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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red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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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25T09:20:3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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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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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6T09:05: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이는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황순원 졸업사진.jpg]]&lt;br /&gt;
&lt;br /&gt;
&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파일:양정길.jp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하여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 '삼사문학', '창작',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 1931년 '동광'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lt;br /&gt;
&lt;br /&gt;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lt;br /&gt;
&lt;br /&gt;
 교수로 활동하며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lt;br /&gt;
&lt;br /&gt;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eg]]&lt;br /&gt;
&lt;br /&gt;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한 때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의 촌장이었으며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lt;br /&gt;
&lt;br /&gt;
[[파일: 원응서.jpg]]&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는 평양 출생 번역문학가  (1914-1973)이다. 리쿄 대학 영미 학부를 졸업했고, 1.4 후퇴 때 월남. 문예지 &amp;lt;문학의 주간&amp;gt;을 역임하였고,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번역 작품으로는 &amp;lt;나의 사랑 안드리스&amp;gt;, &amp;lt;제인 에어&amp;gt;, &amp;lt;25시&amp;gt; 등이 있다. 원응서와 황순원은 절친한 사이였다. 소나기의 원래의 원고 결말에서는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도 유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좋은 친구요 좋은 독자를 가진 복을 누린 경우이다. 황순원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원응서와의 교감을 그린 &amp;lt;마지막 잔&amp;gt;(1974)이라는 단편을 쓰기도 하였다.  황순원은 주석에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꼭 병바닥의 마지막 잔 술을 탁자 옆 허공이나 퇴주그릇에 부었는데, 그것을 아는 제자들은 덩달아 그 법칙을 지켜가며 숙연해 하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마지막 잔.PNG]]&lt;br /&gt;
&lt;br /&gt;
&lt;br /&gt;
단편 '마지막 잔' 일부&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40</id>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40"/>
				<updated>2020-06-16T09:05: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이는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황순원 졸업사진.jpg]]&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파일:양정길.jp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하여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 '삼사문학', '창작',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 1931년 '동광'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lt;br /&gt;
&lt;br /&gt;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lt;br /&gt;
&lt;br /&gt;
 교수로 활동하며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lt;br /&gt;
&lt;br /&gt;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eg]]&lt;br /&gt;
&lt;br /&gt;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한 때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의 촌장이었으며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lt;br /&gt;
&lt;br /&gt;
[[파일: 원응서.jpg]]&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는 평양 출생 번역문학가  (1914-1973)이다. 리쿄 대학 영미 학부를 졸업했고, 1.4 후퇴 때 월남. 문예지 &amp;lt;문학의 주간&amp;gt;을 역임하였고,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번역 작품으로는 &amp;lt;나의 사랑 안드리스&amp;gt;, &amp;lt;제인 에어&amp;gt;, &amp;lt;25시&amp;gt; 등이 있다. 원응서와 황순원은 절친한 사이였다. 소나기의 원래의 원고 결말에서는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도 유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좋은 친구요 좋은 독자를 가진 복을 누린 경우이다. 황순원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원응서와의 교감을 그린 &amp;lt;마지막 잔&amp;gt;(1974)이라는 단편을 쓰기도 하였다.  황순원은 주석에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꼭 병바닥의 마지막 잔 술을 탁자 옆 허공이나 퇴주그릇에 부었는데, 그것을 아는 제자들은 덩달아 그 법칙을 지켜가며 숙연해 하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마지막 잔.PNG]]&lt;br /&gt;
&lt;br /&gt;
&lt;br /&gt;
단편 '마지막 잔' 일부&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39</id>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39"/>
				<updated>2020-06-16T09:05: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이는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 졸업사진.jpg]]&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파일:양정길.jp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하여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 '삼사문학', '창작',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 1931년 '동광'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lt;br /&gt;
&lt;br /&gt;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lt;br /&gt;
&lt;br /&gt;
 교수로 활동하며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lt;br /&gt;
&lt;br /&gt;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eg]]&lt;br /&gt;
&lt;br /&gt;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한 때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의 촌장이었으며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lt;br /&gt;
&lt;br /&gt;
[[파일: 원응서.jpg]]&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는 평양 출생 번역문학가  (1914-1973)이다. 리쿄 대학 영미 학부를 졸업했고, 1.4 후퇴 때 월남. 문예지 &amp;lt;문학의 주간&amp;gt;을 역임하였고,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번역 작품으로는 &amp;lt;나의 사랑 안드리스&amp;gt;, &amp;lt;제인 에어&amp;gt;, &amp;lt;25시&amp;gt; 등이 있다. 원응서와 황순원은 절친한 사이였다. 소나기의 원래의 원고 결말에서는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도 유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좋은 친구요 좋은 독자를 가진 복을 누린 경우이다. 황순원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원응서와의 교감을 그린 &amp;lt;마지막 잔&amp;gt;(1974)이라는 단편을 쓰기도 하였다.  황순원은 주석에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꼭 병바닥의 마지막 잔 술을 탁자 옆 허공이나 퇴주그릇에 부었는데, 그것을 아는 제자들은 덩달아 그 법칙을 지켜가며 숙연해 하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마지막 잔.PNG]]&lt;br /&gt;
&lt;br /&gt;
&lt;br /&gt;
단편 '마지막 잔' 일부&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D%99%A9%EC%88%9C%EC%9B%90_%EC%A1%B8%EC%97%85%EC%82%AC%EC%A7%84.jpg&amp;diff=13038</id>
		<title>파일:황순원 졸업사진.jp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D%99%A9%EC%88%9C%EC%9B%90_%EC%A1%B8%EC%97%85%EC%82%AC%EC%A7%84.jpg&amp;diff=13038"/>
				<updated>2020-06-16T09:04: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36</id>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36"/>
				<updated>2020-06-16T09:01: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이는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파일:양정길.jp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해서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lt;br /&gt;
&lt;br /&gt;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lt;br /&gt;
&lt;br /&gt;
&amp;lt;&amp;lt;삼사문학&amp;gt;&amp;gt;, &amp;lt;&amp;lt;창작&amp;gt;&amp;gt;, &amp;lt;&amp;lt;작품&amp;gt;&amp;gt;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lt;br /&gt;
&lt;br /&gt;
 1931년 &amp;lt;&amp;lt;동광&amp;gt;&amp;gt;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lt;br /&gt;
&lt;br /&gt;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lt;br /&gt;
&lt;br /&gt;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lt;br /&gt;
&lt;br /&gt;
 교수로 활동하며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lt;br /&gt;
&lt;br /&gt;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eg]]&lt;br /&gt;
&lt;br /&gt;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한 때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의 촌장이었으며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lt;br /&gt;
&lt;br /&gt;
[[파일: 원응서.jpg]]&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는 평양 출생 번역문학가  (1914-1973)이다. 리쿄 대학 영미 학부를 졸업했고, 1.4 후퇴 때 월남. 문예지 &amp;lt;문학의 주간&amp;gt;을 역임하였고,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번역 작품으로는 &amp;lt;나의 사랑 안드리스&amp;gt;, &amp;lt;제인 에어&amp;gt;, &amp;lt;25시&amp;gt; 등이 있다. 원응서와 황순원은 절친한 사이였다. 소나기의 원래의 원고 결말에서는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도 유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좋은 친구요 좋은 독자를 가진 복을 누린 경우이다. 황순원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원응서와의 교감을 그린 &amp;lt;마지막 잔&amp;gt;(1974)이라는 단편을 쓰기도 하였다.  황순원은 주석에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꼭 병바닥의 마지막 잔 술을 탁자 옆 허공이나 퇴주그릇에 부었는데, 그것을 아는 제자들은 덩달아 그 법칙을 지켜가며 숙연해 하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마지막 잔.PNG]]&lt;br /&gt;
&lt;br /&gt;
&lt;br /&gt;
단편 '마지막 잔' 일부&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35</id>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35"/>
				<updated>2020-06-16T09:01: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이는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파일:양정길.jpg]]&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해서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lt;br /&gt;
&lt;br /&gt;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lt;br /&gt;
&lt;br /&gt;
&amp;lt;&amp;lt;삼사문학&amp;gt;&amp;gt;, &amp;lt;&amp;lt;창작&amp;gt;&amp;gt;, &amp;lt;&amp;lt;작품&amp;gt;&amp;gt;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lt;br /&gt;
&lt;br /&gt;
 1931년 &amp;lt;&amp;lt;동광&amp;gt;&amp;gt;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lt;br /&gt;
&lt;br /&gt;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lt;br /&gt;
&lt;br /&gt;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lt;br /&gt;
&lt;br /&gt;
 교수로 활동하며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lt;br /&gt;
&lt;br /&gt;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eg]]&lt;br /&gt;
&lt;br /&gt;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한 때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의 촌장이었으며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lt;br /&gt;
&lt;br /&gt;
[[파일: 원응서.jpg]]&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는 평양 출생 번역문학가  (1914-1973)이다. 리쿄 대학 영미 학부를 졸업했고, 1.4 후퇴 때 월남. 문예지 &amp;lt;문학의 주간&amp;gt;을 역임하였고,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번역 작품으로는 &amp;lt;나의 사랑 안드리스&amp;gt;, &amp;lt;제인 에어&amp;gt;, &amp;lt;25시&amp;gt; 등이 있다. 원응서와 황순원은 절친한 사이였다. 소나기의 원래의 원고 결말에서는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도 유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좋은 친구요 좋은 독자를 가진 복을 누린 경우이다. 황순원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원응서와의 교감을 그린 &amp;lt;마지막 잔&amp;gt;(1974)이라는 단편을 쓰기도 하였다.  황순원은 주석에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꼭 병바닥의 마지막 잔 술을 탁자 옆 허공이나 퇴주그릇에 부었는데, 그것을 아는 제자들은 덩달아 그 법칙을 지켜가며 숙연해 하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마지막 잔.PNG]]&lt;br /&gt;
&lt;br /&gt;
&lt;br /&gt;
단편 '마지막 잔' 일부&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17</id>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17"/>
				<updated>2020-06-16T08:44: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한국 거주(1915~1934)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이는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파일:양정길.jpg|섬네일]&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해서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lt;br /&gt;
&lt;br /&gt;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lt;br /&gt;
&lt;br /&gt;
&amp;lt;&amp;lt;삼사문학&amp;gt;&amp;gt;, &amp;lt;&amp;lt;창작&amp;gt;&amp;gt;, &amp;lt;&amp;lt;작품&amp;gt;&amp;gt;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lt;br /&gt;
&lt;br /&gt;
 1931년 &amp;lt;&amp;lt;동광&amp;gt;&amp;gt;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lt;br /&gt;
&lt;br /&gt;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lt;br /&gt;
&lt;br /&gt;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lt;br /&gt;
&lt;br /&gt;
 교수로 활동하며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lt;br /&gt;
&lt;br /&gt;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eg]]&lt;br /&gt;
&lt;br /&gt;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 촌장인 안영 작가.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lt;br /&gt;
&lt;br /&gt;
[[파일: 원응서.jpg]]&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16</id>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16"/>
				<updated>2020-06-16T08:43: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한국 거주(1915~1934)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이는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파일:양정길.jpg|섬네일]]&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해서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lt;br /&gt;
&lt;br /&gt;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lt;br /&gt;
&lt;br /&gt;
&amp;lt;&amp;lt;삼사문학&amp;gt;&amp;gt;, &amp;lt;&amp;lt;창작&amp;gt;&amp;gt;, &amp;lt;&amp;lt;작품&amp;gt;&amp;gt;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lt;br /&gt;
&lt;br /&gt;
 1931년 &amp;lt;&amp;lt;동광&amp;gt;&amp;gt;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lt;br /&gt;
&lt;br /&gt;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lt;br /&gt;
&lt;br /&gt;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lt;br /&gt;
&lt;br /&gt;
 교수로 활동하며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lt;br /&gt;
&lt;br /&gt;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eg]]&lt;br /&gt;
&lt;br /&gt;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 촌장인 안영 작가.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원응서&lt;br /&gt;
&lt;br /&gt;
[[파일: 원응서.jpg]]&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C%96%91%EC%A0%95%EA%B8%B8.jpg&amp;diff=13015</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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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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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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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6T08:38: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이는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해서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lt;br /&gt;
&lt;br /&gt;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lt;br /&gt;
&lt;br /&gt;
&amp;lt;&amp;lt;삼사문학&amp;gt;&amp;gt;, &amp;lt;&amp;lt;창작&amp;gt;&amp;gt;, &amp;lt;&amp;lt;작품&amp;gt;&amp;gt;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lt;br /&gt;
&lt;br /&gt;
 1931년 &amp;lt;&amp;lt;동광&amp;gt;&amp;gt;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lt;br /&gt;
&lt;br /&gt;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lt;br /&gt;
&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lt;br /&gt;
&lt;br /&gt;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lt;br /&gt;
&lt;br /&gt;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lt;br /&gt;
&lt;br /&gt;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eg]]&lt;br /&gt;
&lt;br /&gt;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 촌장인 안영 작가.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요섭.jpg]]&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10</id>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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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6T08:37: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한국 거주(1915~1934)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하지만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lt;br /&gt;
&lt;br /&gt;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lt;br /&gt;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해서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lt;br /&gt;
&lt;br /&gt;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lt;br /&gt;
&lt;br /&gt;
&amp;lt;&amp;lt;삼사문학&amp;gt;&amp;gt;, &amp;lt;&amp;lt;창작&amp;gt;&amp;gt;, &amp;lt;&amp;lt;작품&amp;gt;&amp;gt;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lt;br /&gt;
&lt;br /&gt;
 1931년 &amp;lt;&amp;lt;동광&amp;gt;&amp;gt;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lt;br /&gt;
&lt;br /&gt;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lt;br /&gt;
&lt;br /&gt;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안영&lt;br /&gt;
&lt;br /&gt;
[[파일: 안영.jpg]]&lt;br /&gt;
&lt;br /&gt;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 촌장인 안영 작가. 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요섭.jpg]]&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8%9C%EC%9B%90%EC%9D%98%EC%83%9D%EC%95%A0%EC%99%80%EC%A3%BC%EB%B3%80%EC%9D%B8%EB%AC%BC&amp;diff=13006</id>
		<title>황순원의생애와주변인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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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6T08:21: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황순원이 시기별로 만난 주변인물과 그에 따른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거주(1915~1934)==&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lt;br /&gt;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lt;br /&gt;
&lt;br /&gt;
==일본 유학(1934~1939)==&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amp;lt;방가(放歌)&amp;gt;를 간행하였다. &lt;br /&gt;
&lt;br /&gt;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amp;lt;소&amp;gt;, 주영섭의 &amp;lt;나무&amp;gt;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표.PN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amp;lt;방가&amp;gt;(放歌·1934)와 &amp;lt;골동품&amp;gt;(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사회주의에 받고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황순원의 “동경학생예술좌” 활동에 주목하면 “동경학생예술좌”가 좌익적 성향을 내포하는 운동단체였다는 점을 들어, 당시 황순원이 좌익적 성향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가 동맹 가입 이력”,“국민보도연맹”소속 이력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첫 시집 내용과 일본 유학 시절의  “동경학생예술좌”의 이념적 성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실제로 황순원의 동경 유학 시절은 “동경학생예술좌”를 근거로 해서 유학생 문학청년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lt;br /&gt;
&lt;br /&gt;
두 번에 걸친 시집의 출간도 모두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시를 게재하는 과정,&lt;br /&gt;
&lt;br /&gt;
&amp;lt;&amp;lt;삼사문학&amp;gt;&amp;gt;, &amp;lt;&amp;lt;창작&amp;gt;&amp;gt;, &amp;lt;&amp;lt;작품&amp;gt;&amp;gt; 등의 동인이 되는 과정도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이 연장된 것으로&lt;br /&gt;
&lt;br /&gt;
 1931년 &amp;lt;&amp;lt;동광&amp;gt;&amp;gt;에 작품을 게재하고 등단한 이후, 황순원이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lt;br /&gt;
&lt;br /&gt;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문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amp;lt;방가&amp;gt;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시집 &amp;lt;방가&amp;gt;의 출간 때문에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이나 구류되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검열을 피해서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는 혐의 자체가 황순원의 첫 시집이 놓인 당시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시집 &amp;lt;방가&amp;gt;는 식민지 당국에게 단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lt;br /&gt;
&lt;br /&gt;
그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출판의 주체가 동경 학생예술좌 문예부”이고 인쇄소가“삼문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영섭&lt;br /&gt;
&lt;br /&gt;
[[파일: 주영섭.jpe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amp;lt;밤 주막&amp;gt;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amp;lt;나루&amp;gt;와  &amp;lt;벌판&amp;gt;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lt;br /&gt;
&lt;br /&gt;
==월남 후(1946~)==&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1957~1980)==&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quot;소설가로 충분하다.&amp;quot;&lt;br /&gt;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에 대한 태도&lt;br /&gt;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제자들과의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작품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lt;br /&gt;
&lt;br /&gt;
[[파일:옛사랑.jpg|200px]]&lt;br /&gt;
&lt;br /&gt;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lt;br /&gt;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lt;br /&gt;
&lt;br /&gt;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lt;br /&gt;
&lt;br /&gt;
[[파일:소년소녀.jpg|200px]]&lt;br /&gt;
&lt;br /&gt;
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lt;br /&gt;
&lt;br /&gt;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lt;br /&gt;
&lt;br /&gt;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2. '''공간을 통한 교류'''&lt;br /&gt;
&lt;br /&gt;
&lt;br /&gt;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문학촌.jpg|300px]]&lt;br /&gt;
&lt;br /&gt;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lt;br /&gt;
&lt;br /&gt;
&lt;br /&gt;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amp;quot;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amp;quot;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촌장 김용성과 김종회&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의 제자 김종회는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참조==&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B%A5%98%EC%8B%9C%ED%99%94&amp;diff=12826</id>
		<title>류시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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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3:57: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새 문서:  ==인물== 류시화는 시인이자 번역가  ==생애==  1958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재찬이다. 대광고등학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인물==&lt;br /&gt;
류시화는 시인이자 번역가&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1958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재찬이다. 대광고등학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고 1980년 &amp;lt;아침&amp;gt;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1980년-1982년까지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에 《시운동》에서 50여 편의 시를 발표하다가 '시인은 전쟁이 나도 다락방에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1983년에 활동을 중단한다. 이 후 그는 안재찬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류시화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또한 1988년부터 미국과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고 인도여행을 통해 명상가를 자처하기 시작, 인도 대표 명상가인 라즈니쉬의 주요서적들을 번역한다. 그는 1년에 약 100권의 명상서적을 원서로 읽는 독서광이라고 전해지며, 16년 동안 겨울이 오면 인도를 방문하는 여행가이다. 1991년 첫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1996년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펴냈다. 2012년 세 번째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출간했다.&lt;br /&gt;
&lt;br /&gt;
==작품==&lt;br /&gt;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lt;br /&gt;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lt;br /&gt;
딱정벌레&lt;br /&gt;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lt;br /&gt;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lt;br /&gt;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lt;br /&gt;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lt;br /&gt;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lt;br /&gt;
한 줄도 너무 길다&lt;br /&gt;
지구별 여행자&lt;br /&gt;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lt;br /&gt;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에서 황순원의 제자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25</id>
		<title>HwangsunwonAndPeople</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25"/>
				<updated>2020-06-13T03:55: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경희대 제자들 */&lt;/p&gt;
&lt;hr /&gt;
&lt;div&gt;=='''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 | title=HwangsunwonAndPeople.lst}}&lt;br /&gt;
{{버튼클릭|[[HwangsunwonAndPeople.lst|lst 페이지로 가기]]}}&lt;br /&gt;
&lt;br /&gt;
=='''Data'''==&lt;br /&gt;
==='''Node''' Data===&lt;br /&gt;
===='''Person''' &amp;lt;small&amp;gt;인물&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물데이터 분류는 혈연을 제외한 동경학생예술좌부터  전국소설가협회까지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이러한 황순원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혈연'''=====&lt;br /&gt;
*양정길&lt;br /&gt;
*황남규&lt;br /&gt;
*[[황동규]]&lt;br /&gt;
*황선혜&lt;br /&gt;
*[[황시내]]&lt;br /&gt;
*황정규&lt;br /&gt;
*황찬영&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lt;br /&gt;
[[파일:동경학생.jpe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lt;br /&gt;
&lt;br /&gt;
&lt;br /&gt;
*[[김동원]]&lt;br /&gt;
*김영화&lt;br /&gt;
*김용하&lt;br /&gt;
*마완영&lt;br /&gt;
*[[박동근]]&lt;br /&gt;
*유종렬&lt;br /&gt;
*이진순&lt;br /&gt;
*이해랑&lt;br /&gt;
*임호권&lt;br /&gt;
*[[주영섭]]&lt;br /&gt;
*허남실&lt;br /&gt;
*한적선&lt;br /&gt;
&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5%AD%EB%AF%BC%EB%B3%B4%EB%8F%84%EC%97%B0%EB%A7%B9&amp;amp;ridx=0&amp;amp;tot=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amp;lt;ref&amp;gt;「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24p 인용: “1949년 11월 한 달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설정하고 11월 30일로 마감한 결과, 전향자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황순원(소설가),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으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기림]]&lt;br /&gt;
*김용환&lt;br /&gt;
*백철&lt;br /&gt;
*신막&lt;br /&gt;
*[[양주동]]&lt;br /&gt;
*정인택&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D%95%9C%EB%AF%BC%EA%B5%AD%EC%98%88%EC%88%A0%EC%9B%90&amp;amp;ridx=0&amp;amp;tot=3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amp;lt;ref&amp;gt;[http://www.naa.go.kr/site/main/content/greetings 대한민국예술원 사이트 소갯말]&amp;lt;/ref&amp;gt;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박종화는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는데, 한국문학과협회는 우익 성향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9C%EA%B5%AD%EB%AC%B8%ED%95%99%EA%B0%80%ED%98%91%ED%9A%8C&amp;amp;ridx=0&amp;amp;tot=27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추가로 박현수 문학연구원의 논문 「한국 전후 서정시의 성격과 층위 연구」 189p에도 한국문학가협회가 당시 좌파적 성향의 문인모임에 대항하여 출범했음을 언급한다. 위 각주에 링크된 중앙SUNDAY의 기사내용처럼 기본적으로 모임이나 단체 같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황순원은 월남으로 인해 자신의 좌파적 정체성을 부정해야 할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예술원 가입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박종화&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황순원은 1961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공동수상자의 목록이다.&lt;br /&gt;
&lt;br /&gt;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lt;br /&gt;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lt;br /&gt;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lt;br /&gt;
&lt;br /&gt;
======'''예술원보'''======&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다.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는데, 황순원이 원고를 투고한 예술원보의 완성에 협력했던 이들의 목록을 예술원보 호수별로 아래에 나열해놓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이들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아니며 보통 당호 예술원보에 원고를 투고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5호(1960)'''======&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원복: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피아노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현승&lt;br /&gt;
*김화진&lt;br /&gt;
*나운영&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두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9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염상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병기&lt;br /&gt;
*이상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숭녕&lt;br /&gt;
*이해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혜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이후 1975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만영&lt;br /&gt;
*장우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이후 1970년에 입회했다.&lt;br /&gt;
*전영택&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최현배&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9호(1965)'''======&lt;br /&gt;
*곽종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도상봉: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광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주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1호(1967)'''======&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세형: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인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병규&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4호(1970)'''======&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배길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예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경희대 제자들'''======&lt;br /&gt;
*고원정&lt;br /&gt;
*김종회&lt;br /&gt;
*[[류시화]]&lt;br /&gt;
*이문재&lt;br /&gt;
*이성부&lt;br /&gt;
*전상국&lt;br /&gt;
*정호승&lt;br /&gt;
*조세희&lt;br /&gt;
*한수산&lt;br /&gt;
*김용성&lt;br /&gt;
*조해일&lt;br /&gt;
*이유범&lt;br /&gt;
*박덕규&lt;br /&gt;
*김형경&lt;br /&gt;
*이혜경&lt;br /&gt;
*서하진&lt;br /&gt;
&lt;br /&gt;
======'''동료 문인들'''======&lt;br /&gt;
*[[안영]]&lt;br /&gt;
*[[김광섭]]&lt;br /&gt;
*[[김진수]]&lt;br /&gt;
*[[조병화]]&lt;br /&gt;
*[[주요섭]]&lt;br /&gt;
*[[원응서]]&lt;br /&gt;
관련문헌-[[마지막 잔]]&lt;br /&gt;
&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김동리&lt;br /&gt;
*김정한&lt;br /&gt;
*김팔봉&lt;br /&gt;
*박영준&lt;br /&gt;
*박종화&lt;br /&gt;
*박화성&lt;br /&gt;
*유주현&lt;br /&gt;
*이범선&lt;br /&gt;
*정을병&lt;br /&gt;
&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강용준&lt;br /&gt;
*곽학송&lt;br /&gt;
*김송&lt;br /&gt;
*박경수&lt;br /&gt;
*안수길&lt;br /&gt;
*유현종&lt;br /&gt;
*이원수&lt;br /&gt;
*최정희&lt;br /&gt;
&lt;br /&gt;
===='''Group''' &amp;lt;small&amp;gt;단체&amp;lt;/small&amp;gt;====&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lt;br /&gt;
===='''Place''' &amp;lt;small&amp;gt;장소&amp;lt;/small&amp;gt;====&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일본 와세다대학교&lt;br /&gt;
&lt;br /&gt;
===='''Event''' &amp;lt;small&amp;gt;사건&amp;lt;/small&amp;gt;====&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lt;br /&gt;
===='''Text''' &amp;lt;small&amp;gt;문헌&amp;lt;/small&amp;gt;====&lt;br /&gt;
*예술원보&lt;br /&gt;
&lt;br /&gt;
==='''Link''' Data===&lt;br /&gt;
===='''Person'''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Family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가족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Husband'''&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남편으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Wife'''&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내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Broth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형제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So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들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Daught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딸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knows'''&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지인으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Studen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제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Colleague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동료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stays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머무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worksAt'''&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일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Own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소유주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anag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관리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emb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구성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Group'''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reviousInSequence'''&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전신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ar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일부분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lace'''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Located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 위치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ward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게 상으로 주어지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미정리: 추천 관계어====&lt;br /&gt;
*isDescendTo(전락하다)&lt;br /&gt;
*belongTo(속하다)&lt;br /&gt;
*isOpposedTo(반대했다)&lt;br /&gt;
*isWantedTo(원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24</id>
		<title>HwangsunwonAndPeople</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24"/>
				<updated>2020-06-13T03:55: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경희대 제자들 */&lt;/p&gt;
&lt;hr /&gt;
&lt;div&gt;=='''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 | title=HwangsunwonAndPeople.lst}}&lt;br /&gt;
{{버튼클릭|[[HwangsunwonAndPeople.lst|lst 페이지로 가기]]}}&lt;br /&gt;
&lt;br /&gt;
=='''Data'''==&lt;br /&gt;
==='''Node''' Data===&lt;br /&gt;
===='''Person''' &amp;lt;small&amp;gt;인물&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물데이터 분류는 혈연을 제외한 동경학생예술좌부터  전국소설가협회까지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이러한 황순원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혈연'''=====&lt;br /&gt;
*양정길&lt;br /&gt;
*황남규&lt;br /&gt;
*[[황동규]]&lt;br /&gt;
*황선혜&lt;br /&gt;
*[[황시내]]&lt;br /&gt;
*황정규&lt;br /&gt;
*황찬영&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lt;br /&gt;
[[파일:동경학생.jpe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lt;br /&gt;
&lt;br /&gt;
&lt;br /&gt;
*[[김동원]]&lt;br /&gt;
*김영화&lt;br /&gt;
*김용하&lt;br /&gt;
*마완영&lt;br /&gt;
*[[박동근]]&lt;br /&gt;
*유종렬&lt;br /&gt;
*이진순&lt;br /&gt;
*이해랑&lt;br /&gt;
*임호권&lt;br /&gt;
*[[주영섭]]&lt;br /&gt;
*허남실&lt;br /&gt;
*한적선&lt;br /&gt;
&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5%AD%EB%AF%BC%EB%B3%B4%EB%8F%84%EC%97%B0%EB%A7%B9&amp;amp;ridx=0&amp;amp;tot=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amp;lt;ref&amp;gt;「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24p 인용: “1949년 11월 한 달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설정하고 11월 30일로 마감한 결과, 전향자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황순원(소설가),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으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기림]]&lt;br /&gt;
*김용환&lt;br /&gt;
*백철&lt;br /&gt;
*신막&lt;br /&gt;
*[[양주동]]&lt;br /&gt;
*정인택&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D%95%9C%EB%AF%BC%EA%B5%AD%EC%98%88%EC%88%A0%EC%9B%90&amp;amp;ridx=0&amp;amp;tot=3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amp;lt;ref&amp;gt;[http://www.naa.go.kr/site/main/content/greetings 대한민국예술원 사이트 소갯말]&amp;lt;/ref&amp;gt;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박종화는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는데, 한국문학과협회는 우익 성향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9C%EA%B5%AD%EB%AC%B8%ED%95%99%EA%B0%80%ED%98%91%ED%9A%8C&amp;amp;ridx=0&amp;amp;tot=27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추가로 박현수 문학연구원의 논문 「한국 전후 서정시의 성격과 층위 연구」 189p에도 한국문학가협회가 당시 좌파적 성향의 문인모임에 대항하여 출범했음을 언급한다. 위 각주에 링크된 중앙SUNDAY의 기사내용처럼 기본적으로 모임이나 단체 같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황순원은 월남으로 인해 자신의 좌파적 정체성을 부정해야 할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예술원 가입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박종화&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황순원은 1961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공동수상자의 목록이다.&lt;br /&gt;
&lt;br /&gt;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lt;br /&gt;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lt;br /&gt;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lt;br /&gt;
&lt;br /&gt;
======'''예술원보'''======&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다.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는데, 황순원이 원고를 투고한 예술원보의 완성에 협력했던 이들의 목록을 예술원보 호수별로 아래에 나열해놓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이들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아니며 보통 당호 예술원보에 원고를 투고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5호(1960)'''======&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원복: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피아노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현승&lt;br /&gt;
*김화진&lt;br /&gt;
*나운영&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두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9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염상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병기&lt;br /&gt;
*이상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숭녕&lt;br /&gt;
*이해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혜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이후 1975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만영&lt;br /&gt;
*장우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이후 1970년에 입회했다.&lt;br /&gt;
*전영택&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최현배&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9호(1965)'''======&lt;br /&gt;
*곽종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도상봉: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광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주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1호(1967)'''======&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세형: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인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병규&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4호(1970)'''======&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배길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예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경희대 제자들'''======&lt;br /&gt;
*고원정&lt;br /&gt;
*김종회&lt;br /&gt;
*[[류시화[[&lt;br /&gt;
*이문재&lt;br /&gt;
*이성부&lt;br /&gt;
*전상국&lt;br /&gt;
*정호승&lt;br /&gt;
*조세희&lt;br /&gt;
*한수산&lt;br /&gt;
*김용성&lt;br /&gt;
*조해일&lt;br /&gt;
*이유범&lt;br /&gt;
*박덕규&lt;br /&gt;
*김형경&lt;br /&gt;
*이혜경&lt;br /&gt;
*서하진&lt;br /&gt;
&lt;br /&gt;
======'''동료 문인들'''======&lt;br /&gt;
*[[안영]]&lt;br /&gt;
*[[김광섭]]&lt;br /&gt;
*[[김진수]]&lt;br /&gt;
*[[조병화]]&lt;br /&gt;
*[[주요섭]]&lt;br /&gt;
*[[원응서]]&lt;br /&gt;
관련문헌-[[마지막 잔]]&lt;br /&gt;
&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김동리&lt;br /&gt;
*김정한&lt;br /&gt;
*김팔봉&lt;br /&gt;
*박영준&lt;br /&gt;
*박종화&lt;br /&gt;
*박화성&lt;br /&gt;
*유주현&lt;br /&gt;
*이범선&lt;br /&gt;
*정을병&lt;br /&gt;
&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강용준&lt;br /&gt;
*곽학송&lt;br /&gt;
*김송&lt;br /&gt;
*박경수&lt;br /&gt;
*안수길&lt;br /&gt;
*유현종&lt;br /&gt;
*이원수&lt;br /&gt;
*최정희&lt;br /&gt;
&lt;br /&gt;
===='''Group''' &amp;lt;small&amp;gt;단체&amp;lt;/small&amp;gt;====&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lt;br /&gt;
===='''Place''' &amp;lt;small&amp;gt;장소&amp;lt;/small&amp;gt;====&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일본 와세다대학교&lt;br /&gt;
&lt;br /&gt;
===='''Event''' &amp;lt;small&amp;gt;사건&amp;lt;/small&amp;gt;====&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lt;br /&gt;
===='''Text''' &amp;lt;small&amp;gt;문헌&amp;lt;/small&amp;gt;====&lt;br /&gt;
*예술원보&lt;br /&gt;
&lt;br /&gt;
==='''Link''' Data===&lt;br /&gt;
===='''Person'''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Family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가족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Husband'''&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남편으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Wife'''&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내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Broth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형제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So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들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Daught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딸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knows'''&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지인으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Studen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제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Colleague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동료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stays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머무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worksAt'''&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일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Own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소유주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anag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관리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emb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구성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Group'''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reviousInSequence'''&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전신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ar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일부분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lace'''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Located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 위치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ward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게 상으로 주어지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미정리: 추천 관계어====&lt;br /&gt;
*isDescendTo(전락하다)&lt;br /&gt;
*belongTo(속하다)&lt;br /&gt;
*isOpposedTo(반대했다)&lt;br /&gt;
*isWantedTo(원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B%9C%EB%82%B4&amp;diff=12823</id>
		<title>황시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C%8B%9C%EB%82%B4&amp;diff=12823"/>
				<updated>2020-06-13T03:53: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새 문서:   ==인물==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만하임 국립음대, 마르부르크 대학, 미국 테네시 대학에서 작곡과...&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만하임 국립음대, 마르부르크 대학, 미국 테네시 대학에서 작곡과 음악학, 미술사를 공부했다. 미주 중앙일보를 비롯한 몇몇 매체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현재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작품==&lt;br /&gt;
&amp;lt;황금물고기&amp;gt;라는 에세이집을 출간한 바 있다.&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황순원의 손녀. &amp;lt;황금물고기&amp;gt;산문집에는 할아버지인 황순원 선생에 대한 이야기(&amp;lt;터키인 거리&amp;gt;), 아버지인 황동규 선생에 대한 이야기(&amp;lt;첫사랑&amp;gt;, &amp;lt;한번쯤&amp;gt; 등)가 실려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22</id>
		<title>HwangsunwonAndPeople</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22"/>
				<updated>2020-06-13T03:48: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 | title=HwangsunwonAndPeople.lst}}&lt;br /&gt;
{{버튼클릭|[[HwangsunwonAndPeople.lst|lst 페이지로 가기]]}}&lt;br /&gt;
&lt;br /&gt;
=='''Data'''==&lt;br /&gt;
==='''Node''' Data===&lt;br /&gt;
===='''Person''' &amp;lt;small&amp;gt;인물&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물데이터 분류는 혈연을 제외한 동경학생예술좌부터  전국소설가협회까지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이러한 황순원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혈연'''=====&lt;br /&gt;
*양정길&lt;br /&gt;
*황남규&lt;br /&gt;
*[[황동규]]&lt;br /&gt;
*황선혜&lt;br /&gt;
*[[황시내]]&lt;br /&gt;
*황정규&lt;br /&gt;
*황찬영&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lt;br /&gt;
[[파일:동경학생.jpe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lt;br /&gt;
&lt;br /&gt;
&lt;br /&gt;
*[[김동원]]&lt;br /&gt;
*김영화&lt;br /&gt;
*김용하&lt;br /&gt;
*마완영&lt;br /&gt;
*[[박동근]]&lt;br /&gt;
*유종렬&lt;br /&gt;
*이진순&lt;br /&gt;
*이해랑&lt;br /&gt;
*임호권&lt;br /&gt;
*[[주영섭]]&lt;br /&gt;
*허남실&lt;br /&gt;
*한적선&lt;br /&gt;
&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5%AD%EB%AF%BC%EB%B3%B4%EB%8F%84%EC%97%B0%EB%A7%B9&amp;amp;ridx=0&amp;amp;tot=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amp;lt;ref&amp;gt;「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24p 인용: “1949년 11월 한 달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설정하고 11월 30일로 마감한 결과, 전향자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황순원(소설가),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으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기림]]&lt;br /&gt;
*김용환&lt;br /&gt;
*백철&lt;br /&gt;
*신막&lt;br /&gt;
*[[양주동]]&lt;br /&gt;
*정인택&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D%95%9C%EB%AF%BC%EA%B5%AD%EC%98%88%EC%88%A0%EC%9B%90&amp;amp;ridx=0&amp;amp;tot=3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amp;lt;ref&amp;gt;[http://www.naa.go.kr/site/main/content/greetings 대한민국예술원 사이트 소갯말]&amp;lt;/ref&amp;gt;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박종화는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는데, 한국문학과협회는 우익 성향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9C%EA%B5%AD%EB%AC%B8%ED%95%99%EA%B0%80%ED%98%91%ED%9A%8C&amp;amp;ridx=0&amp;amp;tot=27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추가로 박현수 문학연구원의 논문 「한국 전후 서정시의 성격과 층위 연구」 189p에도 한국문학가협회가 당시 좌파적 성향의 문인모임에 대항하여 출범했음을 언급한다. 위 각주에 링크된 중앙SUNDAY의 기사내용처럼 기본적으로 모임이나 단체 같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황순원은 월남으로 인해 자신의 좌파적 정체성을 부정해야 할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예술원 가입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박종화&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황순원은 1961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공동수상자의 목록이다.&lt;br /&gt;
&lt;br /&gt;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lt;br /&gt;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lt;br /&gt;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lt;br /&gt;
&lt;br /&gt;
======'''예술원보'''======&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다.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는데, 황순원이 원고를 투고한 예술원보의 완성에 협력했던 이들의 목록을 예술원보 호수별로 아래에 나열해놓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이들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아니며 보통 당호 예술원보에 원고를 투고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5호(1960)'''======&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원복: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피아노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현승&lt;br /&gt;
*김화진&lt;br /&gt;
*나운영&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두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9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염상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병기&lt;br /&gt;
*이상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숭녕&lt;br /&gt;
*이해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혜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이후 1975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만영&lt;br /&gt;
*장우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이후 1970년에 입회했다.&lt;br /&gt;
*전영택&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최현배&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9호(1965)'''======&lt;br /&gt;
*곽종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도상봉: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광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주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1호(1967)'''======&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세형: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인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병규&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4호(1970)'''======&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배길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예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경희대 제자들'''======&lt;br /&gt;
*고원정&lt;br /&gt;
*김종회&lt;br /&gt;
*류시화&lt;br /&gt;
*이문재&lt;br /&gt;
*이성부&lt;br /&gt;
*전상국&lt;br /&gt;
*정호승&lt;br /&gt;
*조세희&lt;br /&gt;
*한수산&lt;br /&gt;
*김용성&lt;br /&gt;
*조해일&lt;br /&gt;
*이유범&lt;br /&gt;
*박덕규&lt;br /&gt;
*김형경&lt;br /&gt;
*이혜경&lt;br /&gt;
*서하진&lt;br /&gt;
&lt;br /&gt;
======'''동료 문인들'''======&lt;br /&gt;
*[[안영]]&lt;br /&gt;
*[[김광섭]]&lt;br /&gt;
*[[김진수]]&lt;br /&gt;
*[[조병화]]&lt;br /&gt;
*[[주요섭]]&lt;br /&gt;
*[[원응서]]&lt;br /&gt;
관련문헌-[[마지막 잔]]&lt;br /&gt;
&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김동리&lt;br /&gt;
*김정한&lt;br /&gt;
*김팔봉&lt;br /&gt;
*박영준&lt;br /&gt;
*박종화&lt;br /&gt;
*박화성&lt;br /&gt;
*유주현&lt;br /&gt;
*이범선&lt;br /&gt;
*정을병&lt;br /&gt;
&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강용준&lt;br /&gt;
*곽학송&lt;br /&gt;
*김송&lt;br /&gt;
*박경수&lt;br /&gt;
*안수길&lt;br /&gt;
*유현종&lt;br /&gt;
*이원수&lt;br /&gt;
*최정희&lt;br /&gt;
&lt;br /&gt;
===='''Group''' &amp;lt;small&amp;gt;단체&amp;lt;/small&amp;gt;====&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lt;br /&gt;
===='''Place''' &amp;lt;small&amp;gt;장소&amp;lt;/small&amp;gt;====&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일본 와세다대학교&lt;br /&gt;
&lt;br /&gt;
===='''Event''' &amp;lt;small&amp;gt;사건&amp;lt;/small&amp;gt;====&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lt;br /&gt;
===='''Text''' &amp;lt;small&amp;gt;문헌&amp;lt;/small&amp;gt;====&lt;br /&gt;
*예술원보&lt;br /&gt;
&lt;br /&gt;
==='''Link''' Data===&lt;br /&gt;
===='''Person'''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Family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가족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Husband'''&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남편으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Wife'''&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내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Broth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형제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So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들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Daught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딸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knows'''&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지인으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Studen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제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Colleague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동료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stays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머무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worksAt'''&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일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Own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소유주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anag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관리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emb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구성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Group'''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reviousInSequence'''&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전신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ar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일부분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lace'''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Located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 위치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ward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게 상으로 주어지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미정리: 추천 관계어====&lt;br /&gt;
*isDescendTo(전락하다)&lt;br /&gt;
*belongTo(속하다)&lt;br /&gt;
*isOpposedTo(반대했다)&lt;br /&gt;
*isWantedTo(원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B%8F%99%EA%B7%9C&amp;diff=12821</id>
		<title>황동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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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3:48: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황동규.jpg]]&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1938년 4월 9일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삶의 향기 몇점』(2008) 등의 산문집이 있다.&lt;br /&gt;
&lt;br /&gt;
1998년 『황동규 시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초기 서정시편에서 출발하여 「비가」 연작시를 거치면서 심화되고, 197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겨울의 빛」을 거치며 극서정시로 나아가고, 여기서 다시 선시풍의 연작시 「풍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초기 시인 「시월」이나 「즐거운 편지」 등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적막하고 쓸쓸한 내면풍경을 담은 시이면서 시인의 남다른 개성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는 「비가」를 통해 우울한 내면세계의 묘사에서 현실의 고뇌를 껴안으려는 정열을 드러낸다. 「비가」는 방황하는 자, 혹은 내몰린 자의 언어를 통해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이 구체적인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후 그의 시에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는다. 「태평가」를 비롯해 「삼남에 내리는 눈」, 「열하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lt;br /&gt;
&lt;br /&gt;
시적 대상에 대한 거리 유지는 그가 현실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이자 시적 긴장을 유지시키는 근원적 힘이라고 여겨진다. 일그러졌거나 위악적인 자아의 모습은 사회구조에 대한 시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며, 파편화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시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면 「겨울의 빛」은 그의 시가 합치되고 또한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초기 시의 눈과 겨울의 이미지들이 시인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빛」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장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허무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죽음에 대한 반추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풍장」 연작인 것이다. 황동규의 시적 어법은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 이르러 더욱 유연함을 얻는데, 이 시가 드러내는 일상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적 짜임새는 주체적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존재의 발견은 크고 위대한 것들에게서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에서 얻어진다. 가볍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그 자유로움으로써 속박을 벗어나는 시적 깨달음은 초기 시의 현실과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을 담은 비극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거쳐 다져진 원숙함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부자관계&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D%99%A9%EB%8F%99%EA%B7%9C.jpg&amp;diff=12820</id>
		<title>파일:황동규.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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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B%8F%99%EA%B7%9C&amp;diff=12819</id>
		<title>황동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99%A9%EB%8F%99%EA%B7%9C&amp;diff=12819"/>
				<updated>2020-06-13T03:46: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새 문서:  ==인물==  1938년 4월 9일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업적==  1958년 『현대...&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1938년 4월 9일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삶의 향기 몇점』(2008) 등의 산문집이 있다.&lt;br /&gt;
&lt;br /&gt;
1998년 『황동규 시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초기 서정시편에서 출발하여 「비가」 연작시를 거치면서 심화되고, 197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겨울의 빛」을 거치며 극서정시로 나아가고, 여기서 다시 선시풍의 연작시 「풍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초기 시인 「시월」이나 「즐거운 편지」 등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적막하고 쓸쓸한 내면풍경을 담은 시이면서 시인의 남다른 개성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는 「비가」를 통해 우울한 내면세계의 묘사에서 현실의 고뇌를 껴안으려는 정열을 드러낸다. 「비가」는 방황하는 자, 혹은 내몰린 자의 언어를 통해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이 구체적인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후 그의 시에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는다. 「태평가」를 비롯해 「삼남에 내리는 눈」, 「열하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lt;br /&gt;
&lt;br /&gt;
시적 대상에 대한 거리 유지는 그가 현실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이자 시적 긴장을 유지시키는 근원적 힘이라고 여겨진다. 일그러졌거나 위악적인 자아의 모습은 사회구조에 대한 시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며, 파편화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시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면 「겨울의 빛」은 그의 시가 합치되고 또한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초기 시의 눈과 겨울의 이미지들이 시인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빛」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장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허무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죽음에 대한 반추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풍장」 연작인 것이다. 황동규의 시적 어법은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 이르러 더욱 유연함을 얻는데, 이 시가 드러내는 일상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적 짜임새는 주체적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존재의 발견은 크고 위대한 것들에게서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에서 얻어진다. 가볍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그 자유로움으로써 속박을 벗어나는 시적 깨달음은 초기 시의 현실과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을 담은 비극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거쳐 다져진 원숙함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부자관계&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18</id>
		<title>HwangsunwonAndPeop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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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3:45: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혈연 */&lt;/p&gt;
&lt;hr /&gt;
&lt;div&gt;=='''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 | title=HwangsunwonAndPeople.lst}}&lt;br /&gt;
{{버튼클릭|[[HwangsunwonAndPeople.lst|lst 페이지로 가기]]}}&lt;br /&gt;
&lt;br /&gt;
=='''Data'''==&lt;br /&gt;
==='''Node''' Data===&lt;br /&gt;
===='''Person''' &amp;lt;small&amp;gt;인물&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물데이터 분류는 혈연을 제외한 동경학생예술좌부터  전국소설가협회까지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이러한 황순원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혈연'''=====&lt;br /&gt;
*양정길&lt;br /&gt;
*황남규&lt;br /&gt;
*[[황동규]]&lt;br /&gt;
*황선혜&lt;br /&gt;
*황시내&lt;br /&gt;
*황정규&lt;br /&gt;
*황찬영&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lt;br /&gt;
[[파일:동경학생.jpe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lt;br /&gt;
&lt;br /&gt;
&lt;br /&gt;
*[[김동원]]&lt;br /&gt;
*김영화&lt;br /&gt;
*김용하&lt;br /&gt;
*마완영&lt;br /&gt;
*[[박동근]]&lt;br /&gt;
*유종렬&lt;br /&gt;
*이진순&lt;br /&gt;
*이해랑&lt;br /&gt;
*임호권&lt;br /&gt;
*[[주영섭]]&lt;br /&gt;
*허남실&lt;br /&gt;
*한적선&lt;br /&gt;
&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5%AD%EB%AF%BC%EB%B3%B4%EB%8F%84%EC%97%B0%EB%A7%B9&amp;amp;ridx=0&amp;amp;tot=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amp;lt;ref&amp;gt;「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24p 인용: “1949년 11월 한 달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설정하고 11월 30일로 마감한 결과, 전향자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황순원(소설가),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으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기림]]&lt;br /&gt;
*김용환&lt;br /&gt;
*백철&lt;br /&gt;
*신막&lt;br /&gt;
*[[양주동]]&lt;br /&gt;
*정인택&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D%95%9C%EB%AF%BC%EA%B5%AD%EC%98%88%EC%88%A0%EC%9B%90&amp;amp;ridx=0&amp;amp;tot=3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amp;lt;ref&amp;gt;[http://www.naa.go.kr/site/main/content/greetings 대한민국예술원 사이트 소갯말]&amp;lt;/ref&amp;gt;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박종화는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는데, 한국문학과협회는 우익 성향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9C%EA%B5%AD%EB%AC%B8%ED%95%99%EA%B0%80%ED%98%91%ED%9A%8C&amp;amp;ridx=0&amp;amp;tot=27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추가로 박현수 문학연구원의 논문 「한국 전후 서정시의 성격과 층위 연구」 189p에도 한국문학가협회가 당시 좌파적 성향의 문인모임에 대항하여 출범했음을 언급한다. 위 각주에 링크된 중앙SUNDAY의 기사내용처럼 기본적으로 모임이나 단체 같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황순원은 월남으로 인해 자신의 좌파적 정체성을 부정해야 할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예술원 가입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박종화&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황순원은 1961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공동수상자의 목록이다.&lt;br /&gt;
&lt;br /&gt;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lt;br /&gt;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lt;br /&gt;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lt;br /&gt;
&lt;br /&gt;
======'''예술원보'''======&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다.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는데, 황순원이 원고를 투고한 예술원보의 완성에 협력했던 이들의 목록을 예술원보 호수별로 아래에 나열해놓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이들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아니며 보통 당호 예술원보에 원고를 투고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5호(1960)'''======&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원복: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피아노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현승&lt;br /&gt;
*김화진&lt;br /&gt;
*나운영&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두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9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염상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병기&lt;br /&gt;
*이상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숭녕&lt;br /&gt;
*이해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혜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이후 1975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만영&lt;br /&gt;
*장우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이후 1970년에 입회했다.&lt;br /&gt;
*전영택&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최현배&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9호(1965)'''======&lt;br /&gt;
*곽종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도상봉: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광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주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1호(1967)'''======&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세형: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인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병규&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4호(1970)'''======&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배길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예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경희대 제자들'''======&lt;br /&gt;
*고원정&lt;br /&gt;
*김종회&lt;br /&gt;
*류시화&lt;br /&gt;
*이문재&lt;br /&gt;
*이성부&lt;br /&gt;
*전상국&lt;br /&gt;
*정호승&lt;br /&gt;
*조세희&lt;br /&gt;
*한수산&lt;br /&gt;
*김용성&lt;br /&gt;
*조해일&lt;br /&gt;
*이유범&lt;br /&gt;
*박덕규&lt;br /&gt;
*김형경&lt;br /&gt;
*이혜경&lt;br /&gt;
*서하진&lt;br /&gt;
&lt;br /&gt;
======'''동료 문인들'''======&lt;br /&gt;
*[[안영]]&lt;br /&gt;
*[[김광섭]]&lt;br /&gt;
*[[김진수]]&lt;br /&gt;
*[[조병화]]&lt;br /&gt;
*[[주요섭]]&lt;br /&gt;
*[[원응서]]&lt;br /&gt;
관련문헌-[[마지막 잔]]&lt;br /&gt;
&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김동리&lt;br /&gt;
*김정한&lt;br /&gt;
*김팔봉&lt;br /&gt;
*박영준&lt;br /&gt;
*박종화&lt;br /&gt;
*박화성&lt;br /&gt;
*유주현&lt;br /&gt;
*이범선&lt;br /&gt;
*정을병&lt;br /&gt;
&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강용준&lt;br /&gt;
*곽학송&lt;br /&gt;
*김송&lt;br /&gt;
*박경수&lt;br /&gt;
*안수길&lt;br /&gt;
*유현종&lt;br /&gt;
*이원수&lt;br /&gt;
*최정희&lt;br /&gt;
&lt;br /&gt;
===='''Group''' &amp;lt;small&amp;gt;단체&amp;lt;/small&amp;gt;====&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lt;br /&gt;
===='''Place''' &amp;lt;small&amp;gt;장소&amp;lt;/small&amp;gt;====&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일본 와세다대학교&lt;br /&gt;
&lt;br /&gt;
===='''Event''' &amp;lt;small&amp;gt;사건&amp;lt;/small&amp;gt;====&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lt;br /&gt;
===='''Text''' &amp;lt;small&amp;gt;문헌&amp;lt;/small&amp;gt;====&lt;br /&gt;
*예술원보&lt;br /&gt;
&lt;br /&gt;
==='''Link''' Data===&lt;br /&gt;
===='''Person'''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Family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가족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Husband'''&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남편으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Wife'''&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내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Broth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형제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So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들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Daught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딸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knows'''&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지인으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Studen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제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Colleague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동료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stays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머무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worksAt'''&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일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Own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소유주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anag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관리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emb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구성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Group'''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reviousInSequence'''&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전신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ar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일부분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lace'''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Located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 위치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ward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게 상으로 주어지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미정리: 추천 관계어====&lt;br /&gt;
*isDescendTo(전락하다)&lt;br /&gt;
*belongTo(속하다)&lt;br /&gt;
*isOpposedTo(반대했다)&lt;br /&gt;
*isWantedTo(원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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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석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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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3:40: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새 문서: 파일:신석초.jpg  ==인물==  본명은 응식(應植). 호는 유인(唯仁)·석초(石艸, 石初). 1909년 6월 4일 충남 서천 태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했...&lt;/p&gt;
&lt;hr /&gt;
&lt;div&gt;[[파일:신석초.jpg]]&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본명은 응식(應植). 호는 유인(唯仁)·석초(石艸, 石初). 1909년 6월 4일 충남 서천 태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했고, 한산보통학교,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서 수학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병으로 중퇴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맹원으로 활약하였다.&lt;br /&gt;
1935년에는 『신조선(新朝鮮)』 편집일을 맡아보았고,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lt;br /&gt;
195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1957년에는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예술원회원(1960), 한국시인협회 회장(1965),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1965∼1966)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31년신유인(申唯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抗)하여」를 발표하면서부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lt;br /&gt;
이 논문은 볼셰비키화한 카프의 창작방법론의 강요에 항의하는 내용으로서,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발레리의 작품 「텍스트씨」를 읽은 감동 등으로 사상적 고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박영희(朴英熙)의 전향선언과 함께 1933년 탈퇴원을 제출하고, 이듬해 카프의 해산과 함께 관계를 끓었다. 1935년 무렵부터 이육사(李陸史)와 알게 되어 막역한 지기(知己)가 되었고, 서정주(徐廷柱)·김광균(金光均)·윤곤강(尹崑崗) 등과 함께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호접(胡蝶)」·「무녀의 춤」을 『자오선』 1호에 발표하였고, 이어 1939년『시학(詩學)』지에 「파초(芭蕉)」(1호)·「가야금(伽倻琴)」(2호)·「묘(墓)」(4호) 등을 발표하였다.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폐간되자 침묵을 지킴으로써 친일 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제1시집 『석초시집(石艸詩集)』을 간행하였다.&lt;br /&gt;
&lt;br /&gt;
이어 1959년에는 제2시집 『바라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 1974년 제4집 『처용(處容)은 말한다』와 제5시집 『수유동운(水踰洞韻)』을 간행하였다. 그는 대체로 엄격한 구성과 고전적 심미성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전개하여왔는데, 이러한 작품 세계는 발레리와 노장사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즉, 사고의 조직성을 추구한 발레리(Valery,P.A.)의 엄밀성과 명석성을 형태적인 바탕으로 삼고, 여기에 노장사상의 출세간적 달관(出世間的達觀)의 경지를 담아 보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체로, 과작에 속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바라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는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동시대의 문인&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C%8B%A0%EC%84%9D%EC%B4%88.jpg&amp;diff=12816</id>
		<title>파일:신석초.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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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15</id>
		<title>HwangsunwonAndPeop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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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3:33: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 | title=HwangsunwonAndPeople.lst}}&lt;br /&gt;
{{버튼클릭|[[HwangsunwonAndPeople.lst|lst 페이지로 가기]]}}&lt;br /&gt;
&lt;br /&gt;
=='''Data'''==&lt;br /&gt;
==='''Node''' Data===&lt;br /&gt;
===='''Person''' &amp;lt;small&amp;gt;인물&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물데이터 분류는 혈연을 제외한 동경학생예술좌부터  전국소설가협회까지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이러한 황순원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혈연'''=====&lt;br /&gt;
*양정길&lt;br /&gt;
*황남규&lt;br /&gt;
*황동규&lt;br /&gt;
*황선혜&lt;br /&gt;
*황시내&lt;br /&gt;
*황정규&lt;br /&gt;
*황찬영&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lt;br /&gt;
[[파일:동경학생.jpe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lt;br /&gt;
&lt;br /&gt;
&lt;br /&gt;
*[[김동원]]&lt;br /&gt;
*김영화&lt;br /&gt;
*김용하&lt;br /&gt;
*마완영&lt;br /&gt;
*[[박동근]]&lt;br /&gt;
*유종렬&lt;br /&gt;
*이진순&lt;br /&gt;
*이해랑&lt;br /&gt;
*임호권&lt;br /&gt;
*[[주영섭]]&lt;br /&gt;
*허남실&lt;br /&gt;
*한적선&lt;br /&gt;
&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5%AD%EB%AF%BC%EB%B3%B4%EB%8F%84%EC%97%B0%EB%A7%B9&amp;amp;ridx=0&amp;amp;tot=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amp;lt;ref&amp;gt;「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24p 인용: “1949년 11월 한 달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설정하고 11월 30일로 마감한 결과, 전향자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황순원(소설가),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으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기림]]&lt;br /&gt;
*김용환&lt;br /&gt;
*백철&lt;br /&gt;
*신막&lt;br /&gt;
*[[양주동]]&lt;br /&gt;
*정인택&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D%95%9C%EB%AF%BC%EA%B5%AD%EC%98%88%EC%88%A0%EC%9B%90&amp;amp;ridx=0&amp;amp;tot=3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amp;lt;ref&amp;gt;[http://www.naa.go.kr/site/main/content/greetings 대한민국예술원 사이트 소갯말]&amp;lt;/ref&amp;gt;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박종화는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는데, 한국문학과협회는 우익 성향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9C%EA%B5%AD%EB%AC%B8%ED%95%99%EA%B0%80%ED%98%91%ED%9A%8C&amp;amp;ridx=0&amp;amp;tot=27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추가로 박현수 문학연구원의 논문 「한국 전후 서정시의 성격과 층위 연구」 189p에도 한국문학가협회가 당시 좌파적 성향의 문인모임에 대항하여 출범했음을 언급한다. 위 각주에 링크된 중앙SUNDAY의 기사내용처럼 기본적으로 모임이나 단체 같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황순원은 월남으로 인해 자신의 좌파적 정체성을 부정해야 할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예술원 가입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박종화&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황순원은 1961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공동수상자의 목록이다.&lt;br /&gt;
&lt;br /&gt;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lt;br /&gt;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lt;br /&gt;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lt;br /&gt;
&lt;br /&gt;
======'''예술원보'''======&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다.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는데, 황순원이 원고를 투고한 예술원보의 완성에 협력했던 이들의 목록을 예술원보 호수별로 아래에 나열해놓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이들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아니며 보통 당호 예술원보에 원고를 투고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5호(1960)'''======&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원복: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피아노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현승&lt;br /&gt;
*김화진&lt;br /&gt;
*나운영&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두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9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염상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병기&lt;br /&gt;
*이상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숭녕&lt;br /&gt;
*이해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혜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이후 1975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만영&lt;br /&gt;
*장우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이후 1970년에 입회했다.&lt;br /&gt;
*전영택&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최현배&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9호(1965)'''======&lt;br /&gt;
*곽종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도상봉: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광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주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1호(1967)'''======&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세형: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인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병규&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4호(1970)'''======&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배길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예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경희대 제자들'''======&lt;br /&gt;
*고원정&lt;br /&gt;
*김종회&lt;br /&gt;
*류시화&lt;br /&gt;
*이문재&lt;br /&gt;
*이성부&lt;br /&gt;
*전상국&lt;br /&gt;
*정호승&lt;br /&gt;
*조세희&lt;br /&gt;
*한수산&lt;br /&gt;
*김용성&lt;br /&gt;
*조해일&lt;br /&gt;
*이유범&lt;br /&gt;
*박덕규&lt;br /&gt;
*김형경&lt;br /&gt;
*이혜경&lt;br /&gt;
*서하진&lt;br /&gt;
&lt;br /&gt;
======'''동료 문인들'''======&lt;br /&gt;
*[[안영]]&lt;br /&gt;
*[[김광섭]]&lt;br /&gt;
*[[김진수]]&lt;br /&gt;
*[[조병화]]&lt;br /&gt;
*[[주요섭]]&lt;br /&gt;
*[[원응서]]&lt;br /&gt;
관련문헌-[[마지막 잔]]&lt;br /&gt;
&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김동리&lt;br /&gt;
*김정한&lt;br /&gt;
*김팔봉&lt;br /&gt;
*박영준&lt;br /&gt;
*박종화&lt;br /&gt;
*박화성&lt;br /&gt;
*유주현&lt;br /&gt;
*이범선&lt;br /&gt;
*정을병&lt;br /&gt;
&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강용준&lt;br /&gt;
*곽학송&lt;br /&gt;
*김송&lt;br /&gt;
*박경수&lt;br /&gt;
*안수길&lt;br /&gt;
*유현종&lt;br /&gt;
*이원수&lt;br /&gt;
*최정희&lt;br /&gt;
&lt;br /&gt;
===='''Group''' &amp;lt;small&amp;gt;단체&amp;lt;/small&amp;gt;====&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lt;br /&gt;
===='''Place''' &amp;lt;small&amp;gt;장소&amp;lt;/small&amp;gt;====&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일본 와세다대학교&lt;br /&gt;
&lt;br /&gt;
===='''Event''' &amp;lt;small&amp;gt;사건&amp;lt;/small&amp;gt;====&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lt;br /&gt;
===='''Text''' &amp;lt;small&amp;gt;문헌&amp;lt;/small&amp;gt;====&lt;br /&gt;
*예술원보&lt;br /&gt;
&lt;br /&gt;
==='''Link''' Data===&lt;br /&gt;
===='''Person'''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Family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가족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Husband'''&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남편으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Wife'''&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내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Broth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형제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So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들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Daught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딸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knows'''&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지인으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Studen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제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Colleague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동료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stays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머무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worksAt'''&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일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Own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소유주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anag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관리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emb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구성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Group'''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reviousInSequence'''&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전신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ar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일부분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lace'''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Located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 위치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ward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게 상으로 주어지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미정리: 추천 관계어====&lt;br /&gt;
*isDescendTo(전락하다)&lt;br /&gt;
*belongTo(속하다)&lt;br /&gt;
*isOpposedTo(반대했다)&lt;br /&gt;
*isWantedTo(원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C%84%9C%EC%A0%95%EC%A3%BC&amp;diff=12814</id>
		<title>서정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C%84%9C%EC%A0%95%EC%A3%BC&amp;diff=12814"/>
				<updated>2020-06-13T03:31: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서정주.jpg]]&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lt;br /&gt;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된 뒤 풀려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돼 빈민 운동에 투신, 당시 아현동에서 살고 있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같은 해인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한다.&lt;br /&gt;
&lt;br /&gt;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당시 서정주는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정주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 석전 박한영을 비롯해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유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좌파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키 위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해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현실 참여 문학 대신 순수시를 택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며 전쟁 초기 한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탓에 조현증이 발병해 요양하여 그 영향 탓인지 시 세계가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33년 &amp;lt;그 어머니의 부탁&amp;gt;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amp;lt;벽&amp;gt;이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이 등단 과정이 좀 특이한데, 서정주의 회고에 따르면 &amp;lt;벽&amp;gt; 역시 여느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36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amp;lt;시인부락&amp;gt;을 창간했고,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amp;lt;자화상&amp;gt;, &amp;lt;화사&amp;gt;, &amp;lt;문둥이&amp;gt;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amp;lt;화사집&amp;gt;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lt;br /&gt;
1948년 &amp;lt;화사집&amp;gt;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amp;lt;견우의 노래&amp;gt;, &amp;lt;귀촉도&amp;gt;, &amp;lt;푸르른 날&amp;gt; 등이 수록된 두 번째 시집 &amp;lt;귀촉도&amp;gt;를 출간했고, 이어 1956년 &amp;lt;무등을 보며&amp;gt;, &amp;lt;국화 옆에서&amp;gt;, &amp;lt;추천사&amp;gt; 등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amp;lt;서정주시선&amp;gt;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다시 크게 주목받았다.&lt;br /&gt;
&lt;br /&gt;
1961년에는 &amp;lt;꽃밭의 독백&amp;gt;, &amp;lt;고조&amp;gt;, &amp;lt;무제&amp;gt; 등이 수록된 네 번째 시집 &amp;lt;신라초&amp;gt;를, 1968년에는 &amp;lt;동천&amp;gt;, &amp;lt;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amp;gt;, &amp;lt;선운사 동구&amp;gt; 등이 수록된 다섯 번째 시집 &amp;lt;동천&amp;gt;을 출간하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된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전까지 단명한 시인이 많았던 한국 시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은, 박재삼 등 여러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인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등 시인 양성에 노력을 쏟기도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amp;lt;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amp;gt;와 &amp;lt;천지유정&amp;gt;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amp;lt;한국의 현대시&amp;gt;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 문학계 시각으로 보면 그의 순수시는 '우파적인 경향을 띤 문학'이라고 비판받는다.&lt;br /&gt;
&lt;br /&gt;
1975년에는 &amp;lt;신부&amp;gt;, &amp;lt;상가수의 소리&amp;gt;, &amp;lt;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amp;gt;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amp;lt;질마재 신화&amp;gt;를, 1976년에는 &amp;lt;시론&amp;gt;, &amp;lt;낮잠&amp;gt;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amp;lt;떠돌이의 시&amp;gt;를 출간했다. 이후의 시들은 서정주의 후기 시에 속하는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amp;lt;서으로 가는 달처럼...&amp;gt;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인 &amp;lt;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amp;gt;를 냈다. 같은 시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도 맡았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amp;lt;안 잊히는 일들&amp;gt;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amp;lt;노래&amp;gt;를 출간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amp;lt;팔할이 바람&amp;gt;을 냈다.&lt;br /&gt;
&lt;br /&gt;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1600여 개의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는데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시집 &amp;lt;산시&amp;gt;를 냈다. 말년까지 공부와 시쓰기를 활발하게 하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러시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90년대 중반 &amp;lt;세계 민화집&amp;gt;과 동화집 &amp;lt;우리나라 신선선녀 이야기&amp;gt;를 쓰기도 했다. 1993년 시집 &amp;lt;늙은 떠돌이의 시&amp;gt;를, 1997년 마지막 시집 &amp;lt;80소년 떠돌이의 시&amp;gt;를 출간했다.&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서정주와 황순원은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1915년과 2000년으로 똑같은데, 각각 시와 소설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행보에 있어서는 거의 천양지차의 차이를 보여 대조적인 물로 자주 언급된다. 두 작가의 사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이 함께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C%84%9C%EC%A0%95%EC%A3%BC&amp;diff=12813</id>
		<title>서정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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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2:12: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서정주.jpg]]&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lt;br /&gt;
 14세에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했다.&lt;br /&gt;
&lt;br /&gt;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된 뒤 풀려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돼 빈민 운동에 투신, 당시 아현동에서 살고 있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같은 해인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한다.&lt;br /&gt;
&lt;br /&gt;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당시 서정주는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정주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 석전 박한영을 비롯해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유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좌파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키 위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해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현실 참여 문학 대신 순수시를 택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며 전쟁 초기 한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탓에 조현증이 발병해 요양하여 그 영향 탓인지 시 세계가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33년 &amp;lt;그 어머니의 부탁&amp;gt;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amp;lt;벽&amp;gt;이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이 등단 과정이 좀 특이한데, 서정주의 회고에 따르면 &amp;lt;벽&amp;gt; 역시 여느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36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amp;lt;시인부락&amp;gt;을 창간했고,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amp;lt;자화상&amp;gt;, &amp;lt;화사&amp;gt;, &amp;lt;문둥이&amp;gt;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amp;lt;화사집&amp;gt;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lt;br /&gt;
1948년 &amp;lt;화사집&amp;gt;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amp;lt;견우의 노래&amp;gt;, &amp;lt;귀촉도&amp;gt;, &amp;lt;푸르른 날&amp;gt; 등이 수록된 두 번째 시집 &amp;lt;귀촉도&amp;gt;를 출간했고, 이어 1956년 &amp;lt;무등을 보며&amp;gt;, &amp;lt;국화 옆에서&amp;gt;, &amp;lt;추천사&amp;gt; 등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amp;lt;서정주시선&amp;gt;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다시 크게 주목받았다.&lt;br /&gt;
&lt;br /&gt;
1961년에는 &amp;lt;꽃밭의 독백&amp;gt;, &amp;lt;고조&amp;gt;, &amp;lt;무제&amp;gt; 등이 수록된 네 번째 시집 &amp;lt;신라초&amp;gt;를, 1968년에는 &amp;lt;동천&amp;gt;, &amp;lt;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amp;gt;, &amp;lt;선운사 동구&amp;gt; 등이 수록된 다섯 번째 시집 &amp;lt;동천&amp;gt;을 출간하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된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전까지 단명한 시인이 많았던 한국 시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은, 박재삼 등 여러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인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등 시인 양성에 노력을 쏟기도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amp;lt;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amp;gt;와 &amp;lt;천지유정&amp;gt;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amp;lt;한국의 현대시&amp;gt;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 문학계 시각으로 보면 그의 순수시는 '우파적인 경향을 띤 문학'이라고 비판받는다.&lt;br /&gt;
&lt;br /&gt;
1975년에는 &amp;lt;신부&amp;gt;, &amp;lt;상가수의 소리&amp;gt;, &amp;lt;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amp;gt;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amp;lt;질마재 신화&amp;gt;를, 1976년에는 &amp;lt;시론&amp;gt;, &amp;lt;낮잠&amp;gt;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amp;lt;떠돌이의 시&amp;gt;를 출간했다. 이후의 시들은 서정주의 후기 시에 속하는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amp;lt;서으로 가는 달처럼...&amp;gt;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인 &amp;lt;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amp;gt;를 냈다. 같은 시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도 맡았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amp;lt;안 잊히는 일들&amp;gt;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amp;lt;노래&amp;gt;를 출간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amp;lt;팔할이 바람&amp;gt;을 냈다.&lt;br /&gt;
&lt;br /&gt;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1600여 개의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는데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시집 &amp;lt;산시&amp;gt;를 냈다. 말년까지 공부와 시쓰기를 활발하게 하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러시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90년대 중반 &amp;lt;세계 민화집&amp;gt;과 동화집 &amp;lt;우리나라 신선선녀 이야기&amp;gt;를 쓰기도 했다. 1993년 시집 &amp;lt;늙은 떠돌이의 시&amp;gt;를, 1997년 마지막 시집 &amp;lt;80소년 떠돌이의 시&amp;gt;를 출간했다.&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서정주와 황순원은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1915년과 2000년으로 똑같은데, 각각 시와 소설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행보에 있어서는 거의 천양지차의 차이를 보여 대조적인 물로 자주 언급된다. 두 작가의 사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이 함께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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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정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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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2:12: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서정주.jpg]]&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lt;br /&gt;
 14세에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했다.&lt;br /&gt;
&lt;br /&gt;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된 뒤 풀려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돼 빈민 운동에 투신, 당시 아현동에서 살고 있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같은 해인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한다.&lt;br /&gt;
&lt;br /&gt;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당시 서정주는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정주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 석전 박한영을 비롯해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유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좌파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키 위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해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현실 참여 문학 대신 순수시를 택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며 전쟁 초기 한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탓에 조현증이 발병해 요양하여 그 영향 탓인지 시 세계가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33년 &amp;lt;그 어머니의 부탁&amp;gt;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amp;lt;벽&amp;gt;이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이 등단 과정이 좀 특이한데, 서정주의 회고에 따르면 &amp;lt;벽&amp;gt; 역시 여느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36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amp;lt;시인부락&amp;gt;을 창간했고,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amp;lt;자화상&amp;gt;, &amp;lt;화사&amp;gt;, &amp;lt;문둥이&amp;gt;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amp;lt;화사집&amp;gt;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lt;br /&gt;
1948년 &amp;lt;화사집&amp;gt;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amp;lt;견우의 노래&amp;gt;, &amp;lt;귀촉도&amp;gt;, &amp;lt;푸르른 날&amp;gt; 등이 수록된 두 번째 시집 &amp;lt;귀촉도&amp;gt;를 출간했고, 이어 1956년 &amp;lt;무등을 보며&amp;gt;, &amp;lt;국화 옆에서&amp;gt;, &amp;lt;추천사&amp;gt; 등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amp;lt;서정주시선&amp;gt;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다시 크게 주목받았다.&lt;br /&gt;
&lt;br /&gt;
1961년에는 &amp;lt;꽃밭의 독백&amp;gt;, &amp;lt;고조&amp;gt;, &amp;lt;무제&amp;gt; 등이 수록된 네 번째 시집 &amp;lt;신라초&amp;gt;를, 1968년에는 &amp;lt;동천&amp;gt;, &amp;lt;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amp;gt;, &amp;lt;선운사 동구&amp;gt; 등이 수록된 다섯 번째 시집 &amp;lt;동천&amp;gt;을 출간하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된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전까지 단명한 시인이 많았던 한국 시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은, 박재삼 등 여러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인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등 시인 양성에 노력을 쏟기도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amp;lt;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amp;gt;와 &amp;lt;천지유정&amp;gt;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amp;lt;한국의 현대시&amp;gt;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 문학계 시각으로 보면 그의 순수시는 '우파적인 경향을 띤 문학'이라고 비판받는다.&lt;br /&gt;
&lt;br /&gt;
1975년에는 &amp;lt;신부&amp;gt;, &amp;lt;상가수의 소리&amp;gt;, &amp;lt;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amp;gt;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amp;lt;질마재 신화&amp;gt;를, 1976년에는 &amp;lt;시론&amp;gt;, &amp;lt;낮잠&amp;gt;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amp;lt;떠돌이의 시&amp;gt;를 출간했다. 이후의 시들은 서정주의 후기 시에 속하는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amp;lt;서으로 가는 달처럼...&amp;gt;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인 &amp;lt;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amp;gt;를 냈다. 같은 시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도 맡았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amp;lt;안 잊히는 일들&amp;gt;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amp;lt;노래&amp;gt;를 출간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amp;lt;팔할이 바람&amp;gt;을 냈다.&lt;br /&gt;
&lt;br /&gt;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1600여 개의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는데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시집 &amp;lt;산시&amp;gt;를 냈다. 말년까지 공부와 시쓰기를 활발하게 하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러시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90년대 중반 &amp;lt;세계 민화집&amp;gt;과 동화집 &amp;lt;우리나라 신선선녀 이야기&amp;gt;를 쓰기도 했다. 1993년 시집 &amp;lt;늙은 떠돌이의 시&amp;gt;를, 1997년 마지막 시집 &amp;lt;80소년 떠돌이의 시&amp;gt;를 출간했다.&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서정주와 황순원은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1915년과 2000년으로 똑같은데, 각각 시와 소설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행보에 있어서는 거의 천양지차의 차이를 보여 대조적인 인물로 자주 언급된다. 두 작가의 사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이 함께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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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새 문서:  ==생애==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생애==&lt;br /&gt;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lt;br /&gt;
 14세에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했다.&lt;br /&gt;
&lt;br /&gt;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된 뒤 풀려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돼 빈민 운동에 투신, 당시 아현동에서 살고 있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같은 해인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한다.&lt;br /&gt;
&lt;br /&gt;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당시 서정주는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정주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 석전 박한영을 비롯해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유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좌파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키 위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해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현실 참여 문학 대신 순수시를 택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며 전쟁 초기 한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탓에 조현증이 발병해 요양하여 그 영향 탓인지 시 세계가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33년 &amp;lt;그 어머니의 부탁&amp;gt;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amp;lt;벽&amp;gt;이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이 등단 과정이 좀 특이한데, 서정주의 회고에 따르면 &amp;lt;벽&amp;gt; 역시 여느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36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amp;lt;시인부락&amp;gt;을 창간했고,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amp;lt;자화상&amp;gt;, &amp;lt;화사&amp;gt;, &amp;lt;문둥이&amp;gt;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amp;lt;화사집&amp;gt;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lt;br /&gt;
1948년 &amp;lt;화사집&amp;gt;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amp;lt;견우의 노래&amp;gt;, &amp;lt;귀촉도&amp;gt;, &amp;lt;푸르른 날&amp;gt; 등이 수록된 두 번째 시집 &amp;lt;귀촉도&amp;gt;를 출간했고, 이어 1956년 &amp;lt;무등을 보며&amp;gt;, &amp;lt;국화 옆에서&amp;gt;, &amp;lt;추천사&amp;gt; 등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amp;lt;서정주시선&amp;gt;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다시 크게 주목받았다.&lt;br /&gt;
&lt;br /&gt;
1961년에는 &amp;lt;꽃밭의 독백&amp;gt;, &amp;lt;고조&amp;gt;, &amp;lt;무제&amp;gt; 등이 수록된 네 번째 시집 &amp;lt;신라초&amp;gt;를, 1968년에는 &amp;lt;동천&amp;gt;, &amp;lt;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amp;gt;, &amp;lt;선운사 동구&amp;gt; 등이 수록된 다섯 번째 시집 &amp;lt;동천&amp;gt;을 출간하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된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전까지 단명한 시인이 많았던 한국 시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은, 박재삼 등 여러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인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등 시인 양성에 노력을 쏟기도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amp;lt;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amp;gt;와 &amp;lt;천지유정&amp;gt;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amp;lt;한국의 현대시&amp;gt;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 문학계 시각으로 보면 그의 순수시는 '우파적인 경향을 띤 문학'이라고 비판받는다.&lt;br /&gt;
&lt;br /&gt;
1975년에는 &amp;lt;신부&amp;gt;, &amp;lt;상가수의 소리&amp;gt;, &amp;lt;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amp;gt;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amp;lt;질마재 신화&amp;gt;를, 1976년에는 &amp;lt;시론&amp;gt;, &amp;lt;낮잠&amp;gt;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amp;lt;떠돌이의 시&amp;gt;를 출간했다. 이후의 시들은 서정주의 후기 시에 속하는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amp;lt;서으로 가는 달처럼...&amp;gt;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인 &amp;lt;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amp;gt;를 냈다. 같은 시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도 맡았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amp;lt;안 잊히는 일들&amp;gt;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amp;lt;노래&amp;gt;를 출간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amp;lt;팔할이 바람&amp;gt;을 냈다.&lt;br /&gt;
&lt;br /&gt;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1600여 개의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는데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시집 &amp;lt;산시&amp;gt;를 냈다. 말년까지 공부와 시쓰기를 활발하게 하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러시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90년대 중반 &amp;lt;세계 민화집&amp;gt;과 동화집 &amp;lt;우리나라 신선선녀 이야기&amp;gt;를 쓰기도 했다. 1993년 시집 &amp;lt;늙은 떠돌이의 시&amp;gt;를, 1997년 마지막 시집 &amp;lt;80소년 떠돌이의 시&amp;gt;를 출간했다.&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서정주와 황순원은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1915년과 2000년으로 똑같은데, 각각 시와 소설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행보에 있어서는 거의 천양지차의 차이를 보여 대조적인 인물로 자주 언급된다. 두 작가의 사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이 함께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09</id>
		<title>HwangsunwonAndPeop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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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1:40: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 | title=HwangsunwonAndPeople.lst}}&lt;br /&gt;
{{버튼클릭|[[HwangsunwonAndPeople.lst|lst 페이지로 가기]]}}&lt;br /&gt;
&lt;br /&gt;
=='''Data'''==&lt;br /&gt;
==='''Node''' Data===&lt;br /&gt;
===='''Person''' &amp;lt;small&amp;gt;인물&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물데이터 분류는 혈연을 제외한 동경학생예술좌부터  전국소설가협회까지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이러한 황순원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혈연'''=====&lt;br /&gt;
*양정길&lt;br /&gt;
*황남규&lt;br /&gt;
*황동규&lt;br /&gt;
*황선혜&lt;br /&gt;
*황시내&lt;br /&gt;
*황정규&lt;br /&gt;
*황찬영&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lt;br /&gt;
[[파일:동경학생.jpe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lt;br /&gt;
&lt;br /&gt;
&lt;br /&gt;
*[[김동원]]&lt;br /&gt;
*김영화&lt;br /&gt;
*김용하&lt;br /&gt;
*마완영&lt;br /&gt;
*[[박동근]]&lt;br /&gt;
*유종렬&lt;br /&gt;
*이진순&lt;br /&gt;
*이해랑&lt;br /&gt;
*임호권&lt;br /&gt;
*[[주영섭]]&lt;br /&gt;
*허남실&lt;br /&gt;
*한적선&lt;br /&gt;
&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5%AD%EB%AF%BC%EB%B3%B4%EB%8F%84%EC%97%B0%EB%A7%B9&amp;amp;ridx=0&amp;amp;tot=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amp;lt;ref&amp;gt;「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24p 인용: “1949년 11월 한 달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설정하고 11월 30일로 마감한 결과, 전향자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황순원(소설가),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으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기림]]&lt;br /&gt;
*김용환&lt;br /&gt;
*백철&lt;br /&gt;
*신막&lt;br /&gt;
*[[양주동]]&lt;br /&gt;
*정인택&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D%95%9C%EB%AF%BC%EA%B5%AD%EC%98%88%EC%88%A0%EC%9B%90&amp;amp;ridx=0&amp;amp;tot=3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amp;lt;ref&amp;gt;[http://www.naa.go.kr/site/main/content/greetings 대한민국예술원 사이트 소갯말]&amp;lt;/ref&amp;gt;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박종화는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는데, 한국문학과협회는 우익 성향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9C%EA%B5%AD%EB%AC%B8%ED%95%99%EA%B0%80%ED%98%91%ED%9A%8C&amp;amp;ridx=0&amp;amp;tot=27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추가로 박현수 문학연구원의 논문 「한국 전후 서정시의 성격과 층위 연구」 189p에도 한국문학가협회가 당시 좌파적 성향의 문인모임에 대항하여 출범했음을 언급한다. 위 각주에 링크된 중앙SUNDAY의 기사내용처럼 기본적으로 모임이나 단체 같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황순원은 월남으로 인해 자신의 좌파적 정체성을 부정해야 할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예술원 가입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박종화&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황순원은 1961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공동수상자의 목록이다.&lt;br /&gt;
&lt;br /&gt;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lt;br /&gt;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lt;br /&gt;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lt;br /&gt;
&lt;br /&gt;
======'''예술원보'''======&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다.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는데, 황순원이 원고를 투고한 예술원보의 완성에 협력했던 이들의 목록을 예술원보 호수별로 아래에 나열해놓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이들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아니며 보통 당호 예술원보에 원고를 투고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5호(1960)'''======&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원복: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피아노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현승&lt;br /&gt;
*김화진&lt;br /&gt;
*나운영&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두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9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염상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병기&lt;br /&gt;
*이상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숭녕&lt;br /&gt;
*이해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혜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이후 1975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만영&lt;br /&gt;
*장우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이후 1970년에 입회했다.&lt;br /&gt;
*전영택&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최현배&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9호(1965)'''======&lt;br /&gt;
*곽종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도상봉: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광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주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1호(1967)'''======&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세형: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인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병규&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4호(1970)'''======&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배길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예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경희대 제자들'''======&lt;br /&gt;
*고원정&lt;br /&gt;
*김종회&lt;br /&gt;
*류시화&lt;br /&gt;
*이문재&lt;br /&gt;
*이성부&lt;br /&gt;
*전상국&lt;br /&gt;
*정호승&lt;br /&gt;
*조세희&lt;br /&gt;
*한수산&lt;br /&gt;
*김용성&lt;br /&gt;
*조해일&lt;br /&gt;
*이유범&lt;br /&gt;
*박덕규&lt;br /&gt;
*김형경&lt;br /&gt;
*이혜경&lt;br /&gt;
*서하진&lt;br /&gt;
&lt;br /&gt;
======'''동료 문인들'''======&lt;br /&gt;
*[[안영]]&lt;br /&gt;
*[[김광섭]]&lt;br /&gt;
*[[김진수]]&lt;br /&gt;
*[[조병화]]&lt;br /&gt;
*[[주요섭]]&lt;br /&gt;
*[[원응서]]&lt;br /&gt;
관련문헌-[[마지막 잔]]&lt;br /&gt;
&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김동리&lt;br /&gt;
*김정한&lt;br /&gt;
*김팔봉&lt;br /&gt;
*박영준&lt;br /&gt;
*박종화&lt;br /&gt;
*박화성&lt;br /&gt;
*유주현&lt;br /&gt;
*이범선&lt;br /&gt;
*정을병&lt;br /&gt;
&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강용준&lt;br /&gt;
*곽학송&lt;br /&gt;
*김송&lt;br /&gt;
*박경수&lt;br /&gt;
*안수길&lt;br /&gt;
*유현종&lt;br /&gt;
*이원수&lt;br /&gt;
*최정희&lt;br /&gt;
&lt;br /&gt;
===='''Group''' &amp;lt;small&amp;gt;단체&amp;lt;/small&amp;gt;====&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lt;br /&gt;
===='''Place''' &amp;lt;small&amp;gt;장소&amp;lt;/small&amp;gt;====&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일본 와세다대학교&lt;br /&gt;
&lt;br /&gt;
===='''Event''' &amp;lt;small&amp;gt;사건&amp;lt;/small&amp;gt;====&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lt;br /&gt;
===='''Text''' &amp;lt;small&amp;gt;문헌&amp;lt;/small&amp;gt;====&lt;br /&gt;
*예술원보&lt;br /&gt;
&lt;br /&gt;
==='''Link''' Data===&lt;br /&gt;
===='''Person'''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Family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가족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Husband'''&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남편으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Wife'''&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내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Broth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형제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So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들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Daught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딸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knows'''&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지인으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Studen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제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Colleague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동료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stays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머무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worksAt'''&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일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Own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소유주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anag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관리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emb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구성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Group'''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reviousInSequence'''&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전신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ar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일부분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lace'''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Located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 위치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ward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게 상으로 주어지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미정리: 추천 관계어====&lt;br /&gt;
*isDescendTo(전락하다)&lt;br /&gt;
*belongTo(속하다)&lt;br /&gt;
*isOpposedTo(반대했다)&lt;br /&gt;
*isWantedTo(원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A%B9%80%EA%B8%B0%EB%A6%BC&amp;diff=12808</id>
		<title>김기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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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1:39: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림.jpg]]&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1908∼미상. 시인·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14년임명보통학교(臨溟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릿쿄중학[立敎中學, 또는 名敎中學이라는 설도 있음]에 편입했다.&lt;br /&gt;
&lt;br /&gt;
1930년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문학예술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 뒤에 신설된 학예부 기자로 옮겼다.&lt;br /&gt;
&lt;br /&gt;
1933년김유정(金裕貞)·이태준(李泰俊) 등과 구인회(九人會) 결성에 참가하고, 1936년에 재차 도일, 센다이(仙台)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영문과에 입학, 1939년에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영국의 문예비평가인 리처즈(Richards, I. A.)론이었다. 귀국 후(1939)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 학예부장을 역임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조선일보』의 강제 폐간으로 한때 실직했으며,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鏡成中學校)의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으며, 이 때의 제자에 시인 김규동(金奎東)이 있다. 1946년 1월 공산화된 북한에서 월남하였는데, 이 때 많은 서적과 가재를 탈취당한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 때 ‘우리 시의 방향’에 대하여 연설하였으나, 정부수립 전후에 전향하였다.&lt;br /&gt;
&lt;br /&gt;
월남 후 중앙대학·연희대학 등에 강사로 출강하다가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고, 그가 설립한 신문화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북의 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어 북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부인과 5남매가 서울에 살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生活)로」(『조선일보』, 1930.9.6.)·「슈르레알리스트」(조선일보, 1930.9.30.)·「꿈꾸는 진주(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1.23.)·「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학등』 창간호, 1931.10.)·「고대 고대(苦待)」(『신동아』 창간호, 1931.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주지주의(主知主義)에 관한 단상(斷想)인 「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1.27.)·「시의 기술·인식·현실 등의 제문제」(『조선일보』, 1931.2.11∼14.) 등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주로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lt;br /&gt;
&lt;br /&gt;
첫 시집이며 장시인 『기상도(氣象圖)』(창문사, 1936 ; 재판 산호장, 1948)는 엘리어트(Eliot, T. S.)의 장시 「황무지(荒蕪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통일적인 주제의식의 유무에 대한 시비, 민족 현실에 대한 역사의식의 결여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상과 감각의 통합을 시도한 주지주의 시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제2시집 『태양의 풍속』(학예사, 1939)은 몇 편의 이미지즘(imagism) 시를 제외하고는 주지성과 지적 유희성이 두드러진 것이고, 광복 후의 『바다와 나비』(신문화연구소, 1946), 좌경적인 『새노래』(아문각, 1947) 등이 있다. 『바다와 나비』는 삶의 한계의식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투명한 이미지로 처리한 점이 돋보인다.&lt;br /&gt;
&lt;br /&gt;
『새노래』는 모더니즘(modernism)을 극복하여 민족공동체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나 예술로서의 성숙성이 모자란다. 중편소설 「철도연변」(『조광』, 1935.12∼1936.2.) 등 3편의 소설과 희곡 등이 있으나 주목을 받을 만한 대상은 아닌 듯하다. 평론 및 저서로서 『시론(詩論)』(백양당, 1947)·『시의 이해』(을유문화사, 1950)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전자는 1930년대에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전환시킨 중요 시론집이며, 후자는 리처즈의 심리학적 이론에 의거한 계몽적인 저서이다. 이밖에 『문학개론(文學槪論)』(신문화연구소, 1946)·『문장론신강(文章論新講)』(민중서관, 1949), 수필집 『바다와 육체』(평범사, 1948) 등이 있다.&lt;br /&gt;
[네이버 지식백과] 김기림 [金起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국가보도연맹에 함께 가입된 바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A%B9%80%EA%B8%B0%EB%A6%BC&amp;diff=12807</id>
		<title>김기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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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1:38: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새 문서: 파일:김기림.jpg  ==인물==  1908∼미상. 시인·문학평론가.  ==생애==  1914년임명보통학교(臨溟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서울 보성고등보통...&lt;/p&gt;
&lt;hr /&gt;
&lt;div&gt;[[파일:김기림.jpg]]&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1908∼미상. 시인·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14년임명보통학교(臨溟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릿쿄중학[立敎中學, 또는 名敎中學이라는 설도 있음]에 편입했다.&lt;br /&gt;
&lt;br /&gt;
1930년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문학예술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 뒤에 신설된 학예부 기자로 옮겼다.&lt;br /&gt;
&lt;br /&gt;
1933년김유정(金裕貞)·이태준(李泰俊) 등과 구인회(九人會) 결성에 참가하고, 1936년에 재차 도일, 센다이(仙台)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영문과에 입학, 1939년에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영국의 문예비평가인 리처즈(Richards, I. A.)론이었다. 귀국 후(1939)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 학예부장을 역임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조선일보』의 강제 폐간으로 한때 실직했으며,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鏡成中學校)의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으며, 이 때의 제자에 시인 김규동(金奎東)이 있다. 1946년 1월 공산화된 북한에서 월남하였는데, 이 때 많은 서적과 가재를 탈취당한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 때 ‘우리 시의 방향’에 대하여 연설하였으나, 정부수립 전후에 전향하였다.&lt;br /&gt;
&lt;br /&gt;
월남 후 중앙대학·연희대학 등에 강사로 출강하다가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고, 그가 설립한 신문화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북의 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어 북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부인과 5남매가 서울에 살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生活)로」(『조선일보』, 1930.9.6.)·「슈르레알리스트」(조선일보, 1930.9.30.)·「꿈꾸는 진주(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1.23.)·「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학등』 창간호, 1931.10.)·「고대 고대(苦待)」(『신동아』 창간호, 1931.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주지주의(主知主義)에 관한 단상(斷想)인 「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1.27.)·「시의 기술·인식·현실 등의 제문제」(『조선일보』, 1931.2.11∼14.) 등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주로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lt;br /&gt;
&lt;br /&gt;
첫 시집이며 장시인 『기상도(氣象圖)』(창문사, 1936 ; 재판 산호장, 1948)는 엘리어트(Eliot, T. S.)의 장시 「황무지(荒蕪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통일적인 주제의식의 유무에 대한 시비, 민족 현실에 대한 역사의식의 결여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상과 감각의 통합을 시도한 주지주의 시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제2시집 『태양의 풍속』(학예사, 1939)은 몇 편의 이미지즘(imagism) 시를 제외하고는 주지성과 지적 유희성이 두드러진 것이고, 광복 후의 『바다와 나비』(신문화연구소, 1946), 좌경적인 『새노래』(아문각, 1947) 등이 있다. 『바다와 나비』는 삶의 한계의식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투명한 이미지로 처리한 점이 돋보인다.&lt;br /&gt;
&lt;br /&gt;
『새노래』는 모더니즘(modernism)을 극복하여 민족공동체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나 예술로서의 성숙성이 모자란다. 중편소설 「철도연변」(『조광』, 1935.12∼1936.2.) 등 3편의 소설과 희곡 등이 있으나 주목을 받을 만한 대상은 아닌 듯하다. 평론 및 저서로서 『시론(詩論)』(백양당, 1947)·『시의 이해』(을유문화사, 1950)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전자는 1930년대에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전환시킨 중요 시론집이며, 후자는 리처즈의 심리학적 이론에 의거한 계몽적인 저서이다. 이밖에 『문학개론(文學槪論)』(신문화연구소, 1946)·『문장론신강(文章論新講)』(민중서관, 1949), 수필집 『바다와 육체』(평범사, 1948) 등이 있다.&lt;br /&gt;
[네이버 지식백과] 김기림 [金起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국가보도연맹에 함께 가입된 바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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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805</id>
		<title>HwangsunwonAndPeop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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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1:30: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 | title=HwangsunwonAndPeople.lst}}&lt;br /&gt;
{{버튼클릭|[[HwangsunwonAndPeople.lst|lst 페이지로 가기]]}}&lt;br /&gt;
&lt;br /&gt;
=='''Data'''==&lt;br /&gt;
==='''Node''' Data===&lt;br /&gt;
===='''Person''' &amp;lt;small&amp;gt;인물&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물데이터 분류는 혈연을 제외한 동경학생예술좌부터  전국소설가협회까지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이러한 황순원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혈연'''=====&lt;br /&gt;
*양정길&lt;br /&gt;
*황남규&lt;br /&gt;
*황동규&lt;br /&gt;
*황선혜&lt;br /&gt;
*황시내&lt;br /&gt;
*황정규&lt;br /&gt;
*황찬영&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lt;br /&gt;
[[파일:동경학생.jpe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lt;br /&gt;
&lt;br /&gt;
&lt;br /&gt;
*[[김동원]]&lt;br /&gt;
*김영화&lt;br /&gt;
*김용하&lt;br /&gt;
*마완영&lt;br /&gt;
*[[박동근]]&lt;br /&gt;
*유종렬&lt;br /&gt;
*이진순&lt;br /&gt;
*이해랑&lt;br /&gt;
*임호권&lt;br /&gt;
*[[주영섭]]&lt;br /&gt;
*허남실&lt;br /&gt;
*한적선&lt;br /&gt;
&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5%AD%EB%AF%BC%EB%B3%B4%EB%8F%84%EC%97%B0%EB%A7%B9&amp;amp;ridx=0&amp;amp;tot=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amp;lt;ref&amp;gt;「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24p 인용: “1949년 11월 한 달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설정하고 11월 30일로 마감한 결과, 전향자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황순원(소설가),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으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기림]]&lt;br /&gt;
*김용환&lt;br /&gt;
*백철&lt;br /&gt;
*신막&lt;br /&gt;
*[[양주동]]&lt;br /&gt;
*정인택&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D%95%9C%EB%AF%BC%EA%B5%AD%EC%98%88%EC%88%A0%EC%9B%90&amp;amp;ridx=0&amp;amp;tot=3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amp;lt;ref&amp;gt;[http://www.naa.go.kr/site/main/content/greetings 대한민국예술원 사이트 소갯말]&amp;lt;/ref&amp;gt;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박종화는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는데, 한국문학과협회는 우익 성향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9C%EA%B5%AD%EB%AC%B8%ED%95%99%EA%B0%80%ED%98%91%ED%9A%8C&amp;amp;ridx=0&amp;amp;tot=27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추가로 박현수 문학연구원의 논문 「한국 전후 서정시의 성격과 층위 연구」 189p에도 한국문학가협회가 당시 좌파적 성향의 문인모임에 대항하여 출범했음을 언급한다. 위 각주에 링크된 중앙SUNDAY의 기사내용처럼 기본적으로 모임이나 단체 같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황순원은 월남으로 인해 자신의 좌파적 정체성을 부정해야 할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예술원 가입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박종화&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황순원은 1961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공동수상자의 목록이다.&lt;br /&gt;
&lt;br /&gt;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lt;br /&gt;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lt;br /&gt;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lt;br /&gt;
&lt;br /&gt;
======'''예술원보'''======&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다.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는데, 황순원이 원고를 투고한 예술원보의 완성에 협력했던 이들의 목록을 예술원보 호수별로 아래에 나열해놓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이들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아니며 보통 당호 예술원보에 원고를 투고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5호(1960)'''======&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원복: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피아노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현승&lt;br /&gt;
*김화진&lt;br /&gt;
*나운영&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두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9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염상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병기&lt;br /&gt;
*이상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숭녕&lt;br /&gt;
*이해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혜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이후 1975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만영&lt;br /&gt;
*장우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이후 1970년에 입회했다.&lt;br /&gt;
*전영택&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최현배&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9호(1965)'''======&lt;br /&gt;
*곽종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도상봉: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광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주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1호(1967)'''======&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세형: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인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병규&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4호(1970)'''======&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배길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예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경희대 제자들'''======&lt;br /&gt;
*고원정&lt;br /&gt;
*김종회&lt;br /&gt;
*류시화&lt;br /&gt;
*이문재&lt;br /&gt;
*이성부&lt;br /&gt;
*전상국&lt;br /&gt;
*정호승&lt;br /&gt;
*조세희&lt;br /&gt;
*한수산&lt;br /&gt;
*김용성&lt;br /&gt;
*조해일&lt;br /&gt;
*이유범&lt;br /&gt;
*박덕규&lt;br /&gt;
*김형경&lt;br /&gt;
*이혜경&lt;br /&gt;
*서하진&lt;br /&gt;
&lt;br /&gt;
======'''동료 문인들'''======&lt;br /&gt;
*[[안영]]&lt;br /&gt;
*[[김광섭]]&lt;br /&gt;
*[[김진수]]&lt;br /&gt;
*[[조병화]]&lt;br /&gt;
*[[주요섭]]&lt;br /&gt;
*[[원응서]]&lt;br /&gt;
관련문헌-[[마지막 잔]]&lt;br /&gt;
&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김동리&lt;br /&gt;
*김정한&lt;br /&gt;
*김팔봉&lt;br /&gt;
*박영준&lt;br /&gt;
*박종화&lt;br /&gt;
*박화성&lt;br /&gt;
*유주현&lt;br /&gt;
*이범선&lt;br /&gt;
*정을병&lt;br /&gt;
&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강용준&lt;br /&gt;
*곽학송&lt;br /&gt;
*김송&lt;br /&gt;
*박경수&lt;br /&gt;
*안수길&lt;br /&gt;
*유현종&lt;br /&gt;
*이원수&lt;br /&gt;
*최정희&lt;br /&gt;
&lt;br /&gt;
===='''Group''' &amp;lt;small&amp;gt;단체&amp;lt;/small&amp;gt;====&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lt;br /&gt;
===='''Place''' &amp;lt;small&amp;gt;장소&amp;lt;/small&amp;gt;====&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일본 와세다대학교&lt;br /&gt;
&lt;br /&gt;
===='''Event''' &amp;lt;small&amp;gt;사건&amp;lt;/small&amp;gt;====&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lt;br /&gt;
===='''Text''' &amp;lt;small&amp;gt;문헌&amp;lt;/small&amp;gt;====&lt;br /&gt;
*예술원보&lt;br /&gt;
&lt;br /&gt;
==='''Link''' Data===&lt;br /&gt;
===='''Person'''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Family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가족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Husband'''&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남편으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Wife'''&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내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Broth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형제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So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들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Daught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딸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knows'''&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지인으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Studen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제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Colleague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동료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stays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머무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worksAt'''&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일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Own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소유주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anag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관리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emb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구성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Group'''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reviousInSequence'''&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전신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ar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일부분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lace'''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Located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 위치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ward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게 상으로 주어지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미정리: 추천 관계어====&lt;br /&gt;
*isDescendTo(전락하다)&lt;br /&gt;
*belongTo(속하다)&lt;br /&gt;
*isOpposedTo(반대했다)&lt;br /&gt;
*isWantedTo(원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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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주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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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1:29: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양주동.jpg]]&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황해도 장연에서 성장하였다.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lt;br /&gt;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국가보도연맹에 함께 가입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1935년 10월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제15호에 황순원의 시와 양주동 박사의 글이 함께 게재된 바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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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주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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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황순원.jpg]]&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황해도 장연에서 성장하였다.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lt;br /&gt;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국가보도연맹에 함께 가입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1935년 10월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제15호에 황순원의 시와 양주동 박사의 글이 함께 게재된 바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C%96%91%EC%A3%BC%EB%8F%99.jpg&amp;diff=12802</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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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C%96%91%EC%A3%BC%EB%8F%99&amp;diff=12801</id>
		<title>양주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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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황해도 장연에서 성장하였다.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lt;br /&gt;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국가보도연맹에 함께 가입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1935년 10월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제15호에 황순원의 시와 양주동 박사의 글이 함께 게재된 바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C%96%91%EC%A3%BC%EB%8F%99&amp;diff=12800</id>
		<title>양주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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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1:25: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파일:]]&lt;br /&gt;
&lt;br /&gt;
==인물==&lt;br /&gt;
&lt;br /&gt;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황해도 장연에서 성장하였다.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lt;br /&gt;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업적===&lt;br /&gt;
&lt;br /&gt;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순원과의 관계===&lt;br /&gt;
&lt;br /&gt;
국가보도연맹에 함께 가입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1935년 10월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제15호에 황순원의 시와 양주동 박사의 글이 함께 게재된 바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C%96%91%EC%A3%BC%EB%8F%99&amp;diff=12799</id>
		<title>양주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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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6-13T00:48: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새 문서: 양주동(梁柱東, 1903년 8월 16일 (1903년 음력 6월 24일) - 1977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학·영문학자, 번역문학가, 수필...&lt;/p&gt;
&lt;hr /&gt;
&lt;div&gt;양주동(梁柱東, 1903년 8월 16일 (1903년 음력 6월 24일) - 1977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학·영문학자, 번역문학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남해(南海)이며 호는 무애(无涯)로,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798</id>
		<title>HwangsunwonAndPeople</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HwangsunwonAndPeople&amp;diff=12798"/>
				<updated>2020-06-13T00:47: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 | title=HwangsunwonAndPeople.lst}}&lt;br /&gt;
{{버튼클릭|[[HwangsunwonAndPeople.lst|lst 페이지로 가기]]}}&lt;br /&gt;
&lt;br /&gt;
=='''Data'''==&lt;br /&gt;
==='''Node''' Data===&lt;br /&gt;
===='''Person''' &amp;lt;small&amp;gt;인물&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amp;lt;ref&amp;gt;[https://news.joins.com/article/3646126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amp;lt;/ref&amp;gt;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8%9C%EC%9B%90&amp;amp;ridx=0&amp;amp;tot=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물데이터 분류는 혈연을 제외한 동경학생예술좌부터  전국소설가협회까지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이러한 황순원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혈연'''=====&lt;br /&gt;
*양정길&lt;br /&gt;
*황남규&lt;br /&gt;
*황동규&lt;br /&gt;
*황선혜&lt;br /&gt;
*황시내&lt;br /&gt;
*황정규&lt;br /&gt;
*황찬영&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lt;br /&gt;
[[파일:동경학생.jpeg]]&lt;br /&gt;
&lt;br /&gt;
&lt;br /&gt;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lt;br /&gt;
&lt;br /&gt;
&lt;br /&gt;
*[[김동원]]&lt;br /&gt;
*김영화&lt;br /&gt;
*김용하&lt;br /&gt;
*마완영&lt;br /&gt;
*[[박동근]]&lt;br /&gt;
*유종렬&lt;br /&gt;
*이진순&lt;br /&gt;
*이해랑&lt;br /&gt;
*임호권&lt;br /&gt;
*[[주영섭]]&lt;br /&gt;
*허남실&lt;br /&gt;
*한적선&lt;br /&gt;
&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5%AD%EB%AF%BC%EB%B3%B4%EB%8F%84%EC%97%B0%EB%A7%B9&amp;amp;ridx=0&amp;amp;tot=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amp;lt;ref&amp;gt;「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24p 인용: “1949년 11월 한 달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설정하고 11월 30일로 마감한 결과, 전향자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황순원(소설가),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으며,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기림&lt;br /&gt;
*김용환&lt;br /&gt;
*백철&lt;br /&gt;
*신막&lt;br /&gt;
*[[양주동]]&lt;br /&gt;
*정인택&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C%80%ED%95%9C%EB%AF%BC%EA%B5%AD%EC%98%88%EC%88%A0%EC%9B%90&amp;amp;ridx=0&amp;amp;tot=3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amp;lt;ref&amp;gt;[http://www.naa.go.kr/site/main/content/greetings 대한민국예술원 사이트 소갯말]&amp;lt;/ref&amp;gt;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박종화는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는데, 한국문학과협회는 우익 성향이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9C%EA%B5%AD%EB%AC%B8%ED%95%99%EA%B0%80%ED%98%91%ED%9A%8C&amp;amp;ridx=0&amp;amp;tot=27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추가로 박현수 문학연구원의 논문 「한국 전후 서정시의 성격과 층위 연구」 189p에도 한국문학가협회가 당시 좌파적 성향의 문인모임에 대항하여 출범했음을 언급한다. 위 각주에 링크된 중앙SUNDAY의 기사내용처럼 기본적으로 모임이나 단체 같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황순원은 월남으로 인해 자신의 좌파적 정체성을 부정해야 할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예술원 가입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박종화&lt;br /&gt;
&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황순원은 1961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공동수상자의 목록이다.&lt;br /&gt;
&lt;br /&gt;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lt;br /&gt;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lt;br /&gt;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lt;br /&gt;
&lt;br /&gt;
======'''예술원보'''======&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다.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는데, 황순원이 원고를 투고한 예술원보의 완성에 협력했던 이들의 목록을 예술원보 호수별로 아래에 나열해놓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 설명이 추가되지 않은 이들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아니며 보통 당호 예술원보에 원고를 투고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5호(1960)'''======&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원복: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피아노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현승&lt;br /&gt;
*김화진&lt;br /&gt;
*나운영&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두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9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이후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염상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병기&lt;br /&gt;
*이상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숭녕&lt;br /&gt;
*이해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혜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이후 1975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만영&lt;br /&gt;
*장우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동양화 분야로 이후 1970년에 입회했다.&lt;br /&gt;
*전영택&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최현배&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9호(1965)'''======&lt;br /&gt;
*곽종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도상봉: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영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광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주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장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1호(1967)'''======&lt;br /&gt;
*김광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성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세형: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김인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양화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목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경성&lt;br /&gt;
*이병규&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흥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작곡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예술원보 제14호(1970)'''======&lt;br /&gt;
*김동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모윤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종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박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연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배길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미술 분과, 서예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백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서정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음악 분과, 국악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신석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0년에 입회했다.&lt;br /&gt;
*유치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연극(극작)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이은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시 분야로 1966년에 입회했다.&lt;br /&gt;
*조연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평론 분야로 1954년에 입회했다.&lt;br /&gt;
*황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로 1957년에 입회했다.&lt;br /&gt;
&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황순원은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경희대 제자들'''======&lt;br /&gt;
*고원정&lt;br /&gt;
*김종회&lt;br /&gt;
*류시화&lt;br /&gt;
*이문재&lt;br /&gt;
*이성부&lt;br /&gt;
*전상국&lt;br /&gt;
*정호승&lt;br /&gt;
*조세희&lt;br /&gt;
*한수산&lt;br /&gt;
*김용성&lt;br /&gt;
*조해일&lt;br /&gt;
*이유범&lt;br /&gt;
*박덕규&lt;br /&gt;
*김형경&lt;br /&gt;
*이혜경&lt;br /&gt;
*서하진&lt;br /&gt;
&lt;br /&gt;
======'''동료 문인들'''======&lt;br /&gt;
*[[안영]]&lt;br /&gt;
*[[김광섭]]&lt;br /&gt;
*[[김진수]]&lt;br /&gt;
*[[조병화]]&lt;br /&gt;
*[[주요섭]]&lt;br /&gt;
*[[원응서]]&lt;br /&gt;
관련문헌-[[마지막 잔]]&lt;br /&gt;
&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김동리&lt;br /&gt;
*김정한&lt;br /&gt;
*김팔봉&lt;br /&gt;
*박영준&lt;br /&gt;
*박종화&lt;br /&gt;
*박화성&lt;br /&gt;
*유주현&lt;br /&gt;
*이범선&lt;br /&gt;
*정을병&lt;br /&gt;
&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강용준&lt;br /&gt;
*곽학송&lt;br /&gt;
*김송&lt;br /&gt;
*박경수&lt;br /&gt;
*안수길&lt;br /&gt;
*유현종&lt;br /&gt;
*이원수&lt;br /&gt;
*최정희&lt;br /&gt;
&lt;br /&gt;
===='''Group''' &amp;lt;small&amp;gt;단체&amp;lt;/small&amp;gt;====&lt;br /&gt;
*국민보도연맹&lt;br /&gt;
*대한민국예술원&lt;br /&gt;
*동경학생예술좌&lt;br /&gt;
*전국소설가협회&lt;br /&gt;
*한국소설가협회&lt;br /&gt;
&lt;br /&gt;
===='''Place''' &amp;lt;small&amp;gt;장소&amp;lt;/small&amp;gt;====&lt;br /&gt;
*경희대학교&lt;br /&gt;
*일본 와세다대학교&lt;br /&gt;
&lt;br /&gt;
===='''Event''' &amp;lt;small&amp;gt;사건&amp;lt;/small&amp;gt;====&lt;br /&gt;
*대한민국예술원상&lt;br /&gt;
&lt;br /&gt;
===='''Text''' &amp;lt;small&amp;gt;문헌&amp;lt;/small&amp;gt;====&lt;br /&gt;
*예술원보&lt;br /&gt;
&lt;br /&gt;
==='''Link''' Data===&lt;br /&gt;
===='''Person'''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Family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가족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Husband'''&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남편으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Wife'''&amp;lt;/span&amp;gt;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내로 삼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Broth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형제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So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아들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hasDaughter'''&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딸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knows'''&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를 지인으로 두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Studen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제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Colleague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동료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stays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머무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worksAt'''&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서 일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Own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소유주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anag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관리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Member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구성원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Group''' → '''Group'''====&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reviousInSequence'''&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전신이다)&amp;lt;/small&amp;gt;&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PartOf'''&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의 일부분이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lace''' → '''Place'''====&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LocatedIn'''&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 위치하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Thing''' → '''Person'''====&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ward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에게 상으로 주어지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Person''' → '''Thing'''====&lt;br /&gt;
*A &amp;lt;span style=&amp;quot;color: #000099&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 B &amp;lt;small&amp;gt;(A는 B와 관련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미정리: 추천 관계어====&lt;br /&gt;
*isDescendTo(전락하다)&lt;br /&gt;
*belongTo(속하다)&lt;br /&gt;
*isOpposedTo(반대했다)&lt;br /&gt;
*isWantedTo(원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B%B0%95%EC%A0%95%ED%9D%AC%EC%9D%98_%EC%9B%8C%EC%BB%A4%ED%9E%90_%EC%9C%A0%ED%9D%A5_%ED%8C%8C%ED%8B%B0&amp;diff=10541</id>
		<title>박정희의 워커힐 유흥 파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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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5-13T08:30: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박정희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의 워커힐 유흥 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던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63년 대선 기간 중인데도 불구하고 '기생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이번에 '기생 파티'의 마당을 제공한 방일영의 증언을 들어보자.&lt;br /&gt;
&lt;br /&gt;
''&amp;quot;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amp;quot;''&lt;br /&gt;
&lt;br /&gt;
육영수는 이 기생 파티에 격분해서 박정희가 다시는 방일영의 집에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용주는 그날 박정희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lt;br /&gt;
&lt;br /&gt;
&amp;quot;만당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에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리는 일본 민속무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본인의 주석에 따르면 사관학교(일본 육사) 졸업할 때 은시계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이 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라는 천하에 주도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lt;br /&gt;
&lt;br /&gt;
'기생파티'와 '주도'에 관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은 아주 죽이 잘 맞은 사이였다. 훗날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방일영을 가리켜 &amp;quot;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amp;quot;이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amp;quot;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 집에는 가끔 박정희 자신이 군저 초기에 미행으로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자.&amp;quot;&lt;br /&gt;
&lt;br /&gt;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파트너가 보통 기생이 아니라 여배우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확언하지 못한 건 위에서 말한 술자리가  방우영이 말하는 말하는 술자리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내가 처음 박 대통령은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 등을 데리고 방일영 고문과 함께 술자리에서 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잡을 붙잡고 밴드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와 깡마른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빨이 유난히도 돋보여 한 눈에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출처: 정지환 &amp;lt;&amp;lt;대한민국 다큐멘타리&amp;gt;&amp;gt; ,2008.&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lt;br /&gt;
&lt;br /&gt;
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건설이었다. 69년 3월 22일에 준공하게 되는3.1고가도로는 우선적으로 박정희의 워커힐 내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정목에 따르면,&lt;br /&gt;
&lt;br /&gt;
&amp;quot;박 대통령은 워커힐 건설 중에도 그 건설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자주 내왕했지만 1963년 4월에 개관하고 난 뒤에는 뻔질나게 그곳을 찾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갔고 평일에도 밤에 갔으며 빌라에서 술자리도 가졌고 잠자리도 가졌다. 워커힐의 빌라는 경호하기에도 쉬웠고 일체의 잡음이 절연된 공간이었다. 바깥방에서는 수행원들이 주연을 벌이고 안방에서는 여색을 즐겨도 외부 세계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박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박 대통령의 잦은 워커힐 나들이는 1970년대 중반에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라는 이름의 비밀 휴식처가 생길 때까지 계속되었다.&amp;quot;&lt;br /&gt;
&lt;br /&gt;
67년 여성단체들은 &amp;quot;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건의문&amp;quot;을 통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관료들이 요정을 출입하거나 기생파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건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부터 기생파티를 위해 뻔질나게 워커힐을 찾고 그 바람에 심심하면 육박전(육영수-박정희 부부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무슨 수로 기생파티를 없앨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파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생파티는 산업적 규모로 성장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외화벌이에 기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기생파티 중독증'&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의 관계는 너무나 화기애애해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이동원이 &amp;quot;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이 외교는 더욱 능숙&amp;quot;하다고 받았다.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amp;quot;난 마누라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amp;quot;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lt;br /&gt;
&lt;br /&gt;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벌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존슨의 아내 버드가 존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 옆방에 가 있을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기생파티 중독증'이라고 할까? 박 정권을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그 서비스를 베풀다가 큰 망신을 당했다.  UPI 통신 기자인 메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자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문명자의 증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다음날 홍종철 공보부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amp;quot;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게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고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 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몰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 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나의 조국이라니&amp;quo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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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정희의 워커힐 유흥 파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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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5-13T08:29: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박정희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의 워커힐 유흥 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던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63년 대선 기간 중인데도 불구하고 '기생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이번에 '기생 파티'의 마당을 제공한 방일영의 증언을 들어보자.&lt;br /&gt;
&lt;br /&gt;
''&amp;quot;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amp;quot;''&lt;br /&gt;
&lt;br /&gt;
육영수는 이 기생 파티에 격분해서 박정희가 다시는 방일영의 집에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용주는 그날 박정희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lt;br /&gt;
&lt;br /&gt;
&amp;quot;만당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에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리는 일본 민속무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본인의 주석에 따르면 사관학교(일본 육사) 졸업할 때 은시계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이 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라는 천하에 주도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lt;br /&gt;
&lt;br /&gt;
'기생파티'와 '주도'에 관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은 아주 죽이 잘 맞은 사이였다. 훗날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방일영을 가리켜 &amp;quot;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amp;quot;이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amp;quot;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 집에는 가끔 박정희 자신이 군저 초기에 미행으로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자.&amp;quot;&lt;br /&gt;
&lt;br /&gt;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파트너가 보통 기생이 아니라 여배우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확언하지 못한 건 위에서 말한 술자리가  방우영이 말하는 말하는 술자리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내가 처음 박 대통령은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 등을 데리고 방일영 고문과 함께 술자리에서 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잡을 붙잡고 밴드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와 깡마른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빨이 유난히도 돋보여 한 눈에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출처: 정지환 &amp;lt;&amp;lt;대한민국 다큐멘타리&amp;gt;&amp;gt; ,2008.&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고가도로와 워커힐 기생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lt;br /&gt;
&lt;br /&gt;
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건설이었다. 69년 3월 22일에 준공하게 되는3.1고가도로는 우선적으로 박정희의 워커힐 내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정목에 따르면,&lt;br /&gt;
&lt;br /&gt;
&amp;quot;박 대통령은 워커힐 건설 중에도 그 건설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자주 내왕했지만 1963년 4월에 개관하고 난 뒤에는 뻔질나게 그곳을 찾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갔고 평일에도 밤에 갔으며 빌라에서 술자리도 가졌고 잠자리도 가졌다. 워커힐의 빌라는 경호하기에도 쉬웠고 일체의 잡음이 절연된 공간이었다. 바깥방에서는 수행원들이 주연을 벌이고 안방에서는 여색을 즐겨도 외부 세계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박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박 대통령의 잦은 워커힐 나들이는 1970년대 중반에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라는 이름의 비밀 휴식처가 생길 때까지 계속되었다.&amp;quot;&lt;br /&gt;
&lt;br /&gt;
67년 여성단체들은 &amp;quot;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건의문&amp;quot;을 통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관료들이 요정을 출입하거나 기생파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건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부터 기생파티를 위해 뻔질나게 워커힐을 찾고 그 바람에 심심하면 육박전(육영수-박정희 부부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무슨 수로 기생파티를 없앨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파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생파티는 산업적 규모로 성장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외화벌이에 기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기생파티 중독증'&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의 관계는 너무나 화기애애해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이동원이 &amp;quot;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이 외교는 더욱 능숙&amp;quot;하다고 받았다.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amp;quot;난 마누라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amp;quot;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lt;br /&gt;
&lt;br /&gt;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벌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존슨의 아내 버드가 존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 옆방에 가 있을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기생파티 중독증'이라고 할까? 박 정권을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그 서비스를 베풀다가 큰 망신을 당했다.  UPI 통신 기자인 메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자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문명자의 증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다음날 홍종철 공보부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amp;quot;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게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고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 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몰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 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나의 조국이라니&amp;quo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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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정희의 워커힐 유흥 파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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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5-13T08:29: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박정희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의 워커힐 유흥 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던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63년 대선 기간 중인데도 불구하고 '기생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이번에 '기생 파티'의 마당을 제공한 방일영의 증언을 들어보자.&lt;br /&gt;
&lt;br /&gt;
''&amp;quot;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amp;quot;''&lt;br /&gt;
&lt;br /&gt;
육영수는 이 기생 파티에 격분해서 박정희가 다시는 방일영의 집에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용주는 그날 박정희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lt;br /&gt;
&lt;br /&gt;
&amp;quot;만당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에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리는 일본 민속무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본인의 주석에 따르면 사관학교(일본 육사) 졸업할 때 은시계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이 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라는 천하에 주도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lt;br /&gt;
&lt;br /&gt;
'기생파티'와 '주도'에 관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은 아주 죽이 잘 맞은 사이였다. 훗날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방일영을 가리켜 &amp;quot;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amp;quot;이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amp;quot;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 집에는 가끔 박정희 자신이 군저 초기에 미행으로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자.&amp;quot;&lt;br /&gt;
&lt;br /&gt;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파트너가 보통 기생이 아니라 여배우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확언하지 못한 건 위에서 말한 술자리가  방우영이 말하는 말하는 술자리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내가 처음 박 대통령은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 등을 데리고 방일영 고문과 함께 술자리에서 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잡을 붙잡고 밴드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와 깡마른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빨이 유난히도 돋보여 한 눈에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출처: 정지환 &amp;lt;&amp;lt;대한민국 다큐멘타리&amp;gt;&amp;gt; ,2008.&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고가도로와 워커힐 기생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lt;br /&gt;
&lt;br /&gt;
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건설이었다. 69년 3월 22일에 준공하게 되는3.1고가도로는 우선적으로 박정희의 워커힐 내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정목에 따르면,&lt;br /&gt;
&lt;br /&gt;
&amp;quot;박 대통령은 워커힐 건설 중에도 그 건설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자주 내왕했지만 1963년 4월에 개관하고 난 뒤에는 뻔질나게 그곳을 찾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갔고 평일에도 밤에 갔으며 빌라에서 술자리도 가졌고 잠자리도 가졌다. 워커힐의 빌라는 경호하기에도 쉬웠고 일체의 잡음이 절연된 공간이었다. 바깥방에서는 수행원들이 주연을 벌이고 안방에서는 여색을 즐겨도 외부 세계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박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박 대통령의 잦은 워커힐 나들이는 1970년대 중반에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라는 이름의 비밀 휴식처가 생길 때까지 계속되었다.&amp;quot;&lt;br /&gt;
&lt;br /&gt;
67년 여성단체들은 &amp;quot;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건의문&amp;quot;을 통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관료들이 요정을 출입하거나 기생파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건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부터 기생파티를 위해 뻔질나게 워커힐을 찾고 그 바람에 심심하면 육박전(육영수-박정희 부부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무슨 수로 기생파티를 없앨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파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생파티는 산업적 규모로 성장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외화벌이에 기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기생파티 중독증'&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의 관계는 너무나 화기애애해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이동원이 &amp;quot;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이 외교는 더욱 능숙&amp;quot;하다고 받았다.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amp;quot;난 마누라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amp;quot;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lt;br /&gt;
&lt;br /&gt;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벌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존슨의 아내 버드가 존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 옆방에 가 있을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기생파티 중독증'이라고 할까? 박 정권을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그 서비스를 베풀다가 큰 망신을 당했다.  UPI 통신 기자인 메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자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문명자의 증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다음날 홍종철 공보부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amp;quot;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게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고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 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몰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 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나의 조국이라니&amp;quo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EB%B0%95%EC%A0%95%ED%9D%AC%EC%9D%98_%EC%9B%8C%EC%BB%A4%ED%9E%90_%EC%9C%A0%ED%9D%A5_%ED%8C%8C%ED%8B%B0&amp;diff=10533</id>
		<title>박정희의 워커힐 유흥 파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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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5-13T08:28: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박정희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의 워커힐 유흥 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던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63년 대선 기간 중인데도 불구하고 '기생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이번에 '기생 파티'의 마당을 제공한 방일영의 증언을 들어보자.&lt;br /&gt;
&lt;br /&gt;
''&amp;quot;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amp;quot;''&lt;br /&gt;
&lt;br /&gt;
육영수는 이 기생 파티에 격분해서 박정희가 다시는 방일영의 집에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용주는 그날 박정희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lt;br /&gt;
&lt;br /&gt;
&amp;quot;만당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에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리는 일본 민속무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본인의 주석에 따르면 사관학교(일본 육사) 졸업할 때 은시계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이 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라는 천하에 주도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lt;br /&gt;
&lt;br /&gt;
'기생파티'와 '주도'에 관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은 아주 죽이 잘 맞은 사이였다. 훗날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방일영을 가리켜 &amp;quot;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amp;quot;이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amp;quot;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 집에는 가끔 박정희 자신이 군저 초기에 미행으로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자.&amp;quot;&lt;br /&gt;
&lt;br /&gt;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파트너가 보통 기생이 아니라 여배우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확언하지 못한 건 위에서 말한 술자리가  방우영이 말하는 말하는 술자리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내가 처음 박 대통령은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 등을 데리고 방일영 고문과 함께 술자리에서 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잡을 붙잡고 밴드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와 깡마른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빨이 유난히도 돋보여 한 눈에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출처: 정지환 &amp;lt;&amp;lt;대한민국 다큐멘타리&amp;gt;&amp;gt; ,2008.&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고가도로와 워커힐 기생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lt;br /&gt;
&lt;br /&gt;
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건설이었다. 69년 3월 22일에 준공하게 되는3.1고가도로는 우선적으로 박정희의 워커힐 내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정목에 따르면,&lt;br /&gt;
&lt;br /&gt;
&amp;quot;박 대통령은 워커힐 건설 중에도 그 건설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자주 내왕했지만 1963년 4월에 개관하고 난 뒤에는 뻔질나게 그곳을 찾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갔고 평일에도 밤에 갔으며 빌라에서 술자리도 가졌고 잠자리도 가졌다. 워커힐의 빌라는 경호하기에도 쉬웠고 일체의 잡음이 절연된 공간이었다. 바깥방에서는 수행원들이 주연을 벌이고 안방에서는 여색을 즐겨도 외부 세계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박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박 대통령의 잦은 워커힐 나들이는 1970년대 중반에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라는 이름의 비밀 휴식처가 생길 때까지 계속되었다.&amp;quot;&lt;br /&gt;
&lt;br /&gt;
67년 여성단체들은 &amp;quot;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건의문&amp;quot;을 통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관료들이 요정을 출입하거나 기생파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건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부터 기생파티를 위해 뻔질나게 워커힐을 찾고 그 바람에 심심하면 육박전(육영수-박정희 부부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무슨 수로 기생파티를 없앨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파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생파티는 산업적 규모로 성장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외화벌이에 기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기생파티 중독증'&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의 관계는 너무나 화기애애해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이동원이 &amp;quot;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이 외교는 더욱 능숙&amp;quot;하다고 받았다.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amp;quot;난 마누라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amp;quot;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lt;br /&gt;
&lt;br /&gt;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벌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존슨의 아내 버드가 존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 옆방에 가 있을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기생파티 중독증'이라고 할까? 박 정권을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그 서비스를 베풀다가 큰 망신을 당했다.  UPI 통신 기자인 메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자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문명자의 증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다음날 홍종철 공보부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amp;quot;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게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고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 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몰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 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나의 조국이라니&amp;quo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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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amp;lt;big&amp;gt;박정희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의 워커힐 유흥 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던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63년 대선 기간 중인데도 불구하고 '기생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이번에 '기생 파티'의 마당을 제공한 방일영의 증언을 들어보자.&lt;br /&gt;
&lt;br /&gt;
&amp;quot;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amp;quot;&lt;br /&gt;
&lt;br /&gt;
육영수는 이 기생 파티에 격분해서 박정희가 다시는 방일영의 집에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용주는 그날 박정희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lt;br /&gt;
&lt;br /&gt;
&amp;quot;만당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에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리는 일본 민속무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본인의 주석에 따르면 사관학교(일본 육사) 졸업할 때 은시계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이 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라는 천하에 주도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lt;br /&gt;
&lt;br /&gt;
'기생파티'와 '주도'에 관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은 아주 죽이 잘 맞은 사이였다. 훗날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방일영을 가리켜 &amp;quot;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amp;quot;이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amp;quot;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 집에는 가끔 박정희 자신이 군저 초기에 미행으로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자.&amp;quot;&lt;br /&gt;
&lt;br /&gt;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파트너가 보통 기생이 아니라 여배우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확언하지 못한 건 위에서 말한 술자리가  방우영이 말하는 말하는 술자리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내가 처음 박 대통령은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 등을 데리고 방일영 고문과 함께 술자리에서 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잡을 붙잡고 밴드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와 깡마른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빨이 유난히도 돋보여 한 눈에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출처: 정지환 &amp;lt;&amp;lt;대한민국 다큐멘타리&amp;gt;&amp;gt; ,2008.&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big&amp;gt;고가도로와 워커힐 기생파티&amp;lt;/big&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3.1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건설이었다. 69년 3월 22일에 준공하게 되는3.1고가도로는 우선적으로 박정희의 워커힐 내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정목에 따르면,&lt;br /&gt;
&lt;br /&gt;
&amp;quot;박 대통령은 워커힐 건설 중에도 그 건설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자주 내왕했지만 1963년 4월에 개관하고 난 뒤에는 뻔질나게 그곳을 찾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갔고 평일에도 밤에 갔으며 빌라에서 술자리도 가졌고 잠자리도 가졌다. 워커힐의 빌라는 경호하기에도 쉬웠고 일체의 잡음이 절연된 공간이었다. 바깥방에서는 수행원들이 주연을 벌이고 안방에서는 여색을 즐겨도 외부 세계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박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박 대통령의 잦은 워커힐 나들이는 1970년대 중반에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라는 이름의 비밀 휴식처가 생길 때까지 계속되었다.&amp;quot;&lt;br /&gt;
&lt;br /&gt;
67년 여성단체들은 &amp;quot;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건의문&amp;quot;을 통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관료들이 요정을 출입하거나 기생파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건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부터 기생파티를 위해 뻔질나게 워커힐을 찾고 그 바람에 심심하면 육박전(육영수-박정희 부부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무슨 수로 기생파티를 없앨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파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생파티는 산업적 규모로 성장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외화벌이에 기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기생파티 중독증'&amp;lt;/big&amp;gt;'''&amp;lt;big&amp;gt;큰 글자&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의 관계는 너무나 화기애애해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이동원이 &amp;quot;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이 외교는 더욱 능숙&amp;quot;하다고 받았다.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amp;quot;난 마누라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amp;quot;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lt;br /&gt;
&lt;br /&gt;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벌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존슨의 아내 버드가 존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 옆방에 가 있을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기생파티 중독증'이라고 할까? 박 정권을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그 서비스를 베풀다가 큰 망신을 당했다.  UPI 통신 기자인 메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자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문명자의 증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다음날 홍종철 공보부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amp;quot;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게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고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 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몰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 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나의 조국이라니&amp;quo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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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amp;lt;big&amp;gt;박정희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의 워커힐 유흥 파티&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던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63년 대선 기간 중인데도 불구하고 '기생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이번에 '기생 파티'의 마당을 제공한 방일영의 증언을 들어보자.&lt;br /&gt;
&lt;br /&gt;
&amp;quot;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amp;quot;&lt;br /&gt;
&lt;br /&gt;
육영수는 이 기생 파티에 격분해서 박정희가 다시는 방일영의 집에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용주는 그날 박정희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lt;br /&gt;
&lt;br /&gt;
&amp;quot;만당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에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리는 일본 민속무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본인의 주석에 따르면 사관학교(일본 육사) 졸업할 때 은시계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이 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라는 천하에 주도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lt;br /&gt;
&lt;br /&gt;
'기생파티'와 '주도'에 관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은 아주 죽이 잘 맞은 사이였다. 훗날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방일영을 가리켜 &amp;quot;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amp;quot;이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amp;quot;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 집에는 가끔 박정희 자신이 군저 초기에 미행으로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자.&amp;quot;&lt;br /&gt;
&lt;br /&gt;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파트너가 보통 기생이 아니라 여배우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확언하지 못한 건 위에서 말한 술자리가  방우영이 말하는 말하는 술자리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내가 처음 박 대통령은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 등을 데리고 방일영 고문과 함께 술자리에서 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잡을 붙잡고 밴드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와 깡마른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빨이 유난히도 돋보여 한 눈에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출처: 정지환 &amp;lt;&amp;lt;대한민국 다큐멘타리&amp;gt;&amp;gt; ,2008.&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고가도로와 워커힐 기생파티&amp;lt;/big&amp;gt;&lt;br /&gt;
&lt;br /&gt;
67년 8월 15일 서울 도심에서 거대한 공사판이 또 하나 벌어졌다. 3.1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건설이었다. 69년 3월 22일에 준공하게 되는3.1고가도로는 우선적으로 박정희의 워커힐 내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정목에 따르면,&lt;br /&gt;
&lt;br /&gt;
&amp;quot;박 대통령은 워커힐 건설 중에도 그 건설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자주 내왕했지만 1963년 4월에 개관하고 난 뒤에는 뻔질나게 그곳을 찾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갔고 평일에도 밤에 갔으며 빌라에서 술자리도 가졌고 잠자리도 가졌다. 워커힐의 빌라는 경호하기에도 쉬웠고 일체의 잡음이 절연된 공간이었다. 바깥방에서는 수행원들이 주연을 벌이고 안방에서는 여색을 즐겨도 외부 세계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박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박 대통령의 잦은 워커힐 나들이는 1970년대 중반에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라는 이름의 비밀 휴식처가 생길 때까지 계속되었다.&amp;quot;&lt;br /&gt;
&lt;br /&gt;
67년 여성단체들은 &amp;quot;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건의문&amp;quot;을 통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관료들이 요정을 출입하거나 기생파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건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부터 기생파티를 위해 뻔질나게 워커힐을 찾고 그 바람에 심심하면 육박전(육영수-박정희 부부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무슨 수로 기생파티를 없앨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파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생파티는 산업적 규모로 성장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외화벌이에 기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기생파티 중독증'&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존슨의 관계는 너무나 화기애애해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이동원이 &amp;quot;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이 외교는 더욱 능숙&amp;quot;하다고 받았다.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amp;quot;난 마누라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amp;quot;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lt;br /&gt;
&lt;br /&gt;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벌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존슨의 아내 버드가 존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 옆방에 가 있을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기생파티 중독증'이라고 할까? 박 정권을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그 서비스를 베풀다가 큰 망신을 당했다.  UPI 통신 기자인 메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자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문명자의 증언이다.&lt;br /&gt;
&lt;br /&gt;
&amp;quot;다음날 홍종철 공보부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amp;quot;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게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고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 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몰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 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나의 조국이라니&amp;quo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Kindred_Britain&amp;diff=9896</id>
		<title>Kindred Britai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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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4-21T08:51: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Why 왜 */&lt;/p&gt;
&lt;hr /&gt;
&lt;div&gt;[[File:DHwebsite_main_Kindredbritain.png|center|Kindred Britain웹사이트 가기|link=http://kindred.stanford.edu/]]&lt;br /&gt;
==='''Who''' &amp;lt;small&amp;gt;'''누가'''&amp;lt;/small&amp;gt;===&lt;br /&gt;
Kindred Britain은 많은 이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한 프로젝트지만, 진행 단계별로 주도한 이들이 있다. 이 단계는 연구, 코딩, 디자인 3단계로 나뉜다, 아래는 단계별로 주도한 대표인물들.&lt;br /&gt;
&lt;br /&gt;
&lt;br /&gt;
*연구자: Nicholas Jenkins(Stanford University)-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하고, 인물관계를 연구하고, 프로젝트를 총괄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코더: Elijah Meeks(Stanford University)- Kindred Britain site의 메인 개발자이다.&lt;br /&gt;
&lt;br /&gt;
*디자이너: Scott Murray(University of San Francisco)- Kindred Britain site의 디자이너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예산부분부터 수많은 분야에 걸쳐 스텐포드 대학의 지원이 있었기에 이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외 가족, 동료, 학생 등 더 많은 협력자들을 알고 싶다면 Notes on Kindred Britain(링크)의 General Information 파트 참조.&lt;br /&gt;
&lt;br /&gt;
==='''When''' &amp;lt;small&amp;gt;'''언제'''&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해당 프로젝트는 2007년10월에 시작하여 2013년 2월에 종료되었다.&lt;br /&gt;
&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notes.html// '''notes on KindredBritain''']에서 KindredBritain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시기를 다음의 표로 확인이 가능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Figure1.png|400px]]&lt;br /&gt;
&lt;br /&gt;
==='''Where''' &amp;lt;small&amp;gt;'''어디서'''&amp;lt;/small&amp;gt;===&lt;br /&gt;
[[파일:Stanford.jpeg|300px]]&lt;br /&gt;
&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 Kindred Britain]''' 프로젝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에 위치한 스탠포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에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인 니콜라스 젠킨스(Nicholas Jenkins)의 발명품이다.&lt;br /&gt;
&lt;br /&gt;
==='''What''' &amp;lt;small&amp;gt;'''무엇을'''&amp;lt;/small&amp;gt;===&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 Kindred Britain]''' 프로젝트는 약 3만 명의 개인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이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영국 문화의 상징적인 인물들로, 혈액, 결혼, 또는 소속의 가족 관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 네트워크에는 제인 오스틴, 셰익스피어, 넬슨 및 토마스 모어 등의 유명 인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로버트 월폴, 허버트 애스키스 등 모든 수상까지 포함되어 있다. Kindred Britain은 토마스 모어와 헨리 8세 또는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 1세와 같은 적대 관계에 놓인 인물들을 연결하기도 한다. 또한 화가 반 다이크와 루시안 프로이트 사이의 가족 관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들이 수세기 동안 분리되었지만 모호한 가족 관계를 통해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존 돈과 미나 로이, 문학 반체제 인사 존 밀턴과 조지 버나드 쇼, 소설가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엇, 과학자 아이작 뉴턴과 J. C. 맥스웰의 관계도 볼 수 있다. Kindred Britain에서는 케빈 베이컨과 위대한 르네상스 작가 프란시스 베이컨 사이의 가족 분리 정도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이 단락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은 가족 관계로 이 프로젝트에 포함된 다른 모든 역사적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PEOPLE'''&lt;br /&gt;
&lt;br /&gt;
[[파일:Kb people.jpeg]]&lt;br /&gt;
&lt;br /&gt;
&lt;br /&gt;
Kindred Britian에 등록된 유명한 가족, 형제, 역사적 인물들이 어떤 관계망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 카테고리의 하위 카테고리에는 MOST VIEWED(가장 조회수가 많은 인물), PROFESSIONS(전문직, 고위층의 인물), FAMILIES(가족), SISTERS(자매), FIRST AND LAST(처음과 마지막)가 있다. 예시로 MOST VIEWED에 등록된 인물 중 Virginia Woolf를 클릭하면, 위와 같은 창이 뜬다. 이를 통해 Virginia Woolf의 혈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CONNECTIONS'''&lt;br /&gt;
&lt;br /&gt;
[[파일:Kb connections.jpeg]]&lt;br /&gt;
&lt;br /&gt;
&lt;br /&gt;
Kindred Britain에 등록된 인물들의 가족 관계 혹은 다른 운명이나 역할로 나누어진 사람들을 연결시켜 보여준다. '''PEOPLE'''이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준다면, '''CONNECTIONS'''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놓여있다. 이 카테고리의 하위 카테고리에는 OPPONENTS(적대관계), JUDGE AND ACCUSED(재판관과 피고인), AUTHOR AND SUBJECT(저자와 주제), SITTER AND ARTIST(모델과 화가), DOCTOR AND PATIENT(의사와 환자), GRAVES: BURIED SIDE-BY-SIDE OR IN SAME GROUND(무덤)가 있다. 예시로 SITTER AND ARTIST에서 Virginia Woolf, by George Charles Beresford를 클릭하면, 위와 같은 창이 뜬다. 이를 통해 Virginia Woolf와 George Charles Beresford의 연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How''' &amp;lt;small&amp;gt;'''어떻게'''&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Notes on Kindred Britain에서는 본 프로젝트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Originating, Developing, Designing. Originating은 즉 Researching(연구단계)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내용, 본 프로젝트의 의의를 폭넓게 설명하고 있다. Developing은 Coding과정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Designing은 마지막 사이트 생성과정을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Originating(Researching)====&lt;br /&gt;
&lt;br /&gt;
요약하자면, Kindred Britain은 스탠포드 대학 영문 교수인 Nicholas Jenkins의 개인 연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영국 문화 및 역사 속 가족 및 지인관계가 연구 목적이었고, 자세한 내용은 Jenkins의 에세이인 ‘Originat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Developing(Coding)====&lt;br /&gt;
&lt;br /&gt;
2012년에, Jenkins는 Stanford Libraries의 디지털 인문학 전문가인 Elijah Meeks와 일할 기회가 생겼다. Elijah Meeks는 Kindred Britain database를 최신의 web-based format에 적용하는 역할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Meeks와 Karl Grossner의 에세이인 ‘Develop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Data and Data Modeling: Kindred Britain data는 초기에 GEDCOM(링크) 형식이었다. GEDCOM은 가계도와 같은 관계를 표현하는데 이용되는 소프트웨어를 위한 보편적 코딩 형식이다. 그러나 GEDCOM은 몇몇 관계나 사건, 전통적이지 않은 가족(일부다처제 등)을 표현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 데이터를 다루는 더 나은 방식도 있었다.&lt;br /&gt;
&lt;br /&gt;
첫 과제는 거대한 GEMDOM 데이터를 관계적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이었다. 기존 GEMDOM 데이터의 한계를 해결하고 최신 소프트웨어와 호환성을 맞추기 위해 PostgreSQL(링크)와 같은 관계적, 공간적 데이터로 인코딩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Event Centrality: 사건을 사람과 장소, 기타 각 요소간의 관계성을 보여주는데 사용했다. 과학적으로 정밀한 방식은 아니나, 데이터 시각화와 조사를 간결하게 만들기 위한 데이터 모델링 패턴에 필수적이었다. 출생, 죽음, 결혼, 이혼이 가장 중요시된 사건이었다. 사건은 장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지리적 데이터화하는데 용이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Event01.png|800px|center|섬네일|사건과 사건 속 인물이 중심성의 핵심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Fuzzy Dates: Kindred Britain 속 여러 인물의 출생, 죽음, 사건 등과 관련된 정확한 시간 데이터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시간 정확도를 나타내는 인터페이스를 만들고, 때로는 InferBirth script (written by Wilson Restrepo, Stanford ‘13)에 나온 규칙에 따라 연도를 추측해야 했다. 그 원리는 개략적으로 자식의 출생일, 배우자의 나이, 출생날 부모의 나이 등으로 추측하는 일종의 알고리즘이다.&lt;br /&gt;
&lt;br /&gt;
*DERIVING NEW MEASURES- Network, Tragedy, Centrality, Depth, Inbreeeding, ODNB Distance, Geospatial, Biographical, Close Links, Badges, Events from Contemporaries, Contextual Events&lt;br /&gt;
&lt;br /&gt;
*INTERACTIVITY AND NARRATIVE&lt;br /&gt;
&lt;br /&gt;
*CODING&lt;br /&gt;
&lt;br /&gt;
*PANELS- Timelines&lt;br /&gt;
&lt;br /&gt;
====Designing====&lt;br /&gt;
&lt;br /&gt;
Jenkins와 Meeks는 University of San Francisco의 디자이너이자 디지털시각화 전문가인 Scott Murray를 프로젝트 팀원으로 합류시켰다. 자세한 디자인 내용은 Murray의 글인 ‘Design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결과물이 Kindred Britain 사이트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1월에 Scott Murray가 Kindred Britain project에 합류했다. 이와 함께 다양한 기준에 따른 관계도를 통합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 착수 당시까지 웹 디자인 측면의 정보 시각화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HTML과 CSS coding을 이용한 시각화 및 사이트 설계가 필요한 단계였다. 이 과정에서 일반인이 사이트를 보기에는 너무 어려울 법한 정보를 간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Vis01.png|800px|center|섬네일|초기 시각화된 정보 그림]]&lt;br /&gt;
&lt;br /&gt;
&lt;br /&gt;
이밖에 사이트 구축을 위해 Query(링크)가 이용되었다. Query는 파일의 내용 등을 알기 위해 몇 개의 코드(code)나 키(key)를 기초로 질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이터 베이스에 존재하는 자료를 사용자가 원하는 조건을 통해 검색하고, 검색된 결과를 자유로이 조회할 수 있는 기능 등을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amp;lt;ref&amp;gt;네이버 블로그 정보글 참조.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irea0609&amp;amp;logNo=220407069096&amp;amp;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링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이용된 Query의 종류: The Node Query, The Biographical Query, The Search Query, The Place Query - 이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원할 시  ‘Design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lt;br /&gt;
&lt;br /&gt;
==='''Why''' &amp;lt;small&amp;gt;'''왜'''&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네트워크 이론과 디지털 기술의 현대적 발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국의 문화가 얼마나 가족적인지를 현대의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노엘 아난(Noel Annan)의 에세이 &amp;lt;''The Intellectual Aristocracy''&amp;gt;에서 '''‘Family connexions are part of the poetry of history'''’(가족유대는 역사 시의 일부분)이라는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역사적 저변 위에 역사의 주제와 문화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 은유, 영국에 대한 생각들을 제안하기 위해 현대적인 방법을 사용했고 영국의 과거에 대한 진실을 찾는 것, 현재와 오늘날 가족이 의미하는 바를 돌아보는 것에 유용되기를 바란다고 하고 있다. 더불어 Kindred Britain을 사용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오프닝 화면에 대표되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 사이의 놀라운 가족 관계를 탐구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는데, 영국은 사이트 이용자가 발견하고, 실험하고, 추측하고, 놀기를 바란다고 부연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해당 프로젝트의 목적을 가늠하게 하는 부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니콜라스 젠킨스의 에세이 &amp;lt;''Originating Kindred Britain''&amp;gt;에서 이 사이트의 생성과 목적에 대해 더 많이 읽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Comment''' &amp;lt;small&amp;gt;'''논평'''&amp;lt;/small&amp;gt;===&lt;br /&gt;
(내용 작성)&lt;br /&gt;
&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Kindred_Britain&amp;diff=9895</id>
		<title>Kindred Britai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Kindred_Britain&amp;diff=9895"/>
				<updated>2020-04-21T08:51: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Why 왜 */&lt;/p&gt;
&lt;hr /&gt;
&lt;div&gt;[[File:DHwebsite_main_Kindredbritain.png|center|Kindred Britain웹사이트 가기|link=http://kindred.stanford.edu/]]&lt;br /&gt;
==='''Who''' &amp;lt;small&amp;gt;'''누가'''&amp;lt;/small&amp;gt;===&lt;br /&gt;
Kindred Britain은 많은 이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한 프로젝트지만, 진행 단계별로 주도한 이들이 있다. 이 단계는 연구, 코딩, 디자인 3단계로 나뉜다, 아래는 단계별로 주도한 대표인물들.&lt;br /&gt;
&lt;br /&gt;
&lt;br /&gt;
*연구자: Nicholas Jenkins(Stanford University)-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하고, 인물관계를 연구하고, 프로젝트를 총괄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코더: Elijah Meeks(Stanford University)- Kindred Britain site의 메인 개발자이다.&lt;br /&gt;
&lt;br /&gt;
*디자이너: Scott Murray(University of San Francisco)- Kindred Britain site의 디자이너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예산부분부터 수많은 분야에 걸쳐 스텐포드 대학의 지원이 있었기에 이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외 가족, 동료, 학생 등 더 많은 협력자들을 알고 싶다면 Notes on Kindred Britain(링크)의 General Information 파트 참조.&lt;br /&gt;
&lt;br /&gt;
==='''When''' &amp;lt;small&amp;gt;'''언제'''&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해당 프로젝트는 2007년10월에 시작하여 2013년 2월에 종료되었다.&lt;br /&gt;
&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notes.html// '''notes on KindredBritain''']에서 KindredBritain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시기를 다음의 표로 확인이 가능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Figure1.png|400px]]&lt;br /&gt;
&lt;br /&gt;
==='''Where''' &amp;lt;small&amp;gt;'''어디서'''&amp;lt;/small&amp;gt;===&lt;br /&gt;
[[파일:Stanford.jpeg|300px]]&lt;br /&gt;
&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 Kindred Britain]''' 프로젝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에 위치한 스탠포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에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인 니콜라스 젠킨스(Nicholas Jenkins)의 발명품이다.&lt;br /&gt;
&lt;br /&gt;
==='''What''' &amp;lt;small&amp;gt;'''무엇을'''&amp;lt;/small&amp;gt;===&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 Kindred Britain]''' 프로젝트는 약 3만 명의 개인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이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영국 문화의 상징적인 인물들로, 혈액, 결혼, 또는 소속의 가족 관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 네트워크에는 제인 오스틴, 셰익스피어, 넬슨 및 토마스 모어 등의 유명 인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로버트 월폴, 허버트 애스키스 등 모든 수상까지 포함되어 있다. Kindred Britain은 토마스 모어와 헨리 8세 또는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 1세와 같은 적대 관계에 놓인 인물들을 연결하기도 한다. 또한 화가 반 다이크와 루시안 프로이트 사이의 가족 관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들이 수세기 동안 분리되었지만 모호한 가족 관계를 통해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존 돈과 미나 로이, 문학 반체제 인사 존 밀턴과 조지 버나드 쇼, 소설가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엇, 과학자 아이작 뉴턴과 J. C. 맥스웰의 관계도 볼 수 있다. Kindred Britain에서는 케빈 베이컨과 위대한 르네상스 작가 프란시스 베이컨 사이의 가족 분리 정도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이 단락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은 가족 관계로 이 프로젝트에 포함된 다른 모든 역사적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PEOPLE'''&lt;br /&gt;
&lt;br /&gt;
[[파일:Kb people.jpeg]]&lt;br /&gt;
&lt;br /&gt;
&lt;br /&gt;
Kindred Britian에 등록된 유명한 가족, 형제, 역사적 인물들이 어떤 관계망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 카테고리의 하위 카테고리에는 MOST VIEWED(가장 조회수가 많은 인물), PROFESSIONS(전문직, 고위층의 인물), FAMILIES(가족), SISTERS(자매), FIRST AND LAST(처음과 마지막)가 있다. 예시로 MOST VIEWED에 등록된 인물 중 Virginia Woolf를 클릭하면, 위와 같은 창이 뜬다. 이를 통해 Virginia Woolf의 혈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CONNECTIONS'''&lt;br /&gt;
&lt;br /&gt;
[[파일:Kb connections.jpeg]]&lt;br /&gt;
&lt;br /&gt;
&lt;br /&gt;
Kindred Britain에 등록된 인물들의 가족 관계 혹은 다른 운명이나 역할로 나누어진 사람들을 연결시켜 보여준다. '''PEOPLE'''이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준다면, '''CONNECTIONS'''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놓여있다. 이 카테고리의 하위 카테고리에는 OPPONENTS(적대관계), JUDGE AND ACCUSED(재판관과 피고인), AUTHOR AND SUBJECT(저자와 주제), SITTER AND ARTIST(모델과 화가), DOCTOR AND PATIENT(의사와 환자), GRAVES: BURIED SIDE-BY-SIDE OR IN SAME GROUND(무덤)가 있다. 예시로 SITTER AND ARTIST에서 Virginia Woolf, by George Charles Beresford를 클릭하면, 위와 같은 창이 뜬다. 이를 통해 Virginia Woolf와 George Charles Beresford의 연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How''' &amp;lt;small&amp;gt;'''어떻게'''&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Notes on Kindred Britain에서는 본 프로젝트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Originating, Developing, Designing. Originating은 즉 Researching(연구단계)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내용, 본 프로젝트의 의의를 폭넓게 설명하고 있다. Developing은 Coding과정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Designing은 마지막 사이트 생성과정을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Originating(Researching)====&lt;br /&gt;
&lt;br /&gt;
요약하자면, Kindred Britain은 스탠포드 대학 영문 교수인 Nicholas Jenkins의 개인 연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영국 문화 및 역사 속 가족 및 지인관계가 연구 목적이었고, 자세한 내용은 Jenkins의 에세이인 ‘Originat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Developing(Coding)====&lt;br /&gt;
&lt;br /&gt;
2012년에, Jenkins는 Stanford Libraries의 디지털 인문학 전문가인 Elijah Meeks와 일할 기회가 생겼다. Elijah Meeks는 Kindred Britain database를 최신의 web-based format에 적용하는 역할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Meeks와 Karl Grossner의 에세이인 ‘Develop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Data and Data Modeling: Kindred Britain data는 초기에 GEDCOM(링크) 형식이었다. GEDCOM은 가계도와 같은 관계를 표현하는데 이용되는 소프트웨어를 위한 보편적 코딩 형식이다. 그러나 GEDCOM은 몇몇 관계나 사건, 전통적이지 않은 가족(일부다처제 등)을 표현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 데이터를 다루는 더 나은 방식도 있었다.&lt;br /&gt;
&lt;br /&gt;
첫 과제는 거대한 GEMDOM 데이터를 관계적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이었다. 기존 GEMDOM 데이터의 한계를 해결하고 최신 소프트웨어와 호환성을 맞추기 위해 PostgreSQL(링크)와 같은 관계적, 공간적 데이터로 인코딩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Event Centrality: 사건을 사람과 장소, 기타 각 요소간의 관계성을 보여주는데 사용했다. 과학적으로 정밀한 방식은 아니나, 데이터 시각화와 조사를 간결하게 만들기 위한 데이터 모델링 패턴에 필수적이었다. 출생, 죽음, 결혼, 이혼이 가장 중요시된 사건이었다. 사건은 장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지리적 데이터화하는데 용이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Event01.png|800px|center|섬네일|사건과 사건 속 인물이 중심성의 핵심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Fuzzy Dates: Kindred Britain 속 여러 인물의 출생, 죽음, 사건 등과 관련된 정확한 시간 데이터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시간 정확도를 나타내는 인터페이스를 만들고, 때로는 InferBirth script (written by Wilson Restrepo, Stanford ‘13)에 나온 규칙에 따라 연도를 추측해야 했다. 그 원리는 개략적으로 자식의 출생일, 배우자의 나이, 출생날 부모의 나이 등으로 추측하는 일종의 알고리즘이다.&lt;br /&gt;
&lt;br /&gt;
*DERIVING NEW MEASURES- Network, Tragedy, Centrality, Depth, Inbreeeding, ODNB Distance, Geospatial, Biographical, Close Links, Badges, Events from Contemporaries, Contextual Events&lt;br /&gt;
&lt;br /&gt;
*INTERACTIVITY AND NARRATIVE&lt;br /&gt;
&lt;br /&gt;
*CODING&lt;br /&gt;
&lt;br /&gt;
*PANELS- Timelines&lt;br /&gt;
&lt;br /&gt;
====Designing====&lt;br /&gt;
&lt;br /&gt;
Jenkins와 Meeks는 University of San Francisco의 디자이너이자 디지털시각화 전문가인 Scott Murray를 프로젝트 팀원으로 합류시켰다. 자세한 디자인 내용은 Murray의 글인 ‘Design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결과물이 Kindred Britain 사이트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1월에 Scott Murray가 Kindred Britain project에 합류했다. 이와 함께 다양한 기준에 따른 관계도를 통합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 착수 당시까지 웹 디자인 측면의 정보 시각화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HTML과 CSS coding을 이용한 시각화 및 사이트 설계가 필요한 단계였다. 이 과정에서 일반인이 사이트를 보기에는 너무 어려울 법한 정보를 간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Vis01.png|800px|center|섬네일|초기 시각화된 정보 그림]]&lt;br /&gt;
&lt;br /&gt;
&lt;br /&gt;
이밖에 사이트 구축을 위해 Query(링크)가 이용되었다. Query는 파일의 내용 등을 알기 위해 몇 개의 코드(code)나 키(key)를 기초로 질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이터 베이스에 존재하는 자료를 사용자가 원하는 조건을 통해 검색하고, 검색된 결과를 자유로이 조회할 수 있는 기능 등을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amp;lt;ref&amp;gt;네이버 블로그 정보글 참조.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irea0609&amp;amp;logNo=220407069096&amp;amp;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링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이용된 Query의 종류: The Node Query, The Biographical Query, The Search Query, The Place Query - 이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원할 시  ‘Design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lt;br /&gt;
&lt;br /&gt;
==='''Why''' &amp;lt;small&amp;gt;'''왜'''&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노엘 아난(Noel Annan)의 에세이 &amp;lt;''The Intellectual Aristocracy''&amp;gt;에서 '''‘Family connexions are part of the poetry of history'''’(가족유대는 역사 시의 일부분)이라는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네트워크 이론과 디지털 기술의 현대적 발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국의 문화가 얼마나 가족적인지를 현대의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역사적 저변 위에 역사의 주제와 문화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 은유, 영국에 대한 생각들을 제안하기 위해 현대적인 방법을 사용했고 영국의 과거에 대한 진실을 찾는 것, 현재와 오늘날 가족이 의미하는 바를 돌아보는 것에 유용되기를 바란다고 하고 있다. 더불어 Kindred Britain을 사용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오프닝 화면에 대표되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 사이의 놀라운 가족 관계를 탐구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는데, 영국은 사이트 이용자가 발견하고, 실험하고, 추측하고, 놀기를 바란다고 부연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해당 프로젝트의 목적을 가늠하게 하는 부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니콜라스 젠킨스의 에세이 &amp;lt;''Originating Kindred Britain''&amp;gt;에서 이 사이트의 생성과 목적에 대해 더 많이 읽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Comment''' &amp;lt;small&amp;gt;'''논평'''&amp;lt;/small&amp;gt;===&lt;br /&gt;
(내용 작성)&lt;br /&gt;
&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Kindred_Britain&amp;diff=9894</id>
		<title>Kindred Britai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red/wiki/index.php?title=Kindred_Britain&amp;diff=9894"/>
				<updated>2020-04-21T08:50: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수리: /* Why 왜 */&lt;/p&gt;
&lt;hr /&gt;
&lt;div&gt;[[File:DHwebsite_main_Kindredbritain.png|center|Kindred Britain웹사이트 가기|link=http://kindred.stanford.edu/]]&lt;br /&gt;
==='''Who''' &amp;lt;small&amp;gt;'''누가'''&amp;lt;/small&amp;gt;===&lt;br /&gt;
Kindred Britain은 많은 이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한 프로젝트지만, 진행 단계별로 주도한 이들이 있다. 이 단계는 연구, 코딩, 디자인 3단계로 나뉜다, 아래는 단계별로 주도한 대표인물들.&lt;br /&gt;
&lt;br /&gt;
&lt;br /&gt;
*연구자: Nicholas Jenkins(Stanford University)-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하고, 인물관계를 연구하고, 프로젝트를 총괄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코더: Elijah Meeks(Stanford University)- Kindred Britain site의 메인 개발자이다.&lt;br /&gt;
&lt;br /&gt;
*디자이너: Scott Murray(University of San Francisco)- Kindred Britain site의 디자이너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예산부분부터 수많은 분야에 걸쳐 스텐포드 대학의 지원이 있었기에 이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외 가족, 동료, 학생 등 더 많은 협력자들을 알고 싶다면 Notes on Kindred Britain(링크)의 General Information 파트 참조.&lt;br /&gt;
&lt;br /&gt;
==='''When''' &amp;lt;small&amp;gt;'''언제'''&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해당 프로젝트는 2007년10월에 시작하여 2013년 2월에 종료되었다.&lt;br /&gt;
&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notes.html// '''notes on KindredBritain''']에서 KindredBritain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시기를 다음의 표로 확인이 가능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Figure1.png|400px]]&lt;br /&gt;
&lt;br /&gt;
==='''Where''' &amp;lt;small&amp;gt;'''어디서'''&amp;lt;/small&amp;gt;===&lt;br /&gt;
[[파일:Stanford.jpeg|300px]]&lt;br /&gt;
&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 Kindred Britain]''' 프로젝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에 위치한 스탠포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에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인 니콜라스 젠킨스(Nicholas Jenkins)의 발명품이다.&lt;br /&gt;
&lt;br /&gt;
==='''What''' &amp;lt;small&amp;gt;'''무엇을'''&amp;lt;/small&amp;gt;===&lt;br /&gt;
'''[http://kindred.stanford.edu/# Kindred Britain]''' 프로젝트는 약 3만 명의 개인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이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영국 문화의 상징적인 인물들로, 혈액, 결혼, 또는 소속의 가족 관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 네트워크에는 제인 오스틴, 셰익스피어, 넬슨 및 토마스 모어 등의 유명 인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로버트 월폴, 허버트 애스키스 등 모든 수상까지 포함되어 있다. Kindred Britain은 토마스 모어와 헨리 8세 또는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 1세와 같은 적대 관계에 놓인 인물들을 연결하기도 한다. 또한 화가 반 다이크와 루시안 프로이트 사이의 가족 관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들이 수세기 동안 분리되었지만 모호한 가족 관계를 통해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존 돈과 미나 로이, 문학 반체제 인사 존 밀턴과 조지 버나드 쇼, 소설가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엇, 과학자 아이작 뉴턴과 J. C. 맥스웰의 관계도 볼 수 있다. Kindred Britain에서는 케빈 베이컨과 위대한 르네상스 작가 프란시스 베이컨 사이의 가족 분리 정도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이 단락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은 가족 관계로 이 프로젝트에 포함된 다른 모든 역사적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PEOPLE'''&lt;br /&gt;
&lt;br /&gt;
[[파일:Kb people.jpeg]]&lt;br /&gt;
&lt;br /&gt;
&lt;br /&gt;
Kindred Britian에 등록된 유명한 가족, 형제, 역사적 인물들이 어떤 관계망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 카테고리의 하위 카테고리에는 MOST VIEWED(가장 조회수가 많은 인물), PROFESSIONS(전문직, 고위층의 인물), FAMILIES(가족), SISTERS(자매), FIRST AND LAST(처음과 마지막)가 있다. 예시로 MOST VIEWED에 등록된 인물 중 Virginia Woolf를 클릭하면, 위와 같은 창이 뜬다. 이를 통해 Virginia Woolf의 혈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CONNECTIONS'''&lt;br /&gt;
&lt;br /&gt;
[[파일:Kb connections.jpeg]]&lt;br /&gt;
&lt;br /&gt;
&lt;br /&gt;
Kindred Britain에 등록된 인물들의 가족 관계 혹은 다른 운명이나 역할로 나누어진 사람들을 연결시켜 보여준다. '''PEOPLE'''이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준다면, '''CONNECTIONS'''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놓여있다. 이 카테고리의 하위 카테고리에는 OPPONENTS(적대관계), JUDGE AND ACCUSED(재판관과 피고인), AUTHOR AND SUBJECT(저자와 주제), SITTER AND ARTIST(모델과 화가), DOCTOR AND PATIENT(의사와 환자), GRAVES: BURIED SIDE-BY-SIDE OR IN SAME GROUND(무덤)가 있다. 예시로 SITTER AND ARTIST에서 Virginia Woolf, by George Charles Beresford를 클릭하면, 위와 같은 창이 뜬다. 이를 통해 Virginia Woolf와 George Charles Beresford의 연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How''' &amp;lt;small&amp;gt;'''어떻게'''&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Notes on Kindred Britain에서는 본 프로젝트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Originating, Developing, Designing. Originating은 즉 Researching(연구단계)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내용, 본 프로젝트의 의의를 폭넓게 설명하고 있다. Developing은 Coding과정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Designing은 마지막 사이트 생성과정을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Originating(Researching)====&lt;br /&gt;
&lt;br /&gt;
요약하자면, Kindred Britain은 스탠포드 대학 영문 교수인 Nicholas Jenkins의 개인 연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영국 문화 및 역사 속 가족 및 지인관계가 연구 목적이었고, 자세한 내용은 Jenkins의 에세이인 ‘Originat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Developing(Coding)====&lt;br /&gt;
&lt;br /&gt;
2012년에, Jenkins는 Stanford Libraries의 디지털 인문학 전문가인 Elijah Meeks와 일할 기회가 생겼다. Elijah Meeks는 Kindred Britain database를 최신의 web-based format에 적용하는 역할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Meeks와 Karl Grossner의 에세이인 ‘Develop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Data and Data Modeling: Kindred Britain data는 초기에 GEDCOM(링크) 형식이었다. GEDCOM은 가계도와 같은 관계를 표현하는데 이용되는 소프트웨어를 위한 보편적 코딩 형식이다. 그러나 GEDCOM은 몇몇 관계나 사건, 전통적이지 않은 가족(일부다처제 등)을 표현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 데이터를 다루는 더 나은 방식도 있었다.&lt;br /&gt;
&lt;br /&gt;
첫 과제는 거대한 GEMDOM 데이터를 관계적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이었다. 기존 GEMDOM 데이터의 한계를 해결하고 최신 소프트웨어와 호환성을 맞추기 위해 PostgreSQL(링크)와 같은 관계적, 공간적 데이터로 인코딩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Event Centrality: 사건을 사람과 장소, 기타 각 요소간의 관계성을 보여주는데 사용했다. 과학적으로 정밀한 방식은 아니나, 데이터 시각화와 조사를 간결하게 만들기 위한 데이터 모델링 패턴에 필수적이었다. 출생, 죽음, 결혼, 이혼이 가장 중요시된 사건이었다. 사건은 장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지리적 데이터화하는데 용이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Event01.png|800px|center|섬네일|사건과 사건 속 인물이 중심성의 핵심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Fuzzy Dates: Kindred Britain 속 여러 인물의 출생, 죽음, 사건 등과 관련된 정확한 시간 데이터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시간 정확도를 나타내는 인터페이스를 만들고, 때로는 InferBirth script (written by Wilson Restrepo, Stanford ‘13)에 나온 규칙에 따라 연도를 추측해야 했다. 그 원리는 개략적으로 자식의 출생일, 배우자의 나이, 출생날 부모의 나이 등으로 추측하는 일종의 알고리즘이다.&lt;br /&gt;
&lt;br /&gt;
*DERIVING NEW MEASURES- Network, Tragedy, Centrality, Depth, Inbreeeding, ODNB Distance, Geospatial, Biographical, Close Links, Badges, Events from Contemporaries, Contextual Events&lt;br /&gt;
&lt;br /&gt;
*INTERACTIVITY AND NARRATIVE&lt;br /&gt;
&lt;br /&gt;
*CODING&lt;br /&gt;
&lt;br /&gt;
*PANELS- Timelines&lt;br /&gt;
&lt;br /&gt;
====Designing====&lt;br /&gt;
&lt;br /&gt;
Jenkins와 Meeks는 University of San Francisco의 디자이너이자 디지털시각화 전문가인 Scott Murray를 프로젝트 팀원으로 합류시켰다. 자세한 디자인 내용은 Murray의 글인 ‘Design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결과물이 Kindred Britain 사이트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1월에 Scott Murray가 Kindred Britain project에 합류했다. 이와 함께 다양한 기준에 따른 관계도를 통합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 착수 당시까지 웹 디자인 측면의 정보 시각화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HTML과 CSS coding을 이용한 시각화 및 사이트 설계가 필요한 단계였다. 이 과정에서 일반인이 사이트를 보기에는 너무 어려울 법한 정보를 간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Vis01.png|800px|center|섬네일|초기 시각화된 정보 그림]]&lt;br /&gt;
&lt;br /&gt;
&lt;br /&gt;
이밖에 사이트 구축을 위해 Query(링크)가 이용되었다. Query는 파일의 내용 등을 알기 위해 몇 개의 코드(code)나 키(key)를 기초로 질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이터 베이스에 존재하는 자료를 사용자가 원하는 조건을 통해 검색하고, 검색된 결과를 자유로이 조회할 수 있는 기능 등을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amp;lt;ref&amp;gt;네이버 블로그 정보글 참조.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irea0609&amp;amp;logNo=220407069096&amp;amp;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링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이용된 Query의 종류: The Node Query, The Biographical Query, The Search Query, The Place Query - 이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원할 시  ‘Designing Kindred Britain’(링크)에서 확인.&lt;br /&gt;
&lt;br /&gt;
==='''Why''' &amp;lt;small&amp;gt;'''왜'''&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노엘 아난(Noel Annan)의 에세이 &amp;lt;''The Intellectual Aristocracy''&amp;gt;에서 '''‘Family connexions are part of the poetry of history'''’(가족유대는 역사 시의 일부분)이라는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lt;br /&gt;
&lt;br /&gt;
'''네트워크 이론과 디지털 기술의 현대적 발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국의 문화가 얼마나 가족적인지를 현대의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역사적 저변 위에 역사의 주제와 문화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 은유, 영국에 대한 생각들을 제안하기 위해 현대적인 방법을 사용했고 영국의 과거에 대한 진실을 찾는 것, 현재와 오늘날 가족이 의미하는 바를 돌아보는 것에 유용되기를 바란다고 하고 있다. 더불어 Kindred Britain을 사용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오프닝 화면에 대표되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 사이의 놀라운 가족 관계를 탐구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는데, 영국은 사이트 이용자가 발견하고, 실험하고, 추측하고, 놀기를 바란다고 부연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해당 프로젝트의 목적을 가늠하게 하는 부분이다.&lt;br /&gt;
&lt;br /&gt;
니콜라스 젠킨스의 에세이 &amp;lt;'''Originating Kindred Britain'''&amp;gt;에서 이 사이트의 생성과 목적에 대해 더 많이 읽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Comment''' &amp;lt;small&amp;gt;'''논평'''&amp;lt;/small&amp;gt;===&lt;br /&gt;
(내용 작성)&lt;br /&gt;
&lt;br /&gt;
&lt;br /&gt;
==='''References''' &amp;lt;small&amp;gt;'''각주'''&amp;lt;/smal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김수리</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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