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E000438

song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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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동출토_백자명기
파일:GCE000438.png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대표명칭 송정동출토_백자명기
제작시기 조선



상세설명

조선은 '孝'라는 유교적 윤리를 위해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 3년동안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조상을 편히 모시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믿었다. 예학의 성장과 함께 16세기 중엽부터 사대부층에 유교적 상장례가 보급되었고 조상의 묘역을 단장하고 명기를 부장하는데 큰 관심을 쏟았다. 유교에서는 멀리 떠나보낸 조상이 마치 살아계신 듯 양지바른 곳에 모시고 평상시 물건을 사용토록 하는 것을 도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상은 신명이라 하여 온전히 살아계신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기에 정성껏 예를 갖추어 실제 사용할 수 없도록 생활용기를 축소하여 만든 도자명기를 무덤에 묻어 섬김을 다하였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집안 내력 뿐 아니라 생전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도자 지석을 특별히 제작하여 후대에 길이 전하였다. 조선의 양반가에서는 부모의 갑작스런 변고를 걱정하여 부모가 60세가 되는 해부터 10년 주기로 마련하기 어려운 상례도구를 준비해두는 것을 도리로 여겼다.
소형 그릇을 무덤 남측 장벽의 편방에 넣은 풍습은 조상의 삶을 염원하는 일종의 효의 실천이었으며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부장방식이다. 명기는 식기와 마찬가지로 벼슬에 따라 수량이 차별화되었다. 15세기 편찬된 <국조오례의>(1474)에서는 4품 이상의 사대부는 30벌, 5품 이하는 20벌,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서인은 15벌로 규정하였으나 17세기에 20벌을 무덤에 넣던 5품, 6품은 30벌, 7품과 8품은 20벌로 명기의 수량이 늘어났다. 18세기에는 사대부 묘의 공간이 축소되어 더 이상 명기를 넣지 않았으나 보수성을 유지하는 왕실에서는 꾸준히 사용되었다.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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