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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체 하단에서 수직에 가까운 곡선으로 올라가 구연에 이르는 형태로 굽 안바닥을 깊게 도려낸 전형적인 19세기 백자발이다. 그릇 안바닥과 외측면에 청화문양을 장식하였으며, 외측면의 구연에 청화로 2줄의 횡선을 두르고 간략화된 죽문을 몰골법으로 그려넣었다. 내저면에는 굵은모래의 흔적이 확인되며 굽 접지면에 흙물을 바르고 굵은모래를 받쳐 포개구운 조질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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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벌리는 원래 숯가마골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서 숯을 구웠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가마터는 탄벌리 마을 최상단부에 있는 '사기막골'에 모두 5-6개소가 있다. 탄벌동의 명문은 丙午(1606), 丁未(1607), ?戌, ?申(1608), 己酉(1609), 辛亥(1611), 壬子(1612)가 발견된 바 있어 탄벌동의 운영년대가 1606-1612년경으로 비정되어 왔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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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체 하단에서 수직에 가까운 곡선으로 올라가 구연에 이르는 형태로 굽 안바닥을 깊게 도려낸 전형적인 19세기 백자발이다. 그릇 안바닥과 외측면에 청화문양을 장식하였으며, 외측면의 구연에 청화로 2줄의 횡선을 두르고 간략화된 죽문을 몰골법으로 그려넣었다. 내저면에는 굵은모래의 흔적이 확인되며 굽 접지면에 흙물을 바르고 굵은모래를 받쳐 포개구운 조질백자이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ref></br>
==지식요소==
 
청화기법</br>
 
명나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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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일 (토) 13:26 판

궁평리출토_백자청화_죽문_발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대표명칭 궁평리출토_백자청화_죽문_발
제작시기 조선



상세설명

탄벌리는 원래 숯가마골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서 숯을 구웠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가마터는 탄벌리 마을 최상단부에 있는 '사기막골'에 모두 5-6개소가 있다. 탄벌동의 명문은 丙午(1606), 丁未(1607), ?戌, ?申(1608), 己酉(1609), 辛亥(1611), 壬子(1612)가 발견된 바 있어 탄벌동의 운영년대가 1606-1612년경으로 비정되어 왔다.[1]
동체 하단에서 수직에 가까운 곡선으로 올라가 구연에 이르는 형태로 굽 안바닥을 깊게 도려낸 전형적인 19세기 백자발이다. 그릇 안바닥과 외측면에 청화문양을 장식하였으며, 외측면의 구연에 청화로 2줄의 횡선을 두르고 간략화된 죽문을 몰골법으로 그려넣었다. 내저면에는 굵은모래의 흔적이 확인되며 굽 접지면에 흙물을 바르고 굵은모래를 받쳐 포개구운 조질백자이다.[2]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1.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
  2.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584156 디비피아 조선 초기 명나라 청화백자의 유입과 수용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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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0420042 조선후기 청화백자 산수문양의 전개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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