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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치관(치포관) <ref>치관(치포관):검은색 베[布]로 만든 관으로,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태고시대의 치포관은 재계할 때 쓰던 관[齋冠]이다. 고례서와 당대(唐代)까지의 문헌에서 변함없이 ‘치포관’으로 유지되지만, 송대(宋代)에 이르러 ‘치포관’ 외에 ‘치관(緇冠)’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조선 중기까지는 두 명칭을 함께 사용했고, 18~19세기에는 고례를 따라 ‘치포관’을 사용해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형태는 고례서에서는 상투를 감싸는 작은 관이다. 송대에는 상투만 감싸지만 턱 아래에 끈을 매는 대신 비녀[笄]를 꽂는 형태로 변했다. 조선 후기 허전(許傳)에 의해 상투만 감싸는 작은 형태가 아닌 머리 전체를 덮는 독립된 관모 형태가 나타나기도 한다.(박길수, 〈緇布冠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4~32쪽)</ref></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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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7) 치관(緇冠, 치포관) <ref>치관(緇冠, 치포관):검은색 베[布]로 만든 관으로,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태고시대의 치포관은 재계할 때 쓰던 관[齋冠]이다. 고례서와 당대(唐代)까지의 문헌에서 변함없이 ‘치포관’으로 유지되지만, 송대(宋代)에 이르러 ‘치포관’ 외에 ‘치관(緇冠)’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조선 중기까지는 두 명칭을 함께 사용했고, 18~19세기에는 고례를 따라 ‘치포관’을 사용해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형태는 고례서에서는 상투를 감싸는 작은 관이다. 송대에는 상투만 감싸지만 턱 아래에 끈을 매는 대신 비녀[笄]를 꽂는 형태로 변했다. 조선 후기 허전(許傳)에 의해 상투만 감싸는 작은 형태가 아닌 머리 전체를 덮는 독립된 관모 형태가 나타나기도 한다.(박길수, 〈緇布冠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4~32쪽)</ref></strong><br/>
 
치포관(緇布冠)이다. 《시경》에서 ‘치촬(緇撮)’이라 했는데, 촬(撮)은 상투를 모아 튼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이를 ‘태고관(太古冠)’이라 했는데, 그 제도는 크기가 작으면서 양(梁) <ref>양(梁):관의 정수리 부분에 아래에서 위로 나 있는 세로줄이다. 양의 수에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은 등급이 구별되어, 조선시대 조복에 쓰는 양관(梁冠)은 신분에 따라 오량관(五梁冠)・삼량관(三梁冠)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br/>
 
치포관(緇布冠)이다. 《시경》에서 ‘치촬(緇撮)’이라 했는데, 촬(撮)은 상투를 모아 튼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이를 ‘태고관(太古冠)’이라 했는데, 그 제도는 크기가 작으면서 양(梁) <ref>양(梁):관의 정수리 부분에 아래에서 위로 나 있는 세로줄이다. 양의 수에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은 등급이 구별되어, 조선시대 조복에 쓰는 양관(梁冠)은 신분에 따라 오량관(五梁冠)・삼량관(三梁冠)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br/>
 
〈조선시대 양관 제도〉<br/>
 
〈조선시대 양관 제도〉<br/>
</ref> 5개가 있다. 지금 사람들이 상투를 트는 작은 관을 만들 때는 종이를 여러 겹 대어 만들거나 뿔로 만드는데, 모두 양(梁)이 있고 옻칠을 했으니, 모두 검은 끈으로 상투를 묶던 것이 전해 내려온 제도이다. 《가례》에 실린 ‘치관(緇冠)’이나 《삼재도회》에 실린 ‘오적관(五積冠)’ <ref>《三才圖會》 〈衣服〉 “五積冠”, 626쪽.</ref>은 그 형태가 조금 크면서 양과 비녀가 있으니, 이는 요즘의 상투를 모으는 관과 대체로 비슷하다.《금화경독기》<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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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5개가 있다. 지금 사람들이 상투를 트는 작은 관을 만들 때는 종이를 여러 겹 대어 만들거나 뿔로 만드는데, 모두 양(梁)이 있고 옻칠을 했으니, 모두 검은 끈으로 상투를 묶던 것이 전해 내려온 제도이다. 《가례》에 실린 ‘치관(緇冠)’이나 《삼재도회》에 실린 ‘오적관(五積冠)’ <ref>《三才圖會》 〈衣服〉 “五積冠”, 626쪽.</ref>은 그 형태가 조금 크면서 양과 비녀가 있으니, 이는 요즘의 상투를 모으는 관과 대체로 비슷하다.《금화경독기》<ref>《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 2,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6), 44~45쪽. </ref><br/><br/><br/>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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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3일 (월) 16:45 기준 최신판

내용

7) 치관(緇冠, 치포관) [1]
치포관(緇布冠)이다. 《시경》에서 ‘치촬(緇撮)’이라 했는데, 촬(撮)은 상투를 모아 튼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이를 ‘태고관(太古冠)’이라 했는데, 그 제도는 크기가 작으면서 양(梁) [2] 5개가 있다. 지금 사람들이 상투를 트는 작은 관을 만들 때는 종이를 여러 겹 대어 만들거나 뿔로 만드는데, 모두 양(梁)이 있고 옻칠을 했으니, 모두 검은 끈으로 상투를 묶던 것이 전해 내려온 제도이다. 《가례》에 실린 ‘치관(緇冠)’이나 《삼재도회》에 실린 ‘오적관(五積冠)’ [3]은 그 형태가 조금 크면서 양과 비녀가 있으니, 이는 요즘의 상투를 모으는 관과 대체로 비슷하다.《금화경독기》[4]


각주

  1. 치관(緇冠, 치포관):검은색 베[布]로 만든 관으로,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태고시대의 치포관은 재계할 때 쓰던 관[齋冠]이다. 고례서와 당대(唐代)까지의 문헌에서 변함없이 ‘치포관’으로 유지되지만, 송대(宋代)에 이르러 ‘치포관’ 외에 ‘치관(緇冠)’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조선 중기까지는 두 명칭을 함께 사용했고, 18~19세기에는 고례를 따라 ‘치포관’을 사용해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형태는 고례서에서는 상투를 감싸는 작은 관이다. 송대에는 상투만 감싸지만 턱 아래에 끈을 매는 대신 비녀[笄]를 꽂는 형태로 변했다. 조선 후기 허전(許傳)에 의해 상투만 감싸는 작은 형태가 아닌 머리 전체를 덮는 독립된 관모 형태가 나타나기도 한다.(박길수, 〈緇布冠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4~32쪽)
  2. 양(梁):관의 정수리 부분에 아래에서 위로 나 있는 세로줄이다. 양의 수에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은 등급이 구별되어, 조선시대 조복에 쓰는 양관(梁冠)은 신분에 따라 오량관(五梁冠)・삼량관(三梁冠)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양관 제도〉
  3. 《三才圖會》 〈衣服〉 “五積冠”, 626쪽.
  4. 《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 2, 풍석 서유구 지음, 추담 서우보 교정,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6), 44~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