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二 唐紀
목차
通鑑節要 卷之四十二
唐紀
肅宗
名은 亨이니 玄宗第三子라
[丙申]十五載라
○ 顔杲卿이 起兵纔八日하야 守備未完이러니 史思明, 蔡希德이 引兵하야 皆至城下라 杲卿이 告急於王承業【大京尹이라】한대 承業이 欲竊其功하야 利於城陷하야 遂擁兵不救라 杲卿이 晝夜拒戰호되 糧盡矢竭하야 城陷하니 賊이 縱兵殺萬餘人하고 執杲卿及袁履謙等하야 送洛陽하다 祿山이 數之曰 汝自范陽戶曹어늘 我奏汝爲判官하야 不數年에 超至太守하니 何負於汝而反耶아 杲卿이 瞋目【瞋은 昌人反이니 張目也라 】罵曰 汝本營州牧羊羯奴【羯은 居謁反이니 營州柳城雜胡라 [頭註] 羯은 地名이니 晉匈奴別部人居之러니 後因號匈奴爲羯하니라 】러니 天子擢汝爲三道節度使하시니 恩幸無比어늘 何負於汝而反고 我는 世爲唐臣하니 祿位皆唐有라 雖爲汝所奏나 豈從汝反耶아 我爲國討賊에 恨不斬汝하노니 何爲反也오 臊羯狗【臊는 蘇曹反이니 腥也라 】아 何不速殺我오한대 祿山이 大怒하야 幷袁履謙等하야 縛於中橋【天津中橋也라】之柱而咼之【咼는 音寡니 剔也라 】하니 杲卿, 履謙이 比死토록 罵不虛口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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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杲卿이 군대를 일으킨 지 겨우 8일이어서 수비가 아직 완전하지 못했는데, 史思明과 蔡希德이 군대를 이끌고 范陽城 아래에 이르렀다. 顔杲卿이 王承業에게 위급함을 고하였으나王承業은【王承業은 大京의 尹이었다.】 그의 공을 가로채고자 하여 성이 함락되는 것을 이롭게 여겨 마침내 군대를 보유하고(출동시키지 않고) 구원하지 않았다. 顔杲卿이 밤낮으로 적에게 항거하여 싸웠으나 양식이 다하고 화살이 떨어져 성이 함락되니, 적이 군대를 풀어 만여 명을 죽이고顔杲卿과 袁履謙 등을 사로잡아洛陽으로 압송하였다. 安祿山이 〈顔杲卿에게〉數罪하기를 “너는 본래 范陽의 戶曹의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황제께 아뢰어 너를 判官으로 삼고 몇 년이 안 되어 크게 승진해서 太守에 이르렀으니, 내가 너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나를 배반하였는가.” 하였다. 顔杲卿이 눈을 부릅뜨고【瞋은 昌人反(진)이니, 눈을 부릅뜨는 것이다.】 꾸짖기를 “너는 본래 營州의 양을 치던 羯族의 종이었는데【[釋義] 羯은 居謁反(갈)이니, 營州柳城의 雜胡이다. [頭註] 羯은 地名이니, 晉(東晉)나라 때 匈奴의 別部 사람들이 거주하였는데, 뒤에 인하여 匈奴를 羯이라고 칭하였다.】 천자가 너를 발탁하여 三道의 節度使를 삼으셨으니, 은혜와 총애가 견줄 사람이 없는데 천자가 너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천자를 배반하였는가. 나는 대대로 唐나라의 신하이니, 녹과 지위가 모두 唐나라의 소유이다. 내 비록 너의 奏請으로 등용되었으나 어찌 너를 따라 배반하겠는가. 내가 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함에 너를 목 베지 못하는 것이 통한이니, 어찌 나더러 배반했다고 하는가. 누린내 나는 개 같은 羯族아!【臊은 蘇曹反(소)이니 누린내가 나는 것이다.】 어찌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는가.” 하였다. 安祿山이 크게 노하여 袁履謙 등과 함께 中橋의【中橋는 天津의 中橋이다.】 기둥에 묶어 찢어죽이니,【咼는 음이 과이니, 쪼개는(능지처참하는) 것이다.】顔杲卿, 袁履謙이 죽을 때까지 꾸짖는 말을 입에서 그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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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是에 譙郡太守楊萬石이 以郡降安祿山하고 逼眞源令張巡하야 使爲長史하야 西迎賊이어늘 巡이 至眞源하야 帥吏民하고 哭於玄元皇帝【高宗進號老子曰太上玄元皇帝라하니 唐祖老子하니라 】廟하고 起兵討賊하니 吏民樂從者數千人이라 巡이 選精兵千人하야 至雍丘하야 與賈賁【賁는 波義反이라 河南都知兵馬使니 前至雍丘하야 有衆二千하니라 】合하다 令狐潮【令狐는 複姓이니 雍丘令이라 】引賊精兵하야 攻雍丘【潮以縣降賊이어늘 賊이 使擊淮陽이러니 俘百餘人하야 拘於雍丘하고 將殺之한대 淮陽兵이 作亂하니 潮棄妻子走라 賁得乘其間하야 入據雍丘하니라 】하니 賁出戰敗死어늘 張巡이 力戰却賊하고 因兼領賁衆하다 乃使千人乘城하고 自帥千人하야 分數隊하야 開門突出할새 巡이 身先士卒하야 直衝賊陳(陣)하니 人馬辟易【辟易은 驚郤貌라 漢書註云 謂開張而易其本處也라 】이라 賊遂退라가 明日에 復進攻城하고 設百礟(砲)環城하니 樓堞皆盡【礟는 披敎反이니 機石也라 環은 音患이니 繞也라 堞은 達叶反이니 城上女垣也라 [通鑑要解] 礟는 俗作砲하니 戰石也라 機石也니 唐李密傳에 以機發石하야 爲攻城具라하니라 】이라 巡이 於城上에 立木柵以拒之러니 賊이 蟻附而登이어늘 巡이 束蒿灌脂하야 焚而投之하니 賊不得上이라 時伺賊隙하야 出兵擊之하고 或夜縋斫營【縋는 直爲反이니 垂繩也라 [通鑑要解] 縋는 說文에 以繩有所懸也라하니라 斫營은 斫賊營壘니라 】하야 積六十餘日에 大小三百餘戰할새 帶甲而食하고 裹瘡復戰하니 賊이 遂敗走라 巡이 乘勝追之하야 獲胡兵二千人而還하니 軍聲이 大振이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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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譙郡 太守楊萬石이 郡을 가지고 安祿山에게 항복하고는眞源縣令張巡을 핍박하여 그를 長史로 삼아 서쪽에서 적을 맞이하게하였다. 張巡이 眞源縣에 이르러 관리와 백성을 거느리고 玄元皇帝의【高宗이 老子에게 尊號를 올리기를 太上玄元皇帝라 하였으니, 唐나라는 老子를 시조로 하였다.】 사당에서 곡한 다음 군대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니, 관리와 백성으로서 기꺼이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張巡이 정예병 천 명을 선발하여 雍丘縣에 이르러賈賁와【賁는 波義反(비)이다. 賈賁는 河南都知兵馬使이니, 앞서 雍丘縣에 이르러 2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연합하였다. 令狐潮가【令狐는 複姓이니, 雍丘縣令이었다.】 적의 정예병을 이끌고서 雍丘縣을 공격하였다.【令狐潮가 雍丘縣을 가지고 적에게 항복하자, 적이 그로 하여금 淮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令狐潮가 백여 명을 사로잡아 雍丘縣에 가두고 장차 이들을 죽이려 하자, 淮陽의 병사들이 난리를 일으키니, 令狐潮가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났다. 賈賁가 그 틈을 타서 雍丘縣에 들어가 점거하였다.】賈賁가 나와 싸우다가패하여죽자張巡이 강력히 싸워 적을 물리치고 인하여 賈賁의 군대를 겸하여 통솔하였다. 張巡이 마침내 천 명으로 하여금 성에 올라가게 하고 자신은 천 명을 거느리고 몇 隊로 나누어서 성문을 열고 突出하였는데, 張巡이 몸소 士卒들 앞에 나서서 賊陣으로 곧바로 돌격하니, 적의 군사와 말들이 피하여 흩어졌다.【辟易은 놀라서 퇴각하는 모양이다. ≪漢書≫의 註에 이르기를 “옆으로 벌려 그 본래 있던 장소를 바꾸는 것이다.” 하였다.】 적이 마침내 피하였다가 다음날 다시 성을 진격하고 백 개의 抛車를 설치하여 성을 둘러싸니, 망루와 성가퀴가 다 부서졌다.【[釋義] 設百礟(砲)環城 樓堞皆盡:[釋義] 礟는 披敎反(표)이니 기계로 돌을 날리는 것이다. 環은 음이 환이니 둘러싸는 것이다. 堞은 達叶反(접)이니 성 위의 女垣(女墻)이다. [通鑑要解] 礟는 시속에서 砲로 쓰니, 돌을 날려 싸우는 것이다. 기구로 돌을 발사하는 것이니, ≪唐書≫〈李密傳〉에 “기구로 돌을 날려서 城을 공격하는 도구로 썼다.” 하였다.】張巡이 성 위에 木柵을 세워 적을 막았는데 적이 개미떼처럼 붙어 올라왔다. 張巡이 쑥을 묶고 여기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던지니, 적이 올라오지 못하였다. 張巡은 때로 적의 틈을 엿보아 군대를 내보내 공격하였고, 혹은 밤중에 밧줄로 군사들을 매달아 성 밖으로 내보내 적의 진영을 공격하였다.【[釋義] 縋는 直爲反(추)이니 밧줄을 드리우는 것이다. [通鑑要解] 縋는 ≪說文≫에 ‘끈을 가지고 매다는 것이다.’ 하였다. 斫營은 賊의 營壘를 기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60여 일 동안 크고 작은 싸움을 벌여 300여 차례 전투하였는데, 갑옷을 입은 채 밥을 먹으며 상처를 싸매고 다시 싸우니, 적이 마침내 敗走하였다. 張巡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오랑캐 병사 2천 명을 사로잡고 돌아오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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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郭子儀, 李光弼이 還常山하니 史思明【賊將이라 】이 收散卒數萬하야 踵其後라 子儀至恒陽하니 思明이 隨至어늘 子儀深溝高壘以待之할새 賊이 來則守하고 去則追之하며 晝則耀兵하고 夜斫其營하니 賊이 不得休息이라 數日에 子儀, 光弼이 議曰 賊倦矣니 可以出戰이라하고 戰于嘉山하야 大破之하야 斬首四萬級하고 捕虜千餘人하다 思明이 墜馬하야 奔于博陵이어늘 光弼이 就圍之하니 軍聲이 大振이라 於是에 河北十餘郡이 皆殺賊守將而降하야 漁陽路再絶하니 賊將士家在漁陽者 無不搖心이라 祿山이 大懼하야 議棄洛陽하고 走歸范陽하다 會에 有告崔乾祐【賊將이라 】在陝에 兵不滿四千이요 皆羸弱無備라하야늘 上이 遣使趣(促)哥舒翰【趣는 讀曰促이라 楊國忠이 疑翰謀己하야 言 翰逗留不進하야 將失機會라한대 上遣中使促之하야 項背相望하니라 】하야 進兵復陝洛하니 翰이 不得已撫膺【擊胸也라 】慟哭하고 引兵出關이라가 遇崔乾祐之軍於靈寶西原하야 翰이 大敗하니 囂聲이 振天地라 賊이 乘勝蹙之하니 後軍이 亦潰하고 河北軍이 望之亦潰하야 瞬息間에 兩岸이 皆空이라 翰이 獨與麾下百餘騎로 入關이러니 乾祐進攻潼關克之하고 蕃將火拔歸仁【火拔은 虜複姓이라 】이 執翰降賊【翰降이어늘 祿山問翰曰 汝常輕我러니 今日如何오한대 翰伏地對曰 臣은 肉眼이라 不識聖人이니이다하니 祿山大悅하니라 】하니 祿山이 以翰爲司空同平章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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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子儀와 李光弼이 常山에서 돌아오니, 史思明이【史思明은 賊將이다.】 흩어진 군대 수만 명을 수습하여 그 뒤를 따라왔다. 郭子儀가 恒陽에 이르니, 史思明이 뒤따라 왔다. 이에 郭子儀는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게 쌓아 대비하였는데, 적이 오면 지키고 떠나가면 추격하며, 낮에는 병력을 과시하고 밤에는 적의 진영을 공격하니, 적이 휴식할 수가 없었다. 며칠 있다가 郭子儀와 李光弼이 의논하기를 “적이 피로하니, 이제 출전할 수 있다.” 하고는 嘉山에서 싸워 적을 대파하여 4만 명의 수급을 베고 포로 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史思明이 말에서 떨어져 博陵으로 도망하자李光弼이 쫒아가 포위하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이에 河北의 10여 郡이 모두 적의 수령과 장수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여漁陽의 길이 다시 끊기니, 적의 장병 중에 집이 漁陽에 있는 자들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安祿山이 크게 두려워하여洛陽을 버리고 范陽으로 돌아갈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마침 황제에게 ‘崔乾祐가【崔乾祐는 賊將이다.】陝州에 있는데 군대가 채 4천 명이 되지 못하고 모두 파리하고 약하여 수비가 없다.’고 아뢰는 자가 있었다. 上이 사자를 보내어 哥舒翰을【趣는 促으로 읽는다. 楊國忠은 哥舒翰이 자기를 도모하는가 의심하여 이르기를 “哥舒翰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아니하여 장차 좋은 기회를 잃게 생겼다.”라고 하자, 上이 中使를 보내어 독촉해서 목과 등이 서로 이어지듯 빈번하였다.】 재촉해서 진군하여 陝州와 洛州를 수복하게하니, 哥舒翰이 마지못하여 가슴을 치면서【撫膺은 가슴을 치는 것이다.】 통곡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관문을 나갔다가崔乾祐의 군대를 靈寶의 西原에서 만나 싸워哥舒翰이 크게 패하니, 군사들의 고함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적이 승세를 타고 압박하니, 뒤의 군대가 또한 무너졌고 河北의 군대가 이것을 보고 또한 무너져서 순식간에 두 江岸이 모두 텅 비게 되었다. 哥舒翰은 홀로 휘하 기병 백여 명과 함께 관문에 들어갔는데, 崔乾祐가 潼關으로 진격하여함락시키고, 蕃將火拔歸仁이【火拔은 오랑캐의 複姓이다.】哥舒翰을 사로잡아 적에게 항복시키니,【哥舒翰이 항복하자, 安祿山이 哥舒翰에게 묻기를 “너는 항상 나를 깔보더니, 오늘 어떠한가?” 하니, 哥舒翰이 땅에 엎드려 대답하기를 “臣은 肉眼이라 聖人을 몰라 뵈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安祿山이 크게 기뻐하였다.】安祿山이 哥舒翰을 司空同平章事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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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이 懼【哥舒翰麾下來告急이러니 及日暮에 平安火不至라 故로 上始懼也하니라 】하야 召宰相謀之한대 楊國忠이 首唱幸蜀【上이 命陳玄禮하야 整比六軍하야 厚賜錢帛하고 選廐馬九百餘匹하니 外人은 莫之知라 乙未黎明에 帝與貴妃姊妹皇子妃(王)[主]皇孫, 楊國忠, 韋見素等及親近宦官宮人으로 出去할새 上이 遣宦者王洛卿前行하야 告諭郡縣置頓이러니 洛卿이 與縣令俱逃하고 徵召吏民호되 莫有應者하니 小利故也라 】之策하니 上이 然之하다 乙未에 出延秋門하야 至咸陽하니 日이 向中이로되 上猶未食이러니 國忠이 自市胡餠【卽蒸餠이니 以胡麻着之也라 一云爐餠이니 胡人所㗖이라 故로 曰胡餠이라하니라 】以獻하니 於是에 民爭獻糲飯【一斛粟舂七斗米爲糲也라 十斗爲斛이라 】이라 有老父郭從謹이 進言曰 祿山이 包藏禍心은 固非一日이라 亦有詣闕하야 告其謀者면 陛下往往誅之하야 使得逞其姦逆【逞은 恣肆快意라 】하야 致陛下播越【播遷顚越也라 】하시니 是以로 先王이 務延訪忠良하야 以廣聰明은 蓋爲此也니이다 臣이 猶記宋璟爲相에 數進直言하야 天下賴以安平이러니 自頃以來로 在廷之臣이 以言爲諱하고 惟阿諛取容이라 是以로 闕門之外를 陛下皆不得知하시니 草野之臣은 必知有今日이 久矣로이다 但九重嚴邃하야 區區之心【區區는 猶勤勤이라 】을 無路上達하니 事不至此면 臣이 何由得睹陛下之面而訴之乎잇가 上曰 此는 朕之不明이니 悔無所及이라하고 慰諭而遣之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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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이 두려워하여【哥舒翰의 휘하가 와서 위급함을 알렸는데, 날이 저물도록 平安함을 알리는 烽火가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上이 비로소 두려워한 것이다.】宰相들을 불러 상의하자, 楊國忠이 제일 먼저 蜀 지방으로 파천할【上이 陳玄禮에게 명하여 六軍을 정돈해서 돈과 비단을 후히 내려주고 황제의 어구마 900여 필을 선발하니, 바깥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乙未日 黎明에 황제가 楊貴妃와 貴妃의 자매, 皇子와 妃, 공주와 皇孫, 楊國忠과 韋見素 등과 친근한 宦官과 궁인들과 함께 도성을 나갈 적에, 上이 환관인 王洛卿을 보내어 먼저 가서 郡縣에 알려 머물 곳을 설치하게 하였으나 王洛卿은 縣令들과 함께 모두 도망하였고 관리와 백성들을 불렀으나 응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익이 작기 때문이었다.】 계책을 제창하니, 上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乙未日(6월 13일)에 上이 延秋門을 나가 咸陽에 이르니, 해가 중천에 있었으나 上이 아직도 밥을 먹지 못하였다. 楊國忠이 스스로 胡餠(호떡)을【胡餠은 바로 증편이니, 胡麻(참깨)를 붙이기 때문에 胡餠이라 한 것이다. 一說에는 “화로에 굽는 떡이니, 胡人들이 먹는 것이기 때문에 胡餠이라 한다.” 하였다.】 사서 올리니, 이에 백성들이 다투어 조밥을 올렸다.【1斛의 곡식을 찧어서 일곱 말의 쌀을 얻는 것을 糲라 한다. 열 말을 斛이라 한다.】 老父인 郭從謹이 말을 올리기를 “安祿山이 나쁜 마음을 속에 감추고 있었음은 진실로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또한 대궐에 나가서 그의 음모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폐하께서는 종종 그를 죽이시어 安祿山으로 하여금 그 간사함과 반역함을 이루게 하여【逞은 멋대로 부려서 마음에 유쾌하게 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파천하도록 만들었습니다.【播越은 播遷하고 顚越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이 忠良한 자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의견을 물어서 총명을 넓힐 것을 힘썼으니, 이는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臣은 아직도 기억하건대 宋璟이 재상이 되었을 적에 자주 直言을 올려서 천하가 힘입어 편안하고 평화로웠는데, 지난 해 이래로는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말하는 것을 꺼리고 오직 아첨하여 용납되기를 취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대궐 문 밖의 일을 폐하께서 전혀 알지 못하셨으니, 草野의 신은 반드시 금일의 난이 있을 줄 안 지가 오래입니다. 다만 구중궁궐이 엄하고 깊어서 구구한 마음을【區區는 勤勤(간절하고 지성스러움)이란 말과 같다.】 상달할 길이 없었으니, 일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신이 어떻게 폐하의 얼굴을 뵙고 하소연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이는 짐이 밝지 못해서이니, 후회해도 미칠 수 없다.” 하고는 위로하여 타일러서 보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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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至馬嵬驛【馬嵬는 地名也니 在咸陽西라 今安西路興平縣正西三十五里에 有馬嵬坡하니라 】하니 將士飢疲하야 皆憤怒라 陳玄禮【龍武大將軍이라 】以禍由楊國忠이라하야 欲誅之러니 會에 吐蕃使者二十餘人이 遮國忠馬하고 訴以無食이어늘 國忠이 未及對에 軍士呼曰 國忠이 與胡虜謀反이라하고 追殺之하야 以槍揭其首하다 上이 杖屨出驛門하야 慰勞軍士하고 令收隊호되 軍士不應이라 上이 使高力士로 問之한대 玄禮對曰 國忠이 謀反하니 貴妃를 不宜供奉이라 願陛下割恩正法하소서 上曰 貴妃常居深宮하니 安知國忠反謀리오 高力士曰 貴妃誠無罪나 然將士已殺國忠이어늘 而貴妃在陛下左右면 豈敢自安이리잇고 願陛下審思之하소서 將士安則陛下安矣시리이다 上이 乃命力士하야 引貴妃於佛堂하야 縊殺之하고 輿屍寘驛庭하고 召玄禮等入視之하니 於是에 始整部伍하야 爲行計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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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의 행차가〉 馬嵬驛에 이르니,【馬嵬는 지명이니, 咸陽縣 서쪽에 있다. 지금 安西路興平縣 정서쪽 35리 지점에 馬嵬坡가 있다.】 장병들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모두 분노하였다. 陳玄禮는【陳玄禮는 龍武大將軍이다.】 禍가 楊國忠에게서 연유하였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마침 吐蕃의 사신 20여 명이 楊國忠의 말을 가로막고 양식이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楊國忠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군사가 큰 소리로 고함치기를 “楊國忠이 오랑캐와 반역을도모한다.” 하고는 쫒아가 그를 죽여서 창끝에다 그 머리를 매달았다. 上이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 驛門을 나와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대오를 수습하여 떠나가게 하였으나 軍士들이 응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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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이 將發馬嵬할새 父老皆遮道請留曰 宮闕은 陛下家居요 陵寢【古者에 宗廟는 前廟後寢이러니 至秦始하야 出寢起於廟側이라 故로 陵上을 稱寢殿하니 有衣冠几杖象生之具하니라 】은 陛下墳墓시니 今捨此欲何之시니잇고 上이 爲之按轡久之라가 乃命太子하야 於後에 宣慰父老하니 父老因曰 至尊이 旣不肯留하시니 某等이 願帥子弟하고 從殿下하야 東破賊하고 取長安하리이다 若殿下與至尊으로 皆入蜀하시면 使中原百姓으로 誰爲之主리잇고 須臾에 聚至數千人이라 太子不可曰 至尊이 遠冒險阻하시니 吾豈忍朝夕離左右리오 且吾尙未面辭호니 當還白至尊하야 更禀進止호리라하고 涕泣跋馬【跋은 回也라】欲西한대 建寧王倓이 與李輔國으로 執鞚【鞚은 苦貢反이니 馬勒也라 】諫曰 逆胡犯闕에 四海分崩하니 不因人情이면 何以興復이릿고 今殿下從至尊入蜀이라가 若賊兵이 燒絶棧道면 則中原之地를 拱手授賊矣리니 不如收西北守邊之兵하고 召郭李於河北【郭李는 郭子儀, 李光弼이라 】하야 與之倂力이니 東討逆賊하야 克復二京하고 削平四海하야 以迎至尊이 豈非孝之大者乎잇가 何必區區溫凊하야 爲兒女之戀乎잇가 廣平王俶이 亦勸太子留하고 父老共擁太子馬하야 不得行이라 上이 摠轡待太子호되 久不至어늘 使人偵之【偵은 丑正反이니 問也라 】한대 還白狀이라 上曰 天也라하고 乃命分後軍二千人及飛龍廐馬【飛龍은 廐名이니 仗內六廐에 飛龍爲最上하니라 】하야 從太子하고 且諭將士曰 太子仁孝하야 可奉宗廟하니 汝曹는 善輔佐之하라하고 又諭太子曰 西北諸胡를 吾撫之素厚하니 汝必得其用하리라 太子南向號泣【上已南邁로되 而太子留在後라 故로 南向號泣하니라 】而已러라 又宣旨하야 欲傳位太子하니 太子不受하다 俶, 倓은 皆太子之子也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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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이 馬嵬驛을 출발하려 할 적에 父老들이 모두 길을 막고 머물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宮闕은 陛下의 집이고 陵寢은【옛날에 宗廟는 앞에는 사당이 있고 뒤에는 寢이 있었는데, 秦나라 始皇帝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寢을 내어 사당 곁에 세웠다. 그러므로 陵上을 寢殿이라 칭하였으니, 여기에는 죽은 황제의 옷과 冠과 안석과 지팡이 등 생전을 상징하는 도구가 있었다.】 陛下의 墳墓이니, 지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고자 하십니까?” 하였다. 上이 이 때문에 고삐를 잡고 오랫동안 있다가 마침내 태자에게 명하여 뒤에서 부로들을 宣慰하게 하니, 父老들이 인하여 말하기를 “至尊께서 이미 머물려 하지 않으시니, 저희들은 원컨대 자제들을 거느리고 태자전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적을 격파하고 長安을 탈취하겠습니다. 만약 태자전하께서 至尊과 함께 모두 蜀으로 들어가신다면 中原의 百姓들로 하여금 누구를 주인 삼게 하시렵니까?” 하였다. 잠시 후 사람들이 모여 수천 명에 이르렀다. 太子가 不可하다 하며 말하기를 “至尊께서 멀리 험한 곳을 무릅쓰고 가시니, 내 어찌 차마 아침저녁으로 좌우를 떠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아직 至尊을 대면하여 하직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돌아가 至尊에게 아뢰어서 다시 가부를 여쭈어 去留를 결정하겠다.” 하고는 눈물을 흘리고 말을 돌려【跋은 돌리는 것이다.】 서쪽으로 가려 하였다. 建寧王倓(담)이 李輔國과 함께 말고삐를【鞚은 苦貢反(공)이니, 말굴레이다.】 잡고 간하기를 “역적 오랑캐가 대궐을 침범하여 온천하가 분열되어 와해되었으니, 人情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興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至尊을 따라 蜀으로 들어가셨다가 만약 賊兵이 棧道를 불태워 끊는다면 中原의 영토를 팔짱을 끼고 적에게 주게 될 것입니다. 서북 지방의 변경을 지키는 군대를 수습하고, 郭子儀와 李光弼을 河北 지방에서 불러와【郭李는 郭子儀와 李光弼이다.】 그들과 더불어 병력을 연합하는 것만 못하니, 동쪽으로 역적을 토벌하여 長安과 洛陽 두 서울을 수복하고 사해를 평정하여 至尊을 맞이하는 것이 어찌 큰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하필 구구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 작은 효도를 다하여 아녀자의 온정을 행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廣平王俶도 또한 太子에게 머물 것을 권하였고, 父老들이 함께 太子의 말을 가로막아서 太子가 갈 수가 없었다. 上이 고삐를 잡고 태자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오래도록 오지 않자 사람을 보내 염탐하게 하였는데,【偵은 丑正反(정)이니, 묻는 것이다.】 돌아와 이러한 내용을 아뢰었다. 上은 말하기를 “천운이다.” 하고는 마침내 명하여 후군 2천 명과 飛龍의 어구마를 나누어서【飛龍은 황제의 마구간 이름이니, 仗內의 여섯 마구간 중에 飛龍廐가 가장 상등이었다.】태자를 따르게 하고, 또 장병들에게 諭示하기를 “태자는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宗廟를 받들 만하니, 너희들은 그를 잘 보좌하라.” 하였다. 또 태자에게 유시하기를 “서북 지방의 여러 오랑캐를 내가 평소 후대하여 어루만졌으니, 네가 반드시 그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태자는 남쪽을 향하여 울부짖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上이 이미 남쪽으로 갔으나 太子는 머물러 뒤에 있었다. 그러므로 남쪽을 향해 울부짖고 운 것이다.】 上이 또 聖旨를 내려서 太子에게 傳位하고자 하였으나 태자가 받지 않았다. 俶과 倓은 모두 太子의 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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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祿山은 上이 뜻밖에 갑자기 서쪽으로 파천하자, 사자를 보내 崔乾祐의 군대를 중지시켜서 潼關에 머문지 10일 만에 마침내 孫孝哲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長安에 들어가게하였다. 이에 적의 형세가 크게 성하였다. 그러나 적장들이 모두 거칠고 사나우며 원대한 지략이 없어서 長安을 점령한 뒤로는 스스로 뜻을 얻었다고 여겨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오로지 음악과 여색과 보물과 재물을 탐하는 것만 일삼고, 다시는 서쪽으로 진출할 뜻이 없었다. 그러므로 上이 편안히 걸어서 蜀에 들어갈 수 있었고, 太子가 북쪽으로 갈 적에도 쫓겨서 급박한 근심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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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子至平凉【平凉은 舊屬隴右라 今平凉府에 有平凉縣하니 在陝西하니라】數日에 朔方留後杜鴻漸이 迎太子於平凉北境하고 說太子曰 朔方은 天下勁兵處也라 今에 吐蕃請和하고 回紇【其先匈奴라 】內附하고 四方郡縣이 大抵堅守拒賊하야 以俟興復하니 殿下今理兵靈武하야 按轡長驅하고 移檄四方하야 收攬忠義하시면 則逆賊을 不足屠也리이다 秋七月에 太子至靈武【靈武는 漢朔方郡也니 今夏州是라 括地志云 靈武는 卽蕭關也라】하니 裴冕【河西行軍參軍이라 】, 杜鴻漸等이 上太子牋【牋은 表識書也니 於書中에 有所表記之也라 】하야 請遵馬嵬之命하야 卽皇帝位한대 太子不許라 冕等이 言曰 將士는 皆關中人이라 日夜思歸호되 所以崎嶇從殿下【崎嶇는 山路也요 又謂艱險也라 】하야 遠涉沙塞者는 冀尺寸之功이니 若一朝離散이면 不可復集이라 願陛下는 勉徇衆心하야 爲社稷計하소서 牋五上에 太子乃許之하다 是日에 肅宗이 卽位於靈武하야 尊玄宗曰上皇天帝라하고 赦天下하고 改元至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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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子가 平凉에 이른지【平凉은 옛날에 隴右에 속하였다. 지금 平凉府에 平凉縣이 있으니, 陝西省에 있다.】며칠 만에 朔方留後杜鴻漸이 太子를 平凉의 북쪽 경계에서 맞이하고, 太子를 설득하기를 “朔方은 天下의 강한 군대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 吐蕃이 화친을 청하고 回紇이【回紇은 그 선조가 匈奴族이었다.】 內附(복종하여 따름)하며, 사방의 郡縣이 대체로 견고히 지켜 적을 막으면서 興復을 기다리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이제 靈武에서 군대를 다스려 고삐를 잡고 길게 달려가며 사방에 격문을 돌려서 忠義로운 선비들을 거두어 잡는다면 역적은 굳이 도륙할 것도 못 될 것입니다.” 하였다. 가을 7월에 太子가 靈武에 이르니,【靈武는 漢나라 朔方郡이니, 지금의 夏州가 이곳이다. ≪括地志≫에 “靈武는 바로 蕭關이다.” 하였다.】裴冕과【裴冕은 河西行軍參軍이었다.】杜鴻漸 등이 太子에게 牋文을 올려【牋은 表識하는 글이니, 글 가운데에 表記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馬嵬驛에서의 명령을 따라 황제에 즉위할 것을 청하였으나태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裴冕 등이 모두 말하기를 “장병들은 모두 關中 사람이라서 밤낮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되 어렵고 험한 길을 넘어 전하를 따라【崎嶇는 산길이고, 또 어렵고 험함을 이른다.】 멀리 사막 지방으로 건너온 까닭은 작은 공을 세우기를 바라서이니, 만약 이들이 하루아침에 離散한다면 다시 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 社稷의 계책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이들이 牋文을 다섯 번 올리자태자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날 肅宗이 靈武에서 즉위하여, 玄宗을 높여 上皇天帝라 하고 天下에 사면하고至德으로 개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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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唐書》〈睿宗本紀〉의 贊에 말하였다. “睿宗은 그 아들(玄宗)의 공을 인하여【이 내용은 39卷 庚戌年(710)에 보인다.】 재위한 지가 오래지 않으니, 진실로 말할 것이 없다. 아! 여자가 사람에게 화를 끼침이 심하였다. 高祖로부터 中宗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사이에 두 번이나 여색으로 인한 화에 걸려서【두 번의 女禍는 則天武氏와 中宗의 妃인 韋后를 가리킨다.】唐나라의 국통이 이미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으며, 中宗은 자신이 죽음을 면치 못하였고【中宗은 韋后에게 시해당하였다.】韋氏는 마침내 멸족당하였다. 玄宗이 몸소 이 난리를 평정하였으니 鑑戒로 삼을 만하였으나 또다시 여자 때문에 실패하였다.【또다시 여자 때문에 실패하였다는 것은 楊貴妃가 天寶 年間의 난리를 이룸을 말한다.】玄宗이 막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에 힘써 開元 年間에는 거의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그리도 훌륭하였는가. 그러다가 사치한 마음이 한 번 움직이자, 천하의 욕망을 다하였으나 즐거움으로 삼기에 부족하여 매우 사랑하는 여인(楊貴妃)에게 빠지고 경계해야 할 바를 잊었다. 그리하여 몸을 숨기고 나라를 잃음에 이르렀는데도 뉘우치지 못하였다. 그 시작과 종말의 다름을 살펴보건대 성품과 습관이 서로 다름이 이와 같음에 이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肅宗이 太子로서 적을 토벌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으니, 이는 바로 태자가 아버지를 배반한 것이니, 어떻게 安祿山을 토벌할 수 있겠는가. 唐나라가 天下를 소유한 지가 거의 300년이었으니, 漢나라 이래로 국통을 이은 것이 가장 오래었다. 그러나 三綱이 확립되지 못하여 父子間과 君臣間의 義理가 없어서 이익을 보면 행동하고 어버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위에는 敎化가 없고 아래에는 廉恥가 없었다. 옛날의 王者는 반드시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여 천하에 標率(모범)이 되었으니,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서 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자는 있지 않다. 唐나라는 부자간이 바르지 못하면서 만사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어려우니, 국통을 장구하게 이은 것만 해도 요행이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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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氏(胡寅)가 말하였다. “玄宗이 이미 太子에게 傳位한다는 명령이 있었으니, 太子가 참으로 배반한 것이 아니다. 그 잘못은 玄宗이 명령을 빨리 행하지 않고 裴冕 등 여러 사람이 영화와 부귀에 급급한 데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만일 肅宗이 부자간과 군신간의 의리에 밝았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의 권유에 마음이 동요되었겠는가. 동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唐나라 高祖와 睿宗과 玄宗의 잘못은 기미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太宗과 明皇과 肅宗의 잘못은 속히 하고자 하고 작은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자식은 자식노릇을 못했으니, 어찌 후세의 큰 귀감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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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京兆李泌가 어려서 재주가 민첩하다고 알려졌다. 玄宗이 그로 하여금 평민의 신분으로 태자와 벗이 되게 하니, 태자가 항상 그를 일러 선생이라 하였는데 뒤에 潁陽에 은거하였다. 上(肅宗)이 馬嵬坡로부터 북쪽으로 갈 적에 사자를 보내어 부르니, 李泌가 靈武에서 上을 알현하였다. 上이 크게 기뻐하여 밖에 나갈 때에는 함께 나란히 고삐를 잡고 잘 때에는 침상을 마주하여 태자였을 때와 똑같이 하였으며, 정사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다 그에게 자문하여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上은 장수와 재상을 등용하고 물리침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와 더불어 의논하였다. 上이 李泌를 右相으로 삼으려고 하자, 李泌가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폐하께서 신을 손님과 벗으로서 대우하신다면 재상보다 더 귀하니, 하필 저의 뜻을 굽히려 하십니까.” 하니, 上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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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庚辰에 上皇이 至成都하니 從官及六軍至者 千三百人而已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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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日에 上皇이 成都에 이르니, 따라온 관원과 六軍으로 이른 자가 1,300명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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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令狐潮圍張巡於雍丘하야 相守四十餘日에 朝廷聲問이 不通이라 潮聞玄宗已幸蜀하고 復以書招巡하니 有大將六人이 官皆開府特進이라 白巡호되 以兵勢不敵이요 且上存亡을 不可知하니 不如降賊이라하야늘 巡이 陽許諾하고 明日에 堂上設天子畫像하고 帥將士朝之하니 人人皆泣이라 巡이 引六將於前하야 責以大義斬之하니 士心益勸이라 城中矢盡이어늘 巡이 縛藁爲人千餘하야 被以黑衣하고 夜縋城下【縋는 垂繩也라 】하니 潮兵이 爭射之라가 久에 乃知其藁人이라 得矢數十萬하다 其後에 復夜縋人하니 賊이 笑不設備어늘 乃以死士五百으로 斫潮營하니 潮軍이 大亂하야 焚壘而遯이라 追奔十餘里하니 潮慚하야 益兵圍之러라 巡이 使郞將雷萬春으로 於城上에 與潮相聞할새 語未絶에 賊이 弩射之하야 面中六矢而不動이라 潮疑其木人하야 使諜問之하고 乃大驚하야 遙謂巡曰 向見雷將軍하니 方知足下軍令矣로다 然이나 其如天道何오 巡謂之曰 君未識人倫하니 焉知天道【叛君附賊하야 不識君臣之倫也라 】리오 未幾에 出戰하야 擒賊將十四人하고 斬首百餘級하니 賊乃夜遯하야 收兵入陳留하야 不敢復出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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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狐潮가 張巡을 雍丘에서 포위하여 서로 대치한 40여 일 동안 조정의 소식이 통하지 못하였다. 令狐潮는 玄宗이 이미 蜀으로 파천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편지로 張巡을 불렀다. 張巡의 대장 6명은 벼슬이 모두 開府特進이었는데, 이들이 張巡에게 아뢰기를 “군세가 대적할 수 없고 또 上의 生死를 알 수 없으니, 적에게 항복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張巡이 겉으로 허락하는 체하고 다음날 堂上에 천자의 화상을 설치하고서 장병들을 거느리고 조회하니,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張巡이 여섯 명의 장수를 앞으로 끌어내어 大義로 꾸짖고 목을 베니, 장병들의 마음이 더욱 권면되었다. 張巡은 성 안에 화살이 다 떨어지자, 짚을 묶어 인형 천여 개를 만들어 검은 옷을 입혀서 밤에 밧줄로 매달아 성 아래로 내려 보내니,【縋는 밧줄을 드리우는 것이다.】令狐潮의 병사들이 사람인 줄 알고 다투어 화살을 쏘다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짚으로 만든 인형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張巡의 군대는 화살 수십만 개를 얻었다. 그 뒤에 張巡이 또다시 밤중에 사람을 밧줄로 매달아 내려 보내니, 적이 웃고 대비하지 않았다. 이에 결사대 500명으로 令狐潮의 진영을 공격하니, 令狐潮의 군대가 크게 혼란하여 보루를 불태우고 도망하였다. 10여 리를 쫓겨 달아나고는 令狐潮가 부끄러워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포위하였다. 張巡이 郞將雷萬春으로 하여금 성 위에서 令狐潮와 서로 안부를 묻게 하였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적이 쇠뇌로 雷萬春을 쏘아 맞혀서 얼굴에 여섯 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令狐潮는 그가 나무로 만든 사람인가 의심하여 첩자로 하여금 정찰하게 하고는 마침내 크게 놀라서 멀리 張巡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雷將軍을 보니, 비로소 足下의 軍令이 엄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천도를 어찌 하겠습니까?” 하였다. 張巡이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人倫을 알지 못하니, 어찌 天道를 알겠는가?” 하였다.【君主를 배반하고 逆賊에게 붙어서 군신간의 윤리를 알지 못함을 이른다.】 얼마 후에 張巡이 성문을 나가 싸워서 적장 14명을 사로잡고 백여 명의 首級을 베니, 적이 비로소 밤에 도망하여 군대를 거두어 陳留로 들어가서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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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子儀等이 將兵五萬하고 自河北으로 至靈武하니 靈武軍威始盛이라 人有興復之望矣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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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子儀 등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河北으로부터 靈武에 이르니, 靈武 군대의 위엄이 비로소 강성해졌다. 이에 사람들은 唐나라를 興復할 희망이 있음을 깨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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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武의 사자가 蜀에 이르니, 上皇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이 하늘의 뜻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니, 내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制書를 내리기를 “지금으로부터 制勅을 고쳐 誥라 하고【誥는 고함이니, 윗사람에게 아뢰는 것을 告이라 하고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誥라 한다.】 表文과 上疏文에 太上皇이라 칭하며, 四海의 軍國에 관한 중요한 일을 모두 먼저 皇帝에게 아뢰어 가부를 결정한 다음 인하여 짐에게 아뢰어서 알게 하라. 上京(長安)을 收復하기를 기다린 뒤에 짐은 다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겠다.” 하였다. 인하여 韋見素, 房琯, 崔渙에게 명하여 傳國寶인 옥새와 옥책을 받들어 靈武에 나아가傳位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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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에 上皇이 每酺宴【酺는 音蒲니 王德布飮酒也라 漢律에 三人已上會飮이면 罰金四兩이로되 賜酺면 得聚飮이라 唐無此禁이나 亦賜酺者는 聚作伎樂하고 高年賜酒麵이니라 】에 先設太常雅樂坐部立部【明皇이 分樂爲二部하야 堂下立奏를 謂之立部伎요 堂上坐奏를 謂之坐部伎라하니라】하고 繼以鼓吹【吹는 去聲이니 北狄馬上之聲이라 自漢以後로 以爲鼓吹라하니 亦軍中樂을 馬上奏之라 故로 唐以隷鼓吹部하니라 】胡樂과 敎坊府縣散樂雜戲【散은 上聲이라 明皇爲平王에 有散樂一部러니 定韋后之難에 頗有預謀者하다 及卽位에 命寧王하야 主蕃邸樂하야 以充太常하고 分兩朋하야 以角優劣하며 置內敎坊於蓬萊宮側하고 居新聲散樂倡優之伎하니라 】하며 又以山車陸船【山車는 車上施棚閣하고 加綵繒하야 爲山林之狀이라 陸船은 縛竹木爲船形하고 餙以繒綵하야 列人於中하고 舁之以行하니라 】으로 載樂器往來하고 又出宮人하야 舞霓裳羽衣【明皇〈時〉에 河西節度使楊欽忠이 獻霓裳羽衣曲十二遍하니 凡曲終必遽로되 唯此曲은 將畢에 引聲益緩하니라 】하고 又敎舞馬百匹【帝以馬百匹盛飾하고 分左右하야 施三重榻하고 舞傾盃數十曲하며 壯士擧榻에 馬不動하니라 】로 啣盃上壽하고 又引犀象入場하야 或拜或舞하니 安祿山이 見而悅之러니 旣克長安에 命搜捕樂工하고 運載樂器舞衣하고 驅舞馬犀象하야 詣洛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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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上皇이 매번 酺宴할 때마다【酺는 음이 蒲(포)이니, 王의 덕을 펴서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漢나라 법률에 세 사람 이상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 罰金 4兩을 내게 하였는데 황제가 酺를 하사하면 모여서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唐나라 때에는 이런 금령이 없었으나 또한 酺를 하사하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여 伎樂을 일으키고 국가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술과 麵을 하사하였다.】 먼저 太常雅樂으로 坐部와 立部를【明皇이 악공을 두 部로 나누어 堂下에서 서서 연주하는 것을 立部伎라 하고, 堂上에서 앉아서 연주하는 것을 坐部伎라 하였다.】 연주하게 하고, 그 뒤에 鼓吹樂과【吹는 去聲이니 北狄이 말 위에서 부는 악기소리이다. 漢나라 이후로 이것을 鼓吹라 하였으니, 또한 軍中의 음악을 말 위에서 연주하였기 때문에 唐나라 때 이것을 鼓吹部에 예속시킨 것이다.】胡樂과 敎坊樂과 府縣의 散樂(민간의 음악)과 雜戲(광대놀이)로써【散은 上聲이다 明皇이 平王이었을 때에 散樂 一部가 있었는데 韋后의 난리를 평정할 적에 이 모의에 참여한 자가 자못 있었다. 明皇이 즉위하자 兄인 寧王(成器)에게 명하여 蕃邸의 음악을 주관하게 해서 太常에 충원하고 무리를 둘로 나누어서 우열을 겨루게 하였으며, 蓬萊宮 옆에 內敎坊을 세우고 新聲散樂과 倡優의 기생들을 거처하게 하였다.】 잇게 하였으며, 또 山車와 陸船으로【山車는 수레 위에 棚閣을 설치하고 채색비단을 가하여 山林의 모양을 만든 것이다. 陸船은 대나무를 엮어 배 모양으로 만들고 채색 비단으로 꾸며서 사람을 이 가운데에 나열하고 끌고 다녔다.】 樂器를 싣고 왕래하게 하였다. 또 궁녀들을 동원하여 霓裳羽衣曲을【明皇 때에 河西節度使楊欽忠이 霓裳羽衣曲 열두 편을 올리니, 모든 곡은 음악이 끝날 때에 반드시 곡조가 빠르지만 오직 이 곡만은 음악이 끝나려 할 때에 소리를 끌어 더욱 느리다.】 춤추게 하고, 또 말 백 필에게 춤추는 법을 가르쳐서【황제는 말 백 필을 성대하게 꾸미고 좌와 우로 나누어 三重의 木榻을 설치한 다음 〈그 위에 올려놓고〉傾盃樂 수십 곡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하였는데 壯士가 木榻을 들어도 말이 움직이지 않았다.】 술잔을 입에 물고 축수를 올리게 하였으며, 물소와 코끼리를 데리고 입장하여 혹은 절하고 혹은 춤추게 하였다. 安祿山이 이것을 보고 기뻐하였는데, 이미 長安을 점령하자, 명하여 악공들을 수색하여 체포하고 악기와 춤추는 옷을 수레에 싣고 舞馬와 무소와 코끼리를 몰아서 洛陽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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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曰 聖人은 以道德爲麗【麗音离니 愼厥麗之麗也요 又本音戾也라】하고 仁義爲樂【樂은 力洛反이니 娛也라 】이라 故로 雖茅茨土階【茨는 疾玆反이니 茅茨는 以草覆屋也라 茅茨不剪하고 土階三尺은 謂堯舜也라】하고 惡衣菲食【菲는 撫尾反이니 薄也라 惡衣服, 菲飮食은 謂禹也라 】이라도 不恥其陋하고 唯恐奉養之過하야 以勞民費財라 明皇이 恃其承平【承一作升하니 民有三年之儲曰升平이라 】하고 不思後患하야 殫耳目之玩【殫은 多寒反이니 極也라 】하고 窮聲技之巧하야 自謂帝王富貴 皆不我如라하야 欲使前莫能及하고 後無以踰하야 非徒娛己라 亦以誇人하니 豈知大盜在旁에 已有窺窬之心【窬는 容朱反이니 私視也라 】하야 卒使鑾輿播越하고 生民塗炭이리오 乃知人君崇華靡以示人은 適足爲大盜之招也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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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이 말하였다. “聖人은 道德을 화려함으로 삼고【麗는 음이 리이니, 愼厥麗의 麗자와 같다. 또 본래 음은 려이다.】仁義를 즐거움으로 삼는다.【樂은 力洛反(락)이니,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띠풀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흙으로 계단을 만들었으며,【茨는 疾玆反(자)이니, 茅茨는 띠풀로 지붕을 덮는 것이다. 띠풀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고 흙 계단을 겨우 3척 높이로 한 것은 堯‧舜을 이른다.】 거친 의복과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菲는 撫尾反(미)이니, 박한 것이다. 衣服을 나쁘게 하고 飮食을 나쁘게 한 것은 禹王을 이른다.】 그 누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직 봉양이 지나쳐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할까 두려워하였다. 明皇은 태평함을 믿고서【承이 一本에는 升으로 되어 있으니, 백성들이 3년의 저축이 있는 것을 升平이라 한다.】 후일의 환난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귀와 눈의 즐거움을 다하고【殫은 多寒反(단)이니, 지극함이다.】 음악과 기예의 공교로움을 지극히 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帝王의 부귀가 자기만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예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고,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넘지 못하게 하고자 해서, 단지 자신이 즐길 뿐만 아니라 또한 남에게 과시하였으니, 큰 도둑이 옆에 있으면서 이미 황제의 자리를 엿보는 마음이 있어서【窬는 容朱反(우)이니, 몰래 보는 것이다.】 끝내 明皇 자신으로 하여금 播遷하게 하고 生民으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에 비로소 人君이 화려함을 숭상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다만 큰 도둑을 부르는 것일 뿐임을 알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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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祿山이 聞嚮日에 百姓乘亂하야 多盜庫物하고 旣得長安에 命大索三日하야 幷其私財하야 盡掠之하며 又令府縣推按하야 銖兩之物【十黍爲絫요 十絫爲銖요 八銖爲錙요 二十四銖爲兩이라 】를 無不窮治하니 連引搜捕하야 枝蔓無窮이라 民間이 騷然하야 益思唐室이러라 自上離馬嵬北行으로 民間相傳호되 太子北收兵하야 來取長安이라하니 長安民이 日夜望之하야 或時相驚曰 太子大軍至矣라하면 則皆走하야 市里爲空이라 賊이 望見北方塵起하면 輒驚欲走어늘 京畿豪傑이 往往殺賊官吏하고 遙應官軍하야 誅而復起하야 相繼不絶하니 賊不能制라 其始에 自京畿鄜坊【二州名이라 鄜는 音浮라】으로 至于岐隴히 皆附之러니 至是에 西門之外【西門은 長安城西門이라 】率爲敵壘로되 賊兵力所及者는 南不出武關이요 北不過雲陽이요 西不過武功이라 江淮奏請貢獻하야 之蜀之靈武者 皆自襄陽으로 取上津路【上津은 漢中長利縣地라 】하야 抵扶風하야 道路無壅은 皆薛景仙之功【時에 景仙이 爲陳倉令하야 殺賊守將하고 克扶風而守之하니라】也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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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祿山은 지난날에 백성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창고의 물건을 많이 도둑질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長安을 점령하자 3일동안 크게 수색하도록 명령하여 백성들의 사사로운 재물까지 아울러 모두 노략질하였으며, 또 府‧縣에 명하여 조사하게 해서 한 치와 한 냥의 작은 물건도【10개의 기장 낟알을 絫라 하고, 10絫를 銖라 하고, 8銖를 錙라 하고, 24銖를 兩이라 한다.】 모두 끝까지 다스리게 하니, 이에 연루되어 수색하고 체포함에 얽히고 설켜 끝이 없었다. 백성들이 소란하여 唐나라 황실을 더욱 생각하였다. 上이 馬嵬를 떠나 북쪽으로 간 뒤로부터 민간에서 서로 전하기를 “태자가 북쪽으로 가서 병력을 수습해 가지고 와서 長安을 점령하려 한다.” 하니, 長安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태자가 오기를 바라서 혹 때로 서로 놀라 이르기를 “태자의 대군이 이르렀다.” 하면 적들이 모두 도망해서 저잣거리와 마을이 텅 비곤 하였다. 적들은 북쪽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그때마다 놀라 도망하고자 하니, 京畿의 豪傑들이 왕왕 적의 관리를 죽이고 멀리 官軍에게 호응하여, 이들을 죽여도 다시 새로운 호걸들이 일어나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으니, 적이 통제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京畿와 鄜州‧坊州로부터【鄜와 坊은 두 고을 이름이다. 鄜는 음이 부이다.】岐州‧隴州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에게 붙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長安城 西門의 밖은【西門은 長安城의 서쪽 문이다.】 대부분 적의 보루가 되었으나 적의 병력이 미치는 곳은 남쪽으로 武關을 넘지 못하고 북쪽으로 雲陽을 넘지 못하고 서쪽으로 武功을 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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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이 李泌와 함께 군대를 순행할 적에【行은 去聲이니, 行軍은 군대를 순행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군사들이 모두 손가락질하고 속으로 은밀히 말하기를 “황색 옷을 입은 것은 천자이고【[釋義] 衣는 去聲이니 입는 것이다. 이하도 같다. [通鑑要解] 聖人은 上을 이르니, 唐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君父를 칭하여 聖人이라 하였다.】 백색 옷을 입은 것은 처사 李泌이다.” 하니, 上이 그 말을 듣고 李泌에게 고하기를 “국가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감히 그대에게 관직을 주어 굽히게 할 수 없으나 우선 붉은 도포(관복)를 입어서 사람들의 의심을 끊으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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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月에 上이 至彭原하니 第五琦見上하고 請作榷鹽法하야 用以饒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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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上이 彭原에 이르니, 第五琦가 上을 뵙고榷鹽法을 만들어서 재용을 풍요롭게 할 것을 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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房琯이 賓客을 좋아하고 談論을 좋아하여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을 많이 끌어오고 뽑았으나 미천하고 비루하니, 사람들이 많이 그를 원망하였다. 北海太守賀蘭進明이 行在所로 가서 上에게 아뢰기를 “晉나라는 王衍을 등용하여 三公으로 삼았는데, 부황하고 헛된 명예를 숭상하여 中原을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中原板蕩은 中華가 망하고 혼란함을 이른 것이니, 板과 蕩은 모두 ≪詩經≫의 篇名이다.】 지금 房琯이 제멋대로 우활한 흰소리를 하여 헛된 명성을 세우고 이끌어 등용한 것은 모두 겉으로만 화려한 무리이니, 참으로 王衍의 무리입니다.” 하였다. 上이 이로 말미암아 房琯을 소원히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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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琯이 上疏하야 請自將兵하야 復兩京이어늘 上許之하다 琯이 悉以戎務로 委李揖, 劉秩하니 二人이 皆書生이라 不閑軍旅【閑은 習也라 】로되 琯謂人曰 賊曳落河【初에 安祿山이 養同羅, 奚, 契丹降者八千餘人하고 號曰曳落河라 胡語曳落河는 華言壯士也라 曳은 羊列反이다. 】雖多나 安能敵我劉秩이리오하니라 琯軍이 遇賊將安守忠於咸陽之陳濤斜【陳濤斜는 咸陽地名이라 [通鑑要解] 陳燾澤在咸陽縣東하니 其路斜出故로 曰陳燾斜라하니라 】하야 琯이 效古法, 用車戰하야 以牛車二千乘으로 馬步夾之러니 賊이 順風鼓譟하니 牛皆震駭라 賊이 縱火焚之하니 人畜大亂하야 官軍死者四萬餘人이요 存者數千而已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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房琯이 상소하여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兩京(長安과 洛陽)을 수복할 것을 청하자, 上이 이를 허락하였다. 房琯이 군대의 일을 모두 李揖과 劉秩에게 맡기니, 두 사람은 다 書生이어서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였으나【閑은 익힘이다.】房琯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적의 曳落河가【처음에 安祿山이 同羅, 奚, 契丹 등에서 항복한 자 8천여 명을 기르고 이들을 曳落河라 이름하였다. 오랑캐 말의 曳落河는 중국말로 壯士이다. 曳은 羊列反(열)이다.】 비록 많으나 어찌 우리 劉秩을 대적하겠는가?” 하였다. 房琯의 군대가 적장 安守忠을 咸陽의 陳濤斜에서 만났다.【[釋義] 陳濤斜는 咸陽에 있는 지명이다. [通鑑要解] 陳燾澤은 咸陽縣 동쪽에 있었는데, 그 길이 기울게 났기 때문에 陳燾斜라 한 것이다.】房琯은 옛 병법을 모방하여 戰車戰하던 방법을 사용하여 소가 끄는 수레 2천 乘으로 전진하고 기마군과 보병은 협공하게 하였는데, 적이 바람을 타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소가 모두 놀랐다. 적이 불을 놓아 불태우니, 사람과 가축이 크게 혼란하여 관군으로 죽은 자는 4만여 명이었고, 생존한 자는 몇천 명뿐이었다.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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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至德二載
上이 謂李泌曰 今郭子儀, 李光弼이 已爲宰相하니 若克兩京, 平海內면 則無官以賞之니 奈何오 對曰 古者에 官以任能하고 爵以酬功이라 漢魏以來로 雖以郡縣治民이나 然有功則錫以茅土【王者封五色土하야 爲社라가 建諸侯면 則各割其方土與之하야 使立社호되 燾以黃土하고 苴以白茅하니 茅는 取其潔이니 所以供祭祀縮酒之用이요 黃은 取王者覆燾四方之義니라 】하고 傳之子孫하야 至于周隋히 皆然하니이다 唐은 初未得關東이라 故로 封爵에 皆設虛名하고 其食實封者는 給繒布【唐制에 食實封者 凡一戶면 則以一丁之調로 歲給之也하니라 】而已라 貞觀中에 太宗이 欲復古制나 大臣議論이 不同而止하니 由是로 賞功者多以官하니이다 夫以官賞功이 有二害하니 非才則廢事요 權重則難制라 曏使祿山이 有百里之國이런들 則亦惜之하야 以傳子孫하야 不反矣리이다 爲今之計컨대 俟天下旣平하야 莫若疏爵土【疏는 分也라 】하야 以賞功臣이니 則雖大國이라도 不過二三百里라 可比今之小郡이니 豈難制哉리잇가 上曰 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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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이 李泌에게 이르기를 “지금 郭子儀와 李光弼이 이미 재상이 되었다. 만약 이들이 兩京을 수복하고 海內를 평정한다면 상줄만한 벼슬이 없으니, 어찌해야겠는가?” 하니, 李泌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는 재능이 있는 자에게 벼슬을 맡기고 공로가 있는 자에게 관작으로써 보답하였습니다. 漢‧魏 이래로 비록 郡縣을 설치하여 백성을 다스렸으나 공이 있으면 茅土를【王者가 다섯 가지 색깔의 흙을 쌓아 社를 만들었다가 제후들을 세우게 되면 각각 방위의 색깔에 따른 흙을 떼어 주어서 社를 세우게 하였는데, 黃土를 덮고 흰 띠풀로 흙을 쌌다. 띠풀은 그 깨끗함을 취한 것이니 제사에 술 거르는 용도로 제공하고, 황색은 王者가 사방을 덮어주는 뜻을 취한 것이다.】 내려주고 자손에게 전하게 하여, 周나라와 隋나라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였습니다. 唐나라는 처음 關東 지방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관작을 봉해줄 때에는 다 虛名을 쓰고, 실제 봉지를 받은 자에게는 繒과 布를 줄 뿐이었습니다.【唐나라 제도에 실제 封邑을 받은 자는 무릇 1戶당 1丁의 調를 해마다 주었다.】貞觀 연간에 太宗이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大臣들의 議論이 똑같지 않아서 중지하였으니, 이로부터 공 있는 자에게 상줄 적에 관직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관직을 가지고 공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두 가지 폐해가 있으니, 재능이 있는 자가 아니면 정사를 망치고 권력이 중하면 제재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安祿山이 백 리의 나라가 있었더라면 또한 그것을 아까워하여 자손에게 물려주어서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을 생각하건대 天下가 평정되기를 기다려서 작위와 토지를 나누어【疏는 나눔이다.】 공신에게 상 주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비록 大國이라도 2, 3백 리를 넘지 못합니다. 지금의 작은 郡에 견줄 수 있으니, 어찌 제재하기 어렵겠습니까?” 이에 上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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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以郭子儀로 爲天下兵馬副元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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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子儀를 天下兵馬副元帥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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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是時에 府庫無蓄積하야 朝廷이 專以官爵賞功이라 諸將出征에 皆給空名告身【空은 苦貢反이라 唐選擧志에 視品及流外則判補에 皆給以符하고 謂之告身하니 其中에 有褒貶訓戒之辭라 空者는 不塡寫名姓하고 從其臨事에 自注授也라 】할새 自開府, 特進, 列卿, 大將軍으로 下至中郞, 郞將히 聽臨事注名하고 其後에 又聽以信牒【未有告身엔 先給牒以爲信하니라 】授人官爵하니 有至異姓王者라 諸軍이 但以職任으로 相統攝하야 不復計官爵高下러니 及淸渠之敗【是年四月에 郭子儀敗績하니라 】하야 復以官爵으로 收散卒하니 由是로 官爵輕而貨重이라 大將軍告身一通【書首尾曰一通이라 】에 纔易一醉하니 凡應募入軍者 一切衣金紫하고 至於朝士僮僕하야는 衣金紫하고 稱大官이로되 而執賤役者하니 名器之濫이 至是而極焉이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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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조정의 府庫에 저축된 것이 없어서 조정에서 오로지 관작을 가지고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었다. 諸將들이 출정할 적에 이들에게 모두 空名의 告身牒을【空은 苦貢反(공)이다. 唐나라 〈選擧志〉에 視品과 流外는 判補할 때에 다 符를 지급하고 이것을 告身牒이라 일렀으니, 이 가운데에는 褒貶과 訓戒하는 말이 있었다. 空이라는 것은 이름과 성을 써서 채워 넣지 않고 일에 임했을 때에 스스로 이름을 써넣어 주는 것이다.】 지급하였는데, 위로 開府, 特進, 列卿, 大將軍으로부터 아래로 中郞, 郞將에 이르기까지 일에 임하여 이름을 써넣는 것을 허락하고, 그 뒤에 또 信牒을 가지고【告身이 있기 전에는 먼저 牒을 주어서 신표로 삼았다.】 사람들에게 관작을 주도록 허락하니, 異姓으로서 王이 되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여러 군대가 다만 職任으로 서로 통솔하여 다시는 관작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았는데, 淸渠에서 패전하게 되자【이해 4월에 郭子儀가 淸渠에서 패전하였다.】 다시 관작으로써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니, 이로 말미암아 관작이 가벼워지고 재화가 중하게 되었다. 大將軍의 告身牒 한 통을 팔아【앞뒤로 온전히 쓴 것을 一通이라 한다.】 겨우 한 번 취할 정도의 술과 바꿀 수 있었다. 무릇 응모하여 군에 들어온 자가 일체 金章(金印)과 紫綬를 착용하였으며 朝士와 僮僕에 이르러는 金章과 紫綬를 착용하고 大官이라 칭하면서 賤役을 잡는 자가 있으니, 名器의 범람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官爵이라는 것은 人君이 천하를 어거하는 것이니, 빈 이름을 가지고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군주가 관작을 귀하게 여겨서 관작을 君子에게 가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군주가 관작을 천하게 여겨서 小人에게 베풀면 사람들이 천하게 여긴다. 肅宗은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공을 이루어 함부로 名器를 빌려주어서 거름흙보다도 가볍게 여겼으니, 이것이 혼란한 정사가 극에 달한 것이다. 唐나라가 강하지 못함이【競은 强함이다.】 마땅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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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子奇【慶緖以子奇爲河南節度使하니라 】益兵하야 圍睢陽益急이어늘 張巡이 於城中에 夜鳴鼓嚴隊하야 若將出擊者하니 賊聞之하고 達旦儆備【儆은 戒也라 】러라 旣明에 巡이 乃寢兵絶鼓하니 賊이 以飛樓로 瞰城中【瞰은 古監反이니 視也라 】호되 無所見이어늘 遂解甲休息하다 巡이 與將軍南霽雲과 郞將雷萬春等十餘將으로 各將五十騎하고 開門突出하야 直衝賊營하야 至子奇麾下하니 營中이 大亂이라 斬賊將五十餘人하고 殺士卒五千餘人하다 巡이 欲射子奇而不識하여 乃剡蒿爲矢하니 中者喜【剡은 以冉反이니 銳利之也라 蒿는 呼高反이요 中은 去聲이라 易繫云 剡木爲矢라하니라】하야 謂巡矢盡이라하고 走白子奇어늘 乃得其狀하고 使霽雲으로 射之하야 喪其左目하야 幾獲之라 子奇乃收軍退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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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子奇가【安慶緖는 尹子奇를 河南節度使로 임명하였다.】 병력을 증가하여 睢陽城을 포위하여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자, 張巡이 성 안에서 밤중에 북을 울리고 대오를 정돈하여 장차 성을 나가 공격할 것처럼 하니, 적이 이 말을 듣고 날이 새도록 경계하고 대비하였다.【儆은 경계하는 것이다.】 날이 밝은 뒤에, 張巡이 마침내 군사들을 자게 하고 북소리를 그치니, 적이 飛樓를 가지고 성 안을 엿보았으나【瞰은 古監反(감)이니, 살펴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갑옷을 벗고 휴식하였다. 張巡은 將軍南霽雲과 郞將雷萬春 등 10여 명의 장군과 함께 각각 5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는 성문을 열고돌격하여 곧장 적의 진영을 무찔러서尹子奇의 휘하에 이르니, 적의 진영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그리하여 적장 50여 명을 목 베고, 사졸 5천여 명을 죽였다. 張巡이 尹子奇를 쏘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므로 마침내 쑥대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쏘니, 화살을 맞은 적병이 기뻐하여【剡은 以冉反(염)이니, 뾰족하게 만드는 것이다. 蒿는 呼高反(호)이고, 中은 去聲(맞춤)이다. ≪周易≫〈繫辭傳〉에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든다.” 하였다.】張巡의 화살이 다 떨어졌다고 생각하고는 달려가 尹子奇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張巡이 비로소 그의 얼굴 모습을 알아내고는 南霽雲으로 하여금 활을 쏘아 그의 왼쪽 눈을 잃게 해서 거의 사로잡을 뻔 하였다. 尹子奇가 마침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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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冬十月에 尹子奇久圍睢陽하니 城中이 食盡이라 議棄城東走어늘 張巡, 許遠【張巡이 辟雍丘하야 保寧陵이러니 子奇以兵十三萬來어늘 遠爲睢陽守하야 告急於巡하니 巡이 引兵入睢陽하다 遠曰 遠은 (揣)[懦]不知兵하고 公은 智勇兼濟하니 公爲遠戰하라 遠爲公守하리라 賊以巡善用兵하니 畏巡爲後患이라 故로 不滅巡이면 則不得越過而南也하니라 [頭註] 許遠은 敬宗曾孫이라 】이 謀以爲 睢陽은 江淮之保障【一卷戊寅年注에 指藩籬而言이라하니라 】이니 若棄之去면 賊必乘勝長驅하리니 是는 無江淮也라 不如堅守以待之라하고 始與士卒로 同食茶紙하고 旣盡에 遂食馬하고 馬盡에 羅雀掘鼠하고 雀鼠旣盡에 巡이 出愛妾하야 殺以食士【食는 音嗣라 】하고 遠亦殺其奴然後에 括城中婦人【括은 拾也라 】하야 食之하고 旣盡에 繼以男子老弱하니 人知必死호되 莫有叛者요 所餘纔四百人이러라 癸丑에 賊이 登城하니 將士病하야 不能戰이라 巡이 西向再拜曰 臣力竭矣하야 不能全城이라 生旣無以報陛下호니 死當爲厲鬼【無所歸者爲厲니라 】하야 以殺賊호리이다 城遂陷하니 巡, 遠이 俱被執하고 幷南霽雲, 雷萬春等三十六人하야 皆斬之하고 生致許遠於洛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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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에 尹子奇가 오랫동안 睢陽城을 포위하니, 성 안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 사람들이 睢陽城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날 것을 의논하자, 張巡과 許遠이【[附註] 張巡이 雍丘를 맡아 寧陵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尹子奇가 13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몰려오자 許遠이 睢陽太守로 있으면서 張巡에게 위급함을 알리니, 張巡이 군대를 이끌고 睢陽으로 들어왔다. 許遠이 말하기를 “나는 나약하여 병법을 알지 못하고 공은 지혜와 용맹을 겸하여 소유하였으니, 공은 나를 위하여 싸우라. 나는 공을 위하여 지키겠다.” 하였다. 적들은 張巡이 용병을 잘하니 張巡이 後患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張巡을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이곳을 넘어 남쪽으로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頭註] 許遠은 許敬宗의 曾孫이다.】 상의하여 이르기를 “睢陽은 江淮 지방의 보루이니,【保障은 1卷 戊寅年(B.C.401) 注에 “울타리를 가리켜 말한다.” 하였다】 만약 이곳을 버리고 떠나면 적이 반드시 승세를 타고 크게 몰려올 것이니, 이는 江淮 지방을 잃게 될 것이다. 이곳을 굳게 지키면서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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巡이 初守睢陽時에 卒僅萬人이요 城中居人이 亦且數萬이로되 巡이 一見問姓名이면 其後에 無不識者요 前後大小戰이 凡四百餘에 殺賊卒十二萬人이러라 巡이 行兵에 不依古法敎戰陳하고 令本將【本部之將이라 】으로 各以其意敎之라 人이 或問其故한대 巡曰 今與胡虜戰에 雲合鳥散하야 變態不常하야 數步之間에 勢有同異하고 臨機應猝이 在於呼吸之間이어늘 而動詢大將이면 事不相及이니 非知兵之變者也라 故로 吾使兵識將意하고 將識士情하야 投之而往에 如手之使指하노니 兵將相習하야 人自爲戰이 不亦可乎아 自興兵으로 器械甲仗을 皆取之於敵하고 未嘗自修러라 每戰에 將士或退散이면 巡이 立於戰所하야 謂將士曰 我不離此호니 汝는 爲我還決之하라하니 將士莫敢不還死戰하야 卒破敵이러라 又推誠待人하야 無所疑隱하고 臨敵應變에 出奇無窮하며 號令明하고 賞罰信하고 與衆共甘苦寒暑라 故로 下爭致死力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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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巡이 처음 睢陽城을 지킬 적에 병졸이 겨우 만 명이었고 성 안에 살던 사람이 또한 수만 명이었는데, 張巡이 이들을 한 번 보고 성명을 물으면 그 뒤에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으며, 전후로 크고 작은 전투가 400여 차례였는데, 적병을 죽인 것이 12만 명이었다. 張巡은 군대를 운용할 적에 옛 병법을 따라 싸우거나 陣 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本部의 將帥로 하여금【本將은 本部의 장수이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가르치게 하였다. 사람이 혹 그 이유를 묻자, 張巡이 말하기를 “지금 오랑캐와 싸움에 구름처럼 모이고 새처럼 흩어져서 변하는 태도가 일정하지 않다. 그리하여 몇 걸음 사이에도 형세의 同異가 있고 임기응변함이 呼吸하는 사이에 달려 있는데, 번번이 대장에게 물으면 제때에 일에 미칠 수가 없으니, 이는 병법의 변화를 아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병사들로 하여금 장수의 생각을 알고 장수들로 하여금 병사들의 실정을 알게 해서 장수가 병졸을 데리고 감에 손이 손가락을 부리듯이 하게 하노니, 병사들과 장수가 서로 익숙하여 사람마다 각자 싸우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張巡은 군대를 일으킨 이래로 병기와 갑옷과 의장을 다 적에게서 취하여 사용하였고, 일찍이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매번 싸울 때마다 장병들이 혹 후퇴하고 흩어지면 張巡이 전쟁터에 서서 장병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다시 결전하라.” 하니, 장병들이 감히 돌아가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어서 끝내 적을 격파하였다. 張巡은 또 정성을 미루어 사람들을 대우하여 의심하고 숨기는 바가 없었으며, 적을 대하여 변화에 응함에 기이한 계책을 내어 다함이 없었다. 호령이 분명하고 상벌이 진실하며 무리들과 달고 쓴 음식과 춥고 더운 고통을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아랫사람들이 다투어 死力을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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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唐書》〈忠義列傳〉의 贊에 말하였다. “張巡과 許遠은 烈烈한 장부라고【剛直한 것을 烈이라 한다.】 이를 만하다. 피폐한 병졸 수만 명으로 외로운 성을 둘러싸고 지키면서【嬰은 둘러싸는 것이다.】 막 확장하여 제재할 수 없는 오랑캐에 항거하고 그들의 목구멍과 이빨을 막아서【鯁은 骾과 통하니, 뼈를 삼켜 목구멍에 걸려있는 것이다.】 적으로 하여금 멋대로 동남 지방을 집어 삼키지 못하게 하고 앞과 뒤를 견제하여 크고 작은 싸움을 수백 번이나 하였다. 비록 힘이 다하여 죽었으나 唐나라가 江淮 지방의 財用을 온전히 보전하여 중흥을 이룩하였으니, 이로움을 이끌어 해로움을 보상해 보면 百으로 萬과 바꾸었다 하더라도 가할 것이다. 張巡이 먼저 죽은 것이 급함이 되지 않고, 許遠이 뒤에 죽은 것이 뒤늦음이 되지 않는다. 張巡이 죽은 지 3일 만에 구원병이 이르렀고, 10일 만에 적이 망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이 완전한 절개를 두 사람에게 주어 무궁한 후세에 명예를 남기게 하였으니, 살아남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이름이 뒤에 드러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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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上皇이 至咸陽하니 上이 備法駕하야 迎於望賢宮하다 上皇이 卽日에 幸興慶宮하야 遂居之어늘 上表하야 累請避位還東宮호되 上皇이 不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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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上皇이 咸陽에 이르니, 上이 法駕를 갖추어 望賢宮에서 맞이하였다. 上皇이 당일에 興慶宮으로 가서 마침내 거처하였는데, 上이 표문을 올려서 여러 번 황제의 자리를 피하여 東宮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上皇이 허락하지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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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乾元元年
[戊戌]乾元元年이라 春二月에 復以載爲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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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元 元年(戊戌 758) 봄 2월에 다시 載를 年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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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曰 夫民生有欲하니 無主則亂이라 是故로 聖人이 制禮以治之하시니 自天子諸侯로 至於卿大夫庶人히 尊卑有分하고 大小有倫하야 若綱條之相維하고 臂指之相使라 是以로 民服事其上하야 而下無顗覦라 其在周易에 上天下澤이 履니 象曰 君子以하야 辨上下하야 定民志【易履卦大象傳之辭也라 程子曰 天在上하고 澤在下는 上下之正理也니 人之所履 當如是라 故로 取其象而爲履라 君子觀履之象하야 以辨別上下之分하야 以定其民志니라 】라하니 此之謂也라 凡人君所以能有其臣民者는 以八柄【周禮에 王以八柄馭群臣하니 一曰爵이니 以馭其貴하고 二曰祿이니 以馭其富하고 三曰予니 以馭其幸하고 四曰置니 以馭其行하고 五曰生이니 以馭其福하고 六曰奪이니 以馭其貧하고 七曰廢니 以馭其罪하고 八曰誅니 以馭其過니라 】存乎己也니 苟或捨之면 則彼此之勢均이니 何以使其下哉아 肅宗이 遭唐中衰하야 幸而復國하니 是宜正上下之禮하야 以綱紀四方이어늘 而偸取一時之安하고 不思永久之患이라 彼命將帥, 統藩維는 國之大事也어늘 乃委一介之使하고 徇行伍之情하야 無問賢不肖하고 維其所欲與者則授之라 自是之後로 積習爲常하야 君臣循守하고 以爲得策하야 謂之姑息이라 乃至偏裨士卒이 殺逐主帥호되 亦不治其罪하고 因以其位任授之하니 然則爵祿廢置와 殺生予奪이 皆不出於上而出於下니 亂之生也 庸有極乎아 且夫有國家者 賞善而誅惡이라 故로 爲善者勸하고 爲惡者懲하나니 彼爲人下而殺逐其上이면 惡孰大焉이리오 乃使之擁旄秉鉞하야 帥長一方이면 是賞之也니 賞以勸惡이면 惡이 其何所不至乎아 書云 遠乃猷라하고 詩云 猷之未遠이라 是用大諫이라하고 孔子曰 人無遠慮면 必有近憂라하시니 爲天下之政而專事姑息이면 其憂患을 可勝校乎아 由是로 爲下者 常盻盻焉【盻盻는 匹莧切이니 流視貌라 】伺其上하야 苟得間이면 則攻而族之하고 爲上者 常惴惴焉畏其下하야 苟得間이면 則掩而屠之하야 爭務先發以逞其志하야 非有相保養하야 爲俱利久存之計也하니 如是而求天下之安이면 其可得乎아 迹其厲階【厲는 亂也라 】하면 肇於此矣라 蓋古者治軍에 必本於禮라 故로 晉文公城濮之戰에 見其師少長有禮하고 知其可用이어늘 今唐은 治軍而不顧禮하야 使士卒得以陵偏裨하고 偏裨得以陵將帥하니 則將帥之陵天子는 自然之勢也라 由是로 禍亂繼起하야 兵革不息하야 民墜塗炭하야 無所控訴【控은 告也라 】凡二百餘年이라 然後에 大宋受命하니 太祖始制軍法하야 使以階級相承하고 有小違犯이면 咸伏斧質【質은 本作櫍하니 椹也라 古者에 斬人을 伏之於椹上而斫之하니라 椹은 知林切이라 】이라 是以로 上下有敍하야 令行禁止하야 四征不庭에 無思不服하야 宇內【上下四方曰宇라 】乂安하고 兆民允殖하야 以迄于今하니 皆由治軍以禮故也라 豈非詒謀之遠哉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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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이 말하였다. “사람은 태어남에 욕심이 있으니, 군주가 없으면 어지럽다. 이 때문에 聖人이 禮를 만들어서 다스리셨으니, 천자와 제후로부터 卿‧大夫와 庶人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높고 낮음이 분별이 있고 벼슬의 크고 작음이 등급이 있어서, 마치 강령과 조목이 서로 유지하는 것과 같았고 팔뚝과 손가락이 서로 부리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복종하여 윗사람을 섬겨서 아랫사람이 엿봄이 없었던 것이다. 《周易》에,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履卦이니, 〈象傳〉에 이르기를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상하를 분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하였으니,【定民志는 ≪周易≫ 履卦의 〈大象傳〉의 내용이다. 程子가 말씀하였다. “하늘이 위에 있고 못이 아래에 있는 것은 상하의 바른 이치이니, 사람이 이행하는 바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象을 취하여 履卦라 한 것이다. 군자가 履卦의 상을 보고서 상하의 구분을 분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킨 것이다.”】 이것을 말한 것이다. 무릇 人君이 신하와 백성을 보유할 수 있는 까닭은 八柄이【≪周禮≫에 “王이 八柄으로 여러 신하들을 어거한다. 첫 번째는 관작이니 이로써 그 귀함을 어거하고, 두 번째는 祿俸이니 이로써 그 부함을 어거하고, 세 번째는 줌이니 이로써 그 총애함을 어거하고, 네 번째는 버려둠이니 이로써 그 행실을 어거하고, 다섯 번째는 살려줌이니 이로써 그 福을 어거하고, 여섯 번째는 빼앗음이니 이로써 그 가난함을 어거하고, 일곱 번째는 폐함이니 이로써 그 죄 있는 자를 어거하고, 여덟 번째는 죽임이니 이로써 그 허물을 어거한다.” 하였다.】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니, 만일 이것을 버린다면 피차간에 형세가 똑같아지니, 어떻게 아랫사람을 부리겠는가. 肅宗이 唐나라가 중간에 쇠할 때를 만나서 다행히 나라를 회복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상하의 禮를 바로잡아서 사방에 기강을 세워야 할 터인데, 한 때의 편안함을 임시로 취하고 永久한 폐해를 생각하지 않았다. 장수를 임명하고 藩維(藩屛)를 통솔함은 국가의 큰 일인데, 마침내 한 명의 사자에게 맡기고 병졸들의 마음을 따라서 어질고 불초함을 묻지 않고 오직 그들이 주고자 하는 자이면 주었다. 이 뒤로부터 오랫동안 습속이 되어 보통으로 여겨서 임금과 신하가 이것을 따라 지키고 좋은 계책으로 여기면서 姑息이라 일렀다. 심지어 偏裨와 士卒들이 主帥를 죽이고 내쫒아도 그 죄를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主帥의 지위를 그에게 맡겨 주었으니, 그렇다면 관작과 녹봉, 지위를 폐함과 둠, 죽임과 살림, 줌과 빼앗음이 다 위에서 나오지 않고 아래에서 나오는 것이니, 난이 생겨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또 국가를 소유한 자는 선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를 誅伐한다. 그러므로 선을 하는 자가 권면되고 악을 하는 자가 징계되는 것이니, 그가 남의 부하가 되어서 윗사람을 죽이고 쫒아냈다면 악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그로 하여금 깃발을 보유하고 斧鉞을 잡고서 한 지방의 장수가 되고 우두머리가 되게 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상을 주는 것이니, 상으로써 악을 권장하면 악행이 그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않겠는가. 《書經》에 이르기를 ‘네 계책을 원대하게 하라.’ 하였고, 《詩經》에 이르기를 ‘계책이 원대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크게 간한다.’ 하였고, 孔子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 하셨으니, 천하의 정사를 다스리면서 오로지 姑息만을 일삼는다면 그 우환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아랫사람이 된 자는 원망스럽게【盻盻는 匹莧切(편)이니 흘겨보는 모양이다.】 그 윗사람을 엿보아서 만일 틈을 얻으면 공격하여 멸족시키고, 윗사람이 된 자는 항상 벌벌 떨며 그 아랫사람을 두려워하여 만일 틈을 얻으면 도륙한다. 그리하여 다투어 먼저 일어나서 자기 뜻을 펼 것을 힘써, 서로 보호하고 길러주어서 함께 이롭고 오래 보전할 계책을 함이 있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천하가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 禍의 계제를 따져보면【厲는 어지러움이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날에는 군대를 다스릴 적에 반드시 禮에 근본하였다. 그러므로 晉나라 文公은 城濮의 싸움에서 자기 군사들이 젊은이와 어른의 禮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지금 唐나라는 군대를 다스리면서 禮를 돌아보지 아니하여, 士卒들로 하여금 偏裨를 능멸하게 하고 偏裨로 하여금 將帥를 능멸하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將帥가 天子를 능멸하는 것은 자연스런 형세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禍亂이 연이어 일어나서 전쟁이 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하소연할 곳이 없은 지가【控은 告하는 것이다.】 모두 200여 년이었다. 그런 뒤에 大宋이 천명을 받으니, 太祖께서 처음 軍法을 제정하여 階級으로써 서로 받들게 하고, 조금이라도 이것을 어기거나 범하는 경우가 있으면 모두 목숨을 내놓게 하였다.【質은 본래 櫍로 되어 있으니, 도끼바탕이다. 옛날에 목 벨 사람을 도끼바탕 위에 엎드리게 하고 찍었다. 椹은 知林切(짐)이다.】 이 때문에 上下가 질서가 있어서 명령이 행해지고 금함이 그쳐졌다. 그리하여 조정에 오지 않는 자들을 사방으로 정벌함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우주 안이【上下와 四方을 宇라 한다.】 다스려져 편안하고 억조 백성들이 진실로 번성해서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모두 군대를 禮로써 다스렸기 때문이다. 어찌 자손에게 계책을 남겨줌이 원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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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二年
乾元 2년(己亥 759) 2월에 郭子儀 등 아홉 명의 절도사가 鄴城을 포위하였다.【이때 安慶緖가 鄴城을 점거하였다.】 諸軍이 이미 통솔하는 장수가 없고, 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으니, 상하의 마음이 이산되고 와해되었다.【군사들이 지치고 형세가 꺾였기 때문에 상하의 마음이 이산되고 와해된 것이다.】史思明이 大軍을 이끌고 곧바로 성 밑으로 오자, 官軍이 이들과 더불어 날짜를 잡아 결전하려 하였는데, 미처 포진하기 전에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모래가 날리고 나무가 뽑히며 천지가 대낮에도 깜깜하여 지척도 서로 구별하지 못하였다. 兩軍이 크게 놀라서 官軍은 궤멸하여 남쪽으로 가고 賊은 궤멸하여 북쪽으로 갔는데, 郭子儀가 朔方의 군대를 데리고 河陽의 다리를 차단하여 東京(洛陽)을 지키니, 戰馬는 만 필 중에 오직 3천 필이 남았고, 갑옷과 무기 십만 개는 버려져 거의 다 없어졌다. 東京의 선비와 백성들은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숨고 여러 절도사들은 각각 궤멸하여 本鎭으로 돌아가서 열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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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에 史思明이 군대를 이끌고 河陽을 공격하였다. 史思明은 좋은 말 천여 필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매일 이들을 河水가로 내보내 목욕시키고 순환하여 그치지 않아서 말이 많은 것을 과시하였다. 李光弼이 명하여 군중의 암말을 찾게 해서 500필을 얻은 다음 그 망아지를 성 안에 매어 놓고 史思明의 말이 물가에 이르기를 기다려서 어미말을 모두 내보내니, 어미말이 울어대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에 史思明의 숫말이 암말을 따라서 모두 물위에 떠서 河水를 건너오자, 일시에 이것을 몰아 성 안으로 들어가니, 史思明이 노하여 河淸에 군대를 주둔하고 李光弼의 군량수송로를 끊고자 하였다. 李光弼이 野水渡에 군대를 주둔하여 이에 대비하였는데, 史思明이 다시 河陽을 공격하자, 李光弼의 여러 장수가 사력을 다하여 공격하니, 적의 무리가 크게 궤멸하였다. 史思明이 이에 도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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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上元元年
[庚子]上元元年이라 四月에 史思明이 入東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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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元 元年(庚子 760) 4월에 史思明이 東京에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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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皇이 愛興慶宮하야 自蜀歸로 卽居之하다 上皇이 多御長慶樓【長慶樓는 南臨大道하니 上皇每御之하야 徘徊觀覽也하니라 】하니 父老過者 往往瞻拜呼萬歲라 李輔國이 言於上曰 上皇이 居興慶宮하야 日與外人交通하시고 陳玄禮, 高力士 謀不利於陛下니이다 且興慶宮은 與閭閻相參하고 垣墉淺露하니 非至尊所宜居요 大內는 深嚴하니 奉迎居之면 與彼何殊리잇고 又得杜絶小人熒惑聖聽【熒亦惑也라 】이리이다 上이 不聽하다 輔國이 又令六軍將士로 號泣叩頭하고 請迎上皇하야 如西內【初에 隋文帝遷長安城하고 立宮於西北이러니 高宗이 營蓬萊宮於東北하고 命故宮曰西內라하고 新宮曰東內라하고 亦曰大明宮이라하다 又唐都長安하야 以太極宮爲西內하고 大明宮爲東內하고 興慶宮爲南內라하니라 】호되 上이 泣不應이러니 會에 上不豫【豫는 安也라 】라 秋七月에 輔國이 矯稱上語【矯는 托也라 】하고 迎上皇하야 如西內하야 居甘露殿하니 所留侍衛兵이 纔尫老【尫은 音光이니 弱也니 廢疾之人이라 】數十人이라 高力士는 流巫州하고 陳玄禮는 勒致仕하니 上皇이 不懌하야 因不茹葷【茹는 音汝니 飮食也요 葷은 臭菜也라 方術家所禁이니 謂氣不潔也라 [通鑑要解] 葷은 音熏이니 辛臭之菜니 蔥蒜之屬이라 今釋家는 大蒜, 小蒜, 興渠, 慈蔥, 茖蔥으로 爲五葷하고 道家는 以韭, 蒜, 芸薹, 胡荽, 薤로 爲五葷하나니라 】하고 辟穀하야 寖以成疾이러라 上이 初猶往問安이러니 旣而요 上亦有疾하야 但遣人起居라 其後에 上이 稍悔悟하고 惡輔國하야 欲誅之호되 畏其握兵하야 竟猶豫不能決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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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皇이 興慶宮을 좋아하여 蜀에서 돌아온 뒤로부터 즉시 여기에 거처하였다. 上皇이 많이 長慶樓에 나가니,【長慶樓는 남쪽으로 큰길 가에 임하였는데, 上皇이 매번 長慶樓에 나와서 배회하고 구경하였다.】 지나가는 父老들이 왕왕 바라보고 절하며 만세를 불렀다. 李輔國이 上에게 말하기를 “上皇이 興慶宮에 거주하여 날마다 외인들과 사귀고 통하시며, 陳玄禮와 高力士가 폐하께 불리한 짓을 도모합니다. 또 興慶宮은 여염집들과 서로 뒤섞여 있고 담장이 얕아 노출되니 至尊이 마땅히 거주할 곳이 아니요, 大內는 깊고 엄격하니 上皇을 받들어 맞이하여 大內에 거주하시게 하면 저곳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소인들이 聖聰을 현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熒 또한 현혹함이다.】 上이 듣지 않았다. 李輔國이 또 六軍의 將兵들로 하여금 울부짖고 눈물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上皇을 맞이하여 西內로【처음에 隋나라 文帝가 長安城을 옮기고 서북쪽에 궁궐을 세웠는데, 高宗이 蓬萊宮을 동북쪽에 경영하고, 옛 궁궐을 명명하기를 西內라 하고 새 궁궐을 東內라 하고 또 大明宮이라 하였다. 또 唐나라는 長安에 도읍하여 太極宮을 西內라 하고 大明宮을 東內라 하고 興慶宮을 南內라 하였다.】가게할 것을 청하였으나 上이 울면서 듣지 않았는데, 때마침 上이 몸이 편찮았다.【豫는 편안함이다.】 가을 7월에 李輔國은 上의 말씀이라고 사칭하고【矯는 칭탁함이다.】 上皇을 맞이하여 西內로 가서 甘露殿에 거주하게하니, 남아서 모시고 호위하는 병사들이 겨우 늙고 병든 자【尫은 음이 광이니, 약함이니 廢疾이 있는 사람이다.】 수십 명뿐이었다. 高力士는 巫州로 유배보내고陳玄禮는 강제로 致仕시키니, 上皇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인해서 葷菜를 먹지 않고【[釋義] 茹는 음이 汝이니 마시고 먹는 것이요, 葷은 냄새가 나는 채소이다. 方術家들이 금하는 것이니, 냄새가 不潔함을 이른다. [通鑑要解] 葷은 음이 훈이니, 매운 냄새가 나는 채소이니, 파와 마늘 따위이다. 지금 佛家에서는 大蒜(큰 파)‧小蒜(작은 파)‧興渠‧慈蔥‧茖蔥을 五葷이라 하고, 道家에서는 부추‧마늘‧芸薹(평지나물)‧고수풀‧염교를 五葷이라 한다.】 곡기를 물리쳐서 점점 병을 이루었다. 上이 초기에는 오히려 가서 문안하였으나 이윽고 上 또한 병이 있어서 사람을 보내어 안부만 물을 뿐이었다. 그 후 上이 점점 후회하고 깨달아서 李輔國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가 병권을 쥐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끝내 유예하고 결행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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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二年
史思明은 시기하고 잔인하며【猜는 해침이다. 글자가 犬자를 따르니, 개의 본성은 시기심이 많아 해친다. 不仁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忍이라 한다.】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여 여러 부하들이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번번이 삼족을 죽임에 이르니, 사람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다. 그 部將인 駱悅이 史思明을 목졸라 죽이고, 史朝義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釋義] 其部將駱悅……朝義卽帝位:살펴보건대 朝義는 史思明의 長子이니 총애를 받지 못하였고, 史思明은 작은 아들 朝淸을 사랑하여 항상 朝義를 죽이고 朝淸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모의를 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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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李輔國이 張后와 함께 모의하여【張后는 肅宗의 后이다.】 上皇을 西內로 옮겼다. 이 날이 端午였는데【端은 시작이고 午는 거스름이니, 5月에는 陰氣가 陽을 거슬러서 땅을 뚫고 나온다.】山人李唐이 上을 뵙자 上이 막 어린 딸을 안고 있다가 李唐에게 이르기를 “짐이 이 아이를 항상 생각하노니, 경은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李唐은 대답하기를 “太上皇이 陛下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헤아려보건대 또한 폐하께서 공주를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눈물을 줄줄 흘렸으나【泫然은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다.】張后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감히 西內에 가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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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寶應元年
○ 甲寅에 上皇이 崩于神龍殿하니 年七十八이라 上以寢疾로 發哀於內殿하고 哀慕하야 疾轉劇이라 乃命太子監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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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日(4월 5일)에 上皇이 神龍殿에서 별세하니, 나이가 78세였다. 上은 병환이 깊었으므로 內殿에서 發喪하였고, 上皇을 슬피 사모하여 병환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太子에게 監國하도록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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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에 張后與李輔國相表裏하야 專權用事러니 晩年에 更有隙하야 欲殺輔國하고 廢太子어늘 內射生使【肅宗이 擇善騎射者千人하야 爲內射生手하고 號英武軍이라하야 入禁中하야 淸內難하고 又號寶應軍이라하야 以宦官領之라 故로 曰內射生使라하니라 】程元振이 與輔國謀하고 遷張后於別殿이라가 尋殺之하다 丁卯에 上崩하니 代宗【代宗贊曰 高祖以來로 三遜于位하야 以授其子로되 而獨睿宗이 上畏天戒하야 發誠於心이요 若高祖, 玄宗은 豈其志哉아 注에 畏天戒는 謂星官言帝座前星有變이라한대 睿宗曰 傳德避災하리니 吾意決矣라하고 詔皇太子卽皇帝位한대 太子惶恐入請하니 睿宗曰 此吾所以答天戒也라 豈其志는 言高祖因秦王殺建成元吉하야 而授位于太宗하고 玄宗因祿山之亂하야 幸蜀而授位于肅宗하니 皆非其本志也니라 】이 卽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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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張后는 李輔國과 서로 表裏가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 用事하였는데, 만년에는 다시 틈이 있어서 李輔國을 죽이고태자를 폐위하고자하였다. 內射生使인【肅宗이 말 타고 활쏘기를 잘 하는 자 천 명을 선발하여 內射生手라 하고 英武軍이라 이름한 다음 禁中에 들어오게 해서 내란을 소탕하고 또다시 寶應軍이라 이름하여 宦官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內射生使라 한 것이다.】程元振이 李輔國과 모의하고張后를 別殿으로 옮겼다가 얼마 후에 시해하였다. 丁卯日(4월 18일)에 上이 별세하니, 代宗이【≪新唐書≫〈代宗本紀〉贊에 “高祖 이래로 세 번 지위를 선양하여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홀로 睿宗만이 위로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진심에서 나왔고 高祖와 玄宗 같은 이는 어찌 그의 본뜻이었겠는가.” 하였는데, 그 注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했다.[畏天戒]’는 것은, 星官이 帝座 앞의 별에 변고가 있다고 말하자, 睿宗이 ‘덕 있는 자에게 전위하여 재앙을 피할 것이니 내 마음에 결정했다.’ 하고는 황태자(玄宗)가 황제에 즉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황태자가 황공하여 들어와 청하자, 睿宗이 ‘이것은 내가 하늘의 경계에 보답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을 이른다. ‘어찌 그의 본뜻이겠느냐.[豈其志]’는 것은, 高祖는 秦王(太宗)이 建成과 元吉을 죽임으로 인하여 太宗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었고, 玄宗은 安祿山의 난리를 인하여 蜀 지방으로 가면서 肅宗에게 지위를 물려주었으니, 모두 본뜻이 아니었다는 말이다.”】즉위하였다.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肅宗이 李輔國을 信任하여 위로는 그 아버지를 보전하지 못하고, 가운데로는 자기 몸을 보전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그 처자를 보전하지 못했으니, 이는 小人을 가까이한 禍이다.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史略 史評]賀氏(賀善)가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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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李國貞이 군대를 엄격히 다스리니, 朔方의 將兵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모두 郭子儀를 그리워하였다. 그러므로 王元振이 인하여 난리를 일으켰다. 郭子儀가 軍中에 이르니, 王元振이 스스로 공이 있다고 여겼는데 郭子儀가 말하기를 “네가 賊境에 임하여 곧 主將을 살해하였으니, 적이 만약 그 틈을 타고 쳐들어 왔다면 絳州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재상이 되어서 어찌 일개 병졸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겠는가.” 하고는 7월에 王元振과 그 동모자 40명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辛雲京이 이 소식을 듣고 또한 鄧景山을 죽인 자 수십 명을 조사해서 죽이니, 이로 말미암아 河東의 여러 진영이 모두 법을 받들어 시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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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回紇이 入東京하야 肆行殺掠하야 火累旬不滅이라 十一月에 露布【見四十九卷癸酉年하니 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至京師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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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紇이 東京에 들어가 멋대로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고 불을 놓아 수십 일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다. 11월에 露布가【露布는 49卷 癸酉年(913)에 보이니, 판자에 드러내어 쓰고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京師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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