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 後秦紀
목차
- 1 後秦紀
- 1.1 始皇帝
- 1.1.1 名政이요 實姓은 呂氏니 卽王位二十五年이요
- 1.1.2 [丁巳]秦王政三, 楚十九, 燕十一, 魏三十三, 趙悼襄王偃元, 韓二十九, 齊二十一年
- 1.1.3 [庚申]秦六, 楚二十二, 燕十四, 魏二, 趙四, 韓三十二, 齊二十四年
- 1.1.4 [甲子]秦十, 楚幽王悍元, 燕十八, 魏六, 趙八, 韓二, 齊二十八年
- 1.1.5 [戊辰]秦十四, 楚五, 燕二十二, 魏十, 趙三, 韓六, 齊三十二年
- 1.1.6 [己巳]秦十五, 楚六, 燕二十三, 魏十一, 趙四, 韓七, 齊三十三年
- 1.1.7 [辛未]秦十七, 楚八, 燕二十五, 魏十三, 趙六, 韓九, 齊三十五年
- 1.1.8 [癸酉]秦十九, 楚十, 燕二十七, 魏十五, 趙八, 齊三十七年
- 1.1.9 [甲戌]秦二十, 楚王負芻元, 燕二十八, 魏王假元, 齊三十八年
- 1.1.10 [丙子]秦二十二, 楚三, 燕三十, 魏三, 齊四十, 代三年
- 1.1.11 [戊寅]秦二十四, 楚五, 燕三十二, 齊四十二, 代五年
- 1.1.12 [己卯]秦二十五, 燕三十三, 齊四十三, 代六年
- 1.1 始皇帝
後秦紀
始皇帝
後秦紀 ※始皇帝는 嬴秦의 부강함을 믿고서 六國을 멸하여 마침내 천하를 겸병하였는데, 오로지 형벌과 위엄으로 나라를 세우고는 서적을 불태우고 儒生들을 묻어 죽였으며 포학무도하다가 2세 만에 망하였다. ○ 살펴보건대 正月의 正을, 秦나라 法에 政을 휘하여 征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에 征月이라 하여 그 聲調를 바꾼 것이다. 지금 무도한 임금의 때가 천여 년이 지났는데 시속에서 아직도 正字를 平聲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지금 正月의 正은 마땅히 본래 글자대로 읽어 去聲으로 읽는 것이 옳다. 六經과 四書에서도 모두 마땅히 이것을 준례로 삼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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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秦王政三, 楚十九, 燕十一, 魏三十三, 趙悼襄王偃元, 韓二十九, 齊二十一年
趙王이 以李牧爲將하야 伐燕하야 取武遂, 方城【地理志에 武遂는 屬河間國하고 方城은 屬廣陽郡이라 〈括〉地志에 武遂는 易州遂城也요 方城은 在幽州固安南十七里라 】하다 李牧者는 趙之北邊良將也라 嘗居代雁門【雁門縣이 在代地라 故云代雁門이라 漢代郡城은 古代國也라 】하야 備匈奴【王氏曰 唐, 虞以上曰山戎이요 亦曰獯鬻이요 夏曰淳維요 殷曰鬼方이요 周曰玁狁이요 秦, 漢曰匈奴요 魏, 隋, 唐은 皆曰突厥이라 】할새 以便宜置吏하고 市租를 皆輸入莫(幕)府【莫府者는 以軍幕爲義하니 古字通用이라 古者出征에 以幕帳爲府署也라 】하야 爲士卒費하고 日擊數牛하야 饗士하다 習騎射하고 謹烽火하며 多間諜【諜은 卽游偵이니 使之間行하야 以伺敵하야 觀其變動이라 】하고 爲約曰 匈奴卽入盜어든 急入收保하고 有敢捕虜者면 斬하리라 匈奴每入에 烽火謹하고 輒入保不戰하니 如是數歲에 亦不亡失이라 匈奴皆以爲怯하고 邊士日得賞賜而不用【不用之以戰也라 】하야 皆願一戰이러라 於是에 大破殺匈奴十餘萬騎하고 滅襜襤【一作臨駰이라 如淳曰 胡名也니 在代地라 】하고 破東胡하니 單于犇走【趙東有瀛(洲)[州]之東北營州之境이 卽東胡烏丸地니 國在匈奴東이라 故曰東胡라 王氏曰 〈單于는〉 匈奴天子之號니 猶華言皇帝也라 漢書音義曰 單于者는 廣大貌니 言其象天單于然也라 單은 音蟬이라 】하야 十餘歲를 不敢近趙邊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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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王이 李牧을 장수로 삼아 燕나라를 정벌해서武遂와 方城을【武遂와 方城은 ≪漢書≫ 〈地理志〉에 “武遂는 河間國에 속하고 方城은 廣陽郡에 속한다.” 하였고, ≪括地志≫에 “武遂는 易州의 遂城이고 方城은 幽州 固安縣 남쪽 17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점령하였다. 李牧이란 자는 趙나라 북쪽 변방의 훌륭한 장수이다. 일찍이 代郡의 雁門에 있으면서【雁門縣이 代 땅에 있으므로 代雁門이라고 이른 것이다. 漢나라의 代郡의 城은 옛날 代國이다.】匈奴를 방비할【王氏가 말하였다. “匈奴를 堯‧舜 이전에는 山戎이라 하고 또 獯鬻이라 하였으며, 夏나라 때에는 淳維, 殷나라 때에는 鬼方, 周나라 때에는 玁狁, 秦나라와 漢나라 때에는 匈奴, 魏나라‧隋나라‧唐나라 때에는 모두 突厥이라 하였다.”】 적에 편의에 따라 관리를 두고, 시장의 조세를 모두 幕府로 들여와서【莫府는 軍幕을 의미하니, 古字에 莫과 幕이 통용되었다. 옛날에 出征할 때에는 장막으로 府署를 만들었다.】 士卒들의 비용으로 쓰고, 날마다 몇 마리의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였다.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고 烽火를 삼가며 간첩을 많이 이용하고,【諜은 바로 돌아다니며 정탐하는 자이니, 몰래 돌아다니면서 적을 정탐하여 그 변동을 살펴보는 것이다.】 약속하기를 “匈奴가 만약 들어와 도둑질하거든 급히 城으로 들어와 거두어 지킬 것이요, 감히 匈奴를 포로로 잡는 자가 있으면 斬刑에 처하겠다.” 하였다. 匈奴가 매번 쳐들어올 때마다 烽火를 삼가고(철저히 들어올리고) 번번이 城으로 들어와 지키고 싸우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몇 년 동안 함에 또한 망실한 것이 없었다. 匈奴들은 모두 겁쟁이라 하였고 변방의 군사들은 날마다 상으로 하사하는 물건(병기)을 얻었으나 쓸 곳이 없어서【不用은 그것(병기)을 사용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다.】 모두 한 번 싸우기를 원하였다. 이에 〈출전하여〉 匈奴의 10여 만 騎兵을 대파하여 죽이고, 襜襤을 멸망시키고【襜襤은 一本에는 臨駰으로 되어 있다. 如淳이 말하기를 “오랑캐 이름이니 代 땅에 있다.” 하였다.】東胡를 격파하니, 單于가 달아나서【趙나라 동쪽 瀛州의 동북쪽 營州의 경계가 바로 東胡의 烏丸 땅이니, 나라가 匈奴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東胡라고 한 것이다. 王氏가 말하였다. “單于는 匈奴의 天子의 칭호이니 中華에서 皇帝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漢書音義≫에 이르기를 ‘單于는 廣大한 모양이니, 하늘의 광대함을 본떴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單은 음이 선이다.”】 10여 년 동안 감히 趙나라 변경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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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是時에 天下冠帶之國七而三國【三國은 秦趙燕이라 】邊於戎狄이라 秦은 滅義渠하고 始於隴西, 北地, 上郡하야 築長城以拒胡하고 趙武靈王은 北破林胡【西胡國名이라 如淳曰 林胡는 卽(襜)[儋]林이니 爲趙武靈王所滅하니라 】, 樓煩【雁門郡에 有樓煩縣하니 胡之故地也라 輿地要覽云 樓煩故城은 在今太原府崞州東이라 】하고 築長城호되 自代竝(傍)陰山【北戎地라 在朔州北塞外하니 東西千餘里라 草木茂盛하니 匈奴依阻其中이러니 漢武克匈奴하고 置陰山縣하니라 】하야 下至高闕【括地志云 朔方郡臨戎縣北에 有連山하니 險於長城이라 其山中斷하야 兩峯極峻하고 相對若闕이라 故名焉이라 】하야 爲塞하고 其後에 燕은 破東胡하야 却千餘里하고 亦築長城하야 以拒胡러니 及戰國之末하야 而匈奴始大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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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천하에 冠을 쓰고 띠를 매는 예의의 나라가 일곱인데, 세 나라가 戎狄과 邊境을 접하고 있었다.【三國은 秦나라, 趙나라, 燕나라이다.】秦나라는 義渠를 멸하고隴西‧北地‧上郡에서부터 시작하여 長城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으며, 趙나라 武靈王은 북쪽으로 林胡와【林胡는 서쪽 오랑캐의 나라 이름이다. 如淳이 말하였다. “林胡가 바로 儋林이니, 趙나라 武靈王에게 멸망당하였다.”】樓煩을【樓煩은 雁門郡에 樓煩縣이 있으니, 오랑캐의 옛 땅이다. ≪輿地要覽≫에 이르기를 “樓煩의 옛 城이 지금 太原府 崞州 동쪽에 있다.” 하였다.】격파하고長城을 쌓되 代郡에서부터 陰山【陰山은 북쪽 오랑캐 땅이다. 朔州 북쪽 변방 밖에 있으니, 동서로 천여 리이다. 초목이 무성하니, 匈奴가 그 가운데에 의지하여 살았는데 漢나라 武帝가 匈奴를 이기고 陰山縣을 설치하였다.】 곁을 따라 아래로 高闕에【高闕은 ≪括地志≫에 이르기를 “朔方郡 臨戎縣 북쪽에 連山이 있으니 長城보다도 험하다. 산 중간이 끊어져 두 봉우리가 지극히 높고 서로 마주 대하여 闕門과 같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이르러 요새를 만들었으며, 그 후에 燕나라는 東胡를 격파하여 천여 리를 물리치고 또한 長城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는데, 戰國時代 말기에 이르러 匈奴가 비로소 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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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秦六, 楚二十二, 燕十四, 魏二, 趙四, 韓三十二, 齊二十四年
경신(B.C.241) - 秦나라 6년, 楚나라 22년,燕나라 14년,魏나라 2년, 趙나라 4년, 韓나라 32년, 齊나라 24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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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秦十, 楚幽王悍元, 燕十八, 魏六, 趙八, 韓二, 齊二十八年
宗室大臣이 諫曰 諸侯人來仕者 皆爲其主遊間耳니 請一切逐之하소서 於是에 大索逐客하니 客卿楚人李斯亦在逐中이라 行且上書曰 昔에 穆公은 求士하야 西取由余於戎【由余者는 其先春秋晉人也러니 亡入戎耳라 】하고 東得百里奚於宛하고 迎蹇叔於宋【秦本紀云 百里奚謂穆公曰 臣友蹇叔이 賢而世莫知라한대 穆公이 遂厚幣迎之라하야늘 今云迎於宋이라하니 未詳所出이라 或曰 岐州人으로 〈時〉遊於宋耳라 】하고 求丕豹, 公孫支於晉【丕豹는 自晉奔秦하니 左傳〈有〉明文이라 公孫支는 卽子桑也니 是秦大夫어늘 而云求於晉이라하니 未詳이라 或曰 亦岐州人으로 時遊於晉이라 】하야 幷國二十하야 遂霸西戎하니이다 孝公은 用商鞅之法하야 諸侯親服하야 至今治彊하고 惠王은 用張儀之計하야 散六國之從하야 使之事秦하고 昭王은 得范睢하야 彊公室하고 杜私門하니 此四君者는 皆以客之功하시니 由此觀之컨대 客何負於秦哉잇가 臣聞太(泰)山은 不讓土壤故로 能成其大하고 河海는 不擇細流故로 能就其深하고 王者는 不却衆庶故로 能明其德이라하니 此는 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라 今乃棄黔首【黔은 黧也라 始皇名民曰黔首라하니 以其頭黑也라 】하야 以資敵國하고 却賓客하야 以業諸侯하시니 所謂藉寇兵 而齎盜糧【藉는 或作借하니 謂以兵假(借)[寇]也요 齎는 持遺也니 言爲盜齎糧也라 】者也로소이다 王이 乃召李斯하야 復其官하고 除逐客之令하고 卒用李斯之謀하야 兼天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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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室 大臣이 간하기를 “諸侯國의 사람으로 秦나라에 와서 벼슬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 나라 군주를 위하여 유세하고 이간질할 뿐이니, 청컨대 일체 축출하소서.” 하였다. 이에 객들을 크게 찾아서 쫓아내었는데, 客卿인 楚나라 사람 李斯도 쫓겨나는 가운데 있었다. 그가 떠나면서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옛날 穆公은 선비를 구하여 서쪽으로 由余를 戎에서【由余는 그 선조가 春秋時代 晉나라 사람이었는데, 도망하여 戎으로 들어갔다.】취하고, 동쪽으로 百里奚를 宛에서 얻고, 蹇叔을 宋나라에서【≪史記≫ 〈秦本紀〉에 이르기를 “百里奚가 穆公에게 이르기를 ‘신의 벗 蹇叔이 어진데도 세상에 알아주는 자가 없습니다.’ 하자, 穆公이 마침내 후한 폐백으로 맞이하였다.” 하였는데, 지금 宋나라에서 맞이하였다고 말하였으니 出典이 자세하지 않다. 혹자(≪史記正義≫)는 말하기를 “岐州 사람으로 이때 宋나라에 가 있었다.” 한다.】맞이하고, 丕豹와 公孫支를 晉나라에서【丕豹는 晉나라에서 秦나라로 망명하였는데 ≪春秋左傳≫에 분명한 글이 있다. 公孫支는 바로 子桑이니, 이는 秦나라 大夫인데 晉나라에서 구했다고 하였으니, 자세하지 않다. 혹자(≪史記正義≫)는 말하기를 “公孫支 또한 岐州 사람으로 이때 晉나라에 가 있었다.” 한다.】구하여 20개국을 겸병해서 마침내 西戎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孝公은 商鞅의 法을 써서 諸侯들이 친근하고 복종하여 지금까지 秦나라가 다스려지고 강하며, 惠王은 張儀의 계책을 써서 六國의 合從을 와해시켜 六國으로 하여금 秦나라를 섬기게 하였고, 昭王은 范睢를 얻어 公室을 강하게 하고 私門(權臣의 가문)을 막았습니다. 이 네 군주는 모두 객의 공으로 성공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客이 어찌 秦나라를 저버렸습니까? 신은 듣건대 ‘泰山은 작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기 때문에 그 큼을 이루고, 河海는 작은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깊음을 이루고, 王者는 여러 백성들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그 德을 밝힌다.’고 하였으니, 이는 五帝와 三王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던 이유입니다. 지금 도리어 黔首(백성)를【黔은 검음이다. 始皇帝가 백성들을 이름하여 黔首라 하였으니, 머리가 검기 때문이라 한다.】 버려서 적국을 돕게 하고 빈객들을 물리쳐 諸侯들에게 功業을 이루게 하니, 이른바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갖다 준다.’는【藉는 혹 借로 되어 있으니 병기를 빌려줌을 이르고, 齎는 가져다 주는 것이니 도적을 위하여 양식을 가져다 줌을 말한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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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秦十四, 楚五, 燕二十二, 魏十, 趙三, 韓六, 齊三十二年
무진(B.C.233) - 秦나라 14년,楚나라 5년, 燕나라 22년,魏나라 10년, 趙나라 3년, 韓나라 6년, 齊나라 32년이다. - 韓王이 땅을 바쳐 藩臣이 되기를 청하고 韓非를 시켜 와서 聘問하니, 韓非라는 자는 韓나라의 公子였다. 刑名과 法律의 학문을 잘하였는데, 韓나라가 侵削당하고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자주 글로 韓王에게 등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韓王이 쓰지 못하였다. 이에 韓非는 〈說難〉,【說는 음이 세이니, 〈說難은〉 유세하는 길이 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孤憤〉,【孤憤은 외롭고 정직하여 세상에 용납받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五蠹〉,【蠹는 음이 투(두)이니, 〈五蠹는〉 정사를 좀먹는 일이 다섯 가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說林〉【說林은 여러 가지 일을 널리 말하여 그 많음이 숲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등 56편, 10여 만 글자를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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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秦十五, 楚六, 燕二十三, 魏十一, 趙四, 韓七, 齊三十三年
[辛未]秦十七, 楚八, 燕二十五, 魏十三, 趙六, 韓九, 齊三十五年
[癸酉]秦十九, 楚十, 燕二十七, 魏十五, 趙八, 齊三十七年
○ 燕太子丹이 怨王欲報之러니 將軍樊於期得罪하고 亡之燕한대 太子受而舍之하다 太子聞衛人荊軻之賢하고 卑辭厚禮而請見之하야 欲使劫秦王하야 反諸侯侵地라가 不可어든 因刺殺之러라 軻曰 今行而無信이면 則秦을 未可親也니 誠得樊將軍首와 與燕督亢之地圖【劉向云 督亢은 燕之膏腴地니 今涿州南新城縣이 古督亢亭也라 燕欲以獻秦이라 故畫地獻之하니라 】하야 奉獻秦王이면 秦王이 必說(悅)見臣하리니 臣이 乃有以報라하고 乃私見樊於期曰 聞購將軍首를 金千斤, 邑萬家라하니 願得將軍之首하야 以獻秦王이면 秦王이 必喜而見臣하리니 臣이 左手把其袖하고 右手揕其胸이면 則將軍之仇報하고 而燕見陵之愧除矣리이다 樊於期曰 此는 臣之日夜切齒腐心也라하고 遂自刎이어늘 以函盛其首하고 太子豫求天下之利匕首【尺八短劍이니 其頭類匕故로 名匕首라 】하야 使工으로 以藥焠之하야 以試人하니 血濡縷【以匕首試人하야 血出이 如絲縷之細라 】에 人無不立死者라 乃遣入秦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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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나라 太子丹이 王을 원망하여보복하고자 하였는데, 장군 樊於期가 죄를 얻고 도망하여 燕나라로 가니, 太子가 받아들여 집에 머물게 하였다. 太子가 衛나라 사람 荊軻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말을 낮추고(겸손하게 하고) 禮를 후하게 하여 만나 보기를 청해서 秦王을 위협하여 諸侯들에게서 빼앗은 땅을 반환하게 하다가 그것이 불가하면 인하여 찔러 죽이고자 하였다. 荊軻가 말하기를 “이제 가면서 믿을 만한 신표가 없으면 秦王을 가까이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樊將軍의 머리와 燕나라 督亢의 지도를 얻어서【劉向이 이르기를 “督亢은 燕나라의 비옥한 땅이니, 지금 涿州 남쪽 新城縣이 옛날 督亢亭이다.” 하였다. 燕나라가 이곳을 秦나라에 바치고자 하였으므로 지도를 그려서 바친 것이다.】秦王에게 받들어 올리면 秦王이 반드시 기뻐하여 臣을 만나 볼 것이니, 臣이 그제야 보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사사로이 樊於期를 보고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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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秦二十, 楚王負芻元, 燕二十八, 魏王假元, 齊三十八年
荊軻至咸陽하니 王이 大喜하야 朝服設九賓【文物大備를 卽謂九賓也라 或云 周禮九儀公侯伯子男公卿大夫士也라 一說에 賓은 謂傳儐之儐이니 儐者는 九人也라 】而見之하다 荊軻奉圖하야 以進於王이러니 圖窮而匕首見이어늘 因把王袖而揕之할새 未至身하야 王이 驚起하야 袖絶하니 荊軻逐王한대 王이 環柱而走하다 秦法에 群臣侍殿上者 不得操尺寸之兵이라 左右以手共搏之하고 且曰 王은 負劍【古者帶劍하니 劍長하야 未易拔故로 欲王推之於背하야 令前短하야 易拔也라 一曰 負猶持也라 曲禮에 負劍辟咡라한대 註에 以手挾童子於脅下하야 如帶劍然也라 】負劍하소서 王이 遂拔〈劍〉하야 以擊荊軻하야 斷其左股하고 遂體解以徇하다 於是에 益發兵伐燕하야 戰於易水【源出易州南安閻山하야 東經霸州文安하야 入寇[滱]하니 按卽漢固安縣也라 】之西하야 大破之하니 燕王이 斬丹獻王이어늘 王이 復進兵攻之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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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B.C.227) - 秦나라 20년,楚王 負芻元年, 燕나라 28년, 魏王 假元年,齊나라 38년이다. ○ 代王嘉 元年이다. ○ 옛 나라가 다섯이고 새로운 나라가 하나이다. ○ 합해서 여섯 나라이다.- 荊軻가 咸陽에 이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朝服 차림으로 九賓의【文物을 크게 구비함을 九賓이라 이른다. 혹자는 말하기를 “≪周禮≫의 九儀이니, 公‧侯‧伯‧子‧男과 公‧卿‧大夫‧士이다.” 하였다. 一說에 “賓은 명령을 전달하는 儐을 이르니, 儐하는 자가 아홉 명이다.” 하였다.】 禮를 陳設하고 만나 보았다. 荊軻가 지도를 받들어 왕에게 올렸는데, 지도가 다하자 匕首가 보였다. 荊軻가 인하여 왕의 소매를 잡고 찌르려 할 적에 匕首가 왕의 몸에 이르기 전에 왕이 놀라 일어나 소매가 끊어졌다. 荊軻가 왕을 쫓자 왕이 기둥을 돌며 도망하였다. 秦나라 법에 대궐 위에서 모시는 신하들은 한 자나 한 치의 병기도 휴대할 수가 없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손으로 함께 荊軻를 붙잡고, 또 말하기를 “왕은 칼을 등으로【옛날에 검을 차니, 검이 길어서 쉽게 뽑을 수가 없기 때문에 왕으로 하여금 등으로 밀어서 앞이 짧게 하여 뽑기 쉽게 하고자 한 것이다. 一說에 “負는 잡음과 같다. 〈曲禮〉에 ‘칼을 차듯이 옆에 끼고 입가까지 몸을 기울인다.’ 하였는데, 註에 ‘손으로 童子를 겨드랑이 밑에 잡아서 마치 칼을 차는 듯한 것이다.’라고 했다.” 하였다.】 돌려 뽑으소서.” 하니, 왕이 마침내 검을 뽑아 荊軻를 쳐서 왼쪽 다리를 자르고 마침내 해체하여조리돌렸다. 이에 더욱 군대를 일으켜 燕나라를 쳐서 易水의【易水는 근원이 易州 남쪽 安閻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霸州 文安을 지나 滱州로 들어가니, 바로 漢나라 固安縣이다.】 서쪽에서 싸워 대파하니, 燕王이 丹을 목 베어 왕에게 바쳤으나 왕이 다시 進軍하여 공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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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秦二十二, 楚三, 燕三十, 魏三, 齊四十, 代三年
[戊寅]秦二十四, 楚五, 燕三十二, 齊四十二, 代五年
[己卯]秦二十五, 燕三十三, 齊四十三, 代六年
溫公曰 燕丹이 不勝一朝之忿하야 以犯虎狼之秦하야 輕慮淺謀로 挑怨速禍하야 使召公之廟로 不祀忽諸【言忽然而亡也라 】하니 罪孰大焉이리오 而論者或謂之賢이라하니 豈不過哉아 夫爲國家者는 任官以才하고 立政以禮하고 懷民以仁하고 交隣以信이라 是以로 官得其人하고 政得其節하고 百姓懷其德하고 四隣親其義하나니 夫如是면 則國家安如磐石하고 熾如焱火하야 觸之者碎하고 犯之者焦하나니 雖有彊暴之國이나 尙何足畏哉리오 丹이 釋此不爲하고 顧以萬乘之國으로 決匹夫之怒하고 逞盜賊之謀라가 功隳身僇하고 社稷爲墟하니 不亦悲哉아 夫其膝行蒲伏(匍匐)이 非恭也요 復言重諾이 非信也요 糜金散玉이 非惠也요 刎頸決腹이 非勇也니 要之컨대 謀不遠而動不義면 其楚白公勝【楚太子建이 遇讒在鄭이러니 鄭人殺之한대 其子勝이 在吳라 子西欲召之한대 葉公曰 吾聞勝也好復言而期死라하니 復言은 非信也요 期死는 非勇也니 子必悔之리라 子西不從하고 召之爲白公하다 請伐鄭이어늘 子西許之러니 未起師에 晉人伐鄭한대 楚救之하니 勝怒하야 厲劍하고 遂作亂하야 殺子西, 子期, 子朝하고 劫惠王이러니 後奔山自縊하니라 】之流乎인저 荊軻懷其豢養【草食曰芻요 穀食曰豢이라 又牛馬曰芻요 犬豕曰豢이라 】之私하야 不顧七族【父之姓一이요 姑之娣[子]二요 妹之子三이요 女之子四요 母之姓五요 從子六이요 妻父母七이라 】하고 欲以尺八匕首로 彊燕而弱秦하니 不亦愚乎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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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이 말하였다. “燕나라 丹이 하루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호랑이와 같은 秦나라를 범해서 짧은 생각과 얕은 꾀로 원망을 돋우고 화를 불러서 召公의 사당으로 하여금 갑자기 제사가 끊어지게 만들었으니,【忽諸는 갑자기 망함을 말한 것이다.】 죄가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그런데도 논하는 자들은 혹 어질다고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재주에 따라 관직을 맡기고 禮로써 정사를 세우고 仁으로써 백성을 품어주고 信으로써 이웃 나라와 사귄다. 이 때문에 관원은 그 적임자를 얻고 정사는 그 절도를 얻고 백성은 그 덕을 그리워하고 사방의 이웃 나라는 그 의리(신의)로 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국가가 반석처럼 편안하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치성하여 대드는 자는 부서지고 범하는 자는 타버리니, 비록 彊暴한 나라가 있으나 오히려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丹이 이것을 버리고 하지 않고는 도리어 萬乘의 나라를 가지고 匹夫의 분노를 터뜨리고 도적(자객)을 보내어 사람을 죽이는 꾀를 부리다가 功이 무너지고 몸이 죽었으며 社稷이 빈터가 되었으니, 슬프지 않은가. 무릎으로 기어가고 포복하는 것이 공손함이 아니요, 말을 실천하고 승낙을 중히 하는 것이 信이 아니요, 金을 쓰고 玉을 흩어주는 것이 은혜가 아니요, 목을 찌르고 배를 가르는 것이 용맹이 아니니, 요컨대 계책이 원대하지 못하고 행동이 의롭지 못하면 楚나라 白公 勝의【楚나라 太子 建이 참소당하여 망명해서 鄭나라에 있었는데, 鄭나라 사람이 그를 죽였다. 그 아들 勝이 吳나라에 있으므로 子西가 부르고자 하였는데, 葉公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勝은 말을 실천하고 죽기를 기약한다 하니, 말을 실천함은 信이 아니고 죽기를 기약함은 용맹이 아니니, 그대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子西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불러와 白公으로 삼았다. 白公 勝이 鄭나라를 칠 것을 청하자 子西가 이를 허락하였는데,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晉나라 사람이 鄭나라를 정벌하자 楚나라가 이를 구원하니, 勝이 노하여 검을 갈고 마침내 난을 일으켜 子西와 子期, 子朝를 죽이고 惠王을 위협하였는데, 뒤에 산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부류인 것이다. 荊軻는 길러주는 사사로운 은혜를 고마워하여【풀을 먹여 키운 동물을 芻라 하고 곡식을 먹여 키운 동물을 豢이라 하며, 또 소와 말을 芻라 하고 개와 돼지를 豢이라 한다.】 七族을 돌아보지 않고【七族은 아버지의 姓이 첫 번째이고, 고모의 아들이 두 번째이고, 姊妹의 아들이 세 번째이고, 딸의 아들이 네 번째이고, 어머니의 姓(外族)이 다섯 번째이고, 從子가 여섯 번째이고, 妻父母가 일곱 번째이다.】 한 자 여덟 치의 匕首를 가지고 燕나라를 강하게 하고 秦나라를 약하게 만들고자 하였으니, 어리석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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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齊나라는 삼가 秦나라를 섬기고 諸侯와 더불어 약속을 잘 지키며 齊나라는 또한 동쪽 변방 海上에 있었다. 그리하여 秦나라가 밤낮으로 三晉과 燕‧楚를 공격하니, 다섯 나라가 각각 스스로 구원하였다. 이 때문에 齊王 建이 즉위한 지 40여 년에 병란을 입지 않았다. 그 후 齊나라의 재상과 빈객들이 秦나라의 反間(첩자)의 돈을 많이 받고는 왕에게 秦나라에 조회하도록 권하고 攻戰의 대비를 닦지 않았으며, 다섯 나라를 도와 秦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秦나라가 이 때문에 다섯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新增]雙湖胡氏가 말하였다. “六國이 멸망함에 오직 齊나라가 가장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들과 빈객들이 反間의 돈을 받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秦나라에 조회하도록 권하는 말을 따라서 공격과 전투의 대비를 닦지 않았으며 다섯 나라를 도와 秦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秦나라가 이 때문에 다섯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다섯 나라가 멸망하면 齊나라가 홀로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王賁이 갑자기 臨淄로 들어가니 백성들이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는데 오히려 5백 리를 봉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서 항복했다가 끝내 굶어 죽었으니, ‘소나무여, 측백나무여’ 하는 노래를 보면 지금까지도 서글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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