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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9일 (금) 15:29 기준 최신판
| 상림리출토_백자발 |
|
| 대표명칭 | 상림리출토_백자발 |
|---|---|
| 제작시기 | 조선 |
상세설명
현재 16개소의 가마터가 분포된 상림리에는 세 개의 요지군이 있는데 사기소, 승방골, 시어골 요지이다.사기소와 시어골 요지의 경우 17세기, 승방골 요지는 19세기에 운영된 가마터이다. 그동안 발견된 상림리 요지의 간지는 '신미(1631)', '계유(1633)', '을해(1635)', '유?(1636)', '을(1629 또는 1639)' '십구경(1640)'이 보고된 바 있다. 김영훈 선생 자료에서 '술진(1628)'이 있어 1629-1640년으로 추정되던 상림리 요지의 운영시기가 앞당겨지게 되었다.[1]
회백색 태토에 투명유를 시유한 백자 발로 기측선은 동체 하단부에서 둥근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다 구연에서 외반한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굽은 접지면의 폭이 1.5cm인 넓은 굽으로 17세기 중국백자의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형태이다. 굽 안바닥에는 '...左'자 명문을 유면음각하였으며, 접지면에는 가는모래를 받쳐 번조한 흔적이 남아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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