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pungseok
민철기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7월 10일 (금) 12:0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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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가산(假山)은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돌을 모아 쌓아서 인공적으로 만든 작은 산을 말한다. 석가산(石假山)이라고도 한다. 『임원경제지 이운지』에 제작방법이 실려있다.

가산을 배경으로 연못을 구축한 사례

내용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이운지(林園經濟志 怡雲志)』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산

파일:석가산1.PNG
가산 사례1
《》

파일:??.png
<임원경제지 이운지> 오사카본


참고문헌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정진성ㆍ정명현ㆍ김수연 외) 옮김, 『임원경제지 이운지(林園經濟志 怡雲志)』1, 풍석문화재단, 2019.

링크

[https://]


추가중

그림 및 사진 추가예정


못 주변에 석가산(石假山, 돌로 만든 인공산) 만드는 법 만약 물에 달아 반질반질한 돌을 얻을 수 없으면 단단하지 않은 돌을 쪼아서 괴석(怪石)을 만든다. 이 괴석을 연못가에 여러 겹으로 쌓아서 산을 만드는데, 바위와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어 보이도록 한다. 단풍나무·소나무·오죽(烏竹)·진달래·철쭉·패랭이꽃·백합·범부채 따위를 많이 심고, 못가에도 여뀌를 심는다. 산의 뒤쪽에는 큰 항아리를 두고 물을 저장한 뒤, 대나무를 구부려 산꼭대기로부터 굽이굽이 돌면서 물을 끌어 내렸다가 못 가까이에 와서 폭포가 되어 항아리에 떨어지도록 만든다. 대나무로 연결한 그 물길은 기와 굽는 흙으로 견고하게 바르면 물이 새지 않는다. 이 석가산을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면 저절로 기이한 풍취(風趣)가 많이 느껴진다. 《증보산림경제》128


이운지 권제1 129쪽


섭소옹(葉紹翁)129의 《사조문견록(四朝聞見錄)》130에는 오거(吳琚)131의 정원과 못의 제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132 “성에 기대어 돌을 여러 겹으로 쌓아 이를 ‘남록(南麓, 남쪽 산록)’이라 한다. 이 남록의 뒤편으로 계단을 몇 층으로 높이 쌓고 그리로 올라가서 항아리에 물을 길어 대롱으로 물을 흘려보낸다. 그러면 패옥이 찰랑거리듯이 졸졸 물소리를 내며 네모난 못으로 흘러드는데, 이 못은 사방 4~5척의 크기다. 이 남록의 뒤편에서 성으로 올라서면 소대(嘯臺)가 있고, 이 소대에서 동굴 문으로 들어가면 여기에는 둥그렇게 벽도(碧桃)가 심어져 있고, 바위가 있어서 바둑을 두면서 앉아 있을 수 있다. 【 안 아마도 ‘앉아서 바둑을 둘 수 있다’로 고쳐야 될 듯하다.】 여기서 서쪽으로 굽은 길을 걸어가다 길을 꺾어서 돌면 도미동(荼蘼洞)133으로 들어가는데, 이곳은 꼭대기가 띠풀로 덮여 있으며 원형이다. 그 안의 땅은 겨우 1심(尋, 8척)에서 1장(丈) 정도지만 등나무 덩굴이 엉켜 자라고, 꽃과 대나무가 줄지어 있고, 새들은 지저귀며 학은 울어 대니, 마치 산의 숲속에 있는 듯이 적막하다. 일반적으로 성안에 살거나, 끌어올 수원이 없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본받아서 설치할 만하다. 다만 항아리를 껴안고 못에 물을 대느라 평생 힘들게 애를 써야 하는 처지를 면하지 못한다.134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135


129 섭소옹(葉 紹翁):?~?. 12세기경 중국 송(宋)나라의 문인. 자는 사종(嗣宗), 호는 정일(靖逸). 대리사승(大理寺丞)과 형부낭중(刑部郎中)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진덕수(眞德秀, 1178~1235)와 교분을 유지하였다. 벼슬을 그만둔 뒤에는 절강성(浙江省) 전당호(錢塘湖)에 은거하였다. 저서에 《유원불치(遊園不値)》등이 있다. 130 사조문견록(四朝聞見錄):섭소옹의 저술. 5권. 송나라 고종(高宗)·효종(孝宗)·광종(光宗)·영종(寧宗) 4황제의 조정에서 일어난 사적과 야사 등을 수록하고 있다. 131 오거(吳琚):?~1189. 중국 송나라의 문인. 진안군(鎭安軍) 절도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운학집(雲壑集)》 등이 있다. 132 사조문견록(四朝聞見錄)에는……기록하였다:《四朝聞見錄》 卷2 〈乙集〉 “呉雲壑”. 133 도미동(荼蘼洞):소식(蘇軾)이 감탄한, 수려한 경치를 지닌 계곡. 소식이 지은 ‘도미동(荼蘼洞)’이라는 시제(詩題)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자세한 위치는 미상이다. 《東坡詩集註》 卷29 〈題詠〉 “荼蘼洞”에 시가 있다. 134 다만……못한다:《장자(莊子)》 第12 〈천지(天地)〉 편에 나오는 자공(子貢)과 어느 노인과의 고사를 암시하는 구절이다. 자공은 노인에게 물을 길어오기 위해 편리한 도구를 이용하라고 말하지만, 노인은 도구를 이용하려는 마음 곧 기심(機心)이 있으면 도(道)를 지킬 수 없다고 자공을 훈계했다.

이운지 권제1 129~130쪽


가산(假山, 인공으로 만든 산)으로 뱀을 물리치고 안개 일으키는 방법 변경(汴京)146의 간악(艮嶽)147 안에 웅황(雄黃)148과 노감석(爐甘石)149 수만 근을 쌓아 가산을 만들었다. 대개 웅황을 바위 구멍이나 길거리 사이에 쌓아 두면 뱀이나 독사를 물리칠 수가 있다. 노감석의 경우 비가 지나간 뒤 햇볕이 내려 쪼이면 이것이 습기가 수증기처럼 올라오게 해서 이 습기를 남기(嵐氣)나 안개와 비슷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간악의 내부에 이 두 석물을 쌓았다. 《농전여화(農田餘話)150》151


146 변경(汴京):중국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 일대에 있던 남송(南宋)의 수도. 147 간악(艮嶽):송나라 휘종(徽宗)이 변경 북동쪽[간(艮) 방위]에 인공으로 만든 산. 만세산(萬歲山)이라고도 한다. 148 웅황(雄黃):삼류화비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광물. 거풍(祛風) 및 조습(燥濕)의 효능이 있어 개선(疥癬)과 파상풍(破傷風) 등의 약재로 쓴다. 석웅황(石雄黃) 또는 석황(石黃)이라고도 한다. 149 노감석(爐甘石):탄산아연을 주성분으로 하는 능아연석(菱亞鉛石)이나 수아연석(水亞鉛石) 등의 광물. 지혈(止血)과 종기의 해소 및 살균(殺菌)의 효능이 있어 안병(眼病)과 창상(創傷) 등의 약재로 쓴다. 감석(甘石) 또는 양간석(羊肝石)이라고도 한다.


假山辟蛇起霧方 汴京 艮嶽內, 築雄黃、 爐 甘石數萬斤. 蓋雄黃築于嵒穴、 地道間, 可以辟蛇虺. 爐甘石, 雨過之後, 日灸之則有濕氣蒸蒸然, 以象嵐 霧, 故于中築二物. 《農田餘話》

이운지 권제1 132~133쪽



호석(湖石):태호(太湖)에서 나는, 구멍이 많은 돌. 쌓거나 갈아서 가산(假山)을 만들기에 알맞다.

이운지 권제1 191쪽


[운림석보]268 태호석은 성질이 단단하면서 윤기가 있고, 깊숙이 뚫린 구멍이 앞뒤로 통해 있으며, 험하고 괴이한 형세가 있다. 어떤 종류는 색깔이 희고, 어떤 종류는 색깔이 푸르면서 검으며, 어떤 종류는 약간 푸르다. 그 바탕에는 무늬와 결이 가로와 세로로 나 있고, 농락(籠絡, 새장이나 그물 같은 무늬)이 나타나기도 하고 숨어 있기도 하면서269, 돌의 표면에 패인 구멍이 두루 많다. 이 구멍은 대개 바람과 파도에 부딪쳐서 생긴 것이므로 ‘탄자와(彈子窩)’라 한다. 돌을 수집하는 사람은 쇠망치와 끌을 가지고 깊은 물속에 들어가므로 채굴 작업이 꽤 어렵고 힘들다. 기이하고 교묘한 돌을 헤아려서 취하고, 커다란 동아줄로 꿴다. 큰 배를 띄우고 나무 시렁[架]을 설치하여 여기에 밧줄을 감아서 돌을 꺼내 올린다. 꺼낸 돌들 사이에서 가파른 바위가 우뚝 솟아오르는 형세가 약간 있는 돌이 있으면 곧장 깎고 갈아 교묘하게 만든 뒤, 다시 물속에 넣어둔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바람과 물에 부딪치고 쓸리면 돌의 결이 살아 있는 듯하다. 이 돌 중 높이가 가장 높은 돌은 3~5장이지만, 바닥 너비는 십몇 척을 넘지 않으며 너비가 간혹 1척 남짓한 돌이 있기도 하다. 이런 돌은 오직 헌함(軒檻)270에 세워 놓거나 가산(假山)271을 꾸미고 다듬는 데에 알맞으며, 또는 원림(園林)에 쭉 배열해도 상당히 기이하여 훌륭하다. 크기가 작으면서도 기이하여 궤안 사이에 놓아 둘 수 있는 돌도 간혹 있다.

270 헌함(軒檻):누각의 바깥 둘레에 난간이 있도록 만든 좁은 마루. 271 가산(假山):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돌을 모아 쌓아서 인공적으로 만든 작은 산.

이운지 권제3 525~526쪽



덕적석(德積石) [금화경독기]389 덕적도(德積島)390는 서산(瑞山)391에 있다. 이 섬 북쪽 바다 방면의 바닷가 부근 산기슭에서 품질이 좋은 돌이 많이 난다. 모두 파도에 부딪치고 깎이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 표면의 주름과 비늘 모양이 태호석(太湖石)의 ‘탄자와(彈子窩)’와 비슷하다. 높은 바위 모양과 깊은 구멍은 구름과 연기가 모여드는 형세를 이루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돌 중에서 이 돌을 으뜸으로 삼는다. 큰 돌은 몇 십 척이고 작은 돌이라도 3~5척으로, 다만 정원이나 객사에 심어 가산(假山)을 꾸밀 수 있다. 그 돌 중에서 주먹만 한 크기로, 기이하고 교묘하여 궤안(几案) 위에 장식물로 둘 만한 돌은 10개 중에서 1~2개도 얻기 힘들다.

이운지 권제3 554~555쪽


관련 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212

위키백과-가산 http://ko.wikipedia.org/wiki/%EA%B0%80%EC%82%B0_(%EC%9D%B8%EA%B3%B5_%EC%82%B0)

문화콘텐츠닷컴-창덕궁 조경이야기 - 가산(假山)과 괴석(怪石)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5&cp_code=cp0507&index_id=cp05070027&content_id=cp050700270001&search_left_menu=2




관련 전거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9년 기축 > 3월 2일 http://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C0_A09_03A_02A_00010&solrQ=query%E2%80%A0%E5%81%87%E5%B1%B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JT_AA$solr_toalCount%E2%80%A010$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BD_ITKC_JT_C0_A09_03A_02A_00010

종묘(宗廟)의 남쪽에 가산(假山)을 증축(增築)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 정조 9년 을사 > 8월 27일 > http://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V0_A09_08A_27A_00050&solrQ=query%E2%80%A0%E5%81%87%E5%B1%B1$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JT_AA$solr_toalCount%E2%80%A010$solr_curPos%E2%80%A07$solr_solrId%E2%80%A0BD_ITKC_JT_V0_A09_08A_27A_00050

이극문(貳極文)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리에 수강재(壽康齋)를 세웠다. 자경전(慈慶殿)을 영건(營建)할 때에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철거(撤去)하고 그 우물을 파고는 소재(小齋)를 세워 내려다 보게 하였다. 이곳은 태조조(太祖朝) 수강궁(壽康宮)의 옛터로서 《여지승람(與地勝覽)》에 기재되어 있다. 이어 그 재(齋)를 수강재(壽康齋)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국고전종합DB-간이집-애산당기(愛山堂記)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215A_0030_040_0060&solrQ=query%E2%80%A0%E5%81%87%E5%B1%B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169$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BD_ITKC_BT_0215A_0030_040_0060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만보(漫步)하면서 서로 대할 수 있는 산이라고 해야 관악(冠岳)밖에는 있지 않은데, 관악으로 말하면 그저 땅 위로 솟아오른 하나의 범상한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거리 역시 가깝지가 않고 마냥 멀기만 하니, 아침과 저녁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나 날이 흐리고 맑은 데 따라 다르게 보이는 산의 모습은 비록 볼 수가 있다 할지라도, 그 진면목을 직접 자세히 살피면서 멋진 경치를 음미할 도리는 전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는 상공이 산을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또 상공은 배공(裴公)이 바윗돌을 끌어모아 산의 모양을 만들고는 산골짜기와 같은 분위기가 우러나오도록 조성한 그 솜씨를 은근히 과시하면서 직접 답사하지 못하는 한스러움을 보상받으려고 한 옛일을 결코 본받으려 하지도 않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상공과 배공이 모두 산을 사랑하면서도 그 뜻은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하겠는데, 하여튼 이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라도 가산(假山)과 같은 것을 만들 생각을 어떻게 대신(大臣)이 된 입장에서 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무릇 대신(大臣)이라고 한다면, 나라가 편안해져야 자신도 더불어 편안하게 느끼고 나라가 위태로울 경우에는 더불어 그 위태로움을 같이하며, 다른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근심하고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게 된 뒤에야 자신도 즐거워하는 그런 자세를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