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화백자와 철화백자

song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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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백자청화송죽문‘홍치이년’명호와 삼성박물관 리움 소장 백자청화운룡문병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청화백자이다. 두 유물은 각각 국보 176호, 보물 785호로 지정되었지만, 출토지 정보를 동반하지 않는다.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백자청화송죽문‘홍치이년’명호에 새겨진 ‘홍치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로써 해당 유물은 148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유물과 비슷한 시기에 운영되었던 가마는 우산리 9호 가마가 대표적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백자청화운룡문 병에 새겨진 운룡문도 우산리 9호 출토 백자청화운룡문호 편과 비교할 수 있다. 우산리 9호 가마터에서는 간지명이 새겨진 백자음각 ‘임인’명 묘지석 편이 발견되었다. 해당 묘지석의 임인해는 1482년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우산리 9호 가마는 15세기 후반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산리 9호 출토 백자청화운룡문 호 편은 1489년에 제작된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백자청화송죽문 ‘홍치이년’명 호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청화백자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백자 청화운룡문 병은 제작시기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없지만 앞서 언급된 두 유물과의 문양의 표현과 청화 색상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제작시기를 15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운영되었던 관요 출토품을 통해 청화백자는 조선 초기부터 제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청화백자를 제작하는데 사용되었던 회회청 안료는 수입품으로 조선 초기부터 수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조선 초, 고급 안료였던 회회청 수입의 어려움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더욱 심화되었고, 중기가 되면 청화백자 제작량은 급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회회청 대신 석간주를 사용한 철화백자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조선 중기 철화백자는 관요와 민요에서 모두 출토되었고, 당시의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관요 가마로는 17세기부터 18세기 전반에 운영되었던 상림리, 선동리, 송정동, 신대리, 궁평리 가마터가 해당된다. 출토 기종은 특수기종부터 일상기종까지 모두 확인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에 운영되었던 금사리 가마터에서는 소량의 철화백자 편이 확인된다. 반면 18세기 이후 관요에서 청화백자 편이 발견되면서 청화백자 제작의 재개 및 확산되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