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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소장품정보 |사진=GCD200354.png |사진출처=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대표명칭=선동리출토_백자_명기_접시 |고유번호=GCD200354 |소장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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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무덤의 편방에 부장하는 명기접시로 식기, 제기 등 다양한 기종을 축소하여 만들어졌다. 세종실록 오례 등 의궤도설에는 잔탁, 소채 포해첩 등으로 등장한다. 백자 접시의 안바닥에는 굽지름보다 넓은 원각이 있고, 높은 오목굽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백자 명기는 학동리, 선동리, 궁평리 등 분원 가마터에서 주로 발견된다.< | + | 선동리 요지는 지금까지 5개소가 보고되었다. 1640-1648년까지의 간지가 출토되었으며 유물은 백자반상기, 문방구, 제기뿐만 아니라 철화백자와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 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ref> |
| − | + | 선동리가마는 1640년 분원이 설치된 이후 10년이 지난 1649년 초봄, 광주 동면 송치松峙(지금의 송정동)로 이설하였다는 운영기록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전해진다. 확인된 4기의 가마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2-1호와 2-4호는 길이 22m이상, 너비 180∼300cm로 아궁이와 4개의 번조실, 굴뚝부로 갈수록 약간 넓어지는 반지하식 등요이며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가 나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번조실 중심에 불기둥을 둔 조선전기 가마와 달리 불턱으로 경계를 구분하고 번조실 내부에 2~3개의 방형 불기둥을 두었는데, 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발달된 구조로 여겨진다. 가마 외에도 인근에서 추가로 2기의 가마폐기물퇴적과 공방지가 발견되어 여러 가마가 함께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굽 안바닥에 새겨진 辛巳(1641년)~戊子(1648년)에 해당하는<左/右+간지> 명문과 기존에 발견된 庚辰(1640년) 간지를 통해 기록에서처럼 1640~48년까지 운영된 지역임이 증명되었다. 유물은 백자반상기를 중심으로 대발, 합, 병, 호, 문방구, 돈, 명기, 장군, 향로, 제기 등이 만들어졌다. 병,편병 등 특수기종을 중심으로 철화문이 장식되었으며 17세기 가마터에서는 처음으로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 2014 경기도자박물관 발굴유물특별전 >,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4</ref></br> | |
| − | + | 무덤의 편방에 부장하는 명기접시로 식기, 제기 등 다양한 기종을 축소하여 만들어졌다. 세종실록 오례 등 의궤도설에는 잔탁, 소채 포해첩 등으로 등장한다. 백자 접시의 안바닥에는 굽지름보다 넓은 원각이 있고, 높은 오목굽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백자 명기는 학동리, 선동리, 궁평리 등 분원 가마터에서 주로 발견된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21책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21</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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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677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명기</br> |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677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명기</br> | ||
2021년 9월 30일 (목) 23:24 판
| 선동리출토_백자_명기_접시 |
|
| 대표명칭 | 선동리출토_백자_명기_접시 |
|---|---|
| 제작시기 | 조선 |
상세설명
선동리 요지는 지금까지 5개소가 보고되었다. 1640-1648년까지의 간지가 출토되었으며 유물은 백자반상기, 문방구, 제기뿐만 아니라 철화백자와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 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1]
선동리가마는 1640년 분원이 설치된 이후 10년이 지난 1649년 초봄, 광주 동면 송치松峙(지금의 송정동)로 이설하였다는 운영기록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전해진다. 확인된 4기의 가마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2-1호와 2-4호는 길이 22m이상, 너비 180∼300cm로 아궁이와 4개의 번조실, 굴뚝부로 갈수록 약간 넓어지는 반지하식 등요이며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가 나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번조실 중심에 불기둥을 둔 조선전기 가마와 달리 불턱으로 경계를 구분하고 번조실 내부에 2~3개의 방형 불기둥을 두었는데, 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발달된 구조로 여겨진다. 가마 외에도 인근에서 추가로 2기의 가마폐기물퇴적과 공방지가 발견되어 여러 가마가 함께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굽 안바닥에 새겨진 辛巳(1641년)~戊子(1648년)에 해당하는<左/右+간지> 명문과 기존에 발견된 庚辰(1640년) 간지를 통해 기록에서처럼 1640~48년까지 운영된 지역임이 증명되었다. 유물은 백자반상기를 중심으로 대발, 합, 병, 호, 문방구, 돈, 명기, 장군, 향로, 제기 등이 만들어졌다. 병,편병 등 특수기종을 중심으로 철화문이 장식되었으며 17세기 가마터에서는 처음으로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2]
무덤의 편방에 부장하는 명기접시로 식기, 제기 등 다양한 기종을 축소하여 만들어졌다. 세종실록 오례 등 의궤도설에는 잔탁, 소채 포해첩 등으로 등장한다. 백자 접시의 안바닥에는 굽지름보다 넓은 원각이 있고, 높은 오목굽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백자 명기는 학동리, 선동리, 궁평리 등 분원 가마터에서 주로 발견된다.[3]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8223 민백 명기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677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명기
http://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kda_20010002_003&type=view&reSearchWords=&reSearchWords_ime= 조선왕조실록db 세종실록 오례 원문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 실록위키 세종실록오례의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259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세종실록오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