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용지:데우거나 볶거나 굽는 여러 도구:쟁개비
한양은 인가가 조밀하여 우물과 샘에 모두 소금기가 있고 혼탁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 훈련원(訓練院) 안의 통정(筒井)과 돈의문(敦義門)[1] 밖의 초료정(椒聊井)만이 한양에서 가장 물맛이 좋다.
모화관(慕華館)[2]의 벽간수(壁間水, 암벽틈에서 나오는물)와 후조당(後凋堂)[3]의 벽간수, 그리고 숭례문(崇禮門)[4] 밖의 약천(藥泉)이 그나마 맑고 차갑다는 명성이 있다.
창의문(彰義門)[5] 바깥 옥천암(玉泉菴)[6]의 약수(藥水)는 산허리에 있는 바위굴에서 나오는데 병이 없어지는 효험이 있으므로, 도성의 남녀들이 모여들어 이 물을 마신다.
두모포(豆毛浦)[7]의 군자봉(君子峯)[8] 아래에는 옥정천(玉井泉)[9]이 있는데, 본래 맑고 향기로웠다고 한다. 이 물은 이전에 수라간(水刺間)[10]에 공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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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개비 [銚, 냄비]
《설문》에서 “요(銚)는 데우는 그릇이다.”[11] 1라 했고, 《정자통》에서는 “요(銚)는 솥 가운데 작고 자루와 귀때[12]가 있는 그릇이다.” [13]라 했다. 지금 일본에서 수입되는 냄비는 자루와 귀때가 있는 것, 귀때와 자루는 없고 손잡이가 있는 것, 손잡이는 없지만 전이 있어서 들 수 있는 것 등이 있다. 구리로 만들거나 쇠로 만들기도 하여 그 제도가 한결같지 않지만 모두 종이처럼 얇으니, 이 때문에 음식을 담아 불을 때면 쉽게 데워진다. 뚜껑은 나무로 만들어 옻칠한다. 일반적으로 익힌 음식을 데우거나 적은 양의 묽은 죽을 쑬 때 대부분 이 그릇을 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그릇을 ‘잔가비(棧可飛)’[14]라 부른다. 방언으로 빠른 것을 ‘잔(棧)’이라 하는데, 잔가비는 아마도 그 빠르기가 나는 듯하다는 말인 것 같다.《금화경독기》
- ↑ 돈의문(敦義門):서울의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정문(正門)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60번 지에 있었던 서궐(西闕) 앞에 있었는데, 1915년에 철거되었다. 그 터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남아있다.
- ↑ 모화관(慕華館):조선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使臣)을 맞이하던 객관. 사신 일행이 서울에 도착하면 모화관에 묵었는데, 이때 조선의 왕세자는 사신 일행 앞에 나아가 재배(再拜)의 예를 갖추어 영접했으며, 사신 일행이 돌아갈 때는 조정의 관료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하여 재배의 예를 갖추어 전송했다. 모화관은 청일전쟁이 끝난 뒤로 폐지되었고, 1896년에는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등이 이끈 독립협회가 모화관을 수리하여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 ↑ 후조당(後凋堂):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 있던 정자. 조선 전기의 문신 권람(權擥, 1416~1465)의 집터에 위치해 있었다.
- ↑ 숭례문(崇禮門):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 성문(城門). 2008년 화재로 인해 2층 누각이 소실되었다가, 2013년 5월에 형태를 복원하였다.
- ↑ 창의문(彰義門):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서울의 사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 ↑ 옥천암(玉泉菴):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홍지문길 1-38 홍지문(弘智門) 근처에 있는 절.
- ↑ 두모포(豆毛浦):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나루터.
- ↑ 군자봉(君子峯):정월대보름에 올라가서 달을 맞이했다고 전해지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에 위치한 달맞이봉으로 추정된다.
- ↑ 옥정천(玉井泉):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339번지에 있던 우물. 옥정수(玉井水)라고도 한다. 옥수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우물이다.
- ↑ 수라간(水刺間):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
- ↑ 《說文解字注》 卷27 〈十四篇〉 上 “金部”, 704쪽.
- ↑ 귀때:주전자의 부리같이 그릇 한쪽에 바깥쪽으로 내밀어 만든 구멍
- ↑ 《正字通》 〈戌集〉 上 卷11 “金部” ‘銚’(《續修四庫全書》 235, 627쪽).
- ↑ 잔가비(棧可飛):쟁개비를 이두식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뒤의 ‘잔’ 역시 ‘재다(재빠르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