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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갖신 [屨]''' <ref>갖신[屨]:가죽으로 만든 신의 총칭.[[파일: 갖신.jpg|300픽셀|썸네일|가운데|사슴가죽으로 만든 신(국립민속박물관)]][[파일: 갖신2.jpg|300픽셀|썸네일|가운데|사슴가죽으로 만든 신(국립민속박물관)]]</ref><br/> | + | '''2) 갖신 [屨]''' <ref>갖신[屨]:가죽으로 만든 신의 총칭.[[파일: 갖신.jpg|300픽셀|썸네일|가운데|사슴가죽으로 만든 신(국립민속박물관)]][[파일: 갖신2.jpg|300픽셀|썸네일|가운데|사슴가죽으로 만든 신(국립민속박물관)]]</ref><br/> |
− | 《자서(字書)》에서 “풀로 만든 신발은 비(屝)라 하고, 삼으로 만든 신발은 구(屨)라 하며, 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리(履)라 하는데, 황제(黃帝)의 신하였던 어칙(於則)이 만들었다.” <ref>《御定康熙字典》 卷7 〈寅集〉 上 “三畫” ‘尸部’.</ref>라 했다. 그러나 《설문해자》에서는 “구(屨)는 리(履)이고, 제(鞮)이다.” <ref>《說文解字》 卷8 下 .</ref>라 했는데, 서현(徐鉉)<ref>서현(徐鉉):916~991. 당(唐)나라 말기부터 송(宋)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던 학자이자 시인으로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송 태종 옹희 3년(986년) 황명에 따라 증석(增釋)했다.</ref>은 “제(鞮)는 가죽으로 만든 신[革履]이다.” <ref>《說文繋傳》 卷15 〈文三〉.</ref>라 했다. 또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에서는 “여름에는 칡으로 만든 구(屨)를 신고, 겨울에는 가죽으로 만든 구(屨)를 신는다.” <ref>《儀禮注疏》 第3 〈士冠禮〉(《十三經注疏正理本》 10, 59~60쪽).</ref>라 했으니, 리(履)와 구(屨)는 통용된다. 사슴가죽으로 만든 갖신이 좋고, 노루가죽으로 만든 것이 그다음이다. 또는 종이노끈을 짜서 신발을 만들고 사슴가죽으로 가선을 장식하면 편안하고 따뜻하다. 갖신 중에 당나귀가죽으로 만든 뒤 기름을 먹이고 징[釘]을 박아 진창을 다닐 수 있는 신발을 ‘진신[泥鞋]’ <ref>진신[泥鞋]:비가 올 때 신는 신으로, 비가 스며들지 않게 가죽에 기름을 먹여 만든다. 밑창 바닥에 징을 박아서 ‘징신’, 비가 와서 땅이 진 날에 신는다 해서 ‘진신’이라 부르는데, 서유구는 뒤의 본문에서 ‘진신[泥鞋]’과 ‘징신[釘鞋]’을 구분한다. 기름만 먹인 신과 기름을 먹이고 징을 박은 신을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파일: . | + | 《자서(字書)》에서 “풀로 만든 신발은 비(屝)라 하고, 삼으로 만든 신발은 구(屨)라 하며, 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리(履)라 하는데, 황제(黃帝)의 신하였던 어칙(於則)이 만들었다.” <ref>《御定康熙字典》 卷7 〈寅集〉 上 “三畫” ‘尸部’.</ref>라 했다. 그러나 《설문해자》에서는 “구(屨)는 리(履)이고, 제(鞮)이다.” <ref>《說文解字》 卷8 下 .</ref>라 했는데, 서현(徐鉉)<ref>서현(徐鉉):916~991. 당(唐)나라 말기부터 송(宋)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던 학자이자 시인으로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송 태종 옹희 3년(986년) 황명에 따라 증석(增釋)했다.</ref>은 “제(鞮)는 가죽으로 만든 신[革履]이다.” <ref>《說文繋傳》 卷15 〈文三〉.</ref>라 했다. 또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에서는 “여름에는 칡으로 만든 구(屨)를 신고, 겨울에는 가죽으로 만든 구(屨)를 신는다.” <ref>《儀禮注疏》 第3 〈士冠禮〉(《十三經注疏正理本》 10, 59~60쪽).</ref>라 했으니, 리(履)와 구(屨)는 통용된다. 사슴가죽으로 만든 갖신이 좋고, 노루가죽으로 만든 것이 그다음이다. 또는 종이노끈을 짜서 신발을 만들고 사슴가죽으로 가선을 장식하면 편안하고 따뜻하다. 갖신 중에 당나귀가죽으로 만든 뒤 기름을 먹이고 징[釘]을 박아 진창을 다닐 수 있는 신발을 ‘진신[泥鞋]’ <ref>진신[泥鞋]:비가 올 때 신는 신으로, 비가 스며들지 않게 가죽에 기름을 먹여 만든다. 밑창 바닥에 징을 박아서 ‘징신’, 비가 와서 땅이 진 날에 신는다 해서 ‘진신’이라 부르는데, 서유구는 뒤의 본문에서 ‘진신[泥鞋]’과 ‘징신[釘鞋]’을 구분한다. 기름만 먹인 신과 기름을 먹이고 징을 박은 신을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파일: 진신.jpg|300픽셀|썸네일|가운데|징을 박아 만든 진신(국립민속박물관)]][[파일: 진신2.jpg|300픽셀|썸네일|가운데|진신과 바닥(국립민속박물관)]]</ref>이라 한다. 관서 사람들이 갖신을 잘 만든다.《금화경독기》<ref>《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2, 풍석 서유구 지음,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6), 130~131쪽.</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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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9일 (목) 16:38 기준 최신판
내용
2) 갖신 [屨] [1]
《자서(字書)》에서 “풀로 만든 신발은 비(屝)라 하고, 삼으로 만든 신발은 구(屨)라 하며, 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리(履)라 하는데, 황제(黃帝)의 신하였던 어칙(於則)이 만들었다.” [2]라 했다. 그러나 《설문해자》에서는 “구(屨)는 리(履)이고, 제(鞮)이다.” [3]라 했는데, 서현(徐鉉)[4]은 “제(鞮)는 가죽으로 만든 신[革履]이다.” [5]라 했다. 또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에서는 “여름에는 칡으로 만든 구(屨)를 신고, 겨울에는 가죽으로 만든 구(屨)를 신는다.” [6]라 했으니, 리(履)와 구(屨)는 통용된다. 사슴가죽으로 만든 갖신이 좋고, 노루가죽으로 만든 것이 그다음이다. 또는 종이노끈을 짜서 신발을 만들고 사슴가죽으로 가선을 장식하면 편안하고 따뜻하다. 갖신 중에 당나귀가죽으로 만든 뒤 기름을 먹이고 징[釘]을 박아 진창을 다닐 수 있는 신발을 ‘진신[泥鞋]’ [7]이라 한다. 관서 사람들이 갖신을 잘 만든다.《금화경독기》[8]
각주
- ↑ 갖신[屨]:가죽으로 만든 신의 총칭.
- ↑ 《御定康熙字典》 卷7 〈寅集〉 上 “三畫” ‘尸部’.
- ↑ 《說文解字》 卷8 下 .
- ↑ 서현(徐鉉):916~991. 당(唐)나라 말기부터 송(宋)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던 학자이자 시인으로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송 태종 옹희 3년(986년) 황명에 따라 증석(增釋)했다.
- ↑ 《說文繋傳》 卷15 〈文三〉.
- ↑ 《儀禮注疏》 第3 〈士冠禮〉(《十三經注疏正理本》 10, 59~60쪽).
- ↑ 진신[泥鞋]:비가 올 때 신는 신으로, 비가 스며들지 않게 가죽에 기름을 먹여 만든다. 밑창 바닥에 징을 박아서 ‘징신’, 비가 와서 땅이 진 날에 신는다 해서 ‘진신’이라 부르는데, 서유구는 뒤의 본문에서 ‘진신[泥鞋]’과 ‘징신[釘鞋]’을 구분한다. 기름만 먹인 신과 기름을 먹이고 징을 박은 신을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 ↑ 《임원경제지 섬용지(林園經濟志 贍用志)》2, 풍석 서유구 지음, 임원경제연구소 옮김 (풍석문화재단, 2016), 130~131쪽.