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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9일 (금) 15:25 기준 최신판
상림리출토_백자음각_甲戌(1634)左명_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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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상림리출토_백자음각_甲戌(1634)左명_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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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조선 |
상세설명
현재 16개소의 가마터가 분포된 상림리에는 세 개의 요지군이 있는데 사기소, 승방골, 시어골 요지이다.사기소와 시어골 요지의 경우 17세기, 승방골 요지는 19세기에 운영된 가마터이다. 그동안 발견된 상림리 요지의 간지는 '신미(1631)', '계유(1633)', '을해(1635)', '유?(1636)', '을(1629 또는 1639)' '십구경(1640)'이 보고된 바 있다. 김영훈 선생 자료에서 '술진(1628)'이 있어 1629-1640년으로 추정되던 상림리 요지의 운영시기가 앞당겨지게 되었다.[1]
음식을 담기 위한 오목한 백자접시로 기축선은 동체 하단부에서 사선으로 올라가 구연을 이룬다. 내저면에는 굽지름보다 큰 원각이 있으며 가마에서 떨어진 잡물이 붙어있다. 굽은 수직굽으로 접지면에는 가는모래를 받쳐 번조하였다. 굽 안바닥에는 '甲戌(1634)左'명이 유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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