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조선백자 요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소장품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광주 조선백자 요지 |고유번호= |괸리자=광주시 |지정번호=사적 314호 |지정일=1985.11.07 |분류=가마...)
 
14번째 줄: 14번째 줄:
 
}}
 
}}
 
==상세설명==
 
==상세설명==
 +
 +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85쪽</br>
 +
세공으로 진상되어 오던 광주 백자는 명나라 사신에게 선사될 정도로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며 상감백자와 '司', '內用'이 압인된 명문백자가 우산리, 건업리, 번천리 등지에서 생산되었다. 1467년경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되고 왕실과 관청에 소용되는 백자를 직접 조달하게 되면서 광주 백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분원설립 이후, 우산리, 도마리, 번천리, 관음리를 중심으로 화원이 그린 기품있는 청화백자와 함꼐 '천 지 현 황', '좌 우 별'명문을 새긴 고품격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는 17세기에는 철화백자가 등장하는 동시에 진상백자에 간지를 새겨 관리 효율을 높였으며,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정지리, 탄벌동, 학동리, 상림리, 선동리, 송정동, 유사리, 신대리, 지월리 순으로 가마가 약 10년 주기로 이동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오향리, 금사리 등지에서 활동하던 분원가마는 한강을 지나던 선박에 세금을 거둬 땔나무를 구입하면서 더 이상 이전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분원리에 정착하여 130여 년간 운영하였다.</br>
 +
광주 목현동 요지
 +
조선 15세기
 +
목현동은 목감동木甘洞과 초현동草峴洞을 병합해서 목현리라고 했다. 초현은 목현동에서 오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광주 남쪽의 초현草峴일 가능성이 있다. <중정남한지>(1847)에는 "초현점은 부에서 동남으로 20리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새오개 다음에는 두새오개가 있는데, 1872년 지방지도 중 <광주전도>를 보면 새오개의 위치를 초현이라 했고 두 새오개의 위치는 재再초현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br>
 +
 +
광주 우산리 요지</br>
 +
조선 15-16세기</br>
 +
광주 우산리 요지에서는 박건의 부인최씨 묘지편과 정옥현의 부인김씨 묘지편 그리고 '가정 계사년(1533)'이 새겨진 묘지편을 수습하여 중종시대(1506-1544)에 운영되었음을 확실해졌다. </br>
 +
 +
광주 무갑리 요지</br>
 +
조선 15-16세기</br>
 +
무갑리는 토속명으로 '무래비'라고 하며 마을 뒤에 무갑산이 있어 무갑리라고 했다. 이곳 역시 우산리와 마찬가지로 마을전체가 유적군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일찍이 개간되어 유적의 전체적인 규모가 파악되지 않았다. 상감백자와 함께 '지, 현, 능'명 백자, '가정27(1548)'의 년기가 있는 묘지명이 수습되어 무갑리의 운영시기 추정이 가능해졌다.  </br>
 +
광주 도마리 요지</br>
 +
조선 15-16세기</br>
 +
상번천리에서 도마치倒馬峙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도마리는 원래 도마동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도자기를 만드는 도막陶幕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도마道馬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마리 요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64년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가마가 이미 훼손된 상태라 교란된 퇴적층만 조사하였다. 을축팔월명乙丑八月 사각봉의 연대가 1505년으로 추정되어 도마리 요지의 운영시기를 15세기에서 16세기 초반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br>
 +
광주 번천리 요지</br>
 +
조선 15-16세기</br> 
 +
번천리는 토속어로 '벌대'라고 한다. 원래는 초월에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2021년 9월 27일 (월) 23:14 판

광주 조선백자 요지
대표명칭 광주 조선백자 요지
제작시기 조선



상세설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85쪽
세공으로 진상되어 오던 광주 백자는 명나라 사신에게 선사될 정도로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며 상감백자와 '司', '內用'이 압인된 명문백자가 우산리, 건업리, 번천리 등지에서 생산되었다. 1467년경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되고 왕실과 관청에 소용되는 백자를 직접 조달하게 되면서 광주 백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분원설립 이후, 우산리, 도마리, 번천리, 관음리를 중심으로 화원이 그린 기품있는 청화백자와 함꼐 '천 지 현 황', '좌 우 별'명문을 새긴 고품격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는 17세기에는 철화백자가 등장하는 동시에 진상백자에 간지를 새겨 관리 효율을 높였으며,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정지리, 탄벌동, 학동리, 상림리, 선동리, 송정동, 유사리, 신대리, 지월리 순으로 가마가 약 10년 주기로 이동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오향리, 금사리 등지에서 활동하던 분원가마는 한강을 지나던 선박에 세금을 거둬 땔나무를 구입하면서 더 이상 이전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분원리에 정착하여 130여 년간 운영하였다.
광주 목현동 요지 조선 15세기 목현동은 목감동木甘洞과 초현동草峴洞을 병합해서 목현리라고 했다. 초현은 목현동에서 오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광주 남쪽의 초현草峴일 가능성이 있다. <중정남한지>(1847)에는 "초현점은 부에서 동남으로 20리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새오개 다음에는 두새오개가 있는데, 1872년 지방지도 중 <광주전도>를 보면 새오개의 위치를 초현이라 했고 두 새오개의 위치는 재再초현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광주 우산리 요지
조선 15-16세기
광주 우산리 요지에서는 박건의 부인최씨 묘지편과 정옥현의 부인김씨 묘지편 그리고 '가정 계사년(1533)'이 새겨진 묘지편을 수습하여 중종시대(1506-1544)에 운영되었음을 확실해졌다.

광주 무갑리 요지
조선 15-16세기
무갑리는 토속명으로 '무래비'라고 하며 마을 뒤에 무갑산이 있어 무갑리라고 했다. 이곳 역시 우산리와 마찬가지로 마을전체가 유적군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일찍이 개간되어 유적의 전체적인 규모가 파악되지 않았다. 상감백자와 함께 '지, 현, 능'명 백자, '가정27(1548)'의 년기가 있는 묘지명이 수습되어 무갑리의 운영시기 추정이 가능해졌다.
광주 도마리 요지
조선 15-16세기
상번천리에서 도마치倒馬峙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도마리는 원래 도마동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도자기를 만드는 도막陶幕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도마道馬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마리 요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64년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가마가 이미 훼손된 상태라 교란된 퇴적층만 조사하였다. 을축팔월명乙丑八月 사각봉의 연대가 1505년으로 추정되어 도마리 요지의 운영시기를 15세기에서 16세기 초반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광주 번천리 요지
조선 15-16세기
번천리는 토속어로 '벌대'라고 한다. 원래는 초월에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