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지:각 절기의 구경거리와 즐거운 놀이:절일의 세부 내용:중화절
내용
6) 중화절(中和節, 2월 1일)의 풍년 기원
정월 대보름에는 볏짚을 엮어 둑기(纛旗, 소꼬리로 장식한 큰 의장기) 모양으로 만들고 이를 장대 끝에 매달아 집 옆에 세운 뒤 새끼로 묶어 고정시켜 놓는데, 이것을 ‘볏가리[禾積]’라 하니 대개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다.
2월 초하루가 되어서야 볏가리를 달아 놓은 볏가릿대[禾竿]를 풀어서 내린 다음 송엽협병(松葉夾餠)[1]을 만들어 노비들에게 그 나이 수대로 대접한다. 민간에서는 이 2월 초하루를 ‘노비일(奴婢日, 머슴날)’이라 한다. 봄 농사가 이날부터 시작되므로 이런
음식들을 대접한다고 한다. 《한양세시기》[2]
중국의 옛 풍속은 2월 2일을 ‘상공일(上工日)’이라 했다. 대개 농가의 일꾼들이 이날부터 농사일을 시작했던 까닭에 ‘상공(上工)’이라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노비일과 흡사한데, 다만 하루가 늦을 뿐이다. 그러나 《당서(唐書)》 〈덕종(德宗)[3] 본기(本紀)〉를 살펴보니, 조서를 내려 “2월 1일(본래 1월 그믐이었으나)을 중화절(中和節)로 삼고, 또 백관(百官)들에게 농서를 지어 올리게 했으며, 사농(司農)[4]에게 올벼와 늦벼의 종자를 올리게 했다.”[5]라 했다. 또 〈이필(李泌)[6]전〉
에 “2월 초하루에는 민간에서 의춘주(宜春酒)[7]를 빚어 구망신(句芒神)[8]에게 제사지내며 풍년을 기원한다.[9]”라 했다. 우리나라에서 중화절에 종복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 또한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다. 《금화경독기》[10][11]
각주
- ↑ 송엽협병(松葉夾餠):정월 대보름날 달아놓은 볏가릿대[禾竿]를 내리고 그 안에 넣어 놓는 떡. 크기는 손바닥 보다 조금 작다. 안에 콩이나 팥, 혹은 대추나 붉은 수수로 소를 넣어 시루에 얹고 솔잎을 켜켜이 깔고 쪄서 푹 익힌 다음 꺼내어 솔잎을 걷어내고 참기름을 발라서 먹는다. 지금의 송편과 비슷하다. 《정조지(鼎俎志)》 권7 〈절식지류(節食之類)〉 “중화절식(中和節食)” ‘송엽병방(松葉餠方)’에서 중화절에 먹는 송엽병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 ↑ 《京都雜志》 卷2 〈歲時〉 “二月初一日”(《조선대세시기》3, 81쪽).
- ↑ 덕종(德宗):742~805. 중국 당(唐)나라의 제9대 황제(재위 779~805). 이름은 이괄(李适)이며 대종(代宗)의 장자이다. 쇠퇴해 가는 당나라를 재건하려고 애썼으며, 농사를 장려하고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여 체제를 개혁하려 노력했으나 귀족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 ↑ 사농(司農):농사를 담당하는 관직.
- ↑ 2월……했다:《舊唐書》 卷13 〈本紀〉13 “德宗” 下(《舊唐書》 2, 367쪽).
- ↑ 이필(李泌 ):?~?. 중국 당나라의 관료. 자는 장원(長源). 박학다식했으며 늘 숭산(嵩山)과 화산(華山) 및 종남산(終南山)을 오가면서 신선술을 흠모했다. 천보(天寶, 742~756) 연간에 한림이 되어 태자를 모실 때 태자가 매우 후하게 대했으나, 이후로 양국충(楊國忠)의 질시를 받아 낙향하여 은거했다. 숙종(肅宗)이 즉위한 후 다시 기용되어 중흥의 방략을 함께 의논했으나 이보국(李輔國)의 미움을 사서 마침내 조정을 떠나 형산(衡山)에 은거했다.
- ↑ 의춘주(宜春酒):미상. 춘주(春酒)는 겨울에 담가서 봄에 익는 술을 말하는데, 의춘주는 구망신에 제사 지내기 위해 특별히 담근 술을 의미하는 듯하다. 《정조지(鼎俎志)》 권7 〈온배지류(醞醅之類)〉 “시양류(時釀類)” ‘춘주방(春酒方)’에 춘주 담그는 법이 있다.
- ↑ 구망신(句芒神):구망(句芒)은 본래 옛 전설에 의하면 소호씨(小皥氏)의 아들로, 이름은 중(重)이고, 나무를 담당하는 관원이었다. 후대에는 산림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졌다.
- ↑ 2월……기원한다:《新唐書》 卷139 〈列傳〉 64 “李泌” (《新唐書》 15, 4367쪽).
- ↑ 《金華耕讀記》 권4 〈上工日〉, 19쪽.
- ↑ 《임원경제지 이운지(林園經濟志 怡雲志)》4,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9), 523~5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