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D200679

songyi
정송이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0월 1일 (금) 00: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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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동출토_백자철화_운룡문_편병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대표명칭 송정동출토_백자철화_운룡문_편병
제작시기 조선



상세설명

선동리 요지는 지금까지 5개소가 보고되었다. 1640-1648년까지의 간지가 출토되었으며 유물은 백자반상기, 문방구, 제기뿐만 아니라 철화백자와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 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1] 선동리가마는 1640년 분원이 설치된 이후 10년이 지난 1649년 초봄, 광주 동면 송치松峙(지금의 송정동)로 이설하였다는 운영기록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전해진다. 확인된 4기의 가마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2-1호와 2-4호는 길이 22m이상, 너비 180∼300cm로 아궁이와 4개의 번조실, 굴뚝부로 갈수록 약간 넓어지는 반지하식 등요이며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가 나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번조실 중심에 불기둥을 둔 조선전기 가마와 달리 불턱으로 경계를 구분하고 번조실 내부에 2~3개의 방형 불기둥을 두었는데, 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발달된 구조로 여겨진다. 가마 외에도 인근에서 추가로 2기의 가마폐기물퇴적과 공방지가 발견되어 여러 가마가 함께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굽 안바닥에 새겨진 辛巳(1641년)~戊子(1648년)에 해당하는<左/右+간지> 명문과 기존에 발견된 庚辰(1640년) 간지를 통해 기록에서처럼 1640~48년까지 운영된 지역임이 증명되었다. 유물은 백자반상기를 중심으로 대발, 합, 병, 호, 문방구, 돈, 명기, 장군, 향로, 제기 등이 만들어졌다. 병,편병 등 특수기종을 중심으로 철화문이 장식되었으며 17세기 가마터에서는 처음으로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2]
물레로 빚은 원반형의 동체에 경부를 별도로 붙인 대형의 백자 편병으로 번조과정에서 휘어진 동체 일부가 남아있다. 동체를 돌아가며 장식된 삼조의 용은 여의주를 향해 구름 사이로 유유히 지나는 모습으로, 구륵법을 이용해 몸통의 외곽선으로 그린 후 비늘은 점을 찍듯 표현하였다. 운룡문이 그려진 기종은 호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운룡문 편병은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보기 드문 예이다.[3]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1.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
  2.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 2014 경기도자박물관 발굴유물특별전 >,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4
  3.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21책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2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267 민백 운룡문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711020 조선 17-18세기 철화백자의 특징과 성격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791602 조선시대 관요 철화백자의 성격 변화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986384 雲龍文 분석을 통해서 본 조선 후기 백자의 편년 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