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화곡리 가마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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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참고자료== | ||
2024년 4월 19일 (금) 08:15 기준 최신판
| 경기도 안성시 화곡리 가마터 |
|
| 클래스 | Place |
|---|---|
| 아이디 | 경기도_안성시_화곡리 |
| 대표명칭 | 경기도 안성시 화곡리 가마터 |
| 한글명칭 | 경기도 안성시 화곡리 가마터 |
| 한자 | 京畿道 窯址 |
| 유형 | 유적 |
| 세부유형 | 도지가 가마 |
| 시대 | 조선 |
설명
조선 17-18세기
안성시는 조선시대 백자요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 가운데 하나로 특히,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화곡리는 일찍이 고려도기를 생산한 유서깊은 곳이다. 화곡리에서는 조선백자가마 2기(2·3호 백자가마터) 및 건조시설, 수비공 등 추정공방시설이 확인되었다. 2·3호 백자가마는 모두 훼손되어 가마의 구조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길이 15m이상, 폭 1.9m 정도의 등요로 나타났다. 대부분 문양이 없는 회청색 무문백자가 출토되었으나 간략한 초화문을 장식한 철화백자와 함께 도침등 요도구도 소량 출토되었다. 기종은 일상용 반상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호, 병 등의 특수기종은 극히 소량 만들어졌다. 도기가마가 폐요된 이후 수백년이 지나 또다시 같은 지역에 백자가마가 입지한 예는 흔치 않은 일로 화곡리 가마터는 도자기를 꾸준히 생산했던 안성의 중요한 요업단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자료
- ↑ 경기도자박물관,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2014년, 경기도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