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지:임원에서 즐기는 청아한 즐길거리(상):금ㆍ검:번금

pungseok
김용미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9월 15일 (화) 15: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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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금(番琴, 양금)》[1]

구라철현금(歐邏鐵絃琴)은 우리나라에서는 ‘서양금(西洋琴)’이라 하고, 서양인은 ‘천금(天琴)’이라 하며, 중국인은 ‘번금(番琴)’이라 한다. 우리나라에 등장한 시기는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고, 중국에 들어온 시기는 중국 명(明)나라 만력(萬曆)》[2] 연간으로 오군(吳郡)의 풍시가(馮時可)》[3]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4]를 북경에서 만나 이 금의 소리를 들으면서부터이다. 대개 구리철사로 현을 만들었으며, 손가락으로 금을 타지 않고 작은 나무쪽으로만 현을 짚어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더 맑고 탁월했다고 한다. 【금의 바닥에 ‘오음서기(五音舒記)》[5]’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데, 그 제도가 매우 정밀했다.】 《열하일기(熱河日記)[6][7]

양금도(《임원경제지 유예지》오사카본)











  1. 번금(番琴, 양금):번금의 番은 ‘藩’(번국)의 뜻일 것이다. 양금(洋琴, 중국에서는 揚琴, dulcimer)을 말한다. 사다리꼴의 상자형 몸통 안에 14조(組)의 철현을 매고 가느다란 채로 쳐서 소리를 내는 현악기. 조선에서는 18세기 영조(英祖) 때 철현금(鐵絃琴),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 등의 이름으로 처음 소개된 것으로 추정되며, 박지원의 기록에 의하면 1772년에 홍대용이 처음으로 이 악기로 조선의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서유구 지음, 임원경제연구소(김세종·정명현 외) 옮김, 《임원경제지 유예지》3, 풍석문화재단, 2018, 273~334쪽에 양금에 관한 설명과 연주법·악보가 자세히 보인다
  2. 만력(萬曆):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1573~1619).
  3. 풍시가(馮時可):?~?. 중국 명(明)나라의 관리·학자. 송강부(松江府) 화정(華亭) 사람. 자는 민경(敏卿)이고, 호는 무성(無成)이다. 융경(隆慶) 5년(1571) 진사(進士)가 되고, 호광포정사참정(湖廣布政使參政)을 지냈고 안찰사(按察使)까지 올랐다. 저서로 《좌씨석(左氏釋)》·《좌씨토(左氏討)》·《좌씨론(左氏論)》·《역설(易說)》 등이 있다.
  4.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1552~1610.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간 서양인 선교사. 1583년 중국 광동성(廣東省) 조경(肇慶)이라는 곳에서 6년간 머물며 중국의 문화·언어·한문 등을 익혔으나 조경에서 추방당해 소주(蘇州)로 옮기면서 마테오 리치가 아닌 이마두(利瑪竇)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당시 명의 황제인 만력제(신종)에게 진상한 자명종이 황제의 흥미를 끌어 1601년 황제가 사는 북경에 정주 허가를 받아 생활하며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천주실의(天主實義)》·《교우론(交友論)》등을 저술하였고 선교활동을 하며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5. 오음서기(五音舒記):“오음서(五音舒)가 기록하다”라는 뜻. 그러나 박지원은 “오음서가 무슨 뜻인지 두루 찾아보았지만 끝내 알지 못했다.(遍覽所謂五音舒, 而竟未得)”라 했다. 《燕巖集》 卷15 〈別集〉 “熱河日記” ‘銅蘭涉筆’에 있다.
  6. 열하일기(熱河日記):조선 후기 정조 때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와 기술한 연행일기(燕行日記)로, 전 26권 10책이다.
  7. 《燕巖集》 卷15 〈別集〉 “熱河日記” ‘銅蘭涉筆’(《국역열하일기》 2권, 5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