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2000년사》 제25권 제2장

S2000-25-01-02

Diger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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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과 도시경관

1) 경운궁과 환구단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이후,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서 약 1년 동안 머문 후,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1897년 8월 16일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바꾸었다. 같은 해 10월 12일 환구단圜丘壇에서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10월 13일 대한제국을 국호로 선포한다. 이로서 1867년에 중건된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통치공간이 30년만에 경운궁 중심으로 재편되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의 변란 중에 소실된 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겨져 있었다고는 하나 경복궁과 육조거리는 조선왕조 내내 한양도읍의 상징적인 도시공간이었다. 더욱이 1867년에 국력을 다하여 웅장한 규모로 중건되고 나니, 과연 정도전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 묘사된 이경과 삼경의 표현과 같이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성이고 구름에 둘러싸인 궁궐 오색 찬연해 …… 관청은 우뚝우뚝 서로 맞서서, 뭇 별이 북두성에 읍하고 있는 듯”10 한양의 도시경관이 중건되었다. 육조거리 좌우의 관아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대로를 이루고, 광화문 너머로 근정전과 궁궐 전각들이 백악의 능선을 배경으로 중첩되어 있다.

한편 새로운 황궁으로 조성된 경운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경희궁에 견주어 입지조건이 좋지 않고 경역의 규모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궁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기 위하여 제국의 상징적인 통치시설인 환구단을 신축하게 된다.11 비교적 높은 지대여서 도성 안에서 시각적으로 돋보이는 장소였다. 환구단은 광무 원년인 1897년 10월 2일에 착공하여, 불과 10일만인 10월 12일에 완성되었다.

환구단은 위상으로나 형태적으로 대한제국의 가장 상징적인 건축이다. 조선 후기 학자 김윤식의 일기인 《속음청사續陰晴史》의 환구단제圜丘壇祭와 뮈텔 주교 일기에는 황제의 즉위식이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침에 비가 오다가 개이고 다시 저녁에 비가 내렸다. 금일 자각(오후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대가가 남별궁 환구단에 도착하였는데 단은 3층이다. 축각(오전 1시~3시 사이)에 천지에 제사하고, 인각(오전 3시~5시 사이)에 황제위에 오른 후 환궁하였다. 황후, 황태자를 차례로 책봉하였다.”12

1897년 당시에는 경운궁 동쪽의 포덕문을 나와서 우회하여 동쪽으로부터 환구단으로 진입하였다. 이후 1902년 경운궁 궁역의 확장공사를 통하여 정전 영역과 어도가 확장되고, 동쪽의 대안문이 정문이 되고, 경운궁을 마주보고 환구단의 정문이 건설되었다.13

2) 명성황후의 장례와 신교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 명성황후의 국장이 행해지게 된다. 을미사변으로 왕후가 죽은 이후 7차례에 걸쳐 장례가 연기되다가,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황후로 추존되어 1897년 11월 22일(음력 10월 28일)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14 장례 시기의 연기에 대해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황제가 된 후에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장례 시기를 지연시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명성황후의 능제를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청나라 남경南京으로 사람을 보내 명나라 고황후高皇后의 효릉孝陵을 그려 오게 하는 등 국조의 산릉 중에서 가장 성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15 《독립신문》 1897년 11월 20일 논설에는 명성황후 장례식이 처음으로 황후의 존호로 의식을 치른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국장의궤에 기록된 명성황후 국장의 행렬 동선은 경운궁에서 인시(새벽 4시경)에 출발하여 돈례문敦禮門→금천교禁川橋→인화문仁化門→신교新橋→혜정교惠政橋→이석교二石橋→초석교初石橋→흥인문興仁門→동관왕묘東關王廟→보제원普濟院 앞→한천교寒川橋→천장산 청량리를 경유하여 홍릉에 12시경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가는 도중 종묘 앞과 동대문 밖, 노제소, 능소 홍살문 밖에서 노제路祭를 지냈다. 여기에 동원된 수행원은 발인반차도에 4,800여 명으로 대규모의 행렬이었고, 역사상 최초의 황후 장례식이기에 그 행렬에 있어서도 가장 화려하고 대규모로 진행된 것이다.16

명성황후의 국장 행렬이 지나는 길은 한양의 도시구조가 크게 개편되는 것을 선언적으로 보여준다. 육조거리에서 광화문과 경복궁과 백악으로 구성되는 상징적인 도시경관은 육조거리 남쪽의 황토현으로 가려있었다. 명성황후의 국장을 계기로 육조거리와 경운궁을 잇는 큰 길이 생겼으며, 이에 백악과 경복궁, 광화문과 경운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경관축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근대 도시경관이 만들어졌다.

3) 경운궁과 궁궐 부속시설

1899년에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동생인 하인리히 친왕(Heinrich Prinz von Preußen)이 대한제국을 방문하였다. 그 이후 독일공사관은 1900년에 경운궁의 남쪽에 있던 독일공사관 자리를 대한제국 정부에게 매각하고, 남산 기슭 회현동으로 이전한다. 앞서 경운궁 주변의 각국 공사관에게 경운궁역의 확보를 위하여 협조를 요청했으나, 적절한 대지를 확보하지 못했던 대한제국으로서는 독일공사관의 협조 덕분에 1901년 중화전을 중층전각으로 중건하고, 정전의 위상과 규모에 합당한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02년에 촬영된 카를로 로제티의 사진은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인 경운궁 남쪽 궁궐 담장의 확장공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에서 이와 병치하여 석조전이 건설되면서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으로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중화전의 정전 영역이 형식을 갖추면서, 경운궁의 궁역에 변동이 일어난다. 이전에 남쪽의 정문으로 사용하던 인화문을 폐쇄하고, 동쪽으로 대안문을 새롭게 세우게 된다. 이에 대안문과 환구단을 잇는 길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도시경관이 전개된다. 주요 관아는 경복궁 앞 육조거리에 입지하고 있으나, 탁지부 등 대한제국의 국가사업과 보다 긴밀한 근대적인 부처는 경운궁 주변에 포진하게 된다. 그리고 경운궁과 궐외각사를 연결하는 운교를 건설함으로써 궁궐로서의 외연을 갖추어간다.

1902년 환구단 정문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져서, 경운궁의 대안문을 마주보게 되면서 대안문과 환구단 정문을 잇는 길을 따라 근대건축물이 들어서게 된다. 환구단 정문 앞의 대관정이나, 대한문 앞의 팔레호텔 등 2층 높이의 서양식 건물은 그 이전에 대로를 따라 행랑건축으로 형성되었던 한양의 전통 도시경관을 근대적인 도시경관으로 바꾸어놓았다.

한편 조선 후기 창덕궁과 함께 양궐체제를 이루고 있던 경희궁은 1867년 경복궁이 건설되면서 전각들이 해체되었다. 홍화문과 숭정전만이 빈 궁터에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 비워진 경희궁터는 당시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하여, 근대적인 양잠산업의 육성을 도모하는 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경희궁터는 비좁은 경운궁의 궁역을 보완하는 행사장소로 사용되었다. 1899년에 하인리히 친왕의 열병식이 거행되었고, 1907년에는 엄비가 참석했던 여학교의 운동회가 열리기도 하는 등 국가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와 같이 경운궁과 경희궁은 하나의 영역으로 사용되었다. 1901년에 두 궁역을 연결하기 위하여 세 개의 홍예로 지지하는 홍교가 건설되었다. 경운궁과 그 주변의 궁궐도시경관은 1904년 1월 경운궁의 대화재로 궁궐이 잿더미로 변하기까지 대한제국의 근대 도시경관을 대표한다.

4) 대한제국의 도시건축 기념비

원각사10층석탑은 백탑이라 불리면서 한양도성 안17에서 가장 눈에 띄는 표상이었다. 이 탑은 1900년을 전후로 서울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기행문에 늘 등장한다. 1901년 서울을 방문하여 사진과 함께 《SEOUL, THE CAPITAL OF KOREA》를 남겼던 버튼 홈스 역시 서울구경에 나서서 좁은 오솔길의 미로에 감추어져있던 터가 공원용 용지로 계획되어 정돈되면서 원각사탑이 도시공간에 드러나게 되었음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원각사터와 백탑은 오래된 절터이고 익숙한 불탑이지만, 1896년 즈음에 총세무사 브라운의 건의로 근대적인 도시공간으로 등장하게 된다.

19세기에 그려진 경기감영도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인왕산의 능선을 배경으로 돈의문과 경기감영과 의주로의 풍경, 그리고 영은문迎恩門과 무악재고개에 이르는 풍경은 도성 밖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경관이었다. 영은문이나 모화관慕華館이라는 편액에 담긴 뜻과 같이, 조선시대 내내 명나라 청나라와의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보여주던 장소이다. 1898년 돈의문 밖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이 건설되었다. 이 기념비는 대한제국이 청나라를 비롯한 열강들에게 독립국가임을 선포하는 상징적인 기념비로서 독립협회의 주관으로 고종 황제의 내탕금과 백성들의 성금으로 건설되었다. 당시 독립협회의 총무였던 서재필의 스케치와 러시아건축가 사바친의 설계, 그리고 심의석의 공사로 건립되었다. 개선문의 양식을 따라 석재로 건설된 조적건축물은 그 이전의 일주문 형식의 영은문과 대조적이다. 편액에 새겨진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태극 문양은 근대 도시경관으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선포하고 있다.18

1902년은 고종 황제가 즉위한지 4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여 육조거리의 남단 기로소 앞에 기념비전이 건설된다. 1897년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르면서 경복궁에서 경운궁에 이르는 대로가 뚫렸고, 기념비전은 이 대로와 종로가 교차하는 자리에 새로운 도시중심을 기념하는 시설로서 세워진 것이다.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석재 기단 위에 3칸의 다포식 사모지붕으로 지어졌다.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19 에 황제로서 원구에서 제사를 올린 일과 이제 기로소에 입사한다는 사실을 기념한다는 것이 적혀있다. 경운궁 앞의 원구와 조응하는 대한제국의 도시기념물로서, 경운궁과 경복궁에서 백악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도시경관 축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