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지:문방아제:먹틀로 찍어내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pungseok
이동: 둘러보기, 검색
 
27번째 줄: 27번째 줄:
 
먹틀들을 고정시키는 테 모형
 
먹틀들을 고정시키는 테 모형
  
[[파일:인탈도(이운지).jpg|섬네일|가운데|인탈도]]
+
[[파일:인탈도(이운지).jpg|섬네일|가운데|인탈도]]<br><br><br>

2020년 8월 30일 (일) 14:21 기준 최신판

찍는 법:일반적으로 먹틀의 밑판은 곧은 것이 중요하고, 차라리 클지언정 작아서는 안 된다. 평판(平版, 위 판)은 위는 둥그렇고, 아래는 평평하며, 차라리 무거울지언정 가벼워서는 안 된다. 밑판은 은(銀)이 가장 좋고 무늬가 새겨진 면은 상아가 가장 좋다. 보통 밑판은 산앵도나무[棠]를 사용하고, 수판(手版)[1]은 구기자나무[杞]를 사용한다. 대개 밑판·무늬가 새겨진 면의 재료로는 모두 소나무를 좋게 여기니, 소나무는 그을음과 잘 맞는다. 일반적으로 큰 먹을 찍을 때는 물로 먹틀을 닦아내고, 종이를 먹틀 안에 펼쳐놓은 뒤에 먹틀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먹틀이 네모나고 곧으면 가장 사용하기 어려우니, 먹을 사용할 때 많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수에 사는 장우(張遇)[2]의 먹틀은 네모나고 곧은 것이 많으니, 그 그을음반죽의 숙성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조열지 《묵경》[3]


단판(摶板)은 길이가 1.1척, 너비가 0.3척, 두께가 0.1척이다. 자판(字板, 무늬가 새겨진 위판)은 길이와 넓이가 한결같지 않으니, 먹의 크기에 따른다. 가운데를 0.02척 정도 두께로 돌기하도록 주변을 파되 먹의 크기와 같게 하고 글자와 그림을 새겨 무늬를 완성한다. 4면 주위에 각각 0.2척 정도를 남기고 틀을 대고, 누름판도 돌기한 부분과 똑같은 크기로 만들어 남아서 밖으로 나가는 나무가 없게 하여 틀 안에 쏙 들어가게 한다. 먹의 두께는 그을음반죽의 양에 비례한다. 판(板)은 모두 평평하고 바르고 광택이 돌고 매끄러워야 하니, 대추나무로 만든다. 단판(摶板) 위에서 밀고 늘려서 먹의 모양을 만들고, 자판(字板, 글자판) 위에 올린 다음 자판을 수평이 되게 하고 아래쪽으로 눌러 찍어낸다. 먹틀로 큰 먹을 만들 경우에는 반죽을 먹틀 안에 채우는 일이 가장 어렵고, 또 모서리까지 빈틈없이 꽉 채우기도 어렵다. 이때는 국수틀에 얹어 사람이 올라앉아 누르는 누름대[4]로 먹틀에 올려 눌러야 사방의 모든 모서리에 반죽이 보기 좋게 가득 찬다. 《묵법집요》[5]


먹틀의 제작은 7개의 나무 부품이 모여서 완성된다. 나무 4개는 상하·좌우인 옆널이 되고, 밑판·위판 2개에는 명문(銘文)이나 그림을 그 위에 새겨 본보기 무늬를 만드는데, 음각과 양각의 문양을 나눈뒤 이를 합하여 누른다. 옆널과 밑판·위판의 바깥쪽에는 단단한 나무 가운데에 구멍을 파고 다른 6개 나무를 조여 고정시키는 테로 삼아서, 6개의 판이 벌어지지 않게 한다. 크고 작은 먹을 꺼내려면 테를 제거한다. 《묵법집요》[6]


인탈도(印脫圖, 먹틀 그림)

먹틀 상단 모형

먹틀 하단 모형

먹틀 왼쪽 모형

위 판의 양각 무늬 모형

아래 판의 음각 무늬 모형

오문(吳門)[7]의 심주(沈周)[8]가 만든 고먹[古墨]

먹틀 오른쪽 모형

먹틀들을 고정시키는 테 모형

인탈도




  1. 수판(手版):손으로 잡고 눌러 찍는 판으로, 위의 평판(平版)과 같은데 명칭만 달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장우(張遇):9세기 후반에 활약한 묵장(墨匠). 유연묵(油煙墨)을 창시했으며 이정규의 먹 다음으로 평가받는 먹을 만들었다. 아들 장곡(張谷), 손자 장처후(張處厚)도 유명한 묵장이다.
  3. 《墨經》 〈印〉(《叢書集成初編》 1495, 14〜15쪽).
  4. 국수틀에……누름대:여기에서 말하는 누름대는 위 그림을 참조할 수 있다. 《섬용지》 권2 〈짜거나 누르는 여러 도구〉 “국수틀”에서는 국수틀을 돌로 눌렀지만 위 그림은 사람의 힘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본문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5. 《墨法集要》 〈印脫〉(《叢書集成初編》 1496 〈墨法集要〉, 64쪽).
  6. 《墨法集要》 〈印脫〉(《叢書集成初編》 1496 〈墨法集要〉, 66쪽).
  7. 오문(吳門):중국 원(元)나라 이후로 강남(江南) 소주(蘇州) 일대는 문인·화가들의 집성지가 되었는데, 이 소주를 역사가들은 오문이라 불렀다. 명나라 화가들이 형성한 오문화파(吳門畫派)의 본산지이다.
  8. 심주(沈周):1427~1509. 중국 명(明)나라의 화가. 심주의 집안은 장주(長洲) 상성리의 명문으로 증조부 양침(良琛)·조부 징(澄)·백부 정(貞)·부 항(恒)을 비롯하여 심주의 형제도 다 서화를 잘하였다. 원말 사대가 이후, 저조했던 남종화를 부흥하고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畫)를 정립시킴과 동시에 문인의 묵희(墨戯)로서 화훼잡화(花卉雜畫)의 양식을 부흥시켰다. 문징명(文徵明, 1470~1559), 당인(唐寅, 1470~1523), 구영(仇英, 약1493~1560)과 함께 오문4가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