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지:각 절기의 구경거리와 즐거운 놀이:절일의 세부 내용:모란회
내용
15) 4월의 모란회(牡丹會, 모란 즐기는 모임)
송나라 왕간경(王簡卿)[1]이 일찍이 장자(張鎡)의 모란회(牡丹會)에 참석했다. 여러 손님들이 이미 한 방에 모여 아무것도 없이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주위 사람들에게 “향기가 납니까?”라 물으니, 손님들이 “향기가 납니다.”라 대답했다. 가리고 있던 발을 걷게 하니 모란꽃의 향기가 안으로부터 흘러나와 그윽하게 온 자리에 가득 찼다.
여러 기생들이 술과 안주, 현악기와 관악기를 들고 차례대로 들어왔고 그 가운데 따로 특별히 꾸민 기생 10명이 있었다. 모두 흰옷을 입고, 모든 머리 장식과 옷깃은 전부 모란으로 꾸몄고, 머리에는 조전홍(照殿紅)[2] 가지 1개를 꽂고는 손에는 박판(拍板)[3]을 잡고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했다. 노래가 끝나자 음악을 연주하고서야 기생들이
물러났다. 그러자 다시 발을 드리우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참 있다가 향기가 피어나자 이전처럼 발을 걷으니, 따로 기생 10명이 복장과 꽃장식을 바꾸어 나왔다. 대체로 흰색 꽃가지로 비녀를 꽂으면 자줏빛 옷
을 입고, 자주색 꽃이면 아황색 옷을, 노란 꽃이면 붉은색 옷을 입는다. 이렇게 10순배의 술을 마시면 옷과 꽃이 모두 10번 바뀌게 된다. 그때 부르는 노
래는 모두 옛사람들이 노래한 유명한 모란(牡丹) 시들이다. 술자리가 끝나자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했던 무려 수십 명이 줄지어 서서 손님들을 전송했다. 이때 촛불이 빛나고 향기가 자욱하며 노래와 연주가 다양하게 어우러지니, 손님들이 모두 황홀하여 마치 신선놀이인 듯 여겼다.[4]
고금의 꽃구경 놀이 가운데 이렇게 기이하고 화려한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대개 또한 부귀한 집안의 화려한 운치일 뿐이니, 임원의 청빈한 선비들이야 어찌 이런 놀이를 즐길 수 있겠는가.
다만 이름난 향, 오래된 먹, 촉 지방에서 만든 아름다운 종이, 송나라의 벼루를 얻어 자리에 참석한 손님들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릴 줄 알고, 심부름하는 시골 아이가 차를 달일 줄 알면 마음에 흡족하다. 7~8명의 사람들이 붉은 난간이 있는 누각이나 녹색 이끼가 있는 곳에 가서 그 옆에 평상을 설치하고 고아한 모임을 가진다. 흥취가 지극해지면 흩날리는 모란 꽃잎을 가져다 밀가루에 개고 수유(酥油, 유지방)로 부쳐서 술상에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이것이 선비들이 행하는 큰 꽃놀이이다.
장자의 《상심낙사》에는 ‘투춘당(鬪春堂)의 모란(牡丹)·작약(芍藥) 구경’과 ‘화원(花院)의 자모란(紫牡丹) 구경’을 함께 3월에 넣었다.[5] 하지만 이것은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의 기후에 근거했을 뿐이다. 만약 우리나라 서울의 절기를 가지고 논하자면 모란 구경은 4월인 입하(立夏)[6]와 소만(小滿)[7] 사이에 있어야 한다. 《금화경독기》[8][9]
각주
- ↑ 왕간경(王簡卿):미상.
- ↑ 조전홍(照殿紅):산다화(山茶花, 동백꽃)의 일종.
- ↑ 박판(拍板):박(拍)의 옛 이름. 여섯 개의 단단한 나무쪽을 끈으로 연이어 꿰어서 만들어 박자(拍子)를 맞추는 데 쓰는 악기(樂器).
- ↑ 처음부터 여기까지의 고사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이 중 본문과 내용이 가장 유사한 부분은 《宋稗類鈔》 卷7 〈奢汰〉에 나온다.
- ↑ 장자의……넣었다:장자가 지은 《상심낙사》 〈3월〉에 투춘당의 모란·작약, 화원의 자모란을 나열하고 있다. 투춘당과 화원은 당시의 명소로 추정되나, 자세한 사항은 전하지 않는다.
- ↑ 입하(立夏):24절기(節氣) 가운데 7번째 절기. 곡우와 소만 사이이며 양력 5월 5~6일경.
- ↑ 소만(小滿):24절기 가운데 8번째 절기. 입하와 망종 사이이며 양력 5월 21~22일경.
- ↑ 출전 확인 안 됨.
- ↑ 《임원경제지 이운지(林園經濟志 怡雲志)》4,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9), 536~5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