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九 後梁紀
通鑑節要 卷之四十九
五代紀
後梁紀
太祖皇帝
五代紀※ 살펴보건대 梁‧唐‧晉‧漢‧周는 옛날에 각각 한 왕조의 역사책이 있었는데, 本朝(宋나라)의 歐陽文忠公(歐陽脩)이 처음으로 산삭하여 《五代史》를 만들었다. 司馬溫公이 편수한 《資治通鑑》은 비록 歐陽公의 한두 가지 논설을 취하였으나 인용한 일이 대부분 옛 역사이니, 言辭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歐陽公의 《五代史》와 많은 차이가 있다. 後梁紀 [ 太祖皇帝]는 재위가 7년이고 壽가 61세이다. [ 太祖皇帝]는 이름이 [ 晃]이고 성이 [ 朱氏]이니, 처음 이름은 [ 溫]이다. [ 黃巢]를 따라 도적이 되었는데, [ 黃巢]를 배반하고唐나라에 항복하니, [ 僖宗]이 [ 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宣武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昭宗 때에 승진하여[ 梁王]에 봉해져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가 마침내 唐나라 국통을 옮겨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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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907)唐나라 天祐 4년 - 4월 이후는 梁나라 [ 太祖皇帝][ 朱晃]의 開平 元年이고, 西川은 唐나라 天復 7년을 칭하였다. ○ 이해에 唐나라가 망하였다. 梁‧晉‧岐‧淮南‧西川 등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福建‧嶺南 등 모두 다섯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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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蜀王(王建)]이 [ 晉王(李克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각각 한 지방의 황제가 되어 [ 朱溫]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唐나라의 종실을 찾아 세우고 물러나 藩臣으로 돌아가자.” 하니, [ 晉王]이 답서에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 하였다. - [ 李克用]이 [ 黃巢]를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唐나라 昭宗이 [ 晉王]으로 봉하였다. 뒤에 그의 아들[ 存勖]이 왕위를 세습하여 마침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國號를 唐(後唐)이라고 하니, 바로 [ 莊宗]이다. [ 蜀王]은 [ 王建]이니, 唐나라 昭宗이 [ 蜀王]으로 봉하였는데 뒤에 後唐의 [ 莊宗]에게 멸망당하였으며, [ 孟知祥]이 다시 이 땅을 점거했다가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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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가 武安節度使[ 馬殷]을 [ 楚王]으로 삼았다. - [ 馬殷]이 潭州를 점거하여湖南 지역을 모두 소유하였는데, 後周[ 太祖] 때에 이르러 南唐에게 멸망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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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月에 蜀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蜀이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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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 蜀王(王建)]이 황제에 즉위하여국호를 大蜀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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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908)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2년이다. ○ 蜀나라 [ 高祖][ 王建]의 武成 元年이다. ○ 이해에 西川이 蜀을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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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晉王克用이 薨하니 其子存勖이 嗣爲晉王하다 晉王이 與諸將謀曰 上黨, 潞州는 河東之藩蔽니 無上黨이면 是無河東也라 且朱溫所憚者는 獨先王耳러니 聞吾新立하고 以爲童子未閑軍旅라하야 必有驕怠之心하리니 若簡精兵하야 倍道趣(趨)之하야 出其不意하면 破之必矣라 取威定霸在此一擧하니 不可失也라하다 晉王이 大閱士卒하야 帥周德威【都指揮使라 】等하고 發晉陽하야 進兵直抵夾寨하야 塡塹燒寨하고 鼓譟而入하니 梁兵이 大潰南走라 失亡將校士卒이 以萬計요 委棄資糧器械 山積이러라 梁主聞夾寨不守하고 大驚이러니 旣而요 歎曰 生子를 當如李亞子【存勖小名이라 】니 克用이 爲不亡矣로다 至如吾兒하야는 豚犬耳라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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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 晉王][ 李克用]이 죽으니, 그의 아들[ 存勖]이 뒤를 이어 [ 晉王]이 되었다. [ 晉王]이 여러 장수들과 다음과 같이 모의하였다. “上黨과 潞州는 河東의 울타리이니, 上黨이 없으면 河東도 없게 될 것이다. 또 [ 朱溫(朱晃)]이 꺼리는 것은 다만 先王(李克用)뿐인데, 내가 새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동자가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교만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만약 정예병을 선발하여 행군 속도를 배가해서 달려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엄을 취하고 霸業을 정하는 것이 이 한 번의 擧事에 달려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 晉王]이 사졸들을 크게 사열하여[ 周德威]【[ 周德威]는 都指揮使이다.】 등을 거느리고晉陽을 출발해서진군하여 곧바로 夾寨에 이르러 참호를 메우고 城寨를 불태우며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들어가니, 梁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도망하고 사망한 將校와 士卒이 만 명으로 헤아려졌고, 물자와 식량과 병기를 버리고 간 것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 梁主(朱溫)]는 夾寨가 지켜지지 못했단 말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자식을 낳으려면 마땅히 [ 李亞子(李存勖)]와 같아야 하니,【[ 李亞子]는 [ 李存勖]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 李克用]이 아직 죽지 않았도다. 내 자식으로 말하면 돼지나 개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李克用]은 비록 沙陀의 미천한 종족이었으나 하루아침에 河東 지방을 소유하여 도적인 [ 黃巢]를 평정함에 功이 제일이었는데, 上源驛의 변고를 조정에 하소연하였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는 마침내 적국인 梁나라와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화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하의 爵列(爵位)을 편안히 여겨 당나라에 忠純한 신하가 되어 매번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墨勅을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반드시 表文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가 [ 蜀主]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건대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忠義가 위로 하늘에 통한 것이니, 당시의 方伯들보다 월등하게 낫다. 그러므로 先儒들이 人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칭찬하여 그 忠義와 功烈을 기술하여 唐나라 말기의 第一流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喪中에는 喪事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므로 《春秋》에서 喪事를 저버리고 전쟁에 나간 자들을 모두 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門庭 안에 있는 도둑은 국가의 存亡이 달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權制(權道)를 따르고 피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書經》의 〈費誓〉가 典‧謨‧命‧誥의 뒤에 나열된 이유이다. [ 李存勖]의 夾寨의 전투 같은 것을 君子가 깊이 인정하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이다. 夾寨는 晉陽과 거리가 100리가 못 되었으니, 국가의 위태로운 시기라고 이를 만하였다. 만약 [ 李存勖]이 이때에 喪을 슬퍼하는 常情을 고집하고 국가의 큰 계책을 소홀히 하여 上黨이 함락당했다면 晉陽이 보존되지 못하였을 것이니, 또 어찌 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緩急을 살피고 輕重을 헤아려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함으로써 梁나라 군대를 敗走시킨 뒤에야 霸業의 기반이 다시 편안해졌다. 君子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후세에 훈계를 남김이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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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歸晉陽하야 休兵行賞하고 命州縣하야 擧賢才, 黜貪殘하고 寬租賦, 撫孤窮하고 伸寃濫, 禁姦盜하니 境內大治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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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晉陽으로 돌아와서군대를 휴식시키고 賞을 내리며 州縣에 명해서 어진 이와 인재를 천거하고 탐욕스러운 자와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내치며,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고 고아와 곤궁한 자들을 어루만지며,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고 간사한 자와 도둑을 금지하니,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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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六年하고 梁開平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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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909)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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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主遷都洛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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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主]가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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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晉, 岐, 吳는 稱唐天祐八年하고 梁乾化元年이라 ○ 蜀永平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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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911)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8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元年이다. ○ 蜀나라는 永平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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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은 燕王劉守光이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저들이 10년이 되기를 기다려 내 마땅히 솥의 輕重을 물을 것이다.(나라를 빼앗을 것이다.)” 하였다.【《春秋左傳》 宣公 3년에 [ 楚子]가 陸渾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마침내 洛陽에 이르러 周나라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하니, 周나라 [ 定王]이 王孫滿으로 하여금 [ 楚子]를 위로하게 하였는데, [ 楚子]가 천자를 상징하는 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王孫滿이 대답하기를 “帝王의 지위는 德에 달려있지 九鼎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桀王이 어두운 덕이 있어 九鼎이 殷나라로 옮겨 가서 600년을 지냈고, 殷나라 紂王이 포악하여 九鼎이 周나라로 옮겨 갔으니,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솥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무겁고, 군주의 덕이 간사하고 혼란하면 솥이 비록 크더라도 반드시 가볍습니다. 옛날 [ 成王]이 郟鄏에 도읍을 정하고 九鼎을 안치할 적에 周나라의 代數를 점치니 30대였고 年數를 점치니 700년이었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것입니다. 周나라 덕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九鼎의 무게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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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晉, 岐, 吳는 稱唐天祐九年하고 梁乾化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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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912)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9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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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主]가 병이 더욱 심해지자,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경영한 지 30년인데, 太原의 남은 잔당(李存勖)이【餘孽은 《資治通鑑綱目》에 [ 晉王(李存勖)]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시 치성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내가 살펴보건대 그들의 뜻이 작지 않다. 하늘이 다시 나의 수명을 빼앗아 가니, 내가 죽으면 여러 자식들은 저들의 적수가 못 되니, 내가 장사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목이 메어 오열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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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 高季昌]이【[ 高季昌]은 荊南節度使이다. 梁나라에서 작위를 내려 [ 渤海王]으로 삼았는데, 뒤에 [ 季興]으로 개명하였다. 唐나라 [ 莊宗(李存勖)]이 [ 南平王]에 봉하였는데, 5代를 전하여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은밀히 荊南을 점거할 뜻을 품고서 마침내 江陵의 外城을 수축할 것을 上奏하여 더 넓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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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 郢王][ 朱友珪]의【[ 郢王][ 朱友珪]는 梁나라 [ 太祖]의 次子이니, 그의 어머니는 亳州營의 娼妓였다. [ 梁主]가 養子인 [ 朱友文]의 妻를 사랑하여 장차 [ 朱友文]을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마침내 [ 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마부인 [ 馮廷諤]이 [ 梁主]를 시해하자, [ 朱友珪]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朱溫]이 [ 黃巢]의 賊黨이 되었다가 힘이 꿇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王鐸이 분에 넘치게 추대하고 장려하여 이미 同華의 節鎭(節度使의 藩鎭)을 받았고, 功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또다시 宣武 등의 중요한 藩鎭을 주었다. 그리하여 은총이 지나쳐 교만해져서 뜻과 욕망이 끝이 없어 마침내 唐나라의 國運을 옮겨갔으니, 그의 소행을 살펴보면 다만 큰 도둑일 뿐이다. [ 朱溫]은 나라를 찬탈한 뒤에 가혹하게 형벌하는 것을 고치지 않고 無辜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부자간에 한 여자를 함께 소유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 朱友珪]의 禍를 빚어 7년도 못 되어 자식이 아비를 도살하기를 도마 위의 고기를 난도질하듯 하였다. 前日에 군주를 시해하고 핍박한 참혹한 죄를 돌아보건대 하늘의 應報가 그가 한 짓에 걸맞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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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王
[ 均王]은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36세이다. [ 均王]은 처음 이름이 [ 友貞]이었는데 이름을 [ 瑱]으로 고쳤으니, [ 朱溫]의 셋째 아들이다. 시호를 [ 末帝]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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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913)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0년을 칭하였고, [ 梁主][ 朱瑱]은 乾化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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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趙巖【駙馬都尉이니 尙太祖女長樂公主하니라 】이 奉使至大梁이어늘 均王友貞이 密與之謀誅友珪할새 巖曰 此事成敗는 在招討楊令公【師厚爲北面道招討使하야 軍於魏州하니라 】耳니 得其一言하야 諭禁軍이면 吾事立辦이라한대 均王이 乃遣腹心馬愼交하야 之魏州하야 說楊師厚曰 郢王簒弑에 人望이 屬在大梁하니 公若因而成之하면 此不世之功也니라 師厚乃遣其將王舜賢하야 至洛陽하야 陰與袁象先【親軍都指揮使니 乃太祖之甥也라 其父敬初는 尙太祖妹萬安大長公主하니라 】謀하다 庚寅旦에 袁象先이 帥禁兵數千人하고 突入宮中하니 友珪聞變하고 與妻張氏와 及馮廷諤으로 趨北垣樓下하야 將踰城이러니 自度不免하고 令廷諤先殺妻하고 次殺己하니 廷諤亦自殺이라 象先, 巖이 齎傳國寶하야 詣大梁하야 迎均王한대 王曰 大梁은 國家創業之地니 何必洛陽이리오하고 乃卽帝位於大梁하야 更名鍠하고 又更名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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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 趙巖]이【[ 趙巖]은 駙馬都尉이니, [ 太祖]의 딸인 [ 長樂公主]에게 장가들었다.】 使命을 받들고大梁에 이르자, [ 均王][ 朱友貞]이 은밀히 그와 함께 [ 朱友珪]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 趙巖]이 말하기를 “이 일의 성패는 招討使楊令公(楊師厚)에게【楊師厚(楊令公)가 北面道招討使가 되어 魏州에 주둔하였다.】 달려있으니, 그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禁軍을 타이르면 우리 일이 당장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 均王]이 마침내 심복인 [ 馬愼交]를 보내어魏州로 가서楊師厚를 설득하기를 “[ 郢王(朱友珪)]이 황제를 시해하고 찬탈함에 천하의 人望이 大梁(朱友貞)에게 있으니, 公이 만약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이는 세상에 없는 큰 공일 것입니다.” 하였다. 楊師厚가 마침내 그의 장수[ 王舜賢]을 洛陽으로 보내어 은밀히 袁象先과【袁象先은 親軍都指揮使이니, 바로 [ 太祖]의 생질이다. 그의 아버지 [ 袁敬初]는 [ 太祖]의 누이인 萬安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도모하게하였다. 庚寅日(2월 17일) 새벽에 袁象先이 禁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돌입하니, [ 朱友珪]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아내 [ 張氏] 및 [ 馮廷諤]과 함께 북쪽 담장의 누대 아래로 달려가서 장차 성을 넘어가려 하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馮廷諤]에게 명령하여 먼저 자신의 아내인 [ 張氏]를 죽이고 다음으로 자기를 죽이게하였으며, [ 馮廷諤] 또한 자살하였다. 袁象先과 [ 趙巖]이 傳國寶(옥새)를 가지고大梁에 가서[ 均王]을 맞이하자, [ 均王]이 말하기를 “大梁은 우리나라가 창업한 곳이니, 하필 洛陽에 도읍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大梁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 鍠]으로 고치고 또다시 이름을 [ 瑱]으로 고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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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李嗣源이 分兵하야 徇燕山後八州하야 皆下之하고 進逼幽州하다 晉王이 督諸軍하야 四面攻城克之하고 擒劉仁恭及其妻妾하니 守光이 帥妻子亡去라 晉王이 入幽州하야 王이 方宴할새 將吏擒守光適至어늘 王語之曰 主人이 何避客之深耶아 王이 命掌書記王緘하야 草露布【文心雕龍曰 露布者는 蓋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索隱曰 每戰克이면 欲使天下聞知하야 乃以板書獲捷之由하고 不封之하야 以示明告中外라 自後魏以來로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라 初學記曰 露布를 人多用之하니 以不知其始라 春秋佐〈助〉期曰 武露布, 文露沈이라 宋均云 甘露見其國에 布散者는 人尙武하고 文采者는 則甘露(運)[凝]重이라하니라 】한대 緘이 不知故事하야 書之於布하고 遣人曳之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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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 [ 李嗣源]이 군대를 나누어 燕山 뒤에 있는 여덟 州를 순행하여 모두 함락시키고 전진하여 幽州를 핍박하였다. [ 晉王]이 諸軍을 독려해서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여점령하고劉仁恭과 그의 처첩들을 사로잡으니, 劉守光이 처자를 거느리고도망갔다. [ 晉王]이 幽州에 들어가서 王이 막 잔치하려고 할 적에 장수와 관리들이 劉守光을 사로잡아서 마침 이르자, [ 晉王]이 말하기를 “주인이 어찌 이리도 손님을 심하게 피한단 말인가?” 하였다. [ 晉王]이 掌書記[ 王緘]에게 명하여 露布를 초하게 하였는데,【《文心雕龍》에 이르기를 “露布는 露板을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하였고, 《索隱》에 이르기를 “매번 싸워 이기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알게 하고자 하여 마침내 적을 사로잡고 승리한 이유를 판자에 쓰고 이를 봉함하지 않아서 中外에 보여 밝게 고하였다. 後魏 이래로 마침내 비단에 써서 옻칠한 장대 위에 세우고 露布라 이름했다.” 하였다. 《初學記》에 이르기를 “露布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春秋佐助期》에 이르기를 ‘〈甘露가 내릴 적에〉武露는 가벼워서 흩어지고 文露는 무거워서 가라앉는다.’라고 하였는데, 宋均이 이르기를 ‘甘露가 그 나라에 나타날 적에 흩어지면 사람들이 武를 숭상하고, 문채를 숭상하게 되면 甘露가 엉겨서 무겁다.’라고 했다.” 하였다.】[ 王緘]이 故事를 잘 알지 못하여 이것을 삼베에 써서 사람을 보내어 끌고다니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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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主弟剌葛等이 反이어늘 誅其黨而釋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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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二年하고 梁貞明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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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915)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2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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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梁나라 魏博軍이 난리를 일으켜서節度使[ 賀德倫]을 위협하고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 晉王]이 군대를 이끌고전진하여臨淸을 점거해서梁나라 장수 劉鄩과 함께 黃河를 끼고대치하여 진영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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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主]가 종실을 멀리하고 꺼리며 오로지 정권을 [ 趙巖] 및 德妃의【德妃는 皇帝의 어머니이다.】형제인 [ 張漢鼎]‧[ 張漢傑]과 종형제인 [ 張漢倫]‧[ 張漢融]에게 맡겨서 모두 가까운 요직에 있게 하여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 趙巖] 등은 세력을 믿고 권력을 농간하여 재물을 받고 관직을 팔고 옥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으며 옛 장수와 정승들을 이간질하였다. 敬翔과 李振은 비록 執政大臣이 되었으나 말한 것이 대부분 쓰이지 않았다. 李振은 매번 병을 핑계대고 국사에 관여하지 아니하여 [ 趙巖]과 [ 張氏] 종족을 피하니, 정사가 날로 문란해져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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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三年하고 梁貞明二年이라 ○ 蜀通正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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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916)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3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2년이다. ○ 蜀나라는 通正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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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2월에 [ 梁主]가 여러 번 劉鄩을 재촉하여[ 晉王]과 싸우게하였는데, 劉鄩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 王檀]이【[ 王檀]은 匡國節度使이다.】 은밀히 상소하여 關西의 군대를 징발해서晉陽을 습격할 것을 청하자, [ 梁主]가 그의 말을 따라 군대가 晉陽에 이르러서 밤중에 맹렬히 공격하니, 晉陽城이 거의 함락될 뻔한 것이 서너 번이었다. 昭義節度使李嗣昭가 牙將[ 石君立]을 보내어구원하게하니, 梁나라 군사들 중에 죽고 부상한 자가 10분에 2, 3이었다. [ 王檀]이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크게 노략질하고돌아왔다. [ 梁主]는 劉鄩이 패했다는 말을 들었고 또 [ 王檀]도 공이 없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탄하기를 “내 일이 글렀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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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主改元神冊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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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主가 神冊으로 改元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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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五年하고 梁貞明四年이라 ○ 蜀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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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918)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4년이다. ○ 蜀나라는 光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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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晉나라 군대가 침략하여鄆州와 濮州까지 이르렀다가돌아가자, 梁나라 敬翔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나라가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전쟁에서 패하여 疆域(領土)이 날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깊은 궁중에 거처하시어 함께 정사를 계획하는 자들이 모두 좌우의 측근들이니, 어찌 적국의 승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先帝 때에 곧바로 河北 지방을 소유하고 호걸스러운 장수를 직접 어거하였으나 오히려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셨는데,【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음을 이른다.】 지금 적이 鄆州에 이르렀는데도 폐하께서 유념하지 않으시니, 폐하께서 만약 국가에 인재가 없다고 하신다면 臣이 변방에서 스스로 충성을 바칠 것을 청합니다.” 상소문을 올린 뒤에 [ 趙巖]과 [ 張漢鼎]의 무리가 “敬翔이 원망한다.”고 말하니, [ 梁主]가 마침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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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나라 徐知誥가 淮南節度行軍副使가 되었다. - 徐知誥가 뒤에 吳나라를 찬탈하니, 이것이 南唐이다.- 徐知誥가 吳王을 섬김에 공경을 다하고 겸손으로 士大夫를 대하며, 관대함으로 무리들을 다스리고 검소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吳王의 명령으로 天祐 13년 이전에 체납된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관아의 재물을 축낸 것과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숨기고 되돌려주지 않는 것을 모두 逋라고 이른다.】 나머지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바치게 하였으며, 덕이 있는 자와 재주 있는 자를 발굴하고 規諫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제거하고 청탁을 막으니, 이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마음이 돌아와서 비록 老將과 사나운 지아비라도 기뻐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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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主 〈作孔子廟하고 親謁之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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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蜀主][ 王建]이 죽으니, 太子[ 衍]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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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如魏州하야 發徒數萬하야 廣德勝北城【德勝南北夾河에 皆有城이라 】하고 日與梁人爭하야 大小百餘戰에 互有勝負러라 右射軍使石敬瑭이 與梁人으로 戰于河壖【壖은 而緣反이니 緣河邊地라 按韻書에 本作𤲬하고 或作堧하니 訓郤也라 郤은 隙地也라 師古曰 堧은 游地니 游는 餘也라하니라 】할새 梁人이 擊敬瑭하야 斷其馬甲이어늘 橫衝兵馬使【橫衝은 軍都之號也라 】劉知遠이 以所乘馬授之하고 自乘斷甲者하고 徐行爲殿【王氏曰 徐는 緩也니 說文에 安行也라 殿은 丁練反이니 凡軍居前曰啓요 居後曰殿이요 又謂之斷後라하니 此乃兵家之最難者也라 我兵旣敗하야 敵人來追에 我在後拒之는 非勇敢者면 不能也라 】하다 梁人이 疑有伏하야 不敢迫이라 俱得免하니 敬瑭이 以是親愛之하니라 〈敬瑭, 知遠은 其先이 皆沙陀人이니 敬瑭은 後爲晉高祖하고 知遠은 爲漢高祖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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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魏州에 가서 수만 명의 무리를 징발하여德勝의 북쪽 성을【德勝의 남쪽과 북쪽 夾河에 모두 성이 있었다.】 더 넓히고 날마다 梁나라 사람들과 다투어 크고 작은 백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右射軍使[ 石敬瑭]이 梁나라 사람들과 河壖에서【壖은 而緣反(연)이니 黃河 연변의 땅이다. 살펴보건대 《韻書》에 본래 𤲬으로 되어 있고 혹은 堧으로 되어 있으니 訓은 郤이니, 郤은 空閑地이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堧은 노는 땅이니, 游는 남아있는 것이다.” 하였다.】 싸울 적에 梁나라 사람이 [ 石敬瑭]을 공격하여 말의 갑옷을 끊자, 橫衝兵馬使【橫衡은 軍都의 칭호이다.】[ 劉知遠]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 石敬瑭]에게 주고 자신은 갑옷이 끊긴 말을 바꿔 타고는 천천히 가서 군대의 후미가 되었다.【王氏가 말하였다. “徐는 느림이니, 《說文解字》에 ‘천천히 가는 것이다.’ 하였다. 殿은 丁練反(전)이니 무릇 군대는 선두에 있는 것을 啓라 하고, 후미에 있는 것을 殿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를 일러 斷後(후미를 끊음)라고 하니, 이는 兵家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미 패하여 적들이 쫓아올 적에 내가 후미에 있으면서 적을 막는 것은 용감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梁나라 사람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니, [ 石敬瑭]이 이 때문에 그를 친애하였다.- [ 石敬瑭]과 [ 劉知遠]은 그 선조가 모두 沙陀 사람이니, [ 石敬瑭]은 뒤에 晉나라 [ 高祖]가 되었고, [ 劉知遠]은 漢나라 [ 高祖]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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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이 城遼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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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이 遼陽에 築城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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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 太祖(朱溫)]는 처음에 [ 黃巢] 휘하의 항복한 장수로서 宣武軍의 깃발을 잡고【[ 僖宗]이 [ 朱全忠]을 宣武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속임수와 무력을 부려 諸夏(中國)를 잠식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군대가 강성하였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지자 뜻과 욕망이 만족함이 없어서 마침내 唐나라의 국통을 옮겨갔는데, 음탕함과 잔학함을 고치지 아니하여 禍가 안에서 일어났으니,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 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재주가 보통사람을 넘지 못하였는데, 敬翔과 王彦章을 버리고 [ 趙巖]과 [ 張歸霸]를 등용하여 後唐의 [ 莊宗]과 대적하였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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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後梁은 二主에 共一十七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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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後梁은 두 군주에 모두 17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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