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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상세설명==
선동리 요지는 지금까지 5개소가 보고되었다. 1640-1648년까지의 간지가 출토되었으며 유물은 백자반상기, 문방구, 제기뿐만 아니라 철화백자와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 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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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읍에서 번천리로 가기 전 송현 아래에 송정리 마을이 있다. 송정리는 1914년 송정松亭과 수하水下를 합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릇 안 바닥에는 간지(제작연도) 그리고 숫자가 표기되어 있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ref>
조선은 '孝'라는 유교적 윤리를 위해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 3년동안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조상을 편히 모시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믿었다. 예학의 성장과 함께 16세기 중엽부터 사대부층에 유교적 상장례가 보급되었고 조상의 묘역을 단장하고 명기를 부장하는데 큰 관심을 쏟았다. 유교에서는 멀리 떠나보낸 조상이 마치 살아계신 듯 양지바른 곳에 모시고 평상시 물건을 사용토록 하는 것을 도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상은 신명이라 하여 온전히 살아계신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기에 정성껏 예를 갖추어 실제 사용할 수 없도록 생활용기를 축소하여 만든 도자명기를 무덤에 묻어 섬김을 다하였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집안 내력 뿐 아니라 생전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도자 지석을 특별히 제작하여 후대에 길이 전하였다. 조선의 양반가에서는 부모의 갑작스런 변고를 걱정하여 부모가 60세가 되는 해부터 10년 주기로 마련하기 어려운 상례도구를 준비해두는 것을 도리로 여겼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 : 2019 경기도자박물관 기획전>,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9</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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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초봄 무렵, 송정동(옛 송치松峙) 가마는 선동리에서 옮겨와 10여년간 어기御器 생산을 지속하였다. 송정동의 가마터 8곳 가운데 두 차례 조사된 5호·6호 가마는 조선중기 관요의 구조를 규명하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호 가마는 경사도 16°의 바닥을 조성한 뒤 점토로 벽체와 천정을 축조하여 총길이 22.5m, 최대너비 255cm의 반지하식의 등요를 만들었다. 부채꼴 모양의 이 가마는 경사면을 따라 아궁이와 3개의 번조실, 굴뚝을 배치하고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를 두었다. 특히, 불턱과 3줄의 고래가 있는 아궁이 위로 불턱과 3개의 불기둥으로 번조실의 경계를 만들어 불의 흐름에 효율을 더하였다. 가마주변으로는 추정 지붕시설을 두고 가마의 안전을 비는 진단구鎭壇具를 아궁이 옆에 묻어 특이 할만하다. 6호에 비해 갑발이 많이 발견되는 5호는 회청색 백자를 중심으로 사군자문, 포도문, 시 등이 그려져 있는 철화백자와 청자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반상기외에 호, 병, 합, 향로, 마상배, 제기, 명기 등 다양한 기종이 제작됐다. 한편, 굽 안바닥에 새겨진 <左/右+간지>, <左/右+간지+숫자> 명문은 5호에서 己丑(1649년)~甲午(1654년)까지, 6호에서는 己丑(1649년)~壬辰(1652년)까지의 간지가 확인되어 운영시기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 2014 경기도자박물관 발굴유물특별전 >,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4</ref></br>
 
소형 그릇을 무덤 남측 장벽의 편방에 넣은 풍습은 조상의 삶을 염원하는 일종의 효의 실천이었으며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부장방식이다. 명기는 식기와 마찬가지로 벼슬에 따라 수량이 차별화되었다. 15세기 편찬된 <국조오례의>(1474)에서는 4품 이상의 사대부는 30벌, 5품 이하는 20벌,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서인은 15벌로 규정하였으나 17세기에 20벌을 무덤에 넣던 5품, 6품은 30벌, 7품과 8품은 20벌로 명기의 수량이 늘어났다. 18세기에는 사대부 묘의 공간이 축소되어 더 이상 명기를 넣지 않았으나 보수성을 유지하는 왕실에서는 꾸준히 사용되었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 : 2019 경기도자박물관 기획전>,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9</ref></br>
 
소형 그릇을 무덤 남측 장벽의 편방에 넣은 풍습은 조상의 삶을 염원하는 일종의 효의 실천이었으며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부장방식이다. 명기는 식기와 마찬가지로 벼슬에 따라 수량이 차별화되었다. 15세기 편찬된 <국조오례의>(1474)에서는 4품 이상의 사대부는 30벌, 5품 이하는 20벌,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서인은 15벌로 규정하였으나 17세기에 20벌을 무덤에 넣던 5품, 6품은 30벌, 7품과 8품은 20벌로 명기의 수량이 늘어났다. 18세기에는 사대부 묘의 공간이 축소되어 더 이상 명기를 넣지 않았으나 보수성을 유지하는 왕실에서는 꾸준히 사용되었다.<ref>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 : 2019 경기도자박물관 기획전>,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9</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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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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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9일 (금) 11:02 기준 최신판

송정동출토_백자명기
이상기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대표명칭 송정동출토_백자명기
제작시기 조선



상세설명

광주읍에서 번천리로 가기 전 송현 아래에 송정리 마을이 있다. 송정리는 1914년 송정松亭과 수하水下를 합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릇 안 바닥에는 간지(제작연도) 그리고 숫자가 표기되어 있다.[1] 1649년 초봄 무렵, 송정동(옛 송치松峙) 가마는 선동리에서 옮겨와 10여년간 어기御器 생산을 지속하였다. 송정동의 가마터 8곳 가운데 두 차례 조사된 5호·6호 가마는 조선중기 관요의 구조를 규명하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호 가마는 경사도 16°의 바닥을 조성한 뒤 점토로 벽체와 천정을 축조하여 총길이 22.5m, 최대너비 255cm의 반지하식의 등요를 만들었다. 부채꼴 모양의 이 가마는 경사면을 따라 아궁이와 3개의 번조실, 굴뚝을 배치하고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를 두었다. 특히, 불턱과 3줄의 고래가 있는 아궁이 위로 불턱과 3개의 불기둥으로 번조실의 경계를 만들어 불의 흐름에 효율을 더하였다. 가마주변으로는 추정 지붕시설을 두고 가마의 안전을 비는 진단구鎭壇具를 아궁이 옆에 묻어 특이 할만하다. 6호에 비해 갑발이 많이 발견되는 5호는 회청색 백자를 중심으로 사군자문, 포도문, 시 등이 그려져 있는 철화백자와 청자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반상기외에 호, 병, 합, 향로, 마상배, 제기, 명기 등 다양한 기종이 제작됐다. 한편, 굽 안바닥에 새겨진 <左/右+간지>, <左/右+간지+숫자> 명문은 5호에서 己丑(1649년)~甲午(1654년)까지, 6호에서는 己丑(1649년)~壬辰(1652년)까지의 간지가 확인되어 운영시기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2]
소형 그릇을 무덤 남측 장벽의 편방에 넣은 풍습은 조상의 삶을 염원하는 일종의 효의 실천이었으며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부장방식이다. 명기는 식기와 마찬가지로 벼슬에 따라 수량이 차별화되었다. 15세기 편찬된 <국조오례의>(1474)에서는 4품 이상의 사대부는 30벌, 5품 이하는 20벌,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서인은 15벌로 규정하였으나 17세기에 20벌을 무덤에 넣던 5품, 6품은 30벌, 7품과 8품은 20벌로 명기의 수량이 늘어났다. 18세기에는 사대부 묘의 공간이 축소되어 더 이상 명기를 넣지 않았으나 보수성을 유지하는 왕실에서는 꾸준히 사용되었다.[3]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1.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 제 13책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광주 :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6
  2.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 2014 경기도자박물관 발굴유물특별전 >,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4
  3.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 : 2019 경기도자박물관 기획전>,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