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용지:부피:곡(斛)
내용
곡(斛)
곡(斛)은 10두의 분량이다. 《한서》 <율력지>에 “10두가 1곡이다. 곡은 각이 진 두(斗)로, 양을 재는 되[量][1]이다.”[2]라 했다. 《광아(廣雅)》에 “곡은 고(鼓)라 하고 네모난 곡은 각(角)이라 한다.”[3]라 했다. 《주례》에는 “율씨(栗氏)가 되를 만들 때 구리와 주석을 거듭 달구면 더 이상 줄어들지 않는데, 총량이 줄어들지 않게 된 뒤에 저울로 재고, 저울로 잰 뒤에 같은 크기로 두드리고, 같은 크기로 두드린 뒤에 측량한다.[4] 그 명(銘)에는 ‘이에 문덕(文德) 있는 임금이 생각하고 찾아 참으로 그 표준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되가 이미 만들어져서 사방의 나라에 드러났다. 길이 그 뒤를 열어 이 물건만을 법칙으로 삼으라 했다.’”【‘문덕 있는 임금이 생각하고 찾았다[時文思索]’는 것은, 바로 이 깊은 덕을 지닌 임금이 생각하고 구하여 백성들을 위해 법도를 세우고 되를 만들었다는 말이다.】라 했다.[5]
《한서》에서 “5가지 되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사방 1척짜리 구리를 사용하여 그 겉면을 둥글게 하는데, 그 옆에 조(庣)【‘庣’는 지(止)와 조(彫)의 반절이다.】가 있다.【안사고(顏師古)는 “조(庣)는 가득 차지 않은 곳이다.”라 했다.】 이 용기의 윗부분은 곡(斛)이 되고 아랫부분은 두(斗)가 되며,【윗부분은 하늘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곡이 되고, 아랫부분은 곡을 엎어 놓은 모양의 바닥이 되는데, 여기에 1두를 담는다.】 왼쪽 귀에 달린 되는 승(升)이 되고 오른쪽 귀에 달린 되는 홉(合)과 약(龠)이 된다. 무릇 되는 약(龠)에서 뛰고, 홉(合)에서 합하고, 승(升)에서 오르며, 두(斗)에서 모이고, 곡(斛)에서 모난다. 이 용기의 역할은 태창(太倉)[6]에서 곡식을 되는 데 있고, 대사농(大司農)[7]이 이를 담당한다.”[8]라 했다.
지금 농가에서 수확한 곡식은, 일반적으로 관청에 수납하거나 시장에 팔거나 가정에 쌓아둘 때에 양이 많으면 곡, 양이 적으면 두, 양이 그보다 적으면 승으로 재고, 다시 반드시 평미레로 평평하게 되니, 가난하건 부유하건 모두 빠뜨릴 수 없는 도구이다.《왕정농서》
[9]
옛날에는 두(豆)·우(區)·【‘區’는 오(烏)와 후(候)의 반절이다.】부(釜)·종(鍾)·유(庾)·병(秉)이라는 되가 있었다. 《춘추좌전》에 “4승이 1두이고, 4두가 1우이고, 4우가 1부이며, 10부가 1종이다.27 또 2.5부가 1유이고, 16곡이 1병이다.”라 했으니, 모두 옛 되의 이름이다. 지금은 오직 승(升)·두(斗)·곡(斛)을 기준으로 삼는데, 명칭이 가장 간단하고 요긴하여 대개 출납하는 일을 계산하기 쉽기 때문이다.《왕정농서》[10]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모두 10두를 1곡【곡은 곧 석(石)이다.】으로 삼았지만, 우리나라는 15두를 1곡으로 삼으니, 이는 잘못된 기준을 답습하고 미봉책에 의지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수량을 세는 기준을 잃으면 길이와 부피의 쓰임이 어그러지니, 그 단위를 바로 고쳐 10두를 1곡으로 삼아야 한다.
【더러는 우리나라에서 쓰는 두가 작아서 우리의 15두가 중국의 10두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도 옳지 않다. 정말로 두를 작게 만들었다면 두와 승을 고쳐 참다운 크기를 구해야 할 것이니, 그 근본을 바로잡지 않고 말단만 가지런히 해서는 안 된다. 천지(天地)의 수(數)는 1에서 나오고 10에서 완성되니, 10은 수의 기준이다. 이 때문에 작(勺)이 쌓여 홉(合)이 되고, 홉이 쌓여 승(升)이 되며, 승이 쌓여 두(斗)가 되고, 두(斗)가 쌓여 곡(斛)이 되니, 모두 10을 기준으로 했다. 이 때문에 옛날 두의 크기가 작더라도 10두가 1곡이었고, 지금 중국 두의 크기가 크더라도 10두가 1곡이다. 10두가 1곡인 점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제도인 것이다. 만약 바꾸어서는 안 되는데도 바꾼다면 만물이 그 법칙을 잃어 그 용도가 실제로 맞추면 일에서 어그러진다. 무릇 이와 같으므로 지금의 곡이 15라는 수에 맞추면 그 기준을 잃는 것이고, 되를 헤아리는 법칙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 도수(度數)를 어기는 것이다. 지금의 곡으로 계산하면 수량이 십진법으로 똑 떨어지지 않아 쓰기 어렵고, 나귀에 짐을 실으면 너무 무거워 운반하기 어렵다. 이 어찌 잘못된 점을 그대로 구차하게 답습하여 끝내 고치지 않을 일이겠는가?
또 우리나라의 두가 작더라도 꼭 잘못된 것은 아니고, 중국의 두가 크더라도 꼭 옳은 것은 아니다. 옛날 두의 크기를 비록 밝힐 수 없지만 위(魏)나라 이회(李悝)[11]의 말을 살펴보면, “100묘의 농지에서 평년에는 조 150석을 거두고, 큰 풍년이면 4배로 600석을 거두며, 작은 풍년이면 2배로 300석을 거둔다. 1인당 1개월에 1.5석을 먹는다.”[12]라 했으니, 조 1.5석은 좁쌀 7두이다. 또 한나라 제갈량이 하루에 먹는 양이 몇 승을 넘지 못하자 사마의는 그에 대해 먹는 양은 적고 하는 일은 많다고 여겼다. 이런 여러 주장으로 미루어보면 우리나라의 두와 승이 옛 제도에서 멀지 않고, 오히려 지금 중국의 두와 승의 규모가 너무 큰 데서 잘못된 것이다. 지금 중국의 두 중에 우리나라의 두보다 2배가 넘는 것을 ‘당두(唐斗)’라 하고, 또 작은 두로서 당두에 비해 겨우 절반 크기인 두를 ‘주두(周斗)’라 한다고 한다. 대체로 되의 크기는, 율관(律管)[13]의 크기를 정해 소리와 기(氣)의 호응을 구한 뒤에야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10두를 1곡으로 하는 일의 경우는 바꿀 수 없는 제도이다.
[안] 지금 민간의 두와 곡의 제도는 껍질을 깨끗이 대낀 곡식 15두를 1석으로 삼고 껍질을 대끼지 않은 곡식은 20두를 1석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제는 유형원의 주장대로 나무로 10두들이 곡을 만들어 미곡을 출납하고, 쌀은 따로 작은 둥구미를 만들어 둥구미 1개마다 10두씩 담아야 한다. 껍질을 대끼지 않은 곡식은 예전대로 큰 둥구미를 쓰되 둥구미 1개에 2곡씩 담는다. 나무로 만든 곡은 윗부분은 좁게 만들고 아랫부분은 넓게 만드는데, 네 모서리와 아가리를 모두 철엽으로 감싸서 못질하고 양 옆면에는 쇠고리 한 쌍을 박은다음 길이 5~6척인 팔뚝만 한 나무를 끼워 들기 편하게 한다.】《반계수록》[14]
각주
- ↑ 되[量]:분량을 헤아리는데 쓰는 그릇.
- ↑ 10두가……되[量]이다:《漢書》 卷21上 <律曆志> 第1上, 967~968쪽. 十斗爲斛……斛者,角斗平多少之量也. 모양은 그림과 같다.
- ↑ 곡은……한다:《廣雅》 卷8.
- ↑ 율(栗)씨가……양을 측정한다:《주례주소》를 참조하여 옮겼다.
- ↑ 율씨가……라 했다:《周禮註疏》 卷40 <冬官考工記> 第6 “栗氏”(《十三經注疏整理本》 9, 1295~1298쪽).
- ↑ 태창(太倉):중국 고대 수도에 설치된 곡식창고.
- ↑ 대사농(大司農):한나라 때의 관직으로 국가재정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치속내사(治粟内史)라고 했다가 경제(景帝) 때 대농령(大農令), 무제(武帝) 때 대사농으로 변경되었다.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호조판서(戶曹判書)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 ↑ 《漢書》 卷21上 <律曆志> 第1上, 967~968쪽.
- ↑ 《王禎農書》 卷16 <農器圖譜> 10 “倉廪門” ‘斛’, 299쪽;《農政全書》 卷23 <農器> “圖譜”3 ‘斛’(《農政全書校注》, 579~580쪽).
- ↑ 《王禎農書》 卷16 <農器圖譜> 10 “倉廪門”, 298~299쪽;《農政全書》 卷23 <農器> “圖譜”3 (《農政全書校注》, 580쪽).
- ↑ 이회(李悝):BC 455~395. 전국시대의 정치가. 위(魏)나라 문후(文侯)를 섬겼다. 변법(變法)을 주장하고 지력(地力)을 다 활용할 것을 주장하여, 농민들에게 밭을 깊게 갈게 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위나라가 이로 인해 부강해져 전국시대 초기의 강대국의 하나가 되었다.
- ↑ 100묘의……먹는다:《文獻通考》 卷8 <錢幣考一> “歴代錢幣之制”.
- ↑ 율관(律管):대나무를 잘라 만든, 음정을 정하는 도구. 대나무 관(管)의 길이로 음계를 확정한다. 저음부터 계산하여 율(律)로 불리는 6개의 홀수 관과 여(呂)로 불리는 6개의 짝수 관을 정하는데, 이를 합쳐서 ‘12율(律)’이라 한다.
- ↑ 《磻溪隧錄》 卷25 <續篇> “度量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