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지:각 절기의 구경거리와 즐거운 놀이:때에 따라 모이는 모임:월회

pungseok
최시남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0월 29일 (목) 17: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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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7) 월회
명나라의 엄무순(嚴武順)[1], 문계상(聞啓祥)[2] 등 여러 사람이 무림(武林)[3]에 살면서 월회(月會)의 규약을 지었다. 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얻기 어려운 것은 훌륭한 벗이고, 가장 듣기 어려운 것은 좋은 말이다. 말로만 서로 그리워하는 관계가 어찌 얼굴을 마주하며 친하게 지내는 일만 하겠으며, 홀로 앉아 가만히 궁리하는 일이 어찌 귀에 대고 말해주어 흔쾌히 고치는 일만 하겠는가?”[4]
내가 생각하기에 이 모임엔 5가지 좋은 점이 있다. 의심나는 뜻을 서로 질문하는 점이 하나이다. 훌륭한 문장을 함께 감상하는 점이 둘이다. 시문과 글씨를 연구하는 일에 서로 영향을 미쳐 보탬이 되는 점이 셋이다. 모임의 횟수를 한 달 내에 단 하루로 정하였으니, 여유 있으면서도 정기적인 점이 넷이다. 번갈아가며 손님과 주인이 되어 돌아가며 초대하고 응하기 때문에 이를 오래할 수 있고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점이 다섯이다.
다만 도(道)를 함께하고 뜻을 함께함이 마치 도연명(陶淵明)[5]이 찾는 소심인(素心人, 소박한 마음을 지닌 사람)[6]이나 두보(杜甫)가 왕래한 주산인(朱山人)[7]과 같은 이를 얻어야 비로소 이 모임을 만들 수 있다. 진실로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면 도리어 진번(陳番)이 서치(徐穉)[8]를 대접하기 위한 평상을 높이 걸어 놓거나 [9] 진등(陳登)[10]이 높은 누대에 혼자 누워, 차라리 손님을 대접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금화경독기》[11][12]

각주

  1. 엄무순(嚴武順):?~?. 중 국 청 나라의 문인. 절강성(浙江省) 여 항(餘杭) 사 람. 자 는 인공(訒公), 호는 무림(武林).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나 형 엄조어(嚴調御), 동생 엄칙제(嚴敕齊)와 함께 여항삼엄(餘杭三嚴)으로 이름났다.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사람을 가려 사귀며 그들과 모임을 갖고 모임 규약에 대하여 쓴 글이 《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1191에 실려 있다. 《절강통지(浙江通志)》 卷187 〈인물(人物)〉 “의행(義行)”편을 살펴보면, 엄무순은 고을의 현인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에 고을의 부호에게 요청하여 구휼을 베풀게 하고, 도적이 들끓었을 때에는 읍장(邑長)에게 부호들이 무비를 갖추는 데 기여하도록 제안하여 고을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2. 문계상(聞啓祥):?~?. 중국 청(淸)나라 사람. 자는 자장(子將). 엄무순(嚴武順)과 동시대를 살았고 같은 모임의 성원이다. 저서로 《종도유의(種桃柳議)》가 있다.
  3. 무림(武林):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별칭. 항주에 무림산(武林山)이 있어서 얻은 이름이다.
  4. 얻기……하겠는가:《說郛續》 卷29 〈月會約〉(《續修四庫全書》1191, 383쪽).
  5. 도연명(陶淵明):365~427.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자(字)는 무량(無亮).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집 앞에 버드나무 5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선생이라 칭하였고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된 적이 있어 ‘도팽택(陶彭澤)’이라 불리기도 한다.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계기로 팽택현령을 사임하였는데, 이때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어 “봉급으로 5말의 쌀을 받으려고 시골의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 한 일이 있다.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5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며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담박한 시풍이 그의 특징이다.
  6. 소심인(素心人):도연명이 지은 〈이거(移居)〉시에 “예전부터 남촌에 살고자 한 이유는 살기 좋은 데를 골라서가 아니네. 소심인이 많다는 말을 듣고 새벽부터 밤늦도록 자주 더불어 즐기고자 해서였네.(昔欲居南村, 非爲卜其宅. 聞多素心人, 樂與數晨夕.)”라 했다.
  7. 주산인(朱山人):?~?. 중국 당(唐)나라 두보(杜甫)가 금리(錦里)에 있을 때 남촌의 주산인(朱山人)과 왕래하면서 시를 지으며 지기(知己)로 지냈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산인은 오각건(烏角巾)을 쓰고 밤이며 토란을 수확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은둔하던 도사로 보인다. 두보의 시에 그에 대하여 “보아하니 그대는 도기가 많은지라, 이제부터는 자주 따르며 모시리다.(看君多道氣, 從此數追隨.)”라 했다.
  8. 서치(徐穉):97~168. 중국 후한 예장(豫章) 남창(南昌) 사람. 자는 유자(孺子). 집안이 가난해 몸소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공검(恭儉)했고 의롭게 양보할 줄도 알았다. 여러 차례 진번(陳番)과 황경(黃瓊)의 천거를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살았다.
  9. 진번(陳番)이……놓거나:중국 후한(後漢)의 진번(陳番, 99 이전~168)이 남창(南昌) 태수로 있을 때 평상을 벽에 걸어 두고서 빈객을 대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은사(隱士)인 서치(徐穉, 97~168)가 올 때만은 평상을 내려서 펴고 그를 맞이하였고, 서치가 가고 나면 다시 걸어 두었다. 여기서는 도연명(陶淵明)이 찾던 소박한 사람이나 두보(杜甫)가 인정하는 충심어린 이가 아니라면 맞이하여 대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0. 진등(陳登):?~?.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무장. 자는 원룡(元龍). 《삼국지(三國志)》권7 〈위서(魏書)진등전(陳登傳)〉을 살펴보면, 국사(國士)인 허사(許汜)가 진등을 찾아갔는데 손님으로 대하지도 않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자기는 큰 침상 위에 눕고 허사에게는 그 아래 침상에 눕게 하였다. 허사가 이 일로 불평을 하자, 유비(劉備)가 구전문사(求田問舍, 먹고 살 궁리만 하고 큰 뜻이 없는 자세)나 하는 당신에게 그 정도라도 대접을 했다면 매우 잘해 준 것이고, 만약 소인 대접을 하려 했다면 자기는 100척 높이의 누대 위에 올라가 눕고 당신은 땅바닥에 눕도록 했을 것이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해진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11. 출전 확인 안 됨.
  12. 《임원경제지 이운지(林園經濟志 怡雲志)》4,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9), 580~5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