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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안성시는 조선시대 백자요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 가운데 하나로서 화곡리에서는 고려도기가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조선백자가마 2기 및 건조시설, 수비공 등 추정공방시설이 확인되었다. 화곡리에서는 대부분 문양이 없는 회청색 무문백자가 출토되었으나 간략한 초화문을 장식한 철화백자와 함께 도침 등 요도구도 소량 발견되었다. 기종은 일상용 반상기가 대부분이며, 도기가마가 폐요된 이후 수백년이 지나 또다시 같은 지역에 백자가마가 입지한 예는 흔치 않다. 즉 화곡리 가마터는 도자기를 꾸준히 생산했던 안성의 중요한 요업단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 | 안성시는 조선시대 백자요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 가운데 하나로서 화곡리에서는 고려도기가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조선백자가마 2기 및 건조시설, 수비공 등 추정공방시설이 확인되었다. 화곡리에서는 대부분 문양이 없는 회청색 무문백자가 출토되었으나 간략한 초화문을 장식한 철화백자와 함께 도침 등 요도구도 소량 발견되었다. 기종은 일상용 반상기가 대부분이며, 도기가마가 폐요된 이후 수백년이 지나 또다시 같은 지역에 백자가마가 입지한 예는 흔치 않다. 즉 화곡리 가마터는 도자기를 꾸준히 생산했던 안성의 중요한 요업단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 2014 경기도자박물관 발굴유물특별전 >,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4</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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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주석'''== | |
| + | <references/> | ||
2021년 10월 3일 (일) 01:28 판
| 화곡리출토_백자발 |
|
| 대표명칭 | 화곡리출토_백자발 |
|---|---|
| 제작시기 | 조선 |
상세설명
안성시는 조선시대 백자요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 가운데 하나로서 화곡리에서는 고려도기가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조선백자가마 2기 및 건조시설, 수비공 등 추정공방시설이 확인되었다. 화곡리에서는 대부분 문양이 없는 회청색 무문백자가 출토되었으나 간략한 초화문을 장식한 철화백자와 함께 도침 등 요도구도 소량 발견되었다. 기종은 일상용 반상기가 대부분이며, 도기가마가 폐요된 이후 수백년이 지나 또다시 같은 지역에 백자가마가 입지한 예는 흔치 않다. 즉 화곡리 가마터는 도자기를 꾸준히 생산했던 안성의 중요한 요업단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 2014 경기도자박물관 발굴유물특별전 >,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