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안내문)
(안내문)
38번째 줄: 38번째 줄:
 
==안내문==
 
==안내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상은 719년 중아찬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감산사에 아미타불상과 함께 조성하였다. 미륵보살상은 전반적으로 통통한 체형으로 왼쪽 다리에 힘을 약간 주고 비스듬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보살상 전체를 감싸는 광배부터 보살상이 착용하고 있는 보관과 목걸이 그리고 치마 주름표현과 대좌에 새겨진 문양에서 보이국적인 양식이 관찰된다. <br>
+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상은 719년 중아찬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감산사에 아미타불상과 함께 조성하였다. 미륵보살상은 전반적으로 통통한 체형으로 왼쪽 다리에 힘을 약간 주고 비스듬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보살상 전체를 감싸는 광배부터 보살상이 착용하고 있는 보관과 목걸이 그리고 치마 주름표현과 대좌에 새겨진 문양에서 이국적인 양식이 관찰된다. <br>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상의 존명과 조성 시기뿐만 아니라 발원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포함된 조상기를 동반한 8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이다. 특히, 화불이 새겨진 보관을 착용한 미륵보살이라는 점에서 일찍이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보관에 표현된 화불은 관음보살의 대표적인 도상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보살상 광배 뒷면에 '미륵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없었다면, 관음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원자 김지성은 노자도덕경, 장자, 유가사지론과 같은 심오한 경론을 읽었던 당대의 지식인으로 발원자의 무비에서 온 도상적인 오류가 아님을 알려준다.<br>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상의 존명과 조성 시기뿐만 아니라 발원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포함된 조상기를 동반한 8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이다. 특히, 화불이 새겨진 보관을 착용한 미륵보살이라는 점에서 일찍이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보관에 표현된 화불은 관음보살의 대표적인 도상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보살상 광배 뒷면에 '미륵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없었다면, 관음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원자 김지성은 노자도덕경, 장자, 유가사지론과 같은 심오한 경론을 읽었던 당대의 지식인으로 발원자의 무비에서 온 도상적인 오류가 아님을 알려준다.<br>
 
도상의 혼용은 4세기 인도를 시작으로 서역을 거쳐 중국까지의 넓은 범위에서 여러 보살 사이에서 나타났다. 관음을 조성하던 중에 미륵으로 바꾸어 완성하였다는 남조시대의 일화도 초기 불교미술에서 보살 간의 도상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당시 분위기를 보여준다. 화불이 새겨진 보관을 착용한 미륵보살상이 감산사에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br>
 
도상의 혼용은 4세기 인도를 시작으로 서역을 거쳐 중국까지의 넓은 범위에서 여러 보살 사이에서 나타났다. 관음을 조성하던 중에 미륵으로 바꾸어 완성하였다는 남조시대의 일화도 초기 불교미술에서 보살 간의 도상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당시 분위기를 보여준다. 화불이 새겨진 보관을 착용한 미륵보살상이 감산사에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br>

2024년 11월 26일 (화) 00:41 판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Stone Standing Maitreya Bodhisattva of Gamsansa Temple, Gyeongju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소장품 검색, 국립중앙박물관.
대표명칭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영문명칭 Stone Standing Maitreya Bodhisattva of Gamsansa Temple, Gyeongju
한자 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지정(등록) 종목 국보
지정(등록)일 1962년 12월 20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시대 통일신라
제작시기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
수량/면적 1구
웹사이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소장품 검색, 국립중앙박물관.



정의

(예)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미륵보살입상.

서술방식: 해당 작품의 현재 소장처/ 해당 작품의 조성연대/ 해당 작품의 공식 명칭 순으로 기술한다. 공식 명칭은 국가유산청에서 사용하는 명칭이나 현재 소장처에서 사용하는 명칭이다.

Description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전반적으로 통통한 체형으로 왼쪽 다리에 힘을 약간 주고 비스듬하게 서 있는 모습에서 유연함이 보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륵보살상의 장방형 얼굴은 이마 가운데에 백호가 뚜렷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두 눈을 감고 입술을 다문 채 선정에 빠져 있는 보살상은 왼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손바닥이 바깥을 향하는 시무외인을 결하고, 오른손을 밑으로 떨어 뜨리면서 여원인을 하고 있다. 보살상 전체를 감싸는 거신광과 대좌 표면에 새겨진 다양한 문양들은 석조미륵보살입상의 화려한 장식을 강조한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두발을 모아 삼각형 형태로 높게 묶은 髪髻冠 형식에 보관을 착용하고 있다. 삼면 형식의 보관은 마모가 심해 세부 표현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꽃 모양의 장신구가 보관의 양끝과 가운데에 배치되어 주축을 이루고 그 사이에 당초문이 얽혀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관 중앙에는 좌상 형식의 화불 장식이 두드러진다.
미륵보살상의 양어깨 위에는 낙액과 천의가 묶여서 고정된 매듭이 나타난다. 어깨에 고정된 매듭 아래로 양팔을 감싸면서 내려가는 천의 자락은 보살상의 발끝까지 강한 곡선을 그리면서 퍼지고 있다. 미륵보살상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왼쪽 어깨로 올라가면서 가슴 표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낙액으로 인해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이 강조된다. 보살상의 밀착된 치마는 보살상의 하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두 다리 사이의 공간감을 나타내고 있다.
감산사 미륵보살상의 풍만한 신체는 唐代 불교조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唐代 보살상의 체형과 유연한 자세는 중인도 굽타양식의 영향이다. 인도 보살상은 비스듬하게 기대어 서 있는 자세에서 유연함이 강조된다. 또한 보살상 하체에 밀착된 치마 위로 신체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인도 보살상의 특징은 보경사 전래의 십일면관음부조상과 서안 대명사지 출토 석조보살입상에 보인다. 두 보살상은 당 불교조각의 전성기 양식을 대표하면서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유사한 대표적인 당대 보살상으로 언급된다. 보경사 전래 상들은 장안연간에서 개원연간 사이인 8세기 초반 당 보살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기존 연구에서도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두 다리 사이에 부자연스럽게 밀려든 주름처리를 회화적인 도상을 조각이라는 형태로 변환하면서 일어난 투박한 표현으로 보았다. 650년대 왕현책과 천축을 방문하였던 조각가 송법지가 정관 17년 천축으로 가서 성용을 베껴와 조성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도 회화와 조각 형식이 서로 자유롭게 변환된 것을 알 수 있다.
발원자 김지성은 705년 견당사의 일행으로 당의 수도 장안을 방문한 이력이 있다. 즉, 견당사 신분으로 장안을 방문한 김지성은 이국적인 형상의 唐代 보살상의 조형을 조각이나 벽화로 직접 접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이 감산사 미륵보살상 조성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상은 719년 중아찬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감산사에 아미타불상과 함께 조성하였다. 미륵보살상은 전반적으로 통통한 체형으로 왼쪽 다리에 힘을 약간 주고 비스듬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보살상 전체를 감싸는 광배부터 보살상이 착용하고 있는 보관과 목걸이 그리고 치마 주름표현과 대좌에 새겨진 문양에서 이국적인 양식이 관찰된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상의 존명과 조성 시기뿐만 아니라 발원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포함된 조상기를 동반한 8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이다. 특히, 화불이 새겨진 보관을 착용한 미륵보살이라는 점에서 일찍이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보관에 표현된 화불은 관음보살의 대표적인 도상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보살상 광배 뒷면에 '미륵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없었다면, 관음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원자 김지성은 노자도덕경, 장자, 유가사지론과 같은 심오한 경론을 읽었던 당대의 지식인으로 발원자의 무비에서 온 도상적인 오류가 아님을 알려준다.
도상의 혼용은 4세기 인도를 시작으로 서역을 거쳐 중국까지의 넓은 범위에서 여러 보살 사이에서 나타났다. 관음을 조성하던 중에 미륵으로 바꾸어 완성하였다는 남조시대의 일화도 초기 불교미술에서 보살 간의 도상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당시 분위기를 보여준다. 화불이 새겨진 보관을 착용한 미륵보살상이 감산사에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