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용지:건물 짓는 제도:건물의 기초
내용
1) 중국의 제도
중국의 집 짓는 제도에서는 반드시 땅을 깨끗이 정리하고 달구로 다지고 나서 다시 깎아 평평하고 반듯하게 하여 토규(土圭)[1]로 땅을 측량하고 나침반을 놓을 수 있는 뒤에야 대(臺)를 쌓는다. 대는 모두 돌 주추이며, 1단 혹은 2단이나 3단은 모두 벽돌로 쌓고, 그 위에 돌을 다듬어 쌓아서 대를 만든 뒤 대 위에 집을 짓는다.《열하일기》[2][3]
2) 우리나라의 제도
일반적으로 집을 지을 때 먼저 집 지을 땅을 헤아려 정하고 큰 나무달굿대[木杵]【민간에서 ‘원달구[元達古]’[4]라 한다.】로 빙 둘러 가며 두루 흙을 다진다. 단단히 다져지면 다시 주추 놓을 곳을 확정하여 완전히 곧게 땅을 말구유 모양으로 파고 들어가는데, 깊이는 5척(0.5장) 정도이다.【만약 건축할 원래의 땅이 낮고 습해서 단단하지 않으면 깊이가 10척(1장) 정도까지 되어야 더욱 좋다.】
먼저 여기에 왕모래를 0.7~0.8척 넣고 물을 많이 부은 다음 나무달굿대로 이리저리 세차게 다지는데, 달굿대 끝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난 다음에야 비로소 손을 멈춘다. 다시 모래를 넣고 물을 부어 앞에서 다진 방법대로 다지는데, 대략 5척 정도의 깊이가 되려면 6~7번은 나누어 다져야 비로소 돌처럼 단단해진다.
모래 구하기가 어려운 곳이라면 누렇고 거친 모래【곧 색이 누렇고 희면서 모래와 흙이 섞인 것으로, 민간에서는 ‘석비레[石飛輿]’[5]라 부른다.】만 가져다가 여기에 물을 뿌려 축축하게 한 뒤 앞의 방법처럼 층층이 다지면서 힘을 배로 들여야 된다. 누런 모래도 없으면 황토를 물로 적시고 나서 앞에서 다진 방법처럼 다진다.《증보산림경제》 [6][7]
집을 지을 때 기초 닦기에 가장 유의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래서 재력이 있는 집에서는 이것저것 많이 드는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고 숯을 넣고 다지기도[8] 하고 소금을 넣고 다지기도[9] 하면서 남산(南山)보다 단단할 수 있다 [10]고 여기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집 동쪽이 무너지고 서쪽이 내려앉는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대를 쌓는 작업을 먼저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주추 놓는 일에 법식이 없어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대를 높이 쌓지 않고 모래 다지기만 겨우 끝나면 바로 땅의 평평한 면에 주추를 놓는다. 그리고 상부 공사가 끝나야 비로소 조그만 계단을 쌓는다. 이 때문에 자리 잡은 곳이 이미 낮으니 쉽게 습기를 끌어들인다.
게다가 주추를 놓는 일조차 법식이 더욱 없어서 주추의 길이가 가지런하지 않고 주추 밑은 처음부터 다듬지 않아 울퉁불퉁 고르지 않다. 매번 자갈로 주춧돌 네 귀를 괴어 윗면만을 가지런하게 하고 겉은 흙반죽으로 발라 놓는다. 그러나 실상 주춧돌 밑이 비어 있어 빗물이 스며드니, 흙이 얼면 주추가 솟아올랐다가 녹으면 내려앉는다. 그러다 괴어 놓은 자갈이 하나라도 함몰되면 주추와 기둥이 기울어 집이 모두 망가진다.
만약 중국의 제도를 본떠, 모래 다지기를 막 끝내고 나서 땅의 평평한 면에 석대(石臺)를 2~3층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벽돌을 깔고, 다시 그 위에 주추를 세운다면, 주추 밑을 평평하고 바르게 다듬지 않을 수 없으니, 모든 주추가 끝이 가지런해져 먹줄처럼 곧고 바닥이 평평할 것이다. 따라서 석대 전체가 기울거나 함몰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집채가 비틀어지거나 무너지는 사태가 영원히 없을 것이다.《금화경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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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토규(土圭):그림자 길이를 측량하는 기구이다. 이 기구를 이용하여 그림자 길이를 잰 뒤에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정중앙을 찾는다. 본문에서 토규를 측량한다는 말은 정중앙을 찾아 땅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는 과정을 뜻한다. 토규에 대해서는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나오는데, “토규의 법으로 땅의 방위를 재고 해그림자를 바르게 하여 땅의 중앙을 찾는다.(以土圭之法測土深,正日景, 以求地中)”고 했다. 여기서 ‘測土深’은 정현(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땅의 깊이를 재는 일이 아니라 정중앙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거리(南北東西之深)를 말한다. 중국 하남성 낙양 동남쪽에 있는 고성진(告成鎭)에 당(唐) 723년에 세운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가 토규법을 시행한 증거이다. 하지(夏至)에 8척의 표(表) 그림자가 1.5척이 되는 지점을 ‘지중(地中)’이라 하고, 이로부터 사시(四時)와 기준점을 정했다.
- ↑ 《熱河日記》 〈渡江錄〉 “六月二十八日”.
- ↑ 《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1, 풍석 서유구 지음, 임원경제연구소 옮김(풍석문화재단, 2016), 98~99쪽.
- ↑ 원달구[元達古]:땅을 다질 때 사용하는 장구 모양의 나무나 돌로, 잘록한 허리춤을 칡 줄이나 소가죽으로 묶고 새끼줄을 연결하여 여러 명이서 들었다 놓았다 하며 작업한다. 원달고(圓達古)라고도 한다.
- ↑ 석비레[石飛輿]:지표면 가까이에 암반이 완전히 풍화되지 않아 푸석돌이 섞인 흙. 주로 화강암이 풍화된 밝은 색의 모래를 가리킨다.
- ↑ 《增補山林經濟》 卷1 〈卜居〉 “築基”(《農書》 3, 26~27쪽).
- ↑ 《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1, 풍석 서유구 지음, 임원경제연구소 옮김(풍석문화재단, 2016), 99~100쪽.
- ↑ 숯을……다지기도:이 방법을 탄축(炭築)이라 한다.
- ↑ 소금을……다지기도:이 방법을 염축(鹽築)이라 한다.
- ↑ 남산(南山)보다……있다:집의 기초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본래는 무덤을 남산 깊은 곳에 단단하게 만들어 놓아 도굴을 방지한다는 뜻이다. 이는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자신이 죽으면 후장을 하고 싶다는 뜻을 이야기했을 때, 장석지(張釋之)라는 신하가 후장을 반대하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한 말에서 유래한다. “그 관 속에 욕심낼 만한 물건이 있다면, 비록 남산에 단단하게 묻더라도 오히려 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 속에 욕심낼 만한 물건이 없다면, 비록 석관이 없다 한들 또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使其中有可欲者, 雖錮南山猶有郄;使其中無可欲者, 雖無石槨, 又何戚焉?)” 《史記》 卷102 〈張釋之馮唐列傳〉 42.
- ↑ 《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1, 풍석 서유구 지음, 임원경제연구소 옮김(풍석문화재단, 2016), 100~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