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xml-stylesheet type="text/css" href="https://dh.aks.ac.kr/Edu/wiki/skins/common/feed.css?303"?>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s://dh.aks.ac.kr/Edu/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EC%A0%95%EC%86%8C%EC%98%81</id>
		<title>DH 교육용 위키 - 사용자 기여 [ko]</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dh.aks.ac.kr/Edu/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EC%A0%95%EC%86%8C%EC%98%81"/>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A%B9%EC%88%98:%EA%B8%B0%EC%97%AC/%EC%A0%95%EC%86%8C%EC%98%81"/>
		<updated>2026-04-11T09:01:22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3.13</generator>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53: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파일:고구려나라.jpg|thumb|고구려지도]]&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오녀산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표}}&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려'''(高麗)([[기원전 37년]] ~ [[668년]])는 [[백제]]·[[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한국 삼국 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5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5세기 이후 '''고려'''(高麗)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서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 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오녀산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 (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3%A0%EA%B5%AC%EB%A0%A4%EB%82%98%EB%9D%BC.jpg</id>
		<title>파일:고구려나라.jp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3%A0%EA%B5%AC%EB%A0%A4%EB%82%98%EB%9D%BC.jpg"/>
				<updated>2016-12-27T02:51: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48: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표}}&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려'''(高麗)([[기원전 37년]] ~ [[668년]])는 [[백제]]·[[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한국 삼국 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5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5세기 이후 '''고려'''(高麗)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서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 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오녀산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 (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48: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표}}&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려'''(高麗)([[기원전 37년]] ~ [[668년]])는 [[백제]]·[[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한국 삼국 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5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5세기 이후 '''고려'''(高麗)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서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 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오녀산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 (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47: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표}}&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려'''(高麗)([[기원전 37년]] ~ [[668년]])는 [[백제]]·[[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한국 삼국 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5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5세기 이후 '''고려'''(高麗)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amp;lt;ref&amp;gt;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서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 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오녀산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 (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46: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표}}&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려'''(高麗)([[기원전 37년]] ~ [[668년]])는 [[백제]]·[[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한국 삼국 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5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5세기 이후 '''고려'''(高麗)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amp;lt;ref&amp;gt;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서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 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오녀산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 (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43: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표}}&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려'''(高麗)([[기원전 37년]] ~ [[668년]])는 [[백제]]·[[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한국 삼국 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5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5세기 이후 '''고려'''(高麗)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amp;lt;ref&amp;gt;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서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lt;ref&amp;gt;&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amp;lt;/ref&amp;gt;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깨진 링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 (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8%EC%9D%98-%EB%B0%94%EC%A7%80:%EA%B3%A0</id>
		<title>하의-바지: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8%EC%9D%98-%EB%B0%94%EC%A7%80:%EA%B3%A0"/>
				<updated>2016-12-27T02:38: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하의== &lt;br /&gt;
① 가반(柯半) 또는 가배(柯背) 갈고(褐袴)&amp;lt;br/&amp;gt;&lt;br /&gt;
②갈고(褐袴)라는 기록 통해 굵은 베로 바지를 만들어 입었음을 알 수 있음&amp;lt;br/&amp;gt; &lt;br /&gt;
③ 궁고(窮袴)와 대구고(大口袴) 의 두 가지 형태로 대별 됨&amp;lt;br/&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궁.JPG|궁고]]&lt;br /&gt;
===궁고(窮袴)===&lt;br /&gt;
바지통이 주름잡혀 여유있는 형태로 바지부리가 오므려져있다 &amp;lt;br/&amp;gt;&lt;br /&gt;
통넓은 바지끝을 주름잡아 오므린 궁고&amp;lt;br/&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대구.JPG|대구고]]&lt;br /&gt;
&lt;br /&gt;
===대구고(大口袴)=== &lt;br /&gt;
-바지부리가 펼쳐 있는 통이 넓은 바지 &amp;lt;br/&amp;gt;&lt;br /&gt;
-바지부리에 저고리 가선과 같은 청록계열의 넓은가선 장식 &amp;lt;br/&amp;gt;&lt;br /&gt;
-밑단으로 갈수록 통이 조금씩 좁아지는 형태, 일자형, 밑단으로 갈수록 통이 살짝 넓어지는 형태로 다양 &amp;lt;br/&amp;gt;&lt;br /&gt;
-대구고는 고대 삼국 뿐 아니라 실크로드 상의 중앙 아시아를 따라 두루 입혀졌음&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B%91%90%EB%A3%A8%EB%A7%88%EA%B8%B0</id>
		<title>상의-두루마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B%91%90%EB%A3%A8%EB%A7%88%EA%B8%B0"/>
				<updated>2016-12-27T02:38: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두루마기 : 포(袍)==&lt;br /&gt;
*신분이나 의식, 의례용도, 방한목적 &lt;br /&gt;
*골품제도에 의한 계급 사회였던 신라는 신분과 관등에 따라 복색이 구분됨 &lt;br /&gt;
*포나 저고리를 대로 여미는 형태 외에 옷고름을 부착하여 착용,옷고름은 길이가 길었음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그림11.png|thumb|직령합임포]]&lt;br /&gt;
===①직령합임포=== &lt;br /&gt;
*신라의 포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은 대부분 통일 이후의 유물 &lt;br /&gt;
*이전시대: 신라 저고리 및 고구려, 백제를 비롯한 주변국의 포 형태를 통해 유추 &lt;br /&gt;
&amp;quot;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복식은 같다“ 는 사서 곳곳의 기록 &lt;br /&gt;
&lt;br /&gt;
[[파일:그림9.png|thumb|직령교임포]]&lt;br /&gt;
===②직령교임포=== &lt;br /&gt;
*앞이 막혀있는 전페형 외에도 전개형의 직령교임포를 입었음 &amp;lt;김유신묘, 십이지신상&amp;gt;&lt;br /&gt;
앞이 트이고 직선형의 깃이 서로 교차되어 여며짐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그림10.png|thumb|방포]]&lt;br /&gt;
===③방포=== &lt;br /&gt;
*비구가 입는 3종의 기사가 모두 방형인데서 나온 말 &lt;br /&gt;
*사각을 의미하는 방(方,ㅁ), 고대에 당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상 &lt;br /&gt;
*우리 저고리 바지 치마의 구조가 모두 방형을 기초로 하고있음&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C%A0%80%EA%B3%A0%EB%A6%AC</id>
		<title>상의-저고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C%A0%80%EA%B3%A0%EB%A6%AC"/>
				<updated>2016-12-27T02:37: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상의== &lt;br /&gt;
①정의: 위에 입는 옷, 속에 입는 내의, 겉에 입는 외의, 길거나 짧거나 모두 위에 입는 웃옷으로 속옷과 겉옷을 모두 포함한다.&amp;lt;br/&amp;gt;&lt;br /&gt;
②고서에 나타난 신라 상의에 관한 명칭 위해(尉解), 장유, 방포(方袍),삼국사기 흥덕왕 복식금제 표의(表衣), 내의(內衣), 단의(短衣), 반비(半臂), 배당(褙襠), 표(裱):목도리 &lt;br /&gt;
,요대(腰帶):허리띠, 요반:허리끈 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직령교임저고리.JPG|직령교임저고리]]&lt;br /&gt;
&lt;br /&gt;
===직령 저고리===&lt;br /&gt;
*둔부선 길이의 직령교임형 &lt;br /&gt;
*고구려, 백제 사신의 저고리 형태와도 유사, 삼국의 공통된 양식 &lt;br /&gt;
＂신라의 풍속, 형정, 의복은 고구려 백제와 거의 같다＂는 사서의 기록 뒷바침 &lt;br /&gt;
&lt;br /&gt;
[[파일:반령저고리.JPG|반령저고리]]&lt;br /&gt;
&lt;br /&gt;
===반령(盤領) 저고리=== &lt;br /&gt;
*목선이 둥근 깃의 저고리를 말한다, 둥근 깃은 고조선에서부터 존재했다&lt;br /&gt;
*신라건국의 핵심세력은 고조선과 관련된 세력으로 신라의 의복은 고조선으로부터 영향 받음 유추&amp;lt;br/&amp;gt;&lt;br /&gt;
※반령 저고리의 흔적 &lt;br /&gt;
*-4세기 고구려 감신총벽화, 신라의 전형적 무덤형태인 적석목곽분과 유사한 중앙아시아 파지리크 2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amp;gt; 파리지크 지역과 신라와의 연관성&amp;lt;br/&amp;gt;&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신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
				<updated>2016-12-27T02:37: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 신라의 역사적 배경 =&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lt;br /&gt;
# 인종학적 구성&lt;br /&gt;
# 정신문화&lt;br /&gt;
# 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1.역사적 배경==&lt;br /&gt;
[[파일:그림1.png|섬네일|신라]]&lt;br /&gt;
*신라의 기원은 중국 진나라의 망인과 연관된 진한의 후예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amp;lt;br/&amp;gt;&lt;br /&gt;
*삼한 가운데 진한 12개 성읍국의 하나인 사로국을 모체로 진한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금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lt;br /&gt;
*신라의 국호는 서벌 사라 사로 서나 계림국 등으로 표기 되었으며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503년 신라로 확장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인종학적 구성===&lt;br /&gt;
&lt;br /&gt;
*둔황석굴에서 발굴된 신라송공사에 나온 신라인의 체격을 통해 볼 때 대체 백제 시대 미륵사지 연못터에서 백제에서 통일 신라에 이르는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뼈 2구가 발견 되었는데 이들은 25-30세로 키 168cm,162cm로 현대인과 다름이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후한서》에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lt;br /&gt;
변을 쓰고 금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기록을 보아 고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위치했던 한민족이 오랫동안 그 지역에 살아온 토착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신라 역시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예맥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맥 사람들은 북몽골로이드 특징인 샤머니즘을 믿었는데 신라에서 왕호로 한때 우두머리 샤먼이라는 의미의 차차웅 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신라에 미친 샤머니즘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정신문화===&lt;br /&gt;
====신조 사상====&lt;br /&gt;
[[파일:그림8.png|500픽셀|섬네일|신조사상]]&lt;br /&gt;
*새를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을 연결 짓는 매개자 즉 영혼을 천계로 가지고 돌아가는 영조(영조)로 여겼기 때문일 것 이다. 서봉총 금관의 새와 천마총의 새 모양 금제관식 등은 샤먼의 기능을 지녔던 &lt;br /&gt;
신라왕들의 새 토템으로 망자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amp;lt;br/&amp;gt;&lt;br /&gt;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김알지의 탄생 등을 통해 새는 고대인의 삶과 생활 및 죽음과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수 사상====&lt;br /&gt;
&lt;br /&gt;
[[파일:신.jpg|섬네일|신수사상]]&lt;br /&gt;
&lt;br /&gt;
*삼국 및 가야의 지배층이 나무와 화초의 형태를 관모에 사용 하는 것을 볼 때, 고대인들의 사유세계 속에 우주목 또는 세계수 사상이 일찌감치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출토물 중 금관 장식을 통해 나무를 성스로운 존재로 여겨 상징화 했다.&lt;br /&gt;
→ 신라 금관의 기본형을 이루는 산자형 장식은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인들이 &lt;br /&gt;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나무를 하늘로 통하는 통로로 인식하여 신성시 한 것의 견해도 있다.&lt;br /&gt;
&lt;br /&gt;
=== 3)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고구려•백제와의 관계====&lt;br /&gt;
*북으로 고구려, 서로는 백제와 마주하고 있던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정치, 사회 생활문화에 있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끊임 없는 외교활동을 펼쳤다.&lt;br /&gt;
*중국사서 곳곳에 ‘삼국의 의복과 음식이 같다’는 기록을 통해 삼국이 영토 확장 뿐 아니라 한 민족으로 문화적 교류를 공유 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과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br /&gt;
&lt;br /&gt;
====스키타이와 흉노와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B%B0%B1%EC%A0%9C</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백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B%B0%B1%EC%A0%9C"/>
				<updated>2016-12-27T02:3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파일:정소영1.png|thumb|지도]]&lt;br /&gt;
B.C 1세기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한 백제의 역사는 한성시대 493년(B.C18-A.D 475) ,웅진 시대 63년 (475-&lt;br /&gt;
538), 사비시대122년 (538-660)으로 구분된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삼국을 이루며 고이왕(고이왕) 234-&lt;br /&gt;
286)집권 시기에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관제정비, 관복 제정 및 율령을 반포하여 고대 국가의 &lt;br /&gt;
체제를 마련하였다.&lt;br /&gt;
*한성시대 : B.C 18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백제를 건국한 이후 A.D 475년(개로왕 21년)까지를 말한다. &lt;br /&gt;
*웅진시대  :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한 475년부터 성왕이 백제 중흥을 표방하면서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긴 538년(성왕 16년)까지를 말한다.&lt;br /&gt;
*사비시대  :  538년(성왕16년)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백제가 망한 660년(의자왕 20년)까지를 말한다. &lt;br /&gt;
&lt;br /&gt;
===인종학적 구성===&lt;br /&gt;
[[파일:정소영2.png|thumb|백제인의 얼굴]]&lt;br /&gt;
*백제인의 얼굴을 복원한 결과 얼굴과 코가 길고 치아가 크며 눈 사이가 좁은 북방인의 얼굴을 갖고 있다.&lt;br /&gt;
*『魏書』 卷100 列傳 第88 百濟國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백제가 부여국을 선조로 한다는 고서의 기록들과 연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신분구조===&lt;br /&gt;
&amp;lt;&amp;lt; 梁書&amp;gt;&amp;gt; 卷54 列傅48  其國有二十二簷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lt;br /&gt;
&amp;lt;&amp;lt;양서&amp;gt;&amp;gt;기록에 따르면 나라에 22담로를 두고 왕실의 자제들을 보내어 &lt;br /&gt;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사비로 천도한 후 지방통치제는 5방제로 변경 &lt;br /&gt;
되어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파일:정소영3.PNG|thumb|부여 고구려 신라와의 비교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br /&gt;
&lt;br /&gt;
(1) 부여 고구려 신라와의 관계 &lt;br /&gt;
&lt;br /&gt;
*문헌에 백제 의복에 대수자포大袖紫袍나, ‘부인의사포 婦人’등 특별히 ‘포를 지칭하여 표기함은 “백제의 선조가 부여로 부 터 내려왔다” 고 하는 고서 기록을 뒷 바침 하는 부분이 나타난다&lt;br /&gt;
&lt;br /&gt;
(2) 중앙 아시와의 관계 &lt;br /&gt;
[[파일:정소영4.PNG|thumb|중앙아시아와 백제 비교유물]]&lt;br /&gt;
*고대 유목민 문화권의 국가들은 영토 개념의 국가가 아닌 거점 확보의 네트워크network 국가로서, 우리나라에서 초원길을 거쳐 그리스,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물적 교류가 이루어졌음 은 고고학 유물들이 입증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신라의 혜초가 여행했던 카슈카르, 투르판,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역 북도와 호탄, 누란 등 서역 남도, 그리고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동 서 교류의 관문인 둔황서 서안에 이르는 실크로드까지 광범위한 문화적 소통이었음을 볼때 중아아시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lt;br /&gt;
&lt;br /&gt;
(3) 일본과의 관계 &lt;br /&gt;
ㄴ. 천왕가계와의 관계&amp;lt;br/&amp;gt;&lt;br /&gt;
*배경 : 백제계가 일본 왕실의 실력자로 들어서게 된 것은 3세기 후반 부터 &lt;br /&gt;
4세기까지(고분시대) 약 120년 동안의 오오진왕(4세기 말)과 인덕왕 &lt;br /&gt;
(313-399)때이다. &lt;br /&gt;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의 오오진왕에게 보냈다는 칠지도의 소장 명문.&lt;br /&gt;
*&amp;lt;&amp;lt;일본서기&amp;gt;&amp;gt;에 칠지도가 ‘서기 372년 백제가 오오진왕 어머니 &lt;br /&gt;
신공황후에 내린 하사품’이라고 기록 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lt;br /&gt;
&lt;br /&gt;
*&amp;lt;&amp;lt;남제서 南濟書&amp;gt;&amp;gt;백제국전百濟國傳 에도 역시 ‘당시 백제가 5개 속국의 후왕을 거느리고 있었고  일본이 그 중 하나이다’&lt;br /&gt;
-&amp;gt; 4세기 후반 백제계인 오오진이 왜국 왕실의 실력자(오오진왕)로 들어 왔다는 설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으며 이는 바로 왜국이 백제 22담로 중의 하나로서 백제의 속국이 었다는 것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35: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표}}&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려'''(高麗)([[기원전 37년]] ~ [[668년]])는 [[백제]]·[[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한국 삼국 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5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5세기 이후 '''고려'''(高麗)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amp;lt;ref&amp;gt;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서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lt;ref&amp;gt;&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amp;lt;/ref&amp;gt;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깨진 링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C%86%8C%EC%98%81</id>
		<title>정소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C%86%8C%EC%98%81"/>
				<updated>2016-12-27T02:35: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수강생정보&lt;br /&gt;
|이름=정소영&lt;br /&gt;
|영문=SoYeong Jeong&lt;br /&gt;
|전공=한국아시아복식&lt;br /&gt;
|소속=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lt;br /&gt;
|학번=1631098&lt;br /&gt;
|메일=chicori119@naver.com&lt;br /&gt;
|사진=JEONGSOYEONG.jp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Profile'''==&lt;br /&gt;
&lt;br /&gt;
===기본정보===&lt;br /&gt;
*이름 : 정소영&lt;br /&gt;
&lt;br /&gt;
*한자 : 나라 정(鄭) 밝을 소(昭) 꽃부리 영(英)&lt;br /&gt;
&lt;br /&gt;
*영문 : SoYeong Jeong&lt;br /&gt;
&lt;br /&gt;
*전공 : 한국아시아복식&lt;br /&gt;
&lt;br /&gt;
*소속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lt;br /&gt;
&lt;br /&gt;
*학번 : 1631098&lt;br /&gt;
&lt;br /&gt;
*메일 : chicori119@naver.com&lt;br /&gt;
&lt;br /&gt;
==='''학력'''===&lt;br /&gt;
*2016 03.~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석사 2학기 재학중&lt;br /&gt;
*2011-2015.2 대구대학교 공예학과-금속공예 졸업&lt;br /&gt;
&lt;br /&gt;
==='''대외 활동'''===&lt;br /&gt;
* 미국 AmeriCo Group ,Basic Resource Inc 디자이너 인턴 2013-2014&lt;br /&gt;
* 대구경북디자인센터 (주)K.P.D 디자이너 인턴 2014.12.-2015.2&lt;br /&gt;
&lt;br /&gt;
&lt;br /&gt;
===나와 관련있는 것들===&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주어||관계||목적어&lt;br /&gt;
|-&lt;br /&gt;
|[[정소영]]||은~에 재학중이다||[[숙명여자대학교]]&lt;br /&gt;
|-&lt;br /&gt;
|[[정소영]]||은~을 좋아한다|| 해외에 [[여행]],[[사진찍기]]&lt;br /&gt;
|-&lt;br /&gt;
|[[정소영]]||은~영화 ~에 감동했다||[[미드 나잇 인 패리스 (Mid night in Paris)]]&lt;br /&gt;
|-&lt;br /&gt;
|[[정소영]]||은  ~이 필요하다||[[잠]]&lt;br /&gt;
|}&lt;br /&gt;
&lt;br /&gt;
==='''추억'''===&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facebook.com/plugins/video.php?href=https%3A%2F%2Fwww.facebook.com%2Fchicori119%2Fvideos%2Fvb.100002280394325%2F599430360142972%2F%3Ftype%3D3&amp;amp;show_text=0&amp;amp;width=560&amp;quot;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tyle=&amp;quot;border:none;overflow:hidden&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Transparency=&amp;quot;true&amp;quot; allowFullScreen=&amp;quot;true&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나의 전자지도 예시'''==&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amp;lt;googlemap width=&amp;quot;90%&amp;quot; height=&amp;quot;200&amp;quot; lat=&amp;quot;47.733755&amp;quot; lon=&amp;quot;14.497437&amp;quot; type=&amp;quot;hybrid&amp;quot; zoom=&amp;quot;4&amp;quot; icon=&amp;quot;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amp;quot;&amp;gt;&lt;br /&gt;
&lt;br /&gt;
35.891359, 128.589210, [[집]]&lt;br /&gt;
47.733755, 14.497437, [[여행 가고싶은 곳, 유럽, 오스트리아]]&lt;br /&gt;
&amp;lt;/googlemap&amp;gt;&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lt;br /&gt;
==나의 복식 연구 콘텐츠 제작 구상==&lt;br /&gt;
&lt;br /&gt;
#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위키 콘텐츠 주제: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 양직공도는 중국 역사 박물관 소장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을 찾은 백제,&lt;br /&gt;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이다당초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개의 사신만이 남아있다.&lt;br /&gt;
양직 공도에 나타난 각 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도식화하여서 고대 한국복식의 비교 및 연구를 조금더 면밀히 살펴보고자 선정하였다.&lt;br /&gt;
# 이 콘텐츠에 담을 개별 기사의 제목:&lt;br /&gt;
#* 대표 기사 제목: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사신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을 중심으로&lt;br /&gt;
#* 관련 기사 제목: 10 개 이상&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width:350px | 목록 || style=width:450px | 설명 &lt;br /&gt;
|-&lt;br /&gt;
|양직공도란 ||  양직공도 정의 및 각 국 나라 명칭&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역사적 배경||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amp;lt;br/&amp;gt;왜&amp;lt;br/&amp;gt;페르시아&amp;lt;br/&amp;gt; 등등&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저고리) ||저고리&amp;lt;br/&amp;gt;: 직령교임 저고리&amp;lt;br/&amp;gt;, 직령합임 저고리&amp;lt;br/&amp;gt;, 반령 저고리&amp;lt;br/&amp;gt;, 두루마기: 포&amp;lt;br/&amp;gt; 직령합임 포&amp;lt;br/&amp;gt; &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바지) ||바지&amp;lt;br/&amp;gt; : 궁고&amp;lt;br/&amp;gt;, 대구고&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두루마기) ||두루마기: 포&amp;lt;br/&amp;gt; 직령합임 포&amp;lt;br/&amp;gt;,직령교임 포 등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신 및 꾸미개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에 나타난 꾸미개&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발양(머리 모양)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에 나타난 머리모양&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콘텐츠 제작 계획&lt;br /&gt;
#* 자료 조사 계획: 한국 고대 복식 문화 서적 탐구 및 관련 인터넷 기사 및 조사&lt;br /&gt;
#* 현장 취재 계획: 현장 취재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관련 동영상 자료를 활용하여 면밀히 조사.&lt;br /&gt;
#*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계획: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lt;br /&gt;
[[파일:정소영 맵.jpg|400픽셀|]]&lt;br /&gt;
&lt;br /&gt;
&lt;br /&gt;
===온톨로지 시각화: 연습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740px&amp;quot; src=&amp;quot;http://digerati.aks.ac.kr/Dhlab/2016/203/정소영/정소영_샘플.htm&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28: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lt;br /&gt;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 시대|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amp;lt;ref&amp;gt;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태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중원고구려비]]&lt;br /&gt;
&lt;br /&gt;
=== 국력의 쇠퇴 ===&lt;br /&gt;
[[파일:Goguryeo tomb mural.jpg|thumb|left|[[무용총]] 수렵도.]]&lt;br /&gt;
&lt;br /&gt;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lt;br /&gt;
&lt;br /&gt;
=== 수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수 전쟁}}&lt;br /&gt;
&lt;br /&gt;
결국, [[수나라|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나라|수]]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각각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lt;br /&gt;
&lt;br /&gt;
=== 당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주변국이 대부분 당나라에 복속하면서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대규모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다.&lt;br /&gt;
&lt;br /&gt;
[[파일:History of Korea-645.png|thumb|right|제1차 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lt;br /&gt;
{{참고|평양성 함락}}&lt;br /&gt;
&lt;br /&gt;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lt;br /&gt;
&lt;br /&gt;
==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영토 ==&lt;br /&gt;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lt;br /&gt;
원문:인용문|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 구당서 - 고구려&lt;br /&gt;
&lt;br /&gt;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약 2000km)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약 1,220km)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약 785km)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25: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lt;br /&gt;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 시대|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amp;lt;ref&amp;gt;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태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중원고구려비]]&lt;br /&gt;
&lt;br /&gt;
=== 국력의 쇠퇴 ===&lt;br /&gt;
[[파일:Goguryeo tomb mural.jpg|thumb|left|[[무용총]] 수렵도.]]&lt;br /&gt;
&lt;br /&gt;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lt;br /&gt;
&lt;br /&gt;
=== 수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수 전쟁}}&lt;br /&gt;
&lt;br /&gt;
결국, [[수나라|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나라|수]]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각각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lt;br /&gt;
&lt;br /&gt;
=== 당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주변국이 대부분 당나라에 복속하면서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대규모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다.&lt;br /&gt;
&lt;br /&gt;
[[파일:History of Korea-645.png|thumb|right|제1차 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lt;br /&gt;
{{참고|평양성 함락}}&lt;br /&gt;
&lt;br /&gt;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lt;br /&gt;
&lt;br /&gt;
==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영토 ==&lt;br /&gt;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lt;br /&gt;
원문:인용문|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 구당서 - 고구려&lt;br /&gt;
&lt;br /&gt;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약 2000km)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약 1,220km)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약 785km)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23: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lt;ref&amp;gt;&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amp;lt;/ref&amp;gt;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lt;br /&gt;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 시대|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amp;lt;ref&amp;gt;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태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amp;lt;ref&amp;gt;[[중원고구려비]]&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국력의 쇠퇴 ===&lt;br /&gt;
[[파일:Goguryeo tomb mural.jpg|thumb|left|[[무용총]] 수렵도.]]&lt;br /&gt;
&lt;br /&gt;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amp;lt;ref&amp;gt;http://100.naver.com/100.nhn?docid=72262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수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수 전쟁}}&lt;br /&gt;
&lt;br /&gt;
결국, [[수나라|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나라|수]]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각각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lt;br /&gt;
&lt;br /&gt;
=== 당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주변국이 대부분 당나라에 복속하면서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대규모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다.&lt;br /&gt;
&lt;br /&gt;
[[파일:History of Korea-645.png|thumb|right|제1차 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lt;br /&gt;
{{참고|평양성 함락}}&lt;br /&gt;
&lt;br /&gt;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lt;br /&gt;
&lt;br /&gt;
==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영토 ==&lt;br /&gt;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lt;br /&gt;
원문:인용문|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 구당서 - 고구려&lt;br /&gt;
&lt;br /&gt;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약 2000km)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약 1,220km)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약 785km)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7T02:23: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lt;ref&amp;gt;&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amp;lt;/ref&amp;gt;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lt;br /&gt;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 시대|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amp;lt;ref&amp;gt;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태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amp;lt;ref&amp;gt;[[중원고구려비]]&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국력의 쇠퇴 ===&lt;br /&gt;
[[파일:Goguryeo tomb mural.jpg|thumb|left|[[무용총]] 수렵도.]]&lt;br /&gt;
&lt;br /&gt;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amp;lt;ref&amp;gt;http://100.naver.com/100.nhn?docid=72262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수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수 전쟁}}&lt;br /&gt;
&lt;br /&gt;
결국, [[수나라|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나라|수]]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각각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lt;br /&gt;
&lt;br /&gt;
=== 당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주변국이 대부분 당나라에 복속하면서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대규모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다.&lt;br /&gt;
&lt;br /&gt;
[[파일:History of Korea-645.png|thumb|right|제1차 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lt;br /&gt;
{{참고|평양성 함락}}&lt;br /&gt;
&lt;br /&gt;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lt;br /&gt;
&lt;br /&gt;
==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영토 ==&lt;br /&gt;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lt;br /&gt;
원문:{{인용문|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https://zh.wikisource.org/wiki/%E8%88%8A%E5%94%90%E6%9B%B8/%E5%8D%B7199%E4%B8%8A#.E9.AB.98.E9.BA.97 구당서 - 고구려]}}&lt;br /&gt;
&lt;br /&gt;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약 2000km)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약 1,220km)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약 785km)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B%9E%80</id>
		<title>양직공도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B%9E%80"/>
				<updated>2016-12-27T02:21: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양직공도(梁職貢圖)=&lt;br /&gt;
[[파일:정소영_양직공도.jpg]]&lt;br /&gt;
&lt;br /&gt;
==1. 양직공도==&lt;br /&gt;
*  양직공도 정보: 작자-양나라 원제 소역, 비단 채색, 26.7 x 402.6 cm, 중국 남경박물원&lt;br /&gt;
* 설명 : 중국 북경(北京)의 중국역사박물관 소장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을 찾은 백제(百濟).왜(倭)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이다.&lt;br /&gt;
* 양직공도 나타난 나라 : 백제(百濟), 낭아수국(狼牙脩国), 활국(滑国)・주고가국(周古柯国)・아발단국(呵跋檀国)・&lt;br /&gt;
호밀단국(胡蜜丹国)・백제국(白題国)・구자국(龟茲國)・우전국(于闐國)・&lt;br /&gt;
갈반타국(渴盤陀国)・말국(末国)・파사국(波斯国)・탕창국(宕昌国)・&lt;br /&gt;
등지국(鄧至国),왜(倭)&lt;br /&gt;
*  양직공도 모사본: 당엽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南唐顧德謙摹梁元帝蕃客入朝圖).&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양직공도 개요==&lt;br /&gt;
&lt;br /&gt;
===2-1. 정의===&lt;br /&gt;
* 중국 양(梁)나라의 원제(元帝) 소역(蕭繹)이 그린 사신도(使臣圖).&lt;br /&gt;
&lt;br /&gt;
&lt;br /&gt;
===2-2. 개설===&lt;br /&gt;
*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왜국조(倭國條)의 기록에 해당하는 부분은 후대에 왜국과 탕창국(宕昌國)에 대한 기록이 합쳐져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3국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amp;lt;ref&amp;gt; 양직공도 개설내용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림에 따르는 기록은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의 서술과 부합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우리 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양직 공도에 나타난 나라==&lt;br /&gt;
===3-1. 나라별 명칭===&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width:350px | 목록 || style=width:450px | 설명 &lt;br /&gt;
|-&lt;br /&gt;
|활국(滑國) 현재 아프카니스탄||양서 열전 제이&amp;lt;br/&amp;gt;(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lt;br /&gt;
|-&lt;br /&gt;
|파사국(波斯國, 페르시아)||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백제국(百濟國) || 마한에서 시작딘 나라이며, 중국의 요서 지방을 차지해 다스렸다.&amp;lt;br/&amp;gt;&lt;br /&gt;
고구려와 옷차림과 말씨가 비슷하며 백제 무령왕은 고구려를 크게 격파했다. 백제가&lt;br /&gt;
다스리는 탁국,다라,전라가 있으며 22담로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왜국(倭國)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amp;lt;br/&amp;gt;&lt;br /&gt;
왜국사 기술의 후반부는 탕창국의 내용임.&lt;br /&gt;
|-&lt;br /&gt;
|탕창국(宕昌國) ||중국 5호16국시대에서 남북조시대에 걸처 강(羌)족이 세운 국가.&amp;lt;br/&amp;gt;&lt;br /&gt;
수도는 탕창성(宕昌城)(현재의 甘粛省宕昌県의 서쪽) 564년 북주(北周)에게 멸망당함.&lt;br /&gt;
|-&lt;br /&gt;
| 낭아수국(狼牙修國) 말레이반도에 위치한 힌두말레이 ||&amp;lt;의정義淨(635-713)&amp;gt;의 글에서도 이 나라에 대한 언급이 있음.&lt;br /&gt;
|-&lt;br /&gt;
|등지국(鄧至國 430-554) ||등지강(鄧至羌) 또는 백수강(白水羌)으로도 부름&amp;lt;br/&amp;gt;강족(羌族)이 남북조시기 백수강(白水江)유역에 세운 국가(정권).&lt;br /&gt;
왜국사 기술의 후반부는 탕창국의 내용임.&lt;br /&gt;
|-&lt;br /&gt;
|가발단국(呵跋檀國) ||활국 주위의 작은 나라.&lt;br /&gt;
|-&lt;br /&gt;
|호밀단국(胡密丹國) ||활국 주위의 작은 나라.&lt;br /&gt;
|-&lt;br /&gt;
| 말국(末國, 且末)||서역 36국중 하나인 차말(且末)국&lt;br /&gt;
|-&lt;br /&gt;
|주고가국(周古柯國) ||활국 주위의 작은 나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4. 참고 사이트==&lt;br /&gt;
&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7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6T09:00: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lt;ref&amp;gt;&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amp;lt;/ref&amp;gt;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깨진 링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lt;br /&gt;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 시대|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amp;lt;ref&amp;gt;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태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amp;lt;ref&amp;gt;[[중원고구려비]]&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국력의 쇠퇴 ===&lt;br /&gt;
[[파일:Goguryeo tomb mural.jpg|thumb|left|[[무용총]] 수렵도.]]&lt;br /&gt;
&lt;br /&gt;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amp;lt;ref&amp;gt;http://100.naver.com/100.nhn?docid=72262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수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수 전쟁}}&lt;br /&gt;
&lt;br /&gt;
결국, [[수나라|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나라|수]]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각각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lt;br /&gt;
&lt;br /&gt;
=== 당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주변국이 대부분 당나라에 복속하면서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대규모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다.&lt;br /&gt;
&lt;br /&gt;
[[파일:History of Korea-645.png|thumb|right|제1차 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lt;br /&gt;
{{참고|평양성 함락}}&lt;br /&gt;
&lt;br /&gt;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lt;br /&gt;
&lt;br /&gt;
==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영토 ==&lt;br /&gt;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lt;br /&gt;
원문:{{인용문|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https://zh.wikisource.org/wiki/%E8%88%8A%E5%94%90%E6%9B%B8/%E5%8D%B7199%E4%B8%8A#.E9.AB.98.E9.BA.97 구당서 - 고구려]}}&lt;br /&gt;
&lt;br /&gt;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약 2000km)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약 1,220km)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약 785km)다.&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A%B3%A0%EA%B5%AC%EB%A0%A4"/>
				<updated>2016-12-26T08:59: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새 문서: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연해주 일...&lt;/p&gt;
&lt;hr /&gt;
&lt;div&gt;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 3성]] 일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amp;lt;ref&amp;gt;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서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한국사}}&lt;br /&gt;
&lt;br /&gt;
=== 성립 ===&lt;br /&gt;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 및 [[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amp;lt;ref&amp;gt;&amp;quot;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amp;quot; -후한서 고구려전&amp;lt;/ref&amp;gt;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amp;lt;ref&amp;gt;오녀산성&amp;lt;/ref&amp;gt;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lt;br /&gt;
&lt;br /&gt;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 (삼국)|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깨진 링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lt;br /&gt;
&lt;br /&gt;
=== 위기와 극복 ===&lt;br /&gt;
{{참고|고구려-위 전쟁}}&lt;br /&gt;
&lt;br /&gt;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 (삼국)|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amp;lt;ref name=A&amp;gt;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lt;br /&gt;
&lt;br /&gt;
=== 광개토태왕 ===&lt;br /&gt;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thumb|left|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lt;br /&gt;
&lt;br /&gt;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lt;br /&gt;
&lt;br /&gt;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lt;br /&gt;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 시대|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amp;lt;ref&amp;gt;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태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amp;lt;ref&amp;gt;[[중원고구려비]]&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국력의 쇠퇴 ===&lt;br /&gt;
[[파일:Goguryeo tomb mural.jpg|thumb|left|[[무용총]] 수렵도.]]&lt;br /&gt;
&lt;br /&gt;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amp;lt;ref&amp;gt;http://100.naver.com/100.nhn?docid=72262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수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수 전쟁}}&lt;br /&gt;
&lt;br /&gt;
결국, [[수나라|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나라|수]]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각각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lt;br /&gt;
&lt;br /&gt;
=== 당나라와의 전쟁 ===&lt;br /&gt;
{{참고|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주변국이 대부분 당나라에 복속하면서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대규모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다.&lt;br /&gt;
&lt;br /&gt;
[[파일:History of Korea-645.png|thumb|right|제1차 고구려-당 전쟁]]&lt;br /&gt;
&lt;br /&gt;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lt;br /&gt;
{{참고|평양성 함락}}&lt;br /&gt;
&lt;br /&gt;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lt;br /&gt;
&lt;br /&gt;
==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영토 ==&lt;br /&gt;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lt;br /&gt;
원문:{{인용문|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https://zh.wikisource.org/wiki/%E8%88%8A%E5%94%90%E6%9B%B8/%E5%8D%B7199%E4%B8%8A#.E9.AB.98.E9.BA.97 구당서 - 고구려]}}&lt;br /&gt;
&lt;br /&gt;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약 2000km)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약 1,220km)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약 785km)다.&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C%97%90_%EA%B7%B8%EB%A0%A4%EC%A7%84_%EA%B3%A0%EB%8C%80_%EB%B3%B5%EC%8B%9D</id>
		<title>양직공도에 그려진 고대 복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C%97%90_%EA%B7%B8%EB%A0%A4%EC%A7%84_%EA%B3%A0%EB%8C%80_%EB%B3%B5%EC%8B%9D"/>
				<updated>2016-12-25T15:46: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콘텐츠 주제'''==&lt;br /&gt;
[[파일:정소영_양직공도.jpg]]&lt;br /&gt;
*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복식 콘텐츠 주제: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이다당초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개의 사신만이 남아있다. 양직 공도에 나타난 각 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도식화하여서 고대 한국복식의 비교 및 연구를 조금더 면밀히 살펴보고자 선정하였다.&lt;br /&gt;
&lt;br /&gt;
===나의 복식 연구 콘텐츠 제작 구상===&lt;br /&gt;
# 이 콘텐츠에 담을 개별 기사의 제목:&lt;br /&gt;
#* 대표 기사 제목: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사신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을 중심으로&lt;br /&gt;
#* 관련 기사 제목: 10 개 이상&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width:350px | 목록 || style=width:450px | 설명 &lt;br /&gt;
|-&lt;br /&gt;
|양직공도란 ||  양직공도 정의 및 각 국 나라 명칭&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역사적 배경||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amp;lt;br/&amp;gt;왜&amp;lt;br/&amp;gt;페르시아&amp;lt;br/&amp;gt; 등등&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저고리) ||저고리&amp;lt;br/&amp;gt;: 직령교임 저고리&amp;lt;br/&amp;gt;, 직령합임 저고리&amp;lt;br/&amp;gt;, 반령 저고리&amp;lt;br/&amp;gt;, 두루마기: 포&amp;lt;br/&amp;gt; 직령합임 포&amp;lt;br/&amp;gt; &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바지) ||바지&amp;lt;br/&amp;gt; : 궁고&amp;lt;br/&amp;gt;, 대구고&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두루마기) ||두루마기: 포&amp;lt;br/&amp;gt; 직령합임 포&amp;lt;br/&amp;gt;,직령교임 포 등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신 및 꾸미개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에 나타난 꾸미개&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발양(머리 모양)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에 나타난 머리모양&lt;br /&gt;
|}&lt;br /&gt;
&lt;br /&gt;
=='''데이터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740px&amp;quot; src=&amp;quot;http://digerati.aks.ac.kr/Dhlab/2016/203/정소영/정소영_샘플.htm&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관련 문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 관심 문서||style=&amp;quot;width:200px&amp;quot;|관계||style=&amp;quot;width:250px&amp;quot;|관련 문서&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에 나타난 인물]]&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 역사적 배경:백제]]&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 역사적 배경:신라]]&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 상의-저고리 ]]&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상의-두루마기]]&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하의-바지:고]]&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장신구]]&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문양]]&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색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C%86%8C%EC%98%81</id>
		<title>정소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C%86%8C%EC%98%81"/>
				<updated>2016-12-25T15:46: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수강생정보&lt;br /&gt;
|이름=정소영&lt;br /&gt;
|영문=SoYeong Jeong&lt;br /&gt;
|전공=한국아시아복식&lt;br /&gt;
|소속=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lt;br /&gt;
|학번=1631098&lt;br /&gt;
|메일=chicori119@naver.com&lt;br /&gt;
|사진=JEONGSOYEONG.jp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Profile'''==&lt;br /&gt;
&lt;br /&gt;
===기본정보===&lt;br /&gt;
*이름 : 정소영&lt;br /&gt;
&lt;br /&gt;
*한자 : 나라 정(鄭) 밝을 소(昭) 꽃부리 영(英)&lt;br /&gt;
&lt;br /&gt;
*영문 : SoYeong Jeong&lt;br /&gt;
&lt;br /&gt;
*전공 : 한국아시아복식&lt;br /&gt;
&lt;br /&gt;
*소속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lt;br /&gt;
&lt;br /&gt;
*학번 : 1631098&lt;br /&gt;
&lt;br /&gt;
*메일 : chicori119@naver.com&lt;br /&gt;
&lt;br /&gt;
==='''학력'''===&lt;br /&gt;
*2016 03.~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석사 2학기 재학중&lt;br /&gt;
*2011-2015.2 대구대학교 공예학과-금속공예 졸업&lt;br /&gt;
&lt;br /&gt;
==='''대외 활동'''===&lt;br /&gt;
* 미국 AmeriCo Group ,Basic Resource Inc 디자이너 인턴 2013-2014&lt;br /&gt;
* 대구경북디자인센터 (주)K.P.D 디자이너 인턴 2014.12.-2015.2&lt;br /&gt;
&lt;br /&gt;
&lt;br /&gt;
===나와 관련있는 것들===&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주어||관계||목적어&lt;br /&gt;
|-&lt;br /&gt;
|[[정소영]]||은~에 재학중이다||[[숙명여자대학교]]&lt;br /&gt;
|-&lt;br /&gt;
|[[정소영]]||은~을 좋아한다|| 해외에 [[여행]],[[사진찍기]]&lt;br /&gt;
|-&lt;br /&gt;
|[[정소영]]||은~영화 ~에 감동했다||[[미드 나잇 인 패리스 (Mid night in Paris)]]&lt;br /&gt;
|-&lt;br /&gt;
|[[정소영]]||은  ~이 필요하다||[[잠]]&lt;br /&gt;
|}&lt;br /&gt;
&lt;br /&gt;
==='''추억'''===&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facebook.com/plugins/video.php?href=https%3A%2F%2Fwww.facebook.com%2Fchicori119%2Fvideos%2Fvb.100002280394325%2F599430360142972%2F%3Ftype%3D3&amp;amp;show_text=0&amp;amp;width=560&amp;quot;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tyle=&amp;quot;border:none;overflow:hidden&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Transparency=&amp;quot;true&amp;quot; allowFullScreen=&amp;quot;true&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나의 전자지도 예시'''==&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amp;lt;googlemap width=&amp;quot;90%&amp;quot; height=&amp;quot;200&amp;quot; lat=&amp;quot;47.733755&amp;quot; lon=&amp;quot;14.497437&amp;quot; type=&amp;quot;hybrid&amp;quot; zoom=&amp;quot;4&amp;quot; icon=&amp;quot;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amp;quot;&amp;gt;&lt;br /&gt;
&lt;br /&gt;
35.891359, 128.589210, [[집]]&lt;br /&gt;
47.733755, 14.497437, [[여행 가고싶은 곳, 유럽, 오스트리아]]&lt;br /&gt;
&amp;lt;/googlemap&amp;gt;&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lt;br /&gt;
==나의 복식 연구 콘텐츠 제작 구상==&lt;br /&gt;
&lt;br /&gt;
#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위키 콘텐츠 주제: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 양직공도는 중국 역사 박물관 소장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을 찾은 백제,&lt;br /&gt;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이다당초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개의 사신만이 남아있다.&lt;br /&gt;
양직 공도에 나타난 각 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도식화하여서 고대 한국복식의 비교 및 연구를 조금더 면밀히 살펴보고자 선정하였다.&lt;br /&gt;
# 이 콘텐츠에 담을 개별 기사의 제목:&lt;br /&gt;
#* 대표 기사 제목: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사신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을 중심으로&lt;br /&gt;
#* 관련 기사 제목: 10 개 이상&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width:350px | 목록 || style=width:450px | 설명 &lt;br /&gt;
|-&lt;br /&gt;
|양직공도란 ||  양직공도 정의 및 각 국 나라 명칭&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역사적 배경||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amp;lt;br/&amp;gt;왜&amp;lt;br/&amp;gt;페르시아&amp;lt;br/&amp;gt; 등등&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저고리) ||저고리&amp;lt;br/&amp;gt;: 직령교임 저고리&amp;lt;br/&amp;gt;, 직령합임 저고리&amp;lt;br/&amp;gt;, 반령 저고리&amp;lt;br/&amp;gt;, 두루마기: 포&amp;lt;br/&amp;gt; 직령합임 포&amp;lt;br/&amp;gt; &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바지) ||바지&amp;lt;br/&amp;gt; : 궁고&amp;lt;br/&amp;gt;, 대구고&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두루마기) ||두루마기: 포&amp;lt;br/&amp;gt; 직령합임 포&amp;lt;br/&amp;gt;,직령교임 포 등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신 및 꾸미개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에 나타난 꾸미개&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발양(머리 모양)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에 나타난 머리모양&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콘텐츠 제작 계획&lt;br /&gt;
#* 자료 조사 계획: 한국 고대 복식 문화 서적 탐구 및 관련 인터넷 기사 및 조사&lt;br /&gt;
#* 현장 취재 계획: 현장 취재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관련 동영상 자료를 활용하여 면밀히 조사.&lt;br /&gt;
#*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계획: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lt;br /&gt;
[[파일:정소영 맵.jpg|400픽셀|]]&lt;br /&gt;
&lt;br /&gt;
&lt;br /&gt;
===온톨로지 시각화: 연습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740px&amp;quot; src=&amp;quot;http://digerati.aks.ac.kr/Dhlab/2016/203/정소영/정소영_샘플.htm&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C%86%8C%EC%98%81</id>
		<title>정소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A0%95%EC%86%8C%EC%98%81"/>
				<updated>2016-12-25T15:41: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수강생정보&lt;br /&gt;
|이름=정소영&lt;br /&gt;
|영문=SoYeong Jeong&lt;br /&gt;
|전공=한국아시아복식&lt;br /&gt;
|소속=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lt;br /&gt;
|학번=1631098&lt;br /&gt;
|메일=chicori119@naver.com&lt;br /&gt;
|사진=JEONGSOYEONG.jp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Profile'''==&lt;br /&gt;
&lt;br /&gt;
===기본정보===&lt;br /&gt;
*이름 : 정소영&lt;br /&gt;
&lt;br /&gt;
*한자 : 나라 정(鄭) 밝을 소(昭) 꽃부리 영(英)&lt;br /&gt;
&lt;br /&gt;
*영문 : SoYeong Jeong&lt;br /&gt;
&lt;br /&gt;
*전공 : 한국아시아복식&lt;br /&gt;
&lt;br /&gt;
*소속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lt;br /&gt;
&lt;br /&gt;
*학번 : 1631098&lt;br /&gt;
&lt;br /&gt;
*메일 : chicori119@naver.com&lt;br /&gt;
&lt;br /&gt;
==='''학력'''===&lt;br /&gt;
*2016 03.~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석사 2학기 재학중&lt;br /&gt;
*2011-2015.2 대구대학교 공예학과-금속공예 졸업&lt;br /&gt;
&lt;br /&gt;
==='''대외 활동'''===&lt;br /&gt;
* 미국 AmeriCo Group ,Basic Resource Inc 디자이너 인턴 2013-2014&lt;br /&gt;
* 대구경북디자인센터 (주)K.P.D 디자이너 인턴 2014.12.-2015.2&lt;br /&gt;
&lt;br /&gt;
&lt;br /&gt;
===나와 관련있는 것들===&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주어||관계||목적어&lt;br /&gt;
|-&lt;br /&gt;
|[[정소영]]||은~에 재학중이다||[[숙명여자대학교]]&lt;br /&gt;
|-&lt;br /&gt;
|[[정소영]]||은~을 좋아한다|| 해외에 [[여행]],[[사진찍기]]&lt;br /&gt;
|-&lt;br /&gt;
|[[정소영]]||은~영화 ~에 감동했다||[[미드 나잇 인 패리스 (Mid night in Paris)]]&lt;br /&gt;
|-&lt;br /&gt;
|[[정소영]]||은  ~이 필요하다||[[잠]]&lt;br /&gt;
|}&lt;br /&gt;
&lt;br /&gt;
==='''추억'''===&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facebook.com/plugins/video.php?href=https%3A%2F%2Fwww.facebook.com%2Fchicori119%2Fvideos%2Fvb.100002280394325%2F599430360142972%2F%3Ftype%3D3&amp;amp;show_text=0&amp;amp;width=560&amp;quot;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tyle=&amp;quot;border:none;overflow:hidden&amp;quot; scrolling=&amp;quot;no&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Transparency=&amp;quot;true&amp;quot; allowFullScreen=&amp;quot;true&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나의 전자지도 예시'''==&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amp;lt;googlemap width=&amp;quot;90%&amp;quot; height=&amp;quot;200&amp;quot; lat=&amp;quot;47.733755&amp;quot; lon=&amp;quot;14.497437&amp;quot; type=&amp;quot;hybrid&amp;quot; zoom=&amp;quot;4&amp;quot; icon=&amp;quot;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amp;quot;&amp;gt;&lt;br /&gt;
&lt;br /&gt;
35.891359, 128.589210, [[집]]&lt;br /&gt;
47.733755, 14.497437, [[여행 가고싶은 곳, 유럽, 오스트리아]]&lt;br /&gt;
&amp;lt;/googlemap&amp;gt;&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lt;br /&gt;
==나의 복식 연구 콘텐츠 제작 구상==&lt;br /&gt;
&lt;br /&gt;
#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위키 콘텐츠 주제: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 양직공도는 중국 역사 박물관 소장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을 찾은 백제,&lt;br /&gt;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이다당초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개의 사신만이 남아있다.&lt;br /&gt;
양직 공도에 나타난 각 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도식화하여서 고대 한국복식의 비교 및 연구를 조금더 면밀히 살펴보고자 선정하였다.&lt;br /&gt;
# 이 콘텐츠에 담을 개별 기사의 제목:&lt;br /&gt;
#* 대표 기사 제목: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사신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을 중심으로&lt;br /&gt;
#* 관련 기사 제목: 10 개 이상&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width:350px | 목록 || style=width:450px | 설명 &lt;br /&gt;
|-&lt;br /&gt;
|양직공도란 무엇인가||  양직공도 정의 및 각 국 사신&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각 나라 사신||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amp;lt;br/&amp;gt;왜&amp;lt;br/&amp;gt;페르시아&amp;lt;br/&amp;gt; 등등&amp;lt;br/&amp;gt;&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상의) ||고구려: 저고리(직령 저고리) &amp;lt;br/&amp;gt;백제: 저고리(직령 저고리), 포 &amp;lt;br/&amp;gt;신라: 저고리(직령 저고리)&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하의) ||고구려: 바지-고(대구고) &amp;lt;br/&amp;gt;백제: 바지-고(대구고) &amp;lt;br/&amp;gt;신라: 바지-고(대구고)&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복식의 색상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신 및 꾸미개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lt;br /&gt;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발양(머리 모양) ||고구려&amp;lt;br/&amp;gt;백제&amp;lt;br/&amp;gt;신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콘텐츠 제작 계획&lt;br /&gt;
#* 자료 조사 계획: 한국 고대 복식 문화 서적 탐구 및 관련 인터넷 기사 및 조사&lt;br /&gt;
#* 현장 취재 계획: 현장 취재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관련 동영상 자료를 활용하여 면밀히 조사.&lt;br /&gt;
#*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계획: &lt;br /&gt;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lt;br /&gt;
[[파일:정소영 맵.jpg|400픽셀|]]&lt;br /&gt;
&lt;br /&gt;
&lt;br /&gt;
===온톨로지 시각화: 연습용===&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740px&amp;quot; src=&amp;quot;http://digerati.aks.ac.kr/Dhlab/2016/203/정소영/정소영_샘플.htm&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B%91%90%EB%A3%A8%EB%A7%88%EA%B8%B0</id>
		<title>상의-두루마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B%91%90%EB%A3%A8%EB%A7%88%EA%B8%B0"/>
				<updated>2016-12-25T15:28: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두루마기 : 포(袍)==&lt;br /&gt;
*신분이나 의식, 의례용도, 방한목적 &lt;br /&gt;
*골품제도에 의한 계급 사회였던 신라는 신분과 관등에 따라 복색이 구분됨 &lt;br /&gt;
*포나 저고리를 대로 여미는 형태 외에 옷고름을 부착하여 착용,옷고름은 길이가 길었음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그림11.png|thumb|직령합임포]]&lt;br /&gt;
===①직령합임포=== &lt;br /&gt;
*신라의 포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은 대부분 통일 이후의 유물 &lt;br /&gt;
*이전시대: 신라 저고리 및 고구려, 백제를 비롯한 주변국의 포 형태를 통해 유추 &lt;br /&gt;
&amp;quot;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복식은 같다“ 는 사서 곳곳의 기록 &lt;br /&gt;
&lt;br /&gt;
[[파일:그림9.png|thumb|직령교임포]]&lt;br /&gt;
===②직령교임포=== &lt;br /&gt;
*앞이 막혀있는 전페형 외에도 전개형의 직령교임포를 입었음 &amp;lt;김유신묘, 십이지신상&amp;gt;&lt;br /&gt;
앞이 트이고 직선형의 깃이 서로 교차되어 여며짐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그림10.png|thumb|방포]]&lt;br /&gt;
===③방포=== &lt;br /&gt;
*비구가 입는 3종의 기사가 모두 방형인데서 나온 말 &lt;br /&gt;
*사각을 의미하는 방(方,ㅁ), 고대에 당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상 &lt;br /&gt;
*우리 저고리 바지 치마의 구조가 모두 방형을 기초로 하고있음&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10.png</id>
		<title>파일:그림10.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10.png"/>
				<updated>2016-12-25T15:26: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9.png</id>
		<title>파일:그림9.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9.png"/>
				<updated>2016-12-25T15:26: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11.png</id>
		<title>파일:그림11.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11.png"/>
				<updated>2016-12-25T15:26: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B%91%90%EB%A3%A8%EB%A7%88%EA%B8%B0</id>
		<title>상의-두루마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B%91%90%EB%A3%A8%EB%A7%88%EA%B8%B0"/>
				<updated>2016-12-25T15:24: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두루마기 : 포(袍)==&lt;br /&gt;
*신분이나 의식, 의례용도, 방한목적 &lt;br /&gt;
*골품제도에 의한 계급 사회였던 신라는 신분과 관등에 따라 복색이 구분됨 &lt;br /&gt;
*포나 저고리를 대로 여미는 형태 외에 옷고름을 부착하여 착용 &lt;br /&gt;
옷고름은 길이가 길었음 &lt;br /&gt;
&lt;br /&gt;
&lt;br /&gt;
===①직령합임포=== &lt;br /&gt;
*신라의 포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은 대부분 통일 이후의 유물 &lt;br /&gt;
*이전시대: 신라 저고리 및 고구려, 백제를 비롯한 주변국의 포 형태를 통해 유추 &lt;br /&gt;
&amp;quot;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복식은 같다“ 는 사서 곳곳의 기록 &lt;br /&gt;
&lt;br /&gt;
===②직령교임포=== &lt;br /&gt;
*앞이 막혀있는 전페형 외에도 전개형의 직령교임포를 입었음 &amp;lt;김유신묘, 십이지신상&amp;gt;&lt;br /&gt;
앞이 트이고 직선형의 깃이 서로 교차되어 여며짐 &lt;br /&gt;
&lt;br /&gt;
===③방포=== &lt;br /&gt;
*비구가 입는 3종의 기사가 모두 방형인데서 나온 말 &lt;br /&gt;
*사각을 의미하는 방(方,ㅁ), 고대에 당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상 &lt;br /&gt;
*우리 저고리 바지 치마의 구조가 모두 방형을 기초로 하고있음&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B%91%90%EB%A3%A8%EB%A7%88%EA%B8%B0</id>
		<title>상의-두루마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83%81%EC%9D%98-%EB%91%90%EB%A3%A8%EB%A7%88%EA%B8%B0"/>
				<updated>2016-12-25T15:23: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새 문서: 두루마기 : 포(袍) *신분이나 의식, 의례용도, 방한목적  *골품제도에 의한 계급 사회였던 신라는 신분과 관등에 따라 복색이 구분됨  *포나...&lt;/p&gt;
&lt;hr /&gt;
&lt;div&gt;두루마기 : 포(袍)&lt;br /&gt;
*신분이나 의식, 의례용도, 방한목적 &lt;br /&gt;
*골품제도에 의한 계급 사회였던 신라는 신분과 관등에 따라 복색이 구분됨 &lt;br /&gt;
*포나 저고리를 대로 여미는 형태 외에 옷고름을 부착하여 착용 &lt;br /&gt;
옷고름은 길이가 길었음 &lt;br /&gt;
&lt;br /&gt;
&lt;br /&gt;
①직령합임포 &lt;br /&gt;
*신라의 포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은 대부분 통일 이후의 유물 &lt;br /&gt;
*이전시대: 신라 저고리 및 고구려, 백제를 비롯한 주변국의 포 형태를 통해 유추 &lt;br /&gt;
&amp;quot;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복식은 같다“ 는 사서 곳곳의 기록 &lt;br /&gt;
&lt;br /&gt;
②직령교임포 &lt;br /&gt;
*앞이 막혀있는 전페형 외에도 전개형의 직령교임포를 입었음 &amp;lt;김유신묘, 십이지신상&amp;gt;&lt;br /&gt;
앞이 트이고 직선형의 깃이 서로 교차되어 여며짐 &lt;br /&gt;
&lt;br /&gt;
③방포 &lt;br /&gt;
*비구가 입는 3종의 기사가 모두 방형인데서 나온 말 &lt;br /&gt;
*사각을 의미하는 방(方,ㅁ), 고대에 당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상 &lt;br /&gt;
*우리 저고리 바지 치마의 구조가 모두 방형을 기초로 하고있음&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B%B0%B1%EC%A0%9C</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백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B%B0%B1%EC%A0%9C"/>
				<updated>2016-12-25T15:21: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새 문서:  ==역사적 배경== 지도 B.C 1세기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한 백제의 역사는 한성시대 493년(B.C18-A.D 475) ,웅진 시대 63년...&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파일:정소영1.png|thumb|지도]]&lt;br /&gt;
B.C 1세기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한 백제의 역사는 한성시대 493년(B.C18-A.D 475) ,웅진 시대 63년 (475-&lt;br /&gt;
538), 사비시대122년 (538-660)으로 구분된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삼국을 이루며 고이왕(고이왕) 234-&lt;br /&gt;
286)집권 시기에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관제정비, 관복 제정 및 율령을 반포하여 고대 국가의 &lt;br /&gt;
체제를 마련하였다.&lt;br /&gt;
*한성시대 : B.C 18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백제를 건국한 이후 A.D 475년(개로왕 21년)까지를 말한다. &lt;br /&gt;
*웅진시대  :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한 475년부터 성왕이 백제 중흥을 표방하면서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긴 538년(성왕 16년)까지를 말한다.&lt;br /&gt;
*사비시대  :  538년(성왕16년)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백제가 망한 660년(의자왕 20년)까지를 말한다. &lt;br /&gt;
&lt;br /&gt;
===인종학적 구성===&lt;br /&gt;
[[파일:정소영2.png|thumb|백제인의 얼굴]]&lt;br /&gt;
*백제인의 얼굴을 복원한 결과 얼굴과 코가 길고 치아가 크며 눈 사이가 좁은 북방인의 얼굴을 갖고 있다.&lt;br /&gt;
*『魏書』 卷100 列傳 第88 百濟國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백제가 부여국을 선조로 한다는 고서의 기록들과 연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신분구조===&lt;br /&gt;
&amp;lt;&amp;lt; 梁書&amp;gt;&amp;gt; 卷54 列傅48  其國有二十二簷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lt;br /&gt;
&amp;lt;&amp;lt;양서&amp;gt;&amp;gt;기록에 따르면 나라에 22담로를 두고 왕실의 자제들을 보내어 &lt;br /&gt;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사비로 천도한 후 지방통치제는 5방제로 변경 &lt;br /&gt;
되어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파일:정소영3.PNG|thumb|부여 고구려 신라와의 비교유물]]&lt;br /&gt;
(1) 부여 고구려 신라와의 관계 &lt;br /&gt;
&lt;br /&gt;
*문헌에 백제 의복에 대수자포大袖紫袍나, ‘부인의사포 婦人’등 특별히 ‘포를 지칭하여 표기함은 “백제의 선조가 부여로 부 터 내려왔다” 고 하는 고서 기록을 뒷 바침 하는 부분이 나타난다&lt;br /&gt;
&lt;br /&gt;
(2) 중앙 아시와의 관계 &lt;br /&gt;
[[파일:정소영4.PNG|thumb|중앙아시아와 백제 비교유물]]&lt;br /&gt;
*고대 유목민 문화권의 국가들은 영토 개념의 국가가 아닌 거점 확보의 네트워크network 국가로서, 우리나라에서 초원길을 거쳐 그리스,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물적 교류가 이루어졌음 은 고고학 유물들이 입증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신라의 혜초가 여행했던 카슈카르, 투르판,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역 북도와 호탄, 누란 등 서역 남도, 그리고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동 서 교류의 관문인 둔황서 서안에 이르는 실크로드까지 광범위한 문화적 소통이었음을 볼때 중아아시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lt;br /&gt;
&lt;br /&gt;
(3) 일본과의 관계 &lt;br /&gt;
ㄴ. 천왕가계와의 관계&amp;lt;br/&amp;gt;&lt;br /&gt;
*배경 : 백제계가 일본 왕실의 실력자로 들어서게 된 것은 3세기 후반 부터 &lt;br /&gt;
4세기까지(고분시대) 약 120년 동안의 오오진왕(4세기 말)과 인덕왕 &lt;br /&gt;
(313-399)때이다. &lt;br /&gt;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의 오오진왕에게 보냈다는 칠지도의 소장 명문.&lt;br /&gt;
*&amp;lt;&amp;lt;일본서기&amp;gt;&amp;gt;에 칠지도가 ‘서기 372년 백제가 오오진왕 어머니 &lt;br /&gt;
신공황후에 내린 하사품’이라고 기록 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lt;br /&gt;
&lt;br /&gt;
*&amp;lt;&amp;lt;남제서 南濟書&amp;gt;&amp;gt;백제국전百濟國傳 에도 역시 ‘당시 백제가 5개 속국의 후왕을 거느리고 있었고  일본이 그 중 하나이다’&lt;br /&gt;
-&amp;gt; 4세기 후반 백제계인 오오진이 왜국 왕실의 실력자(오오진왕)로 들어 왔다는 설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으며 이는 바로 왜국이 백제 22담로 중의 하나로서 백제의 속국이 었다는 것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4.PNG</id>
		<title>파일:정소영4.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4.PNG"/>
				<updated>2016-12-25T15:14: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3.PNG</id>
		<title>파일:정소영3.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3.PNG"/>
				<updated>2016-12-25T15:14: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2.png</id>
		<title>파일:정소영2.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2.png"/>
				<updated>2016-12-25T15:14: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1.png</id>
		<title>파일:정소영1.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1.png"/>
				<updated>2016-12-25T15:14: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정소영 사용자가 &amp;amp;quot;파일:정소영1.png&amp;amp;quot; 파일의 새 판을 올렸습니다.&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1.png</id>
		<title>파일:정소영1.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A0%95%EC%86%8C%EC%98%811.png"/>
				<updated>2016-12-25T15:13: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id>
		<title>양직공도 역사적 배경:신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
				<updated>2016-12-25T15:02: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새 문서: = 신라의 역사적 배경 =  # 역사적 배경 # 인종학적 구성 # 정신문화 # 다른 나라와의 관계  ==1.역사적 배경== 신라 *...&lt;/p&gt;
&lt;hr /&gt;
&lt;div&gt;= 신라의 역사적 배경 =&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lt;br /&gt;
# 인종학적 구성&lt;br /&gt;
# 정신문화&lt;br /&gt;
# 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1.역사적 배경==&lt;br /&gt;
[[파일:그림1.png|섬네일|신라]]&lt;br /&gt;
*신라의 기원은 중국 진나라의 망인과 연관된 진한의 후예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amp;lt;br/&amp;gt;&lt;br /&gt;
*삼한 가운데 진한 12개 성읍국의 하나인 사로국을 모체로 진한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금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lt;br /&gt;
*신라의 국호는 서벌 사라 사로 서나 계림국 등으로 표기 되었으며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503년 신라로 확장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인종학적 구성===&lt;br /&gt;
&lt;br /&gt;
*둔황석굴에서 발굴된 신라송공사에 나온 신라인의 체격을 통해 볼 때 대체 백제 시대 미륵사지 연못터에서 백제에서 통일 신라에 이르는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뼈 2구가 발견 되었는데 이들은 25-30세로 키 168cm,162cm로 현대인과 다름이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후한서》에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lt;br /&gt;
변을 쓰고 금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기록을 보아 고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위치했던 한민족이 오랫동안 그 지역에 살아온 토착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신라 역시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예맥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맥 사람들은 북몽골로이드 특징인 샤머니즘을 믿었는데 신라에서 왕호로 한때 우두머리 샤먼이라는 의미의 차차웅 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신라에 미친 샤머니즘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정신문화===&lt;br /&gt;
====신조 사상====&lt;br /&gt;
[[파일:그림8.png|500픽셀|섬네일|신조사상]]&lt;br /&gt;
*새를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을 연결 짓는 매개자 즉 영혼을 천계로 가지고 돌아가는 영조(영조)로 여겼기 때문일 것 이다. 서봉총 금관의 새와 천마총의 새 모양 금제관식 등은 샤먼의 기능을 지녔던 &lt;br /&gt;
신라왕들의 새 토템으로 망자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amp;lt;br/&amp;gt;&lt;br /&gt;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김알지의 탄생 등을 통해 새는 고대인의 삶과 생활 및 죽음과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수 사상====&lt;br /&gt;
&lt;br /&gt;
[[파일:신.jpg|섬네일|신수사상]]&lt;br /&gt;
&lt;br /&gt;
*삼국 및 가야의 지배층이 나무와 화초의 형태를 관모에 사용 하는 것을 볼 때, 고대인들의 사유세계 속에 우주목 또는 세계수 사상이 일찌감치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출토물 중 금관 장식을 통해 나무를 성스로운 존재로 여겨 상징화 했다.&lt;br /&gt;
→ 신라 금관의 기본형을 이루는 산자형 장식은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인들이 &lt;br /&gt;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나무를 하늘로 통하는 통로로 인식하여 신성시 한 것의 견해도 있다.&lt;br /&gt;
&lt;br /&gt;
=== 3)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고구려•백제와의 관계====&lt;br /&gt;
*북으로 고구려, 서로는 백제와 마주하고 있던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정치, 사회 생활문화에 있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끊임 없는 외교활동을 펼쳤다.&lt;br /&gt;
*중국사서 곳곳에 ‘삼국의 의복과 음식이 같다’는 기록을 통해 삼국이 영토 확장 뿐 아니라 한 민족으로 문화적 교류를 공유 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과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br /&gt;
&lt;br /&gt;
====스키타이와 흉노와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C%97%90_%EA%B7%B8%EB%A0%A4%EC%A7%84_%EA%B3%A0%EB%8C%80_%EB%B3%B5%EC%8B%9D</id>
		<title>양직공도에 그려진 고대 복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C%97%90_%EA%B7%B8%EB%A0%A4%EC%A7%84_%EA%B3%A0%EB%8C%80_%EB%B3%B5%EC%8B%9D"/>
				<updated>2016-12-25T15:00: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콘텐츠 주제'''==&lt;br /&gt;
[[파일:정소영_양직공도.jpg]]&lt;br /&gt;
*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복식 콘텐츠 주제: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이다당초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개의 사신만이 남아있다. 양직 공도에 나타난 각 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도식화하여서 고대 한국복식의 비교 및 연구를 조금더 면밀히 살펴보고자 선정하였다.&lt;br /&gt;
&lt;br /&gt;
=='''데이터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740px&amp;quot; src=&amp;quot;http://digerati.aks.ac.kr/Dhlab/2016/203/정소영/정소영_샘플.htm&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관련 문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 관심 문서||style=&amp;quot;width:200px&amp;quot;|관계||style=&amp;quot;width:250px&amp;quot;|관련 문서&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에 나타난 인물]]&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 역사적 배경:백제]]&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 역사적 배경:신라]]&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 상의-저고리 ]]&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상의-두루마기]]&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하의-바지:고]]&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장신구]]&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문양]]&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색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C%97%90_%EA%B7%B8%EB%A0%A4%EC%A7%84_%EA%B3%A0%EB%8C%80_%EB%B3%B5%EC%8B%9D</id>
		<title>양직공도에 그려진 고대 복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C%97%90_%EA%B7%B8%EB%A0%A4%EC%A7%84_%EA%B3%A0%EB%8C%80_%EB%B3%B5%EC%8B%9D"/>
				<updated>2016-12-25T14:59: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콘텐츠 주제'''==&lt;br /&gt;
[[파일:정소영_양직공도.jpg]]&lt;br /&gt;
*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복식 콘텐츠 주제: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이다당초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개의 사신만이 남아있다. 양직 공도에 나타난 각 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도식화하여서 고대 한국복식의 비교 및 연구를 조금더 면밀히 살펴보고자 선정하였다.&lt;br /&gt;
&lt;br /&gt;
=='''데이터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740px&amp;quot; src=&amp;quot;http://digerati.aks.ac.kr/Dhlab/2016/203/정소영/정소영_샘플.htm&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관련 문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 관심 문서||style=&amp;quot;width:200px&amp;quot;|관계||style=&amp;quot;width:250px&amp;quot;|관련 문서&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에 나타난 인물]]&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고구려]]&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백제]]&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신라]]&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 상의-저고리 ]]&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상의-두루마기]]&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하의-바지:고]]&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장신구]]&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문양]]&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복식]] || ~에는~가 있다 || [[색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C%97%90_%EA%B7%B8%EB%A0%A4%EC%A7%84_%EA%B3%A0%EB%8C%80_%EB%B3%B5%EC%8B%9D</id>
		<title>양직공도에 그려진 고대 복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6%91%EC%A7%81%EA%B3%B5%EB%8F%84%EC%97%90_%EA%B7%B8%EB%A0%A4%EC%A7%84_%EA%B3%A0%EB%8C%80_%EB%B3%B5%EC%8B%9D"/>
				<updated>2016-12-25T14:58: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콘텐츠 주제'''==&lt;br /&gt;
[[파일:정소영_양직공도.jpg]]&lt;br /&gt;
*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복식 콘텐츠 주제: 양직공도에 나타난 고대 복식 시각화&lt;br /&gt;
*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화첩이다당초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개의 사신만이 남아있다. 양직 공도에 나타난 각 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도식화하여서 고대 한국복식의 비교 및 연구를 조금더 면밀히 살펴보고자 선정하였다.&lt;br /&gt;
&lt;br /&gt;
=='''데이터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740px&amp;quot; src=&amp;quot;http://digerati.aks.ac.kr/Dhlab/2016/203/정소영/정소영_샘플.htm&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관련 문서'''==&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50px&amp;quot;| 관심 문서||style=&amp;quot;width:200px&amp;quot;|관계||style=&amp;quot;width:250px&amp;quot;|관련 문서&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양직공도에 나타난 인물]]&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고구려]]&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백제]]&lt;br /&gt;
|-&lt;br /&gt;
| [[양직공도란]] || ~는~가 있다 || [[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신라]]&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나타난 복식]] || ~에는~가 있다 || [[ 상의-저고리 ]]&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나타난 복식]] || ~에는~가 있다 || [[상의-두루마기]]&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나타난 복식]] || ~에는~가 있다 || [[하의-바지:고]]&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나타난 복식]] || ~에는~가 있다 || [[장신구]]&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나타난 복식]] || ~에는~가 있다 || [[문양]]&lt;br /&gt;
|-&lt;br /&gt;
| [[양직공도 나타난 복식]] || ~에는~가 있다 || [[색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숙명여자대학교]] [[분류:정소영]]&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5%AD_%EA%B3%A0%EB%8C%80_%EC%82%BC%EA%B5%AD%EC%9D%98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id>
		<title>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신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5%AD_%EA%B3%A0%EB%8C%80_%EC%82%BC%EA%B5%AD%EC%9D%98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
				<updated>2016-12-25T14:57: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 신라의 역사적 배경 =&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lt;br /&gt;
# 인종학적 구성&lt;br /&gt;
# 정신문화&lt;br /&gt;
# 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1.역사적 배경==&lt;br /&gt;
[[파일:그림1.png|섬네일|신라]]&lt;br /&gt;
*신라의 기원은 중국 진나라의 망인과 연관된 진한의 후예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amp;lt;br/&amp;gt;&lt;br /&gt;
*삼한 가운데 진한 12개 성읍국의 하나인 사로국을 모체로 진한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금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lt;br /&gt;
*신라의 국호는 서벌 사라 사로 서나 계림국 등으로 표기 되었으며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503년 신라로 확장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인종학적 구성===&lt;br /&gt;
&lt;br /&gt;
*둔황석굴에서 발굴된 신라송공사에 나온 신라인의 체격을 통해 볼 때 대체 백제 시대 미륵사지 연못터에서 백제에서 통일 신라에 이르는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뼈 2구가 발견 되었는데 이들은 25-30세로 키 168cm,162cm로 현대인과 다름이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후한서》에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lt;br /&gt;
변을 쓰고 금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기록을 보아 고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위치했던 한민족이 오랫동안 그 지역에 살아온 토착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신라 역시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예맥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맥 사람들은 북몽골로이드 특징인 샤머니즘을 믿었는데 신라에서 왕호로 한때 우두머리 샤먼이라는 의미의 차차웅 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신라에 미친 샤머니즘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정신문화===&lt;br /&gt;
====신조 사상====&lt;br /&gt;
[[파일:그림8.png|500픽셀|섬네일|신조사상]]&lt;br /&gt;
*새를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을 연결 짓는 매개자 즉 영혼을 천계로 가지고 돌아가는 영조(영조)로 여겼기 때문일 것 이다. 서봉총 금관의 새와 천마총의 새 모양 금제관식 등은 샤먼의 기능을 지녔던 &lt;br /&gt;
신라왕들의 새 토템으로 망자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amp;lt;br/&amp;gt;&lt;br /&gt;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김알지의 탄생 등을 통해 새는 고대인의 삶과 생활 및 죽음과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수 사상====&lt;br /&gt;
&lt;br /&gt;
[[파일:신.jpg|섬네일|신수사상]]&lt;br /&gt;
&lt;br /&gt;
*삼국 및 가야의 지배층이 나무와 화초의 형태를 관모에 사용 하는 것을 볼 때, 고대인들의 사유세계 속에 우주목 또는 세계수 사상이 일찌감치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출토물 중 금관 장식을 통해 나무를 성스로운 존재로 여겨 상징화 했다.&lt;br /&gt;
→ 신라 금관의 기본형을 이루는 산자형 장식은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인들이 &lt;br /&gt;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나무를 하늘로 통하는 통로로 인식하여 신성시 한 것의 견해도 있다.&lt;br /&gt;
&lt;br /&gt;
=== 3)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고구려•백제와의 관계====&lt;br /&gt;
*북으로 고구려, 서로는 백제와 마주하고 있던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정치, 사회 생활문화에 있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끊임 없는 외교활동을 펼쳤다.&lt;br /&gt;
*중국사서 곳곳에 ‘삼국의 의복과 음식이 같다’는 기록을 통해 삼국이 영토 확장 뿐 아니라 한 민족으로 문화적 교류를 공유 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과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br /&gt;
&lt;br /&gt;
====스키타이와 흉노와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5%AD_%EA%B3%A0%EB%8C%80_%EC%82%BC%EA%B5%AD%EC%9D%98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id>
		<title>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신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5%AD_%EA%B3%A0%EB%8C%80_%EC%82%BC%EA%B5%AD%EC%9D%98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
				<updated>2016-12-25T14:57: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 신라의 역사적 배경 =&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lt;br /&gt;
# 인종학적 구성&lt;br /&gt;
# 정신문화&lt;br /&gt;
# 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1.역사적 배경==&lt;br /&gt;
[[파일:그림1.png|신라]]&lt;br /&gt;
*신라의 기원은 중국 진나라의 망인과 연관된 진한의 후예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amp;lt;br/&amp;gt;&lt;br /&gt;
*삼한 가운데 진한 12개 성읍국의 하나인 사로국을 모체로 진한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금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lt;br /&gt;
*신라의 국호는 서벌 사라 사로 서나 계림국 등으로 표기 되었으며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503년 신라로 확장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인종학적 구성===&lt;br /&gt;
&lt;br /&gt;
*둔황석굴에서 발굴된 신라송공사에 나온 신라인의 체격을 통해 볼 때 대체 백제 시대 미륵사지 연못터에서 백제에서 통일 신라에 이르는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뼈 2구가 발견 되었는데 이들은 25-30세로 키 168cm,162cm로 현대인과 다름이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후한서》에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lt;br /&gt;
변을 쓰고 금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기록을 보아 고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위치했던 한민족이 오랫동안 그 지역에 살아온 토착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신라 역시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예맥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맥 사람들은 북몽골로이드 특징인 샤머니즘을 믿었는데 신라에서 왕호로 한때 우두머리 샤먼이라는 의미의 차차웅 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신라에 미친 샤머니즘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정신문화===&lt;br /&gt;
====신조 사상====&lt;br /&gt;
[[파일:그림8.png|500픽셀|신조사상]]&lt;br /&gt;
*새를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을 연결 짓는 매개자 즉 영혼을 천계로 가지고 돌아가는 영조(영조)로 여겼기 때문일 것 이다. 서봉총 금관의 새와 천마총의 새 모양 금제관식 등은 샤먼의 기능을 지녔던 &lt;br /&gt;
신라왕들의 새 토템으로 망자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amp;lt;br/&amp;gt;&lt;br /&gt;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김알지의 탄생 등을 통해 새는 고대인의 삶과 생활 및 죽음과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수 사상====&lt;br /&gt;
&lt;br /&gt;
[[파일:신.jpg|섬네일|신수사상]]&lt;br /&gt;
&lt;br /&gt;
*삼국 및 가야의 지배층이 나무와 화초의 형태를 관모에 사용 하는 것을 볼 때, 고대인들의 사유세계 속에 우주목 또는 세계수 사상이 일찌감치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출토물 중 금관 장식을 통해 나무를 성스로운 존재로 여겨 상징화 했다.&lt;br /&gt;
→ 신라 금관의 기본형을 이루는 산자형 장식은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인들이 &lt;br /&gt;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나무를 하늘로 통하는 통로로 인식하여 신성시 한 것의 견해도 있다.&lt;br /&gt;
&lt;br /&gt;
=== 3)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고구려•백제와의 관계====&lt;br /&gt;
*북으로 고구려, 서로는 백제와 마주하고 있던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정치, 사회 생활문화에 있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끊임 없는 외교활동을 펼쳤다.&lt;br /&gt;
*중국사서 곳곳에 ‘삼국의 의복과 음식이 같다’는 기록을 통해 삼국이 영토 확장 뿐 아니라 한 민족으로 문화적 교류를 공유 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과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br /&gt;
&lt;br /&gt;
====스키타이와 흉노와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8B%A0.jpg</id>
		<title>파일:신.jp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8B%A0.jpg"/>
				<updated>2016-12-25T14:57: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5%AD_%EA%B3%A0%EB%8C%80_%EC%82%BC%EA%B5%AD%EC%9D%98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id>
		<title>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적 배경:신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5%9C%EA%B5%AD_%EA%B3%A0%EB%8C%80_%EC%82%BC%EA%B5%AD%EC%9D%98_%EC%97%AD%EC%82%AC%EC%A0%81_%EB%B0%B0%EA%B2%BD:%EC%8B%A0%EB%9D%BC"/>
				<updated>2016-12-25T14:54: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 신라의 역사적 배경 =&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lt;br /&gt;
# 인종학적 구성&lt;br /&gt;
# 정신문화&lt;br /&gt;
# 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1.역사적 배경==&lt;br /&gt;
[[파일:그림1.png|신라]]&lt;br /&gt;
*신라의 기원은 중국 진나라의 망인과 연관된 진한의 후예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amp;lt;br/&amp;gt;&lt;br /&gt;
*삼한 가운데 진한 12개 성읍국의 하나인 사로국을 모체로 진한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금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lt;br /&gt;
*신라의 국호는 서벌 사라 사로 서나 계림국 등으로 표기 되었으며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503년 신라로 확장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인종학적 구성===&lt;br /&gt;
&lt;br /&gt;
*둔황석굴에서 발굴된 신라송공사에 나온 신라인의 체격을 통해 볼 때 대체 백제 시대 미륵사지 연못터에서 백제에서 통일 신라에 이르는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뼈 2구가 발견 되었는데 이들은 25-30세로 키 168cm,162cm로 현대인과 다름이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후한서》에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lt;br /&gt;
변을 쓰고 금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기록을 보아 고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위치했던 한민족이 오랫동안 그 지역에 살아온 토착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신라 역시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예맥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맥 사람들은 북몽골로이드 특징인 샤머니즘을 믿었는데 신라에서 왕호로 한때 우두머리 샤먼이라는 의미의 차차웅 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신라에 미친 샤머니즘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정신문화===&lt;br /&gt;
====신조 사상====&lt;br /&gt;
[[파일:그림8.png|500픽셀|신조사상]]&lt;br /&gt;
*새를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을 연결 짓는 매개자 즉 영혼을 천계로 가지고 돌아가는 영조(영조)로 여겼기 때문일 것 이다. 서봉총 금관의 새와 천마총의 새 모양 금제관식 등은 샤먼의 기능을 지녔던 &lt;br /&gt;
신라왕들의 새 토템으로 망자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amp;lt;br/&amp;gt;&lt;br /&gt;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김알지의 탄생 등을 통해 새는 고대인의 삶과 생활 및 죽음과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신수 사상====&lt;br /&gt;
*삼국 및 가야의 지배층이 나무와 화초의 형태를 관모에 사용 하는 것을 볼 때, 고대인들의 사유세계 속에 우주목 또는 세계수 사상이 일찌감치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lt;br /&gt;
→ 신라 출토물 중 금관 장식을 통해 나무를 성스로운 존재로 여겨 상징화 했다.&lt;br /&gt;
→ 신라 금관의 기본형을 이루는 산자형 장식은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인들이 &lt;br /&gt;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나무를 하늘로 통하는 통로로 인식하여 신성시 한 것의 견해도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 3)다른 나라와의 관계===&lt;br /&gt;
====고구려•백제와의 관계====&lt;br /&gt;
*북으로 고구려, 서로는 백제와 마주하고 있던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정치, 사회 생활문화에 있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끊임 없는 외교활동을 펼쳤다.&lt;br /&gt;
*중국사서 곳곳에 ‘삼국의 의복과 음식이 같다’는 기록을 통해 삼국이 영토 확장 뿐 아니라 한 민족으로 문화적 교류를 공유 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과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br /&gt;
&lt;br /&gt;
====스키타이와 흉노와의 관계====&lt;br /&gt;
*신라의 뱃사람들과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로 실제로 8세기 초 편찬된 《이즈모 풍토기》에 “신이 신라 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 땅 한조각을 떼어다 바다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8.png</id>
		<title>파일:그림8.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8.png"/>
				<updated>2016-12-25T14:48: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3.jpg</id>
		<title>파일:그림3.jp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3.jpg"/>
				<updated>2016-12-25T14:46: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6.png</id>
		<title>파일:그림6.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6.png"/>
				<updated>2016-12-25T14:45: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7.png</id>
		<title>파일:그림7.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7.png"/>
				<updated>2016-12-25T14:44: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5.png</id>
		<title>파일:그림5.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5.png"/>
				<updated>2016-12-25T14:44: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2.png</id>
		<title>파일:그림2.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A%B7%B8%EB%A6%BC2.png"/>
				<updated>2016-12-25T14:44: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정소영: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정소영</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