
오제도와 [https://namu.wiki/w/%EC%A0%95%ED%9D%AC%ED%83%9D 정희택]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철수하기까지 각 구(區) 보도연맹 지부를 돌아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하였는데, 서울 지역 보도연맹원은 개전 초기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 구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amp;lt;br/&amp;gt; &lt;br /&gt;
이후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도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인민군에 협력했지만 남은 인원들은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려 했다는 기록과 증언도 있다.&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던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하였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 -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반공활동]&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amp;quot;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각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강 이남 지역에서 대채로 보도연맹원 등 좌익들이 소요나 무장폭동 등과 같은 집단적인 행위를 야기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서울 함락 전야에는 일부 소요가 있었긴 있었다).'''''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반공활동]&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은폐 정황'''==&lt;br /&gt;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 여론이 들끓자, 대한민국 제4대 국회에서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해 가장 피해가 큰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등의 학살 현장을 방문해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정부의 태도는 싹 바뀌었다. 군부세력은 '소급법'(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하에 유족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처벌했다. 또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을 모두 소각해 진상을 철저히 은폐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철저하게 금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유가족들에 대한 대우&lt;br /&gt;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희생자 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였고, 이후 정부는 이 자료를 관련자 신원조회에 활용하였다. 군사독재정권 역시 유족들을 항시 감시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오랫동안 유족들을 옥죄었다. 이처럼 정보기관은 학살 희생자와 유족들의 정보를 보관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권침해를 해왔다. 연좌제는 유족들까지 피해자로 만들었고, 그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 자연스럽게 각종 불이익은 유족들을 경제적 곤궁으로 몰아넣었다. 국가기관의 보도연맹원과 그 유가족에 대한 관리는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특히 1960년 5.16 군사정부는 유족회 활동을 금지시키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유족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주었다.&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진상조사'''==&lt;br /&gt;
이 사건은 결국 군사정부가 막을 내린 1990년대 들어서야 제대로 조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간단체에 의한 유해발굴 정도였지만,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었고 2007년 5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기며 국가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들을 통해 2007년 5월부터 시작된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로 충북 청주시에서 110여 명의 민간인 유해들이 발굴되었고 이 가운데 10대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유해들도 여럿 발굴되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3년 동안의 조사 결과 확인된 것만 해도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0년 즈음에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index.html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밝힌 사망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lt;br /&gt;
이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경기·인천 21곳, 강원 1곳, 충북 19곳, 충남 9곳, 경북 28곳, 경남 41곳, 전남 27곳, 전북 6곳, 제주 2곳 등 모두 168곳에 민간인 학살자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사료 조사, 주민 증언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해 우선 발굴 대상지를 39곳으로 압축하였다. 하지만 실제 발굴이 이뤄진 것은 2007~2009년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에 그쳤고 발굴을 통해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최종적으로 2010년 12월 31일 위원회 해산을 끝으로 매장 추정지로 밝힌 168곳 중 7.7%, 우선 발굴 대상지 39곳 중 33%만 발굴이 이뤄진 채 모든 활동이 끝났다. 현재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인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는 4,934명이다. 하지만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군사정권이 대대적으로 관련 기록을 소각시키며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밝혔다.&lt;br /&gt;
&lt;br /&gt;
*국가를 향한 손해 배상 소송&lt;br /&gt;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mp;quot;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amp;quot;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825_0011391763&amp;amp;cID=10201&amp;amp;pID=10200 관련기사])&lt;br /&gt;
유족들의 국가를 상대로한 소송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마산지역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 역시 2019년, 5년만에 재심 판결이 내려지며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88294 관련기사])&lt;br /&gt;
&lt;br /&gt;
*국가차원에서의 사과&lt;br /&gt;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평가'''==&lt;br /&gt;
일부 극우파단체는 ‘위장 전향 좌파세력들이 유사시에 보도연맹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적 활동을 취하는 것이 전쟁 시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보도연맹원 학살을 '반정부활동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사건'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이념적, 사회적 이유라도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보도연맹원들이 반정부 활동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는 그들을 재판도 없이 처벌 할 수 없다. 결국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고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한 반헌법적, 비인간적 학살이다.&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당시 사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파일:보도연맹2.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매체 속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44&amp;quot; height=&amp;quot;306&amp;quot; src=&amp;quot;https://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768973F8EF41979215E59D6A553FBF3DD2BF&amp;amp;outKey=V123510351e7336ee9df265572051454162fbddd5cf9e94e544bb65572051454162fb&amp;quot; frameborder=&amp;quot;no&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title=&amp;quot;NaverVideo&amp;quot; allow=&amp;quot;autoplay; gyroscope; accelerometer; encrypted-media&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극 중 주인공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전쟁 중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리쌀을 준다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반공청년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
				<updated>2019-06-25T14:56: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이에 대한 사후 조치'''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고 현재 이 사건들에 대한 대우와 보상은 어떠한지 알아보아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군대||[[국군]], [[미군]]&lt;br /&gt;
|-&lt;br /&gt;
|법원||[[대법원]]&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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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학살 이후 사후 조치'''==&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mp;quot;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amp;quot;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별다른 보상을 찾을 수 없다.&lt;br /&gt;
*위의 사건들은 모두 [[6.25 전쟁]]중 국군/미군/정부 즉 우리측의 군사 세력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각 사건은 적게는 수 백명 많게는 수 천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정부는 그 동안 위의 사건들을 무시하며 진상 조사는 커녕 유족들의 입을 막고 불이익을 주는 등 어떻게든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덮으려하였다. 물론1990~2000년대 들어서 각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시민들의 관심 또한 커졌으며 정부 역시 과거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소극적이며 오히려 피해 유족들이 진상 규명을 위해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위의 사건들은 [6.25 전쟁]당시 일어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다. 이렇게 큰 사건들에도 정부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더 작은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의 경우 진상규명이나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에 더 관심을 가지고 피해자를 위한 노력에 더욱 힘써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
				<updated>2019-06-25T14:55: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이에 대한 사후 조치'''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고 현재 이 사건들에 대한 대우와 보상은 어떠한지 알아보아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군대||[[국군]], [[미군]]&lt;br /&gt;
|-&lt;br /&gt;
|법원||[[대법원]]&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학살 이후 사후 조치'''==&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mp;quot;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amp;quot;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별다른 보상을 찾을 수 없다.&lt;br /&gt;
*위의 사건들은 모두 [[6.25 전쟁]]중 국군/미군/정부 즉 우리측의 군사 세력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각 사건은 적게는 수 백명 많게는 수 천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정부는 그 동안 위의 사건들을 무시하며 진상 조사는 커녕 유족들의 입을 막고 불이익을 주는 등 어떻게든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덮으려하였다. 물론1990~2000년대 들어서 각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시민들의 관심 또한 커졌으며 정부 역시 과거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소극적이며 오히려 피해 유족들이 진상 규명을 위해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위의 사건들은 [6.25 전쟁]당시 일어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다. 이렇게 큰 사건들에도 정부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더 작은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의 경우 진상규명이나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에 더 관심을 가지고 피해자를 위한 노력에 더욱 힘써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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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다운 콘텐츠 제작노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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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lt;br /&gt;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amp;lt;br/&amp;gt;&lt;br /&gt;
6.25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lt;br /&gt;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lt;br /&gt;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lt;br /&gt;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lt;br /&gt;
이 문서에서는 6.25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lt;br /&gt;
&lt;br /&gt;
=='''스토리 기사'''==&lt;br /&gt;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lt;br /&gt;
=='''주요노드'''==&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lt;br /&gt;
==='''군대'''===&lt;br /&gt;
*국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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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청야&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이야기 관계망==&lt;br /&gt;
[[파일:625관계망.jpg|섬네일|관계망1]]&lt;br /&gt;
&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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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홍길동.l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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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Project&lt;br /&gt;
h1 나의 첫번째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lt;br /&gt;
#Class&lt;br /&gt;
인물	blue	box&lt;br /&gt;
사건	red	star&lt;br /&gt;
국가	orange	box&lt;br /&gt;
영화	green	ellipse&lt;br /&gt;
군대	black	triangle&lt;br /&gt;
사상	yellow	circle&lt;br /&gt;
정권	pink	square&lt;br /&gt;
법원	yellow	box&lt;br /&gt;
&lt;br /&gt;
#Relation&lt;br /&gt;
genocide		학살사건이다&lt;br /&gt;
massacre_civilians 	학살하다&lt;br /&gt;
ignore	묵살하다&lt;br /&gt;
apology	사과하다&lt;br /&gt;
material	소재이다&lt;br /&gt;
investigation	조사하다&lt;br /&gt;
defendant	피고이다&lt;br /&gt;
misunderstanding	오해받다&lt;br /&gt;
conceal	은폐하다&lt;br /&gt;
harm_damage	피해받다&lt;br /&gt;
order	명령하다&lt;br /&gt;
violation_of_human_rights	인권침해&lt;br /&gt;
explode	폭파하다&lt;br /&gt;
lose_a_case	패소하다&lt;br /&gt;
win_a_case	승소하다&lt;br /&gt;
&lt;br /&gt;
#Nodes&lt;br /&gt;
이승만	인물	이승만	null	&lt;br /&gt;
노무현	인물	노무현	null										&lt;br /&gt;
청야	영화	청야	null&lt;br /&gt;
태극기휘날리며	영화	태극기휘날리며	null&lt;br /&gt;
작은연못	영화	작은연못	null&lt;br /&gt;
웰컴투동막골	영화	웰컴투동막골	null&lt;br /&gt;
대한민국	국가	대한민국	null&lt;br /&gt;
미국	국가	미국	null&lt;br /&gt;
대법원	법원	대법원	null&lt;br /&gt;
미군	군대	미군	null&lt;br /&gt;
국군	군대	국군	null&lt;br /&gt;
5.16군사정권	정권	5.16군사정권	null&lt;br /&gt;
빨갱이	사상	빨갱이	null&lt;br /&gt;
보도연맹학살사건	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null&lt;br /&gt;
노근리양민학살사건	사건	노근리양민학살사건	null&lt;br /&gt;
거창양민학살사건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null&lt;br /&gt;
한강인도교폭파사건	사건	한강인도교폭파사건	null&lt;br /&gt;
6.25민간인학살사건	사건	사건	6.25민간인학살사건		null&lt;br /&gt;
&lt;br /&gt;
#Links&lt;br /&gt;
6.25민간인학살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genocide&lt;br /&gt;
6.25민간인학살사건		노근리양민학살사건	genocide&lt;br /&gt;
6.25민간인학살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genocide&lt;br /&gt;
6.25민간인학살사건		한강인도교폭파사건	genocide&lt;br /&gt;
보도연맹학살사건	태극기휘날리며	material&lt;br /&gt;
보도연맹학살사건	빨갱이	misunderstanding&lt;br /&gt;
노무현	보도연맹학살사건	apology&lt;br /&gt;
5.16군사정권	보도연맹학살사건	ignore&lt;br /&gt;
국군	보도연맹학살사건	massacre_civilians&lt;br /&gt;
국군	한강인도교폭파사건	explode&lt;br /&gt;
한강인도교폭파사건	웰컴투동막골	material&lt;br /&gt;
이승만	보도연맹학살사건	order&lt;br /&gt;
이승만	보도연맹학살사건	violation_of_human_rights&lt;br /&gt;
대법원	보도연맹학살사건	win_a_case&lt;br /&gt;
대법원	거창양민학살사건	lose_a_case&lt;br /&gt;
이승만	한강인도교폭파사건	order&lt;br /&gt;
대한민국	노근리양민학살사건	investigation&lt;br /&gt;
미국	노근리양민학살사건	investigation&lt;br /&gt;
미군	노근리양민학살사건	massacre_civilians&lt;br /&gt;
노근리양민학살사건	작은연못	material&lt;br /&gt;
거창양민학살사건	청야	material&lt;br /&gt;
거창양민학살사건	빨갱이	misunderstanding&lt;br /&gt;
이승만	거창양민학살사건	conceal&lt;br /&gt;
대한민국	거창양민학살사건	defendant&lt;br /&gt;
국군	거창양민학살사건	massacre_civilians&lt;br /&gt;
5.16군사정권	거창양민학살사건	ignore&lt;br /&gt;
#End&lt;br /&gt;
&amp;lt;/pre&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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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이에 대한 사후 조치'''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고 현재 이 사건들에 대한 대우와 보상은 어떠한지 알아보아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학살 이후 사후 조치'''==&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mp;quot;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amp;quot;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별다른 보상을 찾을 수 없다.&lt;br /&gt;
*위의 사건들은 모두 [[6.25 전쟁]]중 국군/미군/정부 즉 우리측의 군사 세력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각 사건은 적게는 수 백명 많게는 수 천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정부는 그 동안 위의 사건들을 무시하며 진상 조사는 커녕 유족들의 입을 막고 불이익을 주는 등 어떻게든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덮으려하였다. 물론1990~2000년대 들어서 각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시민들의 관심 또한 커졌으며 정부 역시 과거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소극적이며 오히려 피해 유족들이 진상 규명을 위해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위의 사건들은 [6.25 전쟁]당시 일어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다. 이렇게 큰 사건들에도 정부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더 작은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의 경우 진상규명이나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에 더 관심을 가지고 피해자를 위한 노력에 더욱 힘써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
				<updated>2019-06-25T14:38: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이에 대한 사후 조치'''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고 현재 이 사건들에 대한 대우와 보상은 어떠한지 알아보아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학살 이후 사후 조치'''==&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mp;quot;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amp;quot;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별다른 보상을 찾을 수 없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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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4:30: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고 현재 이 사건들에 대한 대우와 보상은 어떠한지 알아보아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
				<updated>2019-06-25T14:04: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증언'''==&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amp;quot;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amp;quot;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amp;quot;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amp;lt;ref&amp;gt;[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 한계레 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b8F9ahXlWx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노근리 위치'''==&lt;br /&gt;
&amp;lt;googlemap width=&amp;quot;800&amp;quot; height=&amp;quot;800&amp;quot; lat=&amp;quot;36.215192&amp;quot; lon=&amp;quot;127.880292&amp;quot; type=&amp;quot;normal&amp;quot;&lt;br /&gt;
zoom=&amp;quot;8&amp;quot; icon=&amp;quot;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amp;quot;&amp;gt;&lt;br /&gt;
36.215222, 127.880292 노근리 쌍굴다리&lt;br /&gt;
&amp;lt;/googlemap&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보도연맹 학살사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EC%82%AC%EA%B1%B4"/>
				<updated>2019-06-25T13:59: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35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 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보도연맹사건 정의]&amp;lt;/ref&amp;gt; 이 사건을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학살 과정'''==&lt;br /&gt;
*전쟁 발발 직후 정부의 동향&lt;br /&gt;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됐다.&amp;lt;br/&amp;gt;&lt;br /&gt;
따라서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amp;lt;br/&amp;gt;&lt;br /&gt;
한국 전쟁 중에서 수도 서울을 탈출하여 부산으로 피난 갔던 [[이승만]] 대통령은&amp;lt;br/&amp;gt;&lt;br /&gt;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는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는 아직 확보하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게 된다.&amp;lt;br/&amp;gt;&lt;br /&gt;
이승만이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학살사건 과정]&amp;lt;/ref&amp;gt;&lt;br /&gt;
상부에서 처형 명령이 내려오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구금된 인원 중 일부는 교도소로 보내고, 일부 인원은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하기도 했다.&amp;lt;br/&amp;gt;&lt;br /&gt;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연맹원은 군경이 유치장이나창고에 가두었다가 차례로 트럭에 실어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lt;br /&gt;
&lt;br /&gt;
*지역별 학살 현황&lt;br /&gt;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후퇴하던 6월 하순부터 후퇴와 함께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amp;lt;br/&amp;gt;&lt;br /&gt;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시작된 학살은 이후에는 삼남 지역으로 내려갔다.&amp;lt;br/&amp;gt;&lt;br /&gt;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점령할 때까지 상대적으로 시간이 걸렸던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에서는 7월 경에 대량 학살이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대전,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지역은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형무소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amp;lt;br/&amp;gt;&lt;br /&gt;
특히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낙동강 방어선 안쪽 지역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138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78 제주 지역에서의 학살]은 규모와 잔혹성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라도에서의 학살&lt;br /&gt;
1950년 7월 중순에 전라남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다. &amp;lt;br/&amp;gt; &lt;br /&gt;
경찰은 후퇴하기 전 해남 각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고, 어디론가 끌고 가버렸다고 한다.&amp;lt;br/&amp;gt;&lt;br /&gt;
당시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끌려간 후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고 하며, 진도 근처의 무인도에서 이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전라도의 피해] &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경상도에서의 학살&lt;br /&gt;
경상도는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계속해서 행정권을 유지했으며 인민군에게 가장 늦게 점령된 지역인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amp;lt;br/&amp;gt;&lt;br /&gt;
경북에서는 대구 가창골 일대에서 수천 명이 학살 당하고, 경산 지역은 코발트 광산에 약 3천 5백 명을 모아두고 코발트 광산 내에서 집단 학살한 뒤에 아예 콘크리트로 막아 사건 은폐까지 했다. &lt;br /&gt;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amp;lt;br/&amp;gt;&lt;br /&gt;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경남 마산, 진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 총으로 학살한 다음 학살당한 이들 손과 발을 묶어서 바다에 수장시켰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amp;lt;br/&amp;gt;&lt;br /&gt;
당시 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심도 앞바다에서 집단으로 총살되거나 수장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amp;lt;br/&amp;gt;&lt;br /&gt;
경남 남해군에서는 강진만 앞바다에 30여 명을 선상 위에서 총살하여 바다에 빠뜨렸는데, 일부 희생자는 파도에 떠밀려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부산의 경우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학살 당했다.&amp;lt;br/&amp;gt;&lt;br /&gt;
경남 마산의 여양리에 위치한 골짜기 도둑골에도 수백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키겠단 목표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는데 당시 조직을 키운다는 이유로 사상과 무관한 국민들도 비료와 식료를 나눠 준다며 가입을 시켰다.&amp;lt;br/&amp;gt;&lt;br /&gt;
때문에 명단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amp;lt;br/&amp;gt;&lt;br /&gt;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좌익 사상을 가진 적이 있다며 언제든 인민군과 연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경상도의 피해]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보도연맹원들의 무고에 대한 자료'''==&lt;br /&gt;
정부는 보도연맹이 북한측에 협조할까봐 걱정하여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했지만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원 대부분은 정부의 지시에 잘 따랐다. &amp;lt;br/&amp;gt;&lt;br /&gt;
오제도와 [https://namu.wiki/w/%EC%A0%95%ED%9D%AC%ED%83%9D 정희택]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철수하기까지 각 구(區) 보도연맹 지부를 돌아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하였는데, 서울 지역 보도연맹원은 개전 초기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 구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amp;lt;br/&amp;gt; &lt;br /&gt;
이후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도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인민군에 협력했지만 남은 인원들은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려 했다는 기록과 증언도 있다.&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던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하였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 -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반공활동]&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amp;quot;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각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강 이남 지역에서 대채로 보도연맹원 등 좌익들이 소요나 무장폭동 등과 같은 집단적인 행위를 야기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서울 함락 전야에는 일부 소요가 있었긴 있었다).'''''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반공활동]&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은폐 정황'''==&lt;br /&gt;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 여론이 들끓자, 대한민국 제4대 국회에서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해 가장 피해가 큰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등의 학살 현장을 방문해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정부의 태도는 싹 바뀌었다. 군부세력은 '소급법'(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하에 유족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처벌했다. 또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을 모두 소각해 진상을 철저히 은폐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철저하게 금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유가족들에 대한 대우&lt;br /&gt;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희생자 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였고, 이후 정부는 이 자료를 관련자 신원조회에 활용하였다. 군사독재정권 역시 유족들을 항시 감시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오랫동안 유족들을 옥죄었다. 이처럼 정보기관은 학살 희생자와 유족들의 정보를 보관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권침해를 해왔다. 연좌제는 유족들까지 피해자로 만들었고, 그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 자연스럽게 각종 불이익은 유족들을 경제적 곤궁으로 몰아넣었다. 국가기관의 보도연맹원과 그 유가족에 대한 관리는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특히 1960년 5.16 군사정부는 유족회 활동을 금지시키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유족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주었다.&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진상조사'''==&lt;br /&gt;
이 사건은 결국 군사정부가 막을 내린 1990년대 들어서야 제대로 조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간단체에 의한 유해발굴 정도였지만,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었고 2007년 5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기며 국가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들을 통해 2007년 5월부터 시작된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로 충북 청주시에서 110여 명의 민간인 유해들이 발굴되었고 이 가운데 10대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유해들도 여럿 발굴되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3년 동안의 조사 결과 확인된 것만 해도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0년 즈음에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index.html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밝힌 사망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lt;br /&gt;
이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경기·인천 21곳, 강원 1곳, 충북 19곳, 충남 9곳, 경북 28곳, 경남 41곳, 전남 27곳, 전북 6곳, 제주 2곳 등 모두 168곳에 민간인 학살자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사료 조사, 주민 증언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해 우선 발굴 대상지를 39곳으로 압축하였다. 하지만 실제 발굴이 이뤄진 것은 2007~2009년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에 그쳤고 발굴을 통해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최종적으로 2010년 12월 31일 위원회 해산을 끝으로 매장 추정지로 밝힌 168곳 중 7.7%, 우선 발굴 대상지 39곳 중 33%만 발굴이 이뤄진 채 모든 활동이 끝났다. 현재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인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는 4,934명이다. 하지만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군사정권이 대대적으로 관련 기록을 소각시키며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밝혔다.&lt;br /&gt;
&lt;br /&gt;
*국가를 향한 손해 배상 소송&lt;br /&gt;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mp;quot;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amp;quot;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825_0011391763&amp;amp;cID=10201&amp;amp;pID=10200 관련기사])&lt;br /&gt;
유족들의 국가를 상대로한 소송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마산지역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 역시 2019년, 5년만에 재심 판결이 내려지며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88294 관련기사])&lt;br /&gt;
&lt;br /&gt;
*국가차원에서의 사과&lt;br /&gt;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평가'''==&lt;br /&gt;
일부 극우파단체는 ‘위장 전향 좌파세력들이 유사시에 보도연맹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적 활동을 취하는 것이 전쟁 시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보도연맹원 학살을 '반정부활동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사건'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이념적, 사회적 이유라도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보도연맹원들이 반정부 활동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는 그들을 재판도 없이 처벌 할 수 없다. 결국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고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한 반헌법적, 비인간적 학살이다.&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당시 사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파일:보도연맹2.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매체 속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44&amp;quot; height=&amp;quot;306&amp;quot; src=&amp;quot;https://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768973F8EF41979215E59D6A553FBF3DD2BF&amp;amp;outKey=V123510351e7336ee9df265572051454162fbddd5cf9e94e544bb65572051454162fb&amp;quot; frameborder=&amp;quot;no&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title=&amp;quot;NaverVideo&amp;quot; allow=&amp;quot;autoplay; gyroscope; accelerometer; encrypted-media&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극 중 주인공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전쟁 중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리쌀을 준다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반공청년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보도연맹 학살사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EC%82%AC%EA%B1%B4"/>
				<updated>2019-06-25T13:58: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35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 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보도연맹사건 정의]&amp;lt;/ref&amp;gt; 이 사건을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학살 과정'''==&lt;br /&gt;
*전쟁 발발 직후 정부의 동향&lt;br /&gt;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됐다.&amp;lt;br/&amp;gt;&lt;br /&gt;
따라서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amp;lt;br/&amp;gt;&lt;br /&gt;
한국 전쟁 중에서 수도 서울을 탈출하여 부산으로 피난 갔던 [[이승만]] 대통령은&amp;lt;br/&amp;gt;&lt;br /&gt;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는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는 아직 확보하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게 된다.&amp;lt;br/&amp;gt;&lt;br /&gt;
이승만이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학살사건 과정]&amp;lt;/ref&amp;gt;&lt;br /&gt;
상부에서 처형 명령이 내려오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구금된 인원 중 일부는 교도소로 보내고, 일부 인원은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하기도 했다.&amp;lt;br/&amp;gt;&lt;br /&gt;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연맹원은 군경이 유치장이나창고에 가두었다가 차례로 트럭에 실어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lt;br /&gt;
&lt;br /&gt;
*지역별 학살 현황&lt;br /&gt;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후퇴하던 6월 하순부터 후퇴와 함께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amp;lt;br/&amp;gt;&lt;br /&gt;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시작된 학살은 이후에는 삼남 지역으로 내려갔다.&amp;lt;br/&amp;gt;&lt;br /&gt;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점령할 때까지 상대적으로 시간이 걸렸던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에서는 7월 경에 대량 학살이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대전,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지역은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형무소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amp;lt;br/&amp;gt;&lt;br /&gt;
특히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낙동강 방어선 안쪽 지역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138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78 제주 지역에서의 학살]은 규모와 잔혹성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라도에서의 학살&lt;br /&gt;
1950년 7월 중순에 전라남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다. &amp;lt;br/&amp;gt; &lt;br /&gt;
경찰은 후퇴하기 전 해남 각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고, 어디론가 끌고 가버렸다고 한다.&amp;lt;br/&amp;gt;&lt;br /&gt;
당시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끌려간 후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고 하며, 진도 근처의 무인도에서 이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전라도의 피해] &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경상도에서의 학살&lt;br /&gt;
경상도는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계속해서 행정권을 유지했으며 인민군에게 가장 늦게 점령된 지역인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amp;lt;br/&amp;gt;&lt;br /&gt;
경북에서는 대구 가창골 일대에서 수천 명이 학살 당하고, 경산 지역은 코발트 광산에 약 3천 5백 명을 모아두고 코발트 광산 내에서 집단 학살한 뒤에 아예 콘크리트로 막아 사건 은폐까지 했다. &lt;br /&gt;
이승만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amp;lt;br/&amp;gt;&lt;br /&gt;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경남 마산, 진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 총으로 학살한 다음 학살당한 이들 손과 발을 묶어서 바다에 수장시켰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amp;lt;br/&amp;gt;&lt;br /&gt;
당시 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심도 앞바다에서 집단으로 총살되거나 수장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amp;lt;br/&amp;gt;&lt;br /&gt;
경남 남해군에서는 강진만 앞바다에 30여 명을 선상 위에서 총살하여 바다에 빠뜨렸는데, 일부 희생자는 파도에 떠밀려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부산의 경우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학살 당했다.&amp;lt;br/&amp;gt;&lt;br /&gt;
경남 마산의 여양리에 위치한 골짜기 도둑골에도 수백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키겠단 목표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는데 당시 조직을 키운다는 이유로 사상과 무관한 국민들도 비료와 식료를 나눠 준다며 가입을 시켰다.&amp;lt;br/&amp;gt;&lt;br /&gt;
때문에 명단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amp;lt;br/&amp;gt;&lt;br /&gt;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좌익 사상을 가진 적이 있다며 언제든 인민군과 연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경상도의 피해]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보도연맹원들의 무고에 대한 자료'''==&lt;br /&gt;
정부는 보도연맹이 북한측에 협조할까봐 걱정하여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했지만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원 대부분은 정부의 지시에 잘 따랐다. &amp;lt;br/&amp;gt;&lt;br /&gt;
오제도와 [https://namu.wiki/w/%EC%A0%95%ED%9D%AC%ED%83%9D 정희택]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철수하기까지 각 구(區) 보도연맹 지부를 돌아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하였는데, 서울 지역 보도연맹원은 개전 초기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 구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amp;lt;br/&amp;gt; &lt;br /&gt;
이후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도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인민군에 협력했지만 남은 인원들은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려 했다는 기록과 증언도 있다.&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던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하였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 -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반공활동]&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amp;quot;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각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강 이남 지역에서 대채로 보도연맹원 등 좌익들이 소요나 무장폭동 등과 같은 집단적인 행위를 야기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서울 함락 전야에는 일부 소요가 있었긴 있었다).'''''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amp;lt;ref&amp;gt;[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 보도연맹 반공활동]&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은폐 정황'''==&lt;br /&gt;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 여론이 들끓자, 대한민국 제4대 국회에서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해 가장 피해가 큰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등의 학살 현장을 방문해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정부의 태도는 싹 바뀌었다. 군부세력은 '소급법'(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하에 유족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처벌했다. 또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을 모두 소각해 진상을 철저히 은폐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철저하게 금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유가족들에 대한 대우&lt;br /&gt;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희생자 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였고, 이후 정부는 이 자료를 관련자 신원조회에 활용하였다. 군사독재정권 역시 유족들을 항시 감시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오랫동안 유족들을 옥죄었다. 이처럼 정보기관은 학살 희생자와 유족들의 정보를 보관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권침해를 해왔다. 연좌제는 유족들까지 피해자로 만들었고, 그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 자연스럽게 각종 불이익은 유족들을 경제적 곤궁으로 몰아넣었다. 국가기관의 보도연맹원과 그 유가족에 대한 관리는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특히 1960년 5.16 군사정부는 유족회 활동을 금지시키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유족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주었다.&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진상조사'''==&lt;br /&gt;
이 사건은 결국 군사정부가 막을 내린 1990년대 들어서야 제대로 조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간단체에 의한 유해발굴 정도였지만,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었고 2007년 5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기며 국가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들을 통해 2007년 5월부터 시작된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로 충북 청주시에서 110여 명의 민간인 유해들이 발굴되었고 이 가운데 10대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유해들도 여럿 발굴되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3년 동안의 조사 결과 확인된 것만 해도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0년 즈음에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index.html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밝힌 사망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lt;br /&gt;
이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경기·인천 21곳, 강원 1곳, 충북 19곳, 충남 9곳, 경북 28곳, 경남 41곳, 전남 27곳, 전북 6곳, 제주 2곳 등 모두 168곳에 민간인 학살자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사료 조사, 주민 증언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해 우선 발굴 대상지를 39곳으로 압축하였다. 하지만 실제 발굴이 이뤄진 것은 2007~2009년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에 그쳤고 발굴을 통해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최종적으로 2010년 12월 31일 위원회 해산을 끝으로 매장 추정지로 밝힌 168곳 중 7.7%, 우선 발굴 대상지 39곳 중 33%만 발굴이 이뤄진 채 모든 활동이 끝났다. 현재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인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는 4,934명이다. 하지만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군사정권이 대대적으로 관련 기록을 소각시키며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밝혔다.&lt;br /&gt;
&lt;br /&gt;
*국가를 향한 손해 배상 소송&lt;br /&gt;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mp;quot;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amp;quot;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825_0011391763&amp;amp;cID=10201&amp;amp;pID=10200 관련기사])&lt;br /&gt;
유족들의 국가를 상대로한 소송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마산지역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 역시 2019년, 5년만에 재심 판결이 내려지며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88294 관련기사])&lt;br /&gt;
&lt;br /&gt;
*국가차원에서의 사과&lt;br /&gt;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 평가'''==&lt;br /&gt;
일부 극우파단체는 ‘위장 전향 좌파세력들이 유사시에 보도연맹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적 활동을 취하는 것이 전쟁 시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보도연맹원 학살을 '반정부활동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사건'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이념적, 사회적 이유라도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보도연맹원들이 반정부 활동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는 그들을 재판도 없이 처벌 할 수 없다. 결국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고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한 반헌법적, 비인간적 학살이다.&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당시 사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파일:보도연맹2.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매체 속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44&amp;quot; height=&amp;quot;306&amp;quot; src=&amp;quot;https://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768973F8EF41979215E59D6A553FBF3DD2BF&amp;amp;outKey=V123510351e7336ee9df265572051454162fbddd5cf9e94e544bb65572051454162fb&amp;quot; frameborder=&amp;quot;no&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title=&amp;quot;NaverVideo&amp;quot; allow=&amp;quot;autoplay; gyroscope; accelerometer; encrypted-media&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극 중 주인공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전쟁 중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리쌀을 준다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반공청년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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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54: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 노드 리스트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id>
		<title>6.25 전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
				<updated>2019-06-25T13:54: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lt;br /&gt;
당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9년 3월 17일 소련과 북한은 조소군사비밀협정, 그 다음 날인 3월 18일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38선에 북한군 10개 사단 13만명이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lt;br /&gt;
&lt;br /&gt;
결국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기에 미국의 군사체계를 따르는 우리 군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후 전세가 밀릴 것이라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2시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였고 방송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28일 0시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 전투를 소리를 듣고 후퇴를 시작하였다.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이라 일단 후퇴해서 한강이남이나 혹은 더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한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방송이 시작된지 5시간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이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폭사 또는 익사하였다. 이 사건은 한 국가의 대표가 홀로 도망쳐놓고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여 국민을 기만하였고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던, 당시 정권의 큰 과오로 꼽힌다.&lt;br /&gt;
&lt;br /&gt;
결국 6월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전쟁 시작 3일만에 적에게 수도를 빼앗긴 것이다. 이른 한강대교 폭파로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은 국군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낙동강 일대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 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당시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당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여러 후보지가 물색 되었지만 결국 여러 반대를 물리치고 적군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인천이 상륙지로 최종 결정되었다. 맥아더의 예상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북진을 하여 북한에게 남은 영토는 거의 없었다. 이 때 국군과 UN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10월 중순 이후부터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사람수만 많을 뿐 아니라 많은 병사가 중일전쟁 참전 경력을 가지고 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 UN군은 금강까지 빼앗길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왔던 중국이 한 달간 진격을 멈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공측의 보급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이후에는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고 전선은 처음 전쟁을 시작한 38선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고지전만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며 한국전쟁은 끝이났다.&lt;br /&gt;
&lt;br /&gt;
=='''결과'''==&lt;br /&gt;
전쟁 기간 동안 국군의 피해자는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해 약 62만명이며 UN군 역시 약 15만명의 피해를 입었다.&amp;lt;br/&amp;gt;&lt;br /&gt;
민간인 피해 또한 엄청났다. 남한 측 민간인 사망자는 24만 5천여명, 학살된 민간인은 약 13만명, 납치 약 8만 5천명, 실종 30만명으로 총 약 100만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amp;lt;br/&amp;gt;&lt;br /&gt;
또한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 수가 1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인구의 절반 정도이다.&amp;lt;br/&amp;gt;&lt;br /&gt;
전쟁은 사회적, 경제적 피해도 가져왔다. 남한의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9%가 파괴되었고 북한 역시 공업의 60%가 파괴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개인 가옥을 포함해 도로, 철도, 항만, 교량 등 여러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사회, 경제 체제의 기반과 국민의 생활터전이 황폐화되었다.&lt;br /&gt;
&lt;br /&gt;
=='''관련 동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PYY7pDNExG0&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311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78 두산백과-6.25전쟁]&lt;br /&gt;
*[https://namu.wiki/w/6.25%20%EC%A0%84%EC%9F%81?from=6.25#s-3.4 나무위키-6.25전쟁]&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829973&amp;amp;cid=62011&amp;amp;categoryId=62012 국가기록원 - 6.25 전쟁 피해 현황 통계]&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id>
		<title>6.25 전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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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46: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lt;br /&gt;
당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9년 3월 17일 소련과 북한은 조소군사비밀협정, 그 다음 날인 3월 18일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38선에 북한군 10개 사단 13만명이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lt;br /&gt;
&lt;br /&gt;
결국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기에 미국의 군사체계를 따르는 우리 군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후 전세가 밀릴 것이라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2시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였고 방송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28일 0시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 전투를 소리를 듣고 후퇴를 시작하였다.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이라 일단 후퇴해서 한강이남이나 혹은 더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한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방송이 시작된지 5시간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이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폭사 또는 익사하였다. 이 사건은 한 국가의 대표가 홀로 도망쳐놓고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여 국민을 기만하였고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던, 당시 정권의 큰 과오로 꼽힌다.&lt;br /&gt;
&lt;br /&gt;
결국 6월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전쟁 시작 3일만에 적에게 수도를 빼앗긴 것이다. 이른 한강대교 폭파로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은 국군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낙동강 일대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 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당시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당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여러 후보지가 물색 되었지만 결국 여러 반대를 물리치고 적군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인천이 상륙지로 최종 결정되었다. 맥아더의 예상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북진을 하여 북한에게 남은 영토는 거의 없었다. 이 때 국군과 UN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10월 중순 이후부터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사람수만 많을 뿐 아니라 많은 병사가 중일전쟁 참전 경력을 가지고 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 UN군은 금강까지 빼앗길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왔던 중국이 한 달간 진격을 멈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공측의 보급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이후에는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고 전선은 처음 전쟁을 시작한 38선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고지전만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며 한국전쟁은 끝이났다.&lt;br /&gt;
&lt;br /&gt;
=='''결과'''==&lt;br /&gt;
전쟁 기간 동안 국군의 피해자는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해 약 62만명이며 UN군 역시 약 15만명의 피해를 입었다.&amp;lt;br/&amp;gt;&lt;br /&gt;
민간인 피해 또한 엄청났다. 남한 측 민간인 사망자는 24만 5천여명, 학살된 민간인은 약 13만명, 납치 약 8만 5천명, 실종 30만명으로 총 약 100만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amp;lt;br/&amp;gt;&lt;br /&gt;
또한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 수가 1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인구의 절반 정도이다.&amp;lt;br/&amp;gt;&lt;br /&gt;
전쟁은 사회적, 경제적 피해도 가져왔다. 남한의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9%가 파괴되었고 북한 역시 공업의 60%가 파괴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개인 가옥을 포함해 도로, 철도, 항만, 교량 등 여러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사회, 경제 체제의 기반과 국민의 생활터전이 황폐화되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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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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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새 문서: =='''정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lt;br /&gt;
당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9년 3월 17일 소련과 북한은 조소군사비밀협정, 그 다음 날인 3월 18일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38선에 북한군 10개 사단 13만명이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lt;br /&gt;
결국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기에 미국의 군사체계를 따르는 우리 군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후 전세가 밀릴 것이라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2시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였고 방송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28일 0시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 전투를 소리를 듣고 후퇴를 시작하였다.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이라 일단 후퇴해서 한강이남이나 혹은 더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한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방송이 시작된지 5시간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이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폭사 또는 익사하였다. 이 사건은 한 국가의 대표가 홀로 도망쳐놓고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여 국민을 기만하였고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던, 당시 정권의 큰 과오로 꼽힌다.&lt;br /&gt;
결국 6월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전쟁 시작 3일만에 적에게 수도를 빼앗긴 것이다. 이른 한강대교 폭파로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은 국군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낙동강 일대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 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당시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lt;br /&gt;
그러던 중 당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여러 후보지가 물색 되었지만 결국 여러 반대를 물리치고 적군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인천이 상륙지로 최종 결정되었다. 맥아더의 예상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북진을 하여 북한에게 남은 영토는 거의 없었다. 이 때 국군과 UN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lt;br /&gt;
하지만 10월 중순 이후부터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사람수만 많을 뿐 아니라 많은 병사가 중일전쟁 참전 경력을 가지고 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 UN군은 금강까지 빼앗길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왔던 중국이 한 달간 진격을 멈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공측의 보급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이후에는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고 전선은 처음 전쟁을 시작한 38선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고지전만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며 한국전쟁은 끝이났다.&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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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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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28: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
				<updated>2019-06-25T13:27: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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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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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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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24: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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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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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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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23: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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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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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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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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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국가'''====&lt;br /&gt;
*[[미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작은 연못]]&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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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장소'''====&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청야]]&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영화'''====&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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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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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19: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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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17: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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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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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한강인도교1.jpg||300px|thumb|center|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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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한강인도교1.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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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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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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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A%B1%B0%EC%B0%BD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거창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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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12: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과 경과'''==&lt;br /&gt;
*사건 과정&lt;br /&gt;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11사단장 최덕신이 휘하 부대에 보낸 작전이 이 사건의 원인이다. 이 작전은 자신의 진영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인적, 물적 자원을 모두 정리하여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더 나아가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본다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lt;br /&gt;
결국 국군은 1951년 2월 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2월 10일 대대는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대현리·와룡리·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 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서 학살했다. 군인들은 2월 11일 와룡리·대현리·중유리 일대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후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날 517명을 박산골에 끌고 가 총살했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이 학살사건은 산청군, 함양군, 함평군, 전라남도 나주시, 전라북도 고창군 등 11사단의 작전지역 곳곳에서 거창과 같은 양상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lt;br /&gt;
*사건 경과&lt;br /&gt;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 의원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회의를 비공개로 요청한 후 거창사건을 공개했고 긴급히 국회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거창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진상조사차 내려온 국회 조사단은 당시 지역 계엄사령관인 김종원에 의해 북한 인민 게릴라로 분장한 11사단 군인들의 습격을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국전쟁에 자국 병사들을 파견하고 있던 외국의 언론들이 앞다퉈 보도하면서 사건은 덮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국회에서 재조사를 결의하고 진상조사가 재개되었다. 국정조사를 방해한 총격전의 주체가 위장공비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결국 거창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과 조사방해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었고, 내무·법무·국방 3부 장관이 사임하고, 11사단장 최덕신은 직위 해제가, 9연대장 오익균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는 무기징역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에게는 3년 형이 선고되었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lt;br /&gt;
전쟁이 끝나고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된 시기에 유족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고  유족들은 유골을 한 곳에 모아 위령비를 세웠다. 이후 1960년 4대 국회는 정부를 상대로 학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 구제조치 등 권고안을 채택하는 성과도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은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모두 좌절되었는데, 유족들이 박산골에 세운 비석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징으로 쪼여져 땅속에 묻혔고 유해는 흩어졌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사건 결과'''==&lt;br /&gt;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이 사건은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육군에 길이 남을 수치로 꼽힌다. 토벌 과정에서 사단장의 지휘에 따라 같은 나라 국민을 아예 적국 국민으로 취급해서 몽땅 살해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배상 촉구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매체 속 거창 양민 학살 사건'''===&lt;br /&gt;
*청야&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vsB_B-LL4w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영화 청야는 학살에 연루된 군인의 손녀와 이 학살을 취재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PD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간다는 줄거리로 거창양민 학살사건에 대해 정면으로 다루고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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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11: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
				<updated>2019-06-25T13:10: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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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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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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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10: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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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300px|thumb|center|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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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03: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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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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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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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03: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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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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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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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사건'''==&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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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3:02: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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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사건'''==&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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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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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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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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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사건'''==&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사건 내용'''====&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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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EC%82%AC%EA%B1%B4</id>
		<title>한강 인도교 폭파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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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북쪽 두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지(下肢)를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속 목격자 증언&amp;lt;ref&amp;gt;[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amp;lt;/ref&amp;gt; &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6월 27일 밤 10시&lt;br /&gt;
전쟁 2일차이던 6월 27일 밤 10시 서울의 [[이승만]]대통령의 음성이 담긴 라디오가 나왔다.&amp;lt;br/&amp;gt;&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amp;lt;/font&amp;gt;&amp;lt;br/&amp;gt;&lt;br /&gt;
서울 시민들은 이 말을 믿었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뒤였다.&amp;lt;br/&amp;gt;&lt;br /&gt;
*1950년 6월 28일 새벽&lt;br /&gt;
서울 시민들은 6월 28일 새벽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6465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미아리 전투]소리를 듣고 북한군이 서울 가까이 진격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피난민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한강 대교로 모였다. 그러던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철교에 하늘을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이 때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과, 군인, 경찰을 포함해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lt;br /&gt;
*사건 결과&lt;br /&gt;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최소 500,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폭사 및 익사하였다. 무엇보다 강 북쪽의 시민들이 제 때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폭파의 전략적 가치&lt;br /&gt;
일단 한강대교 폭파 자체는 전략적으로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는 행위였으며, 소련 고문단의 사후 평가에서도 105전차여단의 한강교 조기확보 실패를 개전 직후의 주요 실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물론 한강철교의 폭파가 불완전했고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공세 재개까지 3일여의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이 효과가 반감된 것은 사실이나, 공자의 변덕 혹은 정치적 결정으로 인한 공세중단을 바라고 방어에 나설수는 없는 노릇이고, 한강 대안측에 방어선을 구축함에 있어서도 적의 기동로가 한강철교 한 곳으로 제한되는 것은 승수효과를 통해 방자측에서 일시적/국지적 비교우위를 달성하기 용이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인도교폭파]&amp;lt;/ref&amp;gt;&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논란&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가 가치있는 전략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비판적인 시각이 주를 이룬다. 특히 국군의 열세를 숨기고, 홀로 도망쳐놓고는 자신이 서울에 머무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국민을 기만했다는 점이 가장 비판을 받는 점이다. 또한 이 전략은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고 다리를 건너 피난을 가는 무고한 민간인을 아군이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여러 실정과 독재행위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서 이승만 개인의 대표적인 과로 상징화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정리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RQpBDD-bUtc?controls=0&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44&amp;quot; height=&amp;quot;306&amp;quot; src=&amp;quot;https://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6B4B20AE9CD0B8AB124D7E28AFD8B4B02AE9&amp;amp;outKey=V1210dc0102ef630f08901aec7fc67dced3e84e00d0b15e7529431aec7fc67dced3e8&amp;quot; frameborder=&amp;quot;no&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title=&amp;quot;NaverVideo&amp;quot; allow=&amp;quot;autoplay; gyroscope; accelerometer; encrypted-media&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웰컴 투 동막골 속 국군 장교 표현철은 극 중 상관의 명령에 의해 한강 대교를 폭파한 장본인으로 나오며 이를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6.25_%EC%A0%84%EC%9F%81_%EB%8B%B9%EC%8B%9C_%EB%AF%BC%EA%B0%84%EC%9D%B8_%ED%95%99%EC%82%B4</id>
		<title>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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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2:49: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새 문서: =='''주제'''==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  =='''제작의도'''==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lt;/p&gt;
&lt;hr /&gt;
&lt;div&gt;=='''주제'''==&lt;br /&gt;
&amp;lt;font color=red&amp;gt;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제작의도'''==&lt;br /&gt;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lt;br /&gt;
&lt;br /&gt;
=='''노드 리스트'''==&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대한민국, 미국&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주요 노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CLASS||style=&amp;quot;width:500px&amp;quot;|NODE&lt;br /&gt;
|-&lt;br /&gt;
|인물||[[이승만]],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사상||[[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들간 관련사건'''==&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보도연맹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사건 내용'''====&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한강 인도교 폭파사건&amp;lt;/font&amp;gt;'''===&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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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2:32: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증언'''==&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amp;quot;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amp;quot;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amp;quot;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amp;lt;ref&amp;gt;[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 한계레 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b8F9ahXlWx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B%8B%A4%EC%9A%B4_%EC%BD%98%ED%85%90%EC%B8%A0_%EC%A0%9C%EC%9E%91%EB%85%B8%ED%8A%B8</id>
		<title>정다운 콘텐츠 제작노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B%8B%A4%EC%9A%B4_%EC%BD%98%ED%85%90%EC%B8%A0_%EC%A0%9C%EC%9E%91%EB%85%B8%ED%8A%B8"/>
				<updated>2019-06-25T12:17: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lt;br /&gt;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amp;lt;br/&amp;gt;&lt;br /&gt;
6.25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lt;br /&gt;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lt;br /&gt;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lt;br /&gt;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lt;br /&gt;
이 문서에서는 6.25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lt;br /&gt;
&lt;br /&gt;
=='''스토리 기사'''==&lt;br /&gt;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lt;br /&gt;
=='''주요노드'''==&lt;br /&gt;
===인물===&lt;br /&gt;
*[[이승만]]&lt;br /&gt;
*[[노무현]]&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6.25 전쟁]]&lt;br /&gt;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lt;br /&gt;
==='''장소'''===&lt;br /&gt;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lt;br /&gt;
*경상남도 거창군&lt;br /&gt;
&lt;br /&gt;
==='''국가'''===&lt;br /&gt;
*대한민국&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사상'''===&lt;br /&gt;
*[[빨갱이]]&lt;br /&gt;
&lt;br /&gt;
==='''영화'''===&lt;br /&gt;
*[[태극기 휘날리며]]&lt;br /&gt;
*청야&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작은 연못&lt;br /&gt;
&lt;br /&gt;
==이야기 관계망==&lt;br /&gt;
[[파일:625관계망.jpg|섬네일|관계망1]]&lt;br /&gt;
&lt;br /&gt;
{{NetworkGraph|title=홍길동.ls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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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거창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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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새 문서: =='''정의'''==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과 경과'''==&lt;br /&gt;
*사건 과정&lt;br /&gt;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11사단장 최덕신이 휘하 부대에 보낸 작전이 이 사건의 원인이다. 이 작전은 자신의 진영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인적, 물적 자원을 모두 정리하여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더 나아가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본다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lt;br /&gt;
결국 국군은 1951년 2월 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2월 10일 대대는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대현리·와룡리·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 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서 학살했다. 군인들은 2월 11일 와룡리·대현리·중유리 일대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후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날 517명을 박산골에 끌고 가 총살했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이 학살사건은 산청군, 함양군, 함평군, 전라남도 나주시, 전라북도 고창군 등 11사단의 작전지역 곳곳에서 거창과 같은 양상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lt;br /&gt;
*사건 경과&lt;br /&gt;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 의원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회의를 비공개로 요청한 후 거창사건을 공개했고 긴급히 국회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거창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진상조사차 내려온 국회 조사단은 당시 지역 계엄사령관인 김종원에 의해 북한 인민 게릴라로 분장한 11사단 군인들의 습격을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국전쟁에 자국 병사들을 파견하고 있던 외국의 언론들이 앞다퉈 보도하면서 사건은 덮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국회에서 재조사를 결의하고 진상조사가 재개되었다. 국정조사를 방해한 총격전의 주체가 위장공비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결국 거창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과 조사방해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었고, 내무·법무·국방 3부 장관이 사임하고, 11사단장 최덕신은 직위 해제가, 9연대장 오익균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는 무기징역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에게는 3년 형이 선고되었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lt;br /&gt;
전쟁이 끝나고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된 시기에 유족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고  유족들은 유골을 한 곳에 모아 위령비를 세웠다. 이후 1960년 4대 국회는 정부를 상대로 학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 구제조치 등 권고안을 채택하는 성과도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은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모두 좌절되었는데, 유족들이 박산골에 세운 비석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징으로 쪼여져 땅속에 묻혔고 유해는 흩어졌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사건 결과'''==&lt;br /&gt;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amp;lt;ref&amp;g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이 사건은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육군에 길이 남을 수치로 꼽힌다. 토벌 과정에서 사단장의 지휘에 따라 같은 나라 국민을 아예 적국 국민으로 취급해서 몽땅 살해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배상 촉구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SAB8cUFxM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거창 양민 학살 사건'''===&lt;br /&gt;
*청야&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vsB_B-LL4wY&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영화 청야는 학살에 연루된 군인의 손녀와 이 학살을 취재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PD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간다는 줄거리로 거창양민 학살사건에 대해 정면으로 다루고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lt;br /&gt;
*[https://namu.wiki/w/%EA%B1%B0%EC%B0%BD%20%EC%96%91%EB%AF%BC%20%ED%95%99%EC%82%B4%EC%82%AC%EA%B1%B4#s-2.4 나무위키 거창 양민 학살사건]&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EC%82%AC%EA%B1%B4</id>
		<title>한강 인도교 폭파사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EC%82%AC%EA%B1%B4"/>
				<updated>2019-06-25T11:35: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북쪽 두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지(下肢)를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속 목격자 증언&amp;lt;ref&amp;gt;[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amp;lt;/ref&amp;gt; &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6월 27일 밤 10시&lt;br /&gt;
전쟁 2일차이던 6월 27일 밤 10시 서울의 [[이승만]]대통령의 음성이 담긴 라디오가 나왔다.&amp;lt;br/&amp;gt;&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amp;lt;/font&amp;gt;&amp;lt;br/&amp;gt;&lt;br /&gt;
서울 시민들은 이 말을 믿었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뒤였다.&amp;lt;br/&amp;gt;&lt;br /&gt;
*1950년 6월 28일 새벽&lt;br /&gt;
서울 시민들은 6월 28일 새벽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6465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미아리 전투]소리를 듣고 북한군이 서울 ㄱ까이 진격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피난민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한강 대교로 모였다. 그러던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철교에 하늘을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이 때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과, 군인, 경찰을 포함해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lt;br /&gt;
*사건 결과&lt;br /&gt;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최소 500,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폭사 및 익사하였다. 무엇보다 강 북쪽의 시민들이 제 때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폭파의 전략적 가치&lt;br /&gt;
일단 한강대교 폭파 자체는 전략적으로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는 행위였으며, 소련 고문단의 사후 평가에서도 105전차여단의 한강교 조기확보 실패를 개전 직후의 주요 실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물론 한강철교의 폭파가 불완전했고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공세 재개까지 3일여의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이 효과가 반감된 것은 사실이나, 공자의 변덕 혹은 정치적 결정으로 인한 공세중단을 바라고 방어에 나설수는 없는 노릇이고, 한강 대안측에 방어선을 구축함에 있어서도 적의 기동로가 한강철교 한 곳으로 제한되는 것은 승수효과를 통해 방자측에서 일시적/국지적 비교우위를 달성하기 용이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인도교폭파]&amp;lt;/ref&amp;gt;&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논란&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가 가치있는 전략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비판적인 시각이 주를 이룬다. 특히 국군의 열세를 숨기고, 홀로 도망쳐놓고는 자신이 서울에 머무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국민을 기만했다는 점이 가장 비판을 받는 점이다. 또한 이 전략은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고 다리를 건너 피난을 가는 무고한 민간인을 아군이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여러 실정과 독재행위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서 이승만 개인의 대표적인 과로 상징화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정리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RQpBDD-bUtc?controls=0&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44&amp;quot; height=&amp;quot;306&amp;quot; src=&amp;quot;https://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6B4B20AE9CD0B8AB124D7E28AFD8B4B02AE9&amp;amp;outKey=V1210dc0102ef630f08901aec7fc67dced3e84e00d0b15e7529431aec7fc67dced3e8&amp;quot; frameborder=&amp;quot;no&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title=&amp;quot;NaverVideo&amp;quot; allow=&amp;quot;autoplay; gyroscope; accelerometer; encrypted-media&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웰컴 투 동막골 속 국군 장교 표현철은 극 중 상관의 명령에 의해 한강 대교를 폭파한 장본인으로 나오며 이를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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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인도교 폭파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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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북쪽 두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지(下肢)를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속 생존자 증언&amp;lt;ref&amp;gt;[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amp;lt;/ref&amp;gt; &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6월 27일 밤 10시&lt;br /&gt;
전쟁 2일차이던 6월 27일 밤 10시 서울의 [[이승만]]대통령의 음성이 담긴 라디오가 나왔다.&amp;lt;br/&amp;gt;&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amp;lt;/font&amp;gt;&amp;lt;br/&amp;gt;&lt;br /&gt;
서울 시민들은 이 말을 믿었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뒤였다.&amp;lt;br/&amp;gt;&lt;br /&gt;
*1950년 6월 28일 새벽&lt;br /&gt;
서울 시민들은 6월 28일 새벽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6465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미아리 전투]소리를 듣고 북한군이 서울 ㄱ까이 진격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피난민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한강 대교로 모였다. 그러던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철교에 하늘을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이 때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과, 군인, 경찰을 포함해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lt;br /&gt;
*사건 결과&lt;br /&gt;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최소 500,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폭사 및 익사하였다. 무엇보다 강 북쪽의 시민들이 제 때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폭파의 전략적 가치&lt;br /&gt;
일단 한강대교 폭파 자체는 전략적으로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는 행위였으며, 소련 고문단의 사후 평가에서도 105전차여단의 한강교 조기확보 실패를 개전 직후의 주요 실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물론 한강철교의 폭파가 불완전했고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공세 재개까지 3일여의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이 효과가 반감된 것은 사실이나, 공자의 변덕 혹은 정치적 결정으로 인한 공세중단을 바라고 방어에 나설수는 없는 노릇이고, 한강 대안측에 방어선을 구축함에 있어서도 적의 기동로가 한강철교 한 곳으로 제한되는 것은 승수효과를 통해 방자측에서 일시적/국지적 비교우위를 달성하기 용이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인도교폭파]&amp;lt;/ref&amp;gt;&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논란&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가 가치있는 전략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비판적인 시각이 주를 이룬다. 특히 국군의 열세를 숨기고, 홀로 도망쳐놓고는 자신이 서울에 머무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국민을 기만했다는 점이 가장 비판을 받는 점이다. 또한 이 전략은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고 다리를 건너 피난을 가는 무고한 민간인을 아군이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여러 실정과 독재행위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서 이승만 개인의 대표적인 과로 상징화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정리 영상'''===&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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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44&amp;quot; height=&amp;quot;306&amp;quot; src=&amp;quot;https://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6B4B20AE9CD0B8AB124D7E28AFD8B4B02AE9&amp;amp;outKey=V1210dc0102ef630f08901aec7fc67dced3e84e00d0b15e7529431aec7fc67dced3e8&amp;quot; frameborder=&amp;quot;no&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title=&amp;quot;NaverVideo&amp;quot; allow=&amp;quot;autoplay; gyroscope; accelerometer; encrypted-media&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웰컴 투 동막골 속 국군 장교 표현철은 극 중 상관의 명령에 의해 한강 대교를 폭파한 장본인으로 나오며 이를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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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정의'''==&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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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북쪽 두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지(下肢)를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속 생존자 증언&amp;lt;ref&amp;gt;[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amp;lt;/ref&amp;gt; &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lt;br /&gt;
&lt;br /&gt;
=='''사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6월 27일 밤 10시&lt;br /&gt;
전쟁 2일차이던 6월 27일 밤 10시 서울의 [[이승만]]대통령의 음성이 담긴 라디오가 나왔다.&amp;lt;br/&amp;gt;&lt;br /&gt;
&amp;lt;font color=blue&amp;gt;''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amp;lt;/font&amp;gt;&amp;lt;br/&amp;gt;&lt;br /&gt;
서울 시민들은 이 말을 믿었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뒤였다.&amp;lt;br/&amp;gt;&lt;br /&gt;
*1950년 6월 28일 새벽&lt;br /&gt;
서울 시민들은 6월 28일 새벽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64650&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미아리 전투]소리를 듣고 북한군이 서울 ㄱ까이 진격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피난민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한강 대교로 모였다. 그러던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철교에 하늘을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이 때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과, 군인, 경찰을 포함해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lt;br /&gt;
*사건 결과&lt;br /&gt;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최소 500,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폭사 및 익사하였다. 무엇보다 강 북쪽의 시민들이 제 때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폭파의 전략적 가치&lt;br /&gt;
일단 한강대교 폭파 자체는 전략적으로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는 행위였으며, 소련 고문단의 사후 평가에서도 105전차여단의 한강교 조기확보 실패를 개전 직후의 주요 실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물론 한강철교의 폭파가 불완전했고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공세 재개까지 3일여의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이 효과가 반감된 것은 사실이나, 공자의 변덕 혹은 정치적 결정으로 인한 공세중단을 바라고 방어에 나설수는 없는 노릇이고, 한강 대안측에 방어선을 구축함에 있어서도 적의 기동로가 한강철교 한 곳으로 제한되는 것은 승수효과를 통해 방자측에서 일시적/국지적 비교우위를 달성하기 용이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amp;lt;ref&amp;gt;[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인도교폭파]&amp;lt;/ref&amp;gt;&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논란&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가 가치있는 전략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비판적인 시각이 주를 이룬다. 특히 국군의 열세를 숨기고, 홀로 도망쳐놓고는 자신이 서울에 머무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국민을 기만했다는 점이 가장 비판을 받는 점이다. 또한 이 전략은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고 다리를 건너 피난을 가는 무고한 민간인을 아군이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여러 실정과 독재행위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서 이승만 개인의 대표적인 과로 상징화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정리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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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lt;br /&gt;
*웰컴 투 동막골&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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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웰컴 투 동막골 속 국군 장교 표현철은 극 중 상관의 명령에 의해 한강 대교를 폭파한 장본인으로 나오며 이를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namu.wiki/w/%ED%95%9C%EA%B0%95%20%EC%9D%B8%EB%8F%84%EA%B5%90%20%ED%8F%AD%ED%8C%8C#s-3.4 나무위키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_%EC%9D%B8%EB%8F%84%EA%B5%90_%ED%8F%AD%ED%8C%8C 위키백과 한강 인도교 폭파]&lt;br /&gt;
*[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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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0:43: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증언'''==&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amp;quot;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amp;quot;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amp;quot;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amp;lt;ref&amp;gt;[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 한계레 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b8F9ahXlWx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lt;br /&gt;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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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0:41: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증언'''==&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amp;quot;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amp;quot;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amp;quot;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amp;lt;ref&amp;gt;[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 한계레 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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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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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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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0:40: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증언'''==&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amp;quot;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amp;quot;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amp;quot;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amp;lt;ref&amp;gt;[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 한계레 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b8F9ahXlWx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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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0:34: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증언'''==&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amp;quot;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amp;quot;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amp;quot;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amp;lt;ref&amp;gt;[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 한계레 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당시 사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파일:보도연맹2.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학살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rqOt6Ao4o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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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0:31: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증언'''==&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amp;quot;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amp;quot;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amp;quot;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amp;lt;ref&amp;gt;[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cite_note-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글상자&lt;br /&gt;
|color=#EAEAEA&lt;br /&gt;
|text='''''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 한계레 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당시 사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파일:보도연맹2.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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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0:21: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 사건 경과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사건의 은폐&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피해자들의 노력&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lt;br /&gt;
*AP통신의 보도&lt;br /&gt;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한미 합동조사&lt;br /&gt;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lt;br /&gt;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lt;br /&gt;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당시 사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파일:보도연맹2.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EC%82%AC%EA%B1%B4</id>
		<title>노근리 양민 학살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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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9-06-25T10:11: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ufs정다운: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학살 과정과 결과'''==&lt;br /&gt;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amp;lt;ref&amp;gt;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사건 경과'''==&lt;br /&gt;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lt;br /&gt;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amp;lt;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amp;gt;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amp;lt;에이피(AP)통신&amp;gt;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amp;lt;/ref&amp;gt;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아울러 정구도 대변인은 진실규명을 피해자 증언채록, 노근리 학살이 있었던 기간의 조선인민보 신문기사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하고 있는 미군작전기록을 수집하여 노근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이 노근리학살을 일으켰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고 노근리사건에 대한 역사학 논문과 국제법 논문도 발표하였다. &amp;lt;ref&amp;gt;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 위키백과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경과]&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멀티미디어'''==&lt;br /&gt;
==='''학살 당시 사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보도연맹1.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파일:보도연맹2.jpg|[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미군장교 에버트 소령이 찍은 정치범 처형 장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lt;br /&gt;
*작은연못&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amp;amp;cid=46626&amp;amp;categoryId=46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s://namu.wiki/w/%EB%B3%B4%EB%8F%84%EC%97%B0%EB%A7%B9%20%ED%95%99%EC%82%B4%EC%82%AC%EA%B1%B4#s-3 나무위키 보도연맹 학살사건]&lt;br /&gt;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86 국민보도연맹 사건(5): 누가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했나?]&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D%95%99%EC%82%B4# 위키백과 보도연맹 학살]&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lt;br /&gt;
[[분류: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lt;br /&gt;
[[분류:사건]]&lt;br /&gt;
[[분류:정다운]]&lt;/div&gt;</summary>
		<author><name>Hufs정다운</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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