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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소장품정보 |사진=GCD200537.png |사진출처=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대표명칭=상림리출토_백자철화_이사성_지석 |고유번호=GCD200537 |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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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옹원정을 지낸 이사성의 백자 지석으로 철화안료를 이용해 지문을 해서체로 정갈하게 써내려갔다. 이식이 지은 <택당집>에는 지문과 동일한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사후 60년 뒤 의뢰한 기록이 남아있다. 명에는 손주 이명달이 사옹원직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628-30년에는 사옹원에 재임하였던 것으로 보아 지석의 제작연대는 1628년 이후부터 1630년 사이로 추정된다. | + | 현재 16개소의 가마터가 분포된 상림리에는 세 개의 요지군이 있는데 사기소, 승방골, 시어골 요지이다.사기소와 시어골 요지의 경우 17세기, 승방골 요지는 19세기에 운영된 가마터이다. 그동안 발견된 상림리 요지의 간지는 '신미(1631)', '계유(1633)', '을해(1635)', '유?(1636)', '을(1629 또는 1639)' '십구경(1640)'이 보고된 바 있다. 김영훈 선생 자료에서 '술진(1628)'이 있어 1629-1640년으로 추정되던 상림리 요지의 운영시기가 앞당겨지게 되었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ref></br> |
| + | 사옹원정을 지낸 이사성의 백자 지석으로 철화안료를 이용해 지문을 해서체로 정갈하게 써내려갔다. 이식이 지은 <택당집>에는 지문과 동일한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사후 60년 뒤 의뢰한 기록이 남아있다. 명에는 손주 이명달이 사옹원직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628-30년에는 사옹원에 재임하였던 것으로 보아 지석의 제작연대는 1628년 이후부터 1630년 사이로 추정된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21책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21</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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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3일 (일) 01:11 판
| 상림리출토_백자철화_이사성_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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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명칭 | 상림리출토_백자철화_이사성_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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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시기 | 조선 |
상세설명
현재 16개소의 가마터가 분포된 상림리에는 세 개의 요지군이 있는데 사기소, 승방골, 시어골 요지이다.사기소와 시어골 요지의 경우 17세기, 승방골 요지는 19세기에 운영된 가마터이다. 그동안 발견된 상림리 요지의 간지는 '신미(1631)', '계유(1633)', '을해(1635)', '유?(1636)', '을(1629 또는 1639)' '십구경(1640)'이 보고된 바 있다. 김영훈 선생 자료에서 '술진(1628)'이 있어 1629-1640년으로 추정되던 상림리 요지의 운영시기가 앞당겨지게 되었다.[1]
사옹원정을 지낸 이사성의 백자 지석으로 철화안료를 이용해 지문을 해서체로 정갈하게 써내려갔다. 이식이 지은 <택당집>에는 지문과 동일한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사후 60년 뒤 의뢰한 기록이 남아있다. 명에는 손주 이명달이 사옹원직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628-30년에는 사옹원에 재임하였던 것으로 보아 지석의 제작연대는 1628년 이후부터 1630년 사이로 추정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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