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용지:복식 도구:옷과 갖옷:편복
편복(便服)[1]
주자는 만년에 야복(野服)[2]을 입고서 손님을 만났는데, 손님 자리에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을 붙였다. “근래에 오랜 병으로 인해 움직임이 어려워 결국 야복을 입고서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위는 상의, 아래는 치마, 대대, 모난 신[方履]으로 되어 있어, 양삼(涼衫)[3].에 비하면간편하지 않습니다. 그중에 편한 점은 다만 띠를 묶으면 예를 차릴 수 있고, 띠를 풀면 한가히 거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4]나대경(羅大經)[5]은 《학림옥로(鶴林玉露)》<ref《학림옥로(鶴林玉露)》:남송(南宋)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책이다. 나대경이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은 청담(淸談)을 하인에게 시켜 기록하게 하고, 그 기록을 책으로 묶은 것이 《학림옥로》이다. 이 책은 18권으로, 천(天)・지(地)・인(人)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ref> 에 그 제도를 매우 상세하게 실었다.
【야복은 심의와 비슷하나, 다만 상의와 치마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상의는 황색, 백색, 청색을 모두 쓸 수 있고, 곧은 깃[直領]을 달아 띠 2개로 묶는다.149 검은색으로 가선을 두르며, 길이는 무릎과 나란하다. 치마는 반드시 황색을 써야 하고, 가운데와 양옆이 모두 4폭이며, 서로 붙이지 않는다. 두대(頭帶)[6]는 모두 같은 색을 써서 황색 치마의 뜻을 취한다.[7] 따로 흰 견(絹)으로 대대(大帶)를 만드는데, 대대의 양 가장자리에는 청색이나 흑색으로 가선을 두른다. 동년배를 만날 때는 대대를 묶고 아랫사람을 만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또 “야복(野服)이라 하기도 하고, 편복(便服)이라 하기도 한다.”[8]라 했다.
대개 주자가 평상시 거처할 때 심의를 입기 좋아했기 때문에 벼슬하지 않을 때의 편복으로 또한 상의와 치마로 된 제도를 썼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직 조복과 제복에만 상의와 치마가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상의와 치마의 구분이 없다. 집에서는 도포를 상복(上服, 겉옷)으로 삼고 있으니, 야복은 간편한 점을 취해야 할 것이다.
송나라 때의 양삼 제도는 지금 자세히 알 수 없다. 《당서(唐書)》 〈여복지(輿服志)〉에서는 “사인(士人)은 모시로 만든 난삼(襴衫)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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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 없습니다가 난삼 소매의 표(褾)에 선(襈) 대기를 청했다.【안. 표(褾)는 소매 끝이고, 선(襈)은 가선이다.】 허벅지[骻] 부분이 트인 옷을 결과삼(缺骻衫)[9]이라 하는데, 서민들이 입는다.” [10]라 했다. 왕사의의 《속삼재도회》에 결과삼 그림이 있는데,[11] 좁은 소매에 깃을 교차해서 입고 상의의 앞뒤가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행의(杏衣)【민간에서는 중치막[12]이라 부른다.】와 비슷하나 다만 소매가 행의에 비해 둥글고 넓지 않을 뿐이다.
나는 결과삼 제도를 따르되 이를 약간 변통하고자 한다. 양 가장자리에 첨(襜)【민간에서는 무[13]라 부른다.】을 대어 꿰매어 앞뒤를 두루 잇되, 오직 상의의 등허리 아래만 터서 말타기에 편하게 한다. 겨울과 봄에는 겹[裌]으로 만들고, 여름과 가을에는 홑겹[禪]으로 만든다【안. ‘禪’은 음이 단(單)이고, 옷을 겹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겨울에는 주(紬)[14]를 겹으로 만들고서 그 안에 솜을 쟁여 넣어 추위를 막는다. 손님을 만날 때는 그 위에 띠를 묶고, 제사나 연회 때는 그 위에 도포를 입고 띠를 묶는다. 집안의 젊은이들이 존장(尊丈, 어른)을 뵐 때도 이 옷을 입도록 허락한다면 일을 보기에도 편한 데다가 중치막[杏衣] 등의 넓은 소매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서 아낄 수 있을 것이다.《금화경독기》
- ↑ 편복(便服):편복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평상시에 입는 옷[常服]’이다. 조선시대 남자들의 기본 복식은 바지와 저고리이며, 그 위에 포(袍)를 입었다. 조선시대는 의(義)와 예(禮)를 존중하던 시대였기에 사대부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집에서도 포를 착용하는 것을 예의로 여겼다. 여기서 서유구가 말하는 ‘편복’은 말 그대로 ‘편한 옷’으로 주희의 야복을 말한다
- ↑ 야복(野服):야복은 출토 유물이 없어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지만, 예를 들어 송시열(宋時烈)은 초야에 거주할 때 주희를 따라 야복을 직접 착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입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야복은 다음 그림과 같다.
- ↑ 양삼(涼衫):포(袍)의 한 종류이다
- ↑ 《鶴林玉露》 卷8. 《鶴林玉露》에 인용된 이 글은 원래 주희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시골에 머물며 손님들에게 내걸어서 보인 글인 ‘致仕後客位咨目’을 재편집한 내용이다. 야복으로 손님을 맞는 데 대해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다.
- ↑ 나대경(羅大經):1196~1242. 자는 경륜(景綸)이고 호는 유림(儒林)・학림(鶴林)이며, 남송 여릉(廬陵, 지금 강서 길안 지역) 사람이다.
- ↑ 두대(頭帶):치마 머리 부분을 가로지르는 띠(“頭帶謂裳頭橫帶.” 成海應, 《硏經齋全集》 卷43 〈巾服攷〉 ‘野服’)이다. 치마 위쪽에 달린 말기만 의미할 수도 있고, 치맛말기 양옆에 달린 끈까지 의미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치마의 말기와 끈은 옷감과 색을 동일하게 하기 때문에 ‘두대’는 치맛말기와 치마끈을 함께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 황색……취한다:두대와 치마 모두 황색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 ↑ 《鶴林玉露》 卷8.
- ↑ 결과삼(缺骻衫):당대(唐代)에는 둥근 깃[團領]에 양옆이 허벅지까지 트인 긴 옷을 지칭했는데, 《삼재도회》에서는 곧은 깃[直領]에 양옆이 트인 옷을 지칭했다. 깃의 형태보다 양옆이 트인 점에 초점을 두어 명명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재(李縡, 1680~1746)는 결과삼을 사규삼과 같은 옷으로 보고 중치막으로 대체해도 된다고 했다. “사규삼(四䙆衫)은 결과삼(缺骻衫)이라고도 한다. 남색 견(絹) 또는 주(紬)를 사용해 만든다. 맞깃[對衿]에 둥근 소매[圓袂]로 하고, 옆을 트고 뒤도 나누고, 금(錦)으로 깃・소매 끝・치마 양 가장자리와 밑단에 가선을 한다. 동자의 일상복으로, 시속의 중치막(中赤莫)과 같은 옷으로 대체할 수 있다.(“或稱‘缺骻衫’, 用藍絹或紬爲之. 對衿、 圓袂, 開旁析後, 以錦縁領及袖端與裙兩旁及下齊, 童子常服, 如俗‘中赤莫’之類, 可代用.” 李縡, 《四禮便覽》 卷1 〈冠禮〉 “四䙆衫”)”
- ↑ 《新唐書》 卷24 〈車服志〉, 527쪽.袖褾襈.【 案 褾, 袖端;襈, 緣也.】 開骻者, 名缺骻衫, 庶人服之.” 王思義《續三才圖會》有缺骻衫圖, 窄袖交領而衣前後不相連綴, 與我東杏衣
- ↑ 《속삼재도회》에 실린 결과삼 그림은 다음과 같다. 허벅지 부분이 트여 ‘결과삼’이라고 한다.(“開骻名缺骻衫.” 《三才圖會》 〈衣服〉 卷1 “衫”)
- ↑ 중치막:조선 중후기 남자 편복 포의 하나이다. 곧은 깃을 달고, 소매가 넓으며, 옆트임이 있다. 이전에는 중치막에 무가 없다고 보았으나, 최근 출토 복식(조선시대 무덤에서 발굴되는 복식)의 발굴을 통해 무가 있다가 점점 좁아졌고 17세기에 들어설 즈음 사라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만 무가 있을 때도 중치막은 옆이 트여 있었다. 현재 가장 오래된 중치막은 경북 문경 최진(崔縝. 16세기 추정) 일가의 묘에서 출토된 것인데, 후기의 중치막에 비해 소매가 좁다.(옛길박물관, 《중치막자락에 깃든 사연》, 민속원, 2010) 서유구가 생존했던 시기의 중치막은 소매가 넓고 무가 없는 형태이다.
- ↑ 무:상의 몸판인 길 옆의 겨드랑이 아래에 붙인 별도의 폭.
- ↑ 주(紬):누에에서 실을 뽑아 꼬이지 않도록 직조하는 평견직물의 총칭. 《전공지》 권3 〈우리나라의 주 짜는 법[東紬織法]〉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