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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광주읍에서 번천리로 가기 전 송현 아래에 송정리 마을이 있다. 송정리는 1914년 송정松亭과 수하水下를 합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릇 안 바닥에는 간지(제작연도) 그리고 숫자가 표기되어 있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ref> | |
− | + | 1649년 초봄 무렵, 송정동(옛 송치松峙) 가마는 선동리에서 옮겨와 10여년간 어기御器 생산을 지속하였다. 송정동의 가마터 8곳 가운데 두 차례 조사된 5호·6호 가마는 조선중기 관요의 구조를 규명하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호 가마는 경사도 16°의 바닥을 조성한 뒤 점토로 벽체와 천정을 축조하여 총길이 22.5m, 최대너비 255cm의 반지하식의 등요를 만들었다. 부채꼴 모양의 이 가마는 경사면을 따라 아궁이와 3개의 번조실, 굴뚝을 배치하고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를 두었다. 특히, 불턱과 3줄의 고래가 있는 아궁이 위로 불턱과 3개의 불기둥으로 번조실의 경계를 만들어 불의 흐름에 효율을 더하였다. 가마주변으로는 추정 지붕시설을 두고 가마의 안전을 비는 진단구鎭壇具를 아궁이 옆에 묻어 특이 할만하다. 6호에 비해 갑발이 많이 발견되는 5호는 회청색 백자를 중심으로 사군자문, 포도문, 시 등이 그려져 있는 철화백자와 청자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반상기외에 호, 병, 합, 향로, 마상배, 제기, 명기 등 다양한 기종이 제작됐다. 한편, 굽 안바닥에 새겨진 <左/右+간지>, <左/右+간지+숫자> 명문은 5호에서 己丑(1649년)~甲午(1654년)까지, 6호에서는 己丑(1649년)~壬辰(1652년)까지의 간지가 확인되어 운영시기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 2014 경기도자박물관 발굴유물특별전 >,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4</ref></br> | |
물레로 빚은 원반형의 동체에 경부를 별도로 붙인 대형의 백자 편병으로 번조과정에서 휘어진 동체 일부가 남아있다. 동체를 돌아가며 장식된 삼조의 용은 여의주를 향해 구름 사이로 유유히 지나는 모습으로, 구륵법을 이용해 몸통의 외곽선으로 그린 후 비늘은 점을 찍듯 표현하였다. 운룡문이 그려진 기종은 호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운룡문 편병은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보기 드문 예이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21책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21</ref></br> | 물레로 빚은 원반형의 동체에 경부를 별도로 붙인 대형의 백자 편병으로 번조과정에서 휘어진 동체 일부가 남아있다. 동체를 돌아가며 장식된 삼조의 용은 여의주를 향해 구름 사이로 유유히 지나는 모습으로, 구륵법을 이용해 몸통의 외곽선으로 그린 후 비늘은 점을 찍듯 표현하였다. 운룡문이 그려진 기종은 호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운룡문 편병은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보기 드문 예이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21책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21</ref></br> | ||
2021년 10월 1일 (금) 01:08 판
송정동출토_백자철화_운룡문_편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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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송정동출토_백자철화_운룡문_편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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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조선 |
상세설명
광주읍에서 번천리로 가기 전 송현 아래에 송정리 마을이 있다. 송정리는 1914년 송정松亭과 수하水下를 합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릇 안 바닥에는 간지(제작연도) 그리고 숫자가 표기되어 있다.[1]
1649년 초봄 무렵, 송정동(옛 송치松峙) 가마는 선동리에서 옮겨와 10여년간 어기御器 생산을 지속하였다. 송정동의 가마터 8곳 가운데 두 차례 조사된 5호·6호 가마는 조선중기 관요의 구조를 규명하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호 가마는 경사도 16°의 바닥을 조성한 뒤 점토로 벽체와 천정을 축조하여 총길이 22.5m, 최대너비 255cm의 반지하식의 등요를 만들었다. 부채꼴 모양의 이 가마는 경사면을 따라 아궁이와 3개의 번조실, 굴뚝을 배치하고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를 두었다. 특히, 불턱과 3줄의 고래가 있는 아궁이 위로 불턱과 3개의 불기둥으로 번조실의 경계를 만들어 불의 흐름에 효율을 더하였다. 가마주변으로는 추정 지붕시설을 두고 가마의 안전을 비는 진단구鎭壇具를 아궁이 옆에 묻어 특이 할만하다. 6호에 비해 갑발이 많이 발견되는 5호는 회청색 백자를 중심으로 사군자문, 포도문, 시 등이 그려져 있는 철화백자와 청자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반상기외에 호, 병, 합, 향로, 마상배, 제기, 명기 등 다양한 기종이 제작됐다. 한편, 굽 안바닥에 새겨진 <左/右+간지>, <左/右+간지+숫자> 명문은 5호에서 己丑(1649년)~甲午(1654년)까지, 6호에서는 己丑(1649년)~壬辰(1652년)까지의 간지가 확인되어 운영시기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2]
물레로 빚은 원반형의 동체에 경부를 별도로 붙인 대형의 백자 편병으로 번조과정에서 휘어진 동체 일부가 남아있다. 동체를 돌아가며 장식된 삼조의 용은 여의주를 향해 구름 사이로 유유히 지나는 모습으로, 구륵법을 이용해 몸통의 외곽선으로 그린 후 비늘은 점을 찍듯 표현하였다. 운룡문이 그려진 기종은 호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운룡문 편병은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보기 드문 예이다.[3]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267 민백 운룡문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711020 조선 17-18세기 철화백자의 특징과 성격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791602 조선시대 관요 철화백자의 성격 변화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986384 雲龍文 분석을 통해서 본 조선 후기 백자의 편년 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