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관요 설립"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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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에는 1432년 이전의 운영되었던 184개의 자기소가 전국 군현 별로 기록되어 있다. 본 연구자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바탕으로 15세기 전국에 소재하였던 자기소 분포현황에 관한 역사지도를 제작하였다. 역사지도 제작에 필요한 지형도 등의 기본 자료는 김종혁선생님에게 전달 받아 김종혁선생님의 지도 하에 오픈소스 지리정보체계 응용프로그램인 QGIS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역사지도’라는 용어의 개념은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였다. 김종현, 「조선시대 역사지리정보의 전자지도화와 그 의의」, 󰡔대한지리학회 학술대회논문집󰡕, 대한지리학회, 2004, 29쪽.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는 자기를 생산하고 공납하는 의무를 지닌 곳으로 경기도 광주지역에서 관요가 설치되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어용을 비롯한 왕실용과 국정 운영에 필요한 자기의 진헌⦁공헌을 담당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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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자기소에서 공납용 자기를 제작하던 상황에서 경기도 광주에 국가 직영 사기소를 운영하게 된 배경은 금은기 사용을 제한하고 사기와 칠기의 사용을 확대하면서 왕실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백자 수량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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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16세기에 운영되었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라는 명확한 출토지 정보를 동반한 백자인각‘司’명접시는 사옹원 또는 사선서의 ‘사’자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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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지역에 국가 직영 사기소인 관요가 설립되는 시점은 사옹원과 연관하여 볼 수 있다. 본래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사옹司饔이다. 사옹의 ‘옹’은 <주례周禮>의 주에서 割烹煎和, 즉 ‘고기를 베어 삶고 간을 맞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사옹은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을 담당하는 동시에 공납용 자기 제작을 감독하고 수취해왔다.  </br>
 
경기도 광주지역에 국가 직영 사기소인 관요가 설립되는 시점은 사옹원과 연관하여 볼 수 있다. 본래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사옹司饔이다. 사옹의 ‘옹’은 <주례周禮>의 주에서 割烹煎和, 즉 ‘고기를 베어 삶고 간을 맞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사옹은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을 담당하는 동시에 공납용 자기 제작을 감독하고 수취해왔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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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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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에는 1432년 이전의 운영되었던 184개의 자기소가 전국 군현 별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는 자기를 생산하고 공납하는 의무를 지닌 곳으로 경기도 광주지역에서 관요가 설치되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어용을 비롯한 왕실용과 국정 운영에 필요한 자기의 진헌⦁공헌을 담당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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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자기소에서 공납용 자기를 제작하던 상황에서 경기도 광주에 국가 직영 사기소를 운영하게 된 배경은 금은기 사용을 제한하고 사기와 칠기의 사용을 확대하면서 왕실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백자 수량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br>
 
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  </br>
 
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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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옹원 소속의 번조관과 경공장은 관요 운영과 관련한 구성원이었다. 번조관은 경공장을 관리하는 역할이었고, 경공장은 <경국대전> 공전 사옹원 조에 명시된 사기장 380명이었다. 관요의 설립시기 및 운영 그리고 출토품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시각의 학술논문과  웹 콘텐츠들은 여러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br>
 
사옹원 소속의 번조관과 경공장은 관요 운영과 관련한 구성원이었다. 번조관은 경공장을 관리하는 역할이었고, 경공장은 <경국대전> 공전 사옹원 조에 명시된 사기장 380명이었다. 관요의 설립시기 및 운영 그리고 출토품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시각의 학술논문과  웹 콘텐츠들은 여러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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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16세기에 운영되었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다. 해당 접시 편은 한국도자사 전공자 이상기 선생의 자체적인 가마터 학술조사에서 수집된 도편으로 2018년 경기도자박물관에 기증된 2,500여점 가운데 하나이다.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라는 명확한 출토지 정보를 동반한 백자인각‘司’명접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옹원 또는 사선서의 ‘사’자로 추정된다. 접시에 새겨진 글자를 토대로 해당 유물은 관사에서 사용할 그릇으로 제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br>
 
조선 15~16세기에 운영되었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다. 해당 접시 편은 한국도자사 전공자 이상기 선생의 자체적인 가마터 학술조사에서 수집된 도편으로 2018년 경기도자박물관에 기증된 2,500여점 가운데 하나이다.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라는 명확한 출토지 정보를 동반한 백자인각‘司’명접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옹원 또는 사선서의 ‘사’자로 추정된다. 접시에 새겨진 글자를 토대로 해당 유물은 관사에서 사용할 그릇으로 제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br>
 
해당 유물에서 확인되는 관사명 명문은 사기의 관리를 강조하는 문헌기록들을 통하여 진상관리에 대한 관리의 일환인 것을 알 수 있다. </br>
 
해당 유물에서 확인되는 관사명 명문은 사기의 관리를 강조하는 문헌기록들을 통하여 진상관리에 대한 관리의 일환인 것을 알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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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 가마터에서는 관사를 뜻하는 글자 외에도 천⦁지⦁현⦁황, 간지, 좌우, 숫자 등의 글자가 새겨진 자기가 확인된다. 각각 다른 시기에 운영되었던 가마터에서 확인되는 명문들은 해당 가마터들의 선후 관계를 파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천⦁지⦁현⦁황’명 명문은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경기도 광주시 도마리, 경기도 광주시 무갑리 가마터에서 확인된다. 해당 명문은 조선 전기에 사용되었고, 중기에는 간지, 간지, 좌우, 숫자 등의 글자 조합들이 확인된다. </br>
 
관요 가마터에서는 관사를 뜻하는 글자 외에도 천⦁지⦁현⦁황, 간지, 좌우, 숫자 등의 글자가 새겨진 자기가 확인된다. 각각 다른 시기에 운영되었던 가마터에서 확인되는 명문들은 해당 가마터들의 선후 관계를 파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천⦁지⦁현⦁황’명 명문은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경기도 광주시 도마리, 경기도 광주시 무갑리 가마터에서 확인된다. 해당 명문은 조선 전기에 사용되었고, 중기에는 간지, 간지, 좌우, 숫자 등의 글자 조합들이 확인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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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유물의 품질은 번조받침과 방법을 토대로 양질자기와 조질자기로 구분할 수 있다. 깔끔한 모래받침과 갑발을 이용한 갑번으로 제작된 도자유물은 양질자기로 분류된다. 태토빚음 받침과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한 포개구이의 조합으로 제작된 도자유물은 조질자기로 분류된다. 조선시대 왕실 자기를 생산하였던 가마가 집중되어 분포된 경기도 광주지역은 역사적인 공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해당 유적지의 가치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재 조사를 통하여 확인될 수 있었다. 해당 지역의 문화재 조사는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도자유물의 품질은 번조받침과 방법을 토대로 양질자기와 조질자기로 구분할 수 있다. 깔끔한 모래받침과 갑발을 이용한 갑번으로 제작된 도자유물은 양질자기로 분류된다. 태토빚음 받침과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한 포개구이의 조합으로 제작된 도자유물은 조질자기로 분류된다. 조선시대 왕실 자기를 생산하였던 가마가 집중되어 분포된 경기도 광주지역은 역사적인 공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해당 유적지의 가치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재 조사를 통하여 확인될 수 있었다. 해당 지역의 문화재 조사는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2024년 4월 19일 (금) 15:38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_도자유물_메타아카이브


조선 15~16세기에 운영되었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라는 명확한 출토지 정보를 동반한 백자인각‘司’명접시는 사옹원 또는 사선서의 ‘사’자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경기도 광주지역에 국가 직영 사기소인 관요가 설립되는 시점은 사옹원과 연관하여 볼 수 있다. 본래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사옹司饔이다. 사옹의 ‘옹’은 <주례周禮>의 주에서 割烹煎和, 즉 ‘고기를 베어 삶고 간을 맞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사옹은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을 담당하는 동시에 공납용 자기 제작을 감독하고 수취해왔다.
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432년 이전의 운영되었던 184개의 자기소가 전국 군현 별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는 자기를 생산하고 공납하는 의무를 지닌 곳으로 경기도 광주지역에서 관요가 설치되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어용을 비롯한 왕실용과 국정 운영에 필요한 자기의 진헌⦁공헌을 담당하였다.
전국 자기소에서 공납용 자기를 제작하던 상황에서 경기도 광주에 국가 직영 사기소를 운영하게 된 배경은 금은기 사용을 제한하고 사기와 칠기의 사용을 확대하면서 왕실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백자 수량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


사옹원 소속의 번조관과 경공장은 관요 운영과 관련한 구성원이었다. 번조관은 경공장을 관리하는 역할이었고, 경공장은 <경국대전> 공전 사옹원 조에 명시된 사기장 380명이었다. 관요의 설립시기 및 운영 그리고 출토품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시각의 학술논문과 웹 콘텐츠들은 여러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15~16세기에 운영되었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다. 해당 접시 편은 한국도자사 전공자 이상기 선생의 자체적인 가마터 학술조사에서 수집된 도편으로 2018년 경기도자박물관에 기증된 2,500여점 가운데 하나이다.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라는 명확한 출토지 정보를 동반한 백자인각‘司’명접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옹원 또는 사선서의 ‘사’자로 추정된다. 접시에 새겨진 글자를 토대로 해당 유물은 관사에서 사용할 그릇으로 제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당 유물에서 확인되는 관사명 명문은 사기의 관리를 강조하는 문헌기록들을 통하여 진상관리에 대한 관리의 일환인 것을 알 수 있다.


관요 가마터에서는 관사를 뜻하는 글자 외에도 천⦁지⦁현⦁황, 간지, 좌우, 숫자 등의 글자가 새겨진 자기가 확인된다. 각각 다른 시기에 운영되었던 가마터에서 확인되는 명문들은 해당 가마터들의 선후 관계를 파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천⦁지⦁현⦁황’명 명문은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경기도 광주시 도마리, 경기도 광주시 무갑리 가마터에서 확인된다. 해당 명문은 조선 전기에 사용되었고, 중기에는 간지, 간지, 좌우, 숫자 등의 글자 조합들이 확인된다.


도자유물의 품질은 번조받침과 방법을 토대로 양질자기와 조질자기로 구분할 수 있다. 깔끔한 모래받침과 갑발을 이용한 갑번으로 제작된 도자유물은 양질자기로 분류된다. 태토빚음 받침과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한 포개구이의 조합으로 제작된 도자유물은 조질자기로 분류된다. 조선시대 왕실 자기를 생산하였던 가마가 집중되어 분포된 경기도 광주지역은 역사적인 공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해당 유적지의 가치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재 조사를 통하여 확인될 수 있었다. 해당 지역의 문화재 조사는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